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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의 중력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400
홍정선.강계숙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0월
평점 :
벌써(?) 또 다시 100권이 쌓였다. 문학과지성사 시인선은 1978년 황동규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로 출발했다. 1990년 100권 째 기념으로 나온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를 감격스럽게 읽었던 기억이 새로운데 벌써 1997년에 200권 『시야 너 아니냐』에 이어 2005년에 300권 『쨍한 사랑 노래』 그리고 2011년 400권 『내 생의 중력』을 읽었다. 다른 어떤 느낌보다도 켜켜이 세월이 쌓이고 생은 저물어 가고 또 다른 생명이 피어나고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는 어렴풋한 감흥. 신비롭고 기묘한 생의 감각.
시인과 비평가가 걸러낸 시인들의 시를 읽으면서 지난 6년간의 시간이 그 이전 100권의 단위처럼 엮였다. 불연속적인 시간을 분절적으로 사용하고 돌아보고 성찰하는 인간의 습성.
광휘의 속삭임
저녁 어스름 때
하루가 끝나가는 저
시간의 움직임의
광휘,
없는 게 없어서
쓸씀함도 씨앗들도
따로따로 한 우주인,
(광휘 중의 광휘인)
그 움직임에
시가 끼어들 수 있을까.
아픈 사람의 외로움을
남몰래 이쪽 눈물로 적실 때
그 스며드는 것이 혹시 시일까.
(외로움과 눈물의 광휘여)
그동안의 발자국들의 그림자가
고스란히 스며 있는 이 땅속
거기 어디 시는 가슴을 묻을 수 있을까.
(그림자와 가슴의 광휘!)
그동안의 숨결들
고스란히 퍼지고 바람 부는 하늘가
거기 어디서 시는 숨 쉴 수 있을까.
(숨결과 바람의 광휘여)
- 정현종, 『광휘의 속삭임』(352)에서
대가의 숨결과 노련한 솜씨가 자연과 인간과 시간의 비밀을 벗겨 내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들춰내기도 한다. 내 안의 숨은 그림자와 타인과의 관계를 끝없는 기다림으로 표현하기도 하면서.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먼 바다로 나가 하루 종일
고래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사람의 사랑이 한 마리 고래라는 것을
망망대해에서 검은 일 획 그으며
반짝 나타났다 빠르게 사라지는 고래는
첫사랑처럼 환호하며 찾아왔다
이뤄지지 못할 사랑처럼 아프게 사라진다
생의 엔진을 모두 끄고
흔들리는 파도 따라 함께 흔들리며
뜨거운 햇살 뜨거운 바다 위에서
떠나간 고래를 다시 기다리는 일은
그 긴 골목길 마지막 외등
한 발자국 물러난 캄캄한 어둠 속에 서서
너를 기다렸던 일
그때 나는 얼마나 너를 열망했던가
온몸이 귀가 되어 너의 구둣발 소리 기다렸듯
팽팽한 수평선 걸어 내게로 돌아올
그 소리 다시 기다리는 일인지 모른다
오늘도 고래는 돌아오지 않았다
바다에서부터 푸른 어둠이 내리고
떠나온 점등인의 별로 돌아가며
이제 떠나간 것은 기다리지 않기로 한다
지금 고래가 배의 꼬리를 따라올지라도
네가 울며 내 이름 부르며 따라올지라도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사람의 서러운 사랑 바다로 가
한 마리 고래가 되었기에
고래는 기다리는 사랑 아니라
놓아주어야 하는 바다의 사랑이기에
- 정일근,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358)에서
무언가 기다릴 것이 있다는 것은 아직 삶의 희망이 있다는 뜻이다. 기다린다는 것은 조금씩, 꼭 그만큼씩 사라져 가는 어제와 오늘이 아니라 멀어진 거리만큼 다가오고야마는 미래의 시간들이다. 그것은 알 수 없는 비밀이 아니라 알고 싶지 않는 생의 이면일 수도.
알 수 없어요
내가 멍하니 있으면
누군가 묻는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느냐고
내가 생각에 빠져 있으면
누군가 묻는다
왜 그리 멍하니 있느냐고
거미줄처럼 얽힌 복도를 헤매다 보니
바다,
바닷가를 헤매다 보니
내 좁은 방.
- 황인숙, 『리스본行 야간열차』(341)에서
의미와 무의미, 희망과 절망,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기쁨과 슬픔, 물과 불, 산과 강. 언어의 반대편 혹은 모순을 들여다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구멍을 들여다보라. 거기에 시가 찾는 진실이 숨어 있다. 아니, 인간의 눈과 귀와 입을 막아버리는 검은 그림자가.
모순 1
삶의 갈래
그 갈래 속의 수렁
무수하다
손과 발은 열 길을 달려가고
정수리로 치솟은 검은 덤불은
수만 길로 뻗는다
끝까지 갔다가 돌아 나오지 못한 진창에서는
바글바글 애벌레가 기어오른다
봄꽃들 탈골한 길로
단풍 길 쏟아진다
손가락마다 지문을 새겨 살아도
내 몫이 아닌 흙이여
- 조 은, 『생의 빛살』(374)에서
목소리 높여 옳고 그름을 외치고 적당한 거리와 시선이 만들어낸 착각을 믿으며 달콤한 합리화로 밀어붙이는 힘! 파리는 늘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다. 죽을 놈과 살 놈을 구별하지도 못한 채.
파리
꿈은 늘 제자리에서 맴돈다
적당한 거리와 시선이 만들어낸 착각에
세상은 떠 있다
밥상머리에 달라붙은 파리들은
한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자유로운 어둠을 뚫고 생겨난 생은 얼마나 매혹적인가
파리채를 들고 가까이 가자
죽을 놈과 살 놈이 구별되지 않았다
- 조인선, 『노래』(378)에서
그리하여 머나먼 지구별로의 여행자들은 ‘당신’에게 고백한다. ‘사랑하는 당신께’. ‘당신의 텍스트는 나의 텍스트’라고, ‘나의 텍스트는 당신의 텍스트’라고. 내가 당신의 텍스트가 아니라 당신이 나의 텍스트가 아니라 이렇게 네모난 시 안에서 당신과 나와 텍스트가 뒤섞이듯이 혼란스럽게 컨텍스트를 외면한 채 끝없이 나와 당신과 텍스트가 꼬리를 물고 텍스트는 텍스트라고.
당신의 텍스트 1
- 사랑하는 당신께
당신의 텍스트는 나의 텍스트
나의 텍스트는 당신의 텍스트
당신의 텍스트는 텍스트의 나
나의 당신의 텍스트는 텍스트
나의 텍스트는 텍스트의 당신
텍스트의 당신은 텍스트의 나
당신의 나는 텍스트의 텍스트
텍스트의 나는 텍스트의 당신
당신의 나의 텍스트는 텍스트
나의 당신은 텍스트의 텍스트
- 성기완, 『당신의 텍스트』(349)에서
20111125-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