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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저 인간이 싫을까? - 인간관계가 불편한 사람들의 관계 심리학, 7주년 기념 개정판
오카다 다카시 지음, 김해용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3년 3월
평점 :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 수밖에 없는 우리가 인간에 대한 거부 반응을 갖게 되면 여러 가지 곤란한 사건들을 겪게 된다. 이를 테면 ‘고슴도치 딜레마’로 알려진 갈등 상황이 그것이다. 인간은 타인에게 전혀 기대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상대와 너무 가까워지면 여러 가지 거부 반응이 일어난다. 짜증이나 불만으로 시작하여 점차 비난, 공격, 험담, 고집, 괴롭힘, 말싸움, 폭력으로 번진다. 온갖 마찰과 충돌을 일으킨 결과 상대방과 자신 모두 상처를 입는다.
역세권, 초품아, 숲세권을 넘어 언제나 ‘책세권’을 강조해 왔다. 힘들지 않게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도서관이 있다면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건 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다. 그런데, 도서관 재건축이라니. 밀리의 서재 요금제로 변경했지만 적응할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 처음 만나면 사람이든 기계든 다 그렇다. 탐색과 관찰이 필요하고 거리 조절이 관건이다. 혼자 친해졌다는 착각이 관계를 망친다. ‘나’는 ‘너’와 다르다, 아니 너는 내가 아니다. 종이책의 손맛은 대체 불가능이다. 새책이 도착하면 표지를 쓰다듬고 휘리릭 넘기며 바람을 일으키면 옅은 잉크 냄새가 난다. 오감으로 즐기는 독서는 시작부터 두근거린다. 어떤 책은 서문이 너무 좋아 본문에 실망할까 싶어 책꽂이에 몇 주를 꽂아 둔 적도 있다. 어떤 시집은 뒤 표지부터 읽고 묵혀두기도 한다.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은 그렇게 세상 곳곳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책을 온몸으로 즐긴다. 전자책에는 그게 없다. 버스와 지하철은 기다리면 온다. 물론, 막차를 놓칠 수도 있지만. 도서관도 기다리면 재건축을 끝내고 최신식으로 거듭날 것이다. 그러다 예전 살던 동네 재건축이 끝나면 다시 그리로 이사가야 하나. 대한민국은 이래저래 재건축의 나라다. 전자책을 넘어 오디오북까지 대세가 이동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2023 국민독서실태」) 그러나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습관은 무섭다. 그것이 생각이든 행동이든 감정이든.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 바꾸려는 노력보다 뒤엎고 새로 시작하는 게 낫다. 종이책과 전자책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헤매다 비율과 방법을 적절하게 조절하겠지만 한동안 혼란은 피치 못할 사정이다. 어쩌다 오카다 다카시의 『나는 왜 저 인간이 싫을까』를 골랐는지 생각하다 기억이 나지 않아 여기 저기 뒤적거린 이야기를 하려다 그만...
‘인간 알레르기’라는 원제에 딸린 부제다. 부제가 더 자극적이고 직관적이다. 얄팍한 자기계발서는 아니다. 처세술과 관계 기술 혹은 상황별 대처법은 누구에게나 적용할 수 없다. 비법을 알려주겠다는 책을 믿지 않아야 하는 것은 ‘개별성 결여’ 때문이다. 80억 인구가 다 다르다. 인간의 일반적 속성과 공통점에 기반한다 해도 그렇다. ‘나’는 ‘너’와 다르다. 그 차이를 인정하고 각자의 해법을 고민하지 않으면 그럴듯해 보이는 제안이 소용없다. 다만 새로운 관점으로 문제를 보려는 태도를 가진 저자의 이야기는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대개 인간은 듣고 싶은 것만 들을 뿐 아니라,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독서라고 다를까. 읽고 싶은 것만 읽고, 읽고 싶은 대로 이해한다. 같은 책을 서로 다르게 읽는다는 의미와 다르다. 벽을 넘으려고 기어오르는 담쟁이처럼 책을 읽는 태도는 가르치거나 배우기가 매우 어렵다. 그 너머를 향한 안타까운 까치발을 나는 많이 본 적이 없다. ‘사실’에 기초하지 않는 이야기들이 대개 ‘의견(해석과 주장)’을 확정적 진리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일상생활, 각종 매체의 뉴스, 한 다리 건너 들은 가십, 가족과 친구와 대화 혹은 업무 추진 과정에서도 빈번하다. 다른 생각, 다른 감정에 대한 수용 여부는 무엇으로 판단해야 할까. 그러나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한다. 몇몇 사람이 싫은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불편할 수도 있다. 대개 내향인과 외향인으로 구별하기도 하고 MBTI나 혈액형으로 가늠하기도 한다. ‘관계 지향형’도 스타일이 각자 다르지만 원하는 거리는 더더욱 천차만별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서로를 미워한다. - 순자(荀子)
인간의 마음속에는 타인의 행복을 질투하는 감정, 즉 ‘르상티망ressentiment’이 깔려 있다. - 니체(Nietzshe)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심리학이 ‘과학’이냐는 의심이 하루 이틀의 문제는 아니다. 실험심리학이 꽤 오랜 전통을 이어오고 있으나 표본 수의 문제보다 실험 조건과 대상에 따라 매번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 없다는 한계는 극복하기 어려우니 일반적 성향으로 이해하거나 정규분포곡선의 중앙값 80% 정도라고 생각하면 내 마음이 불편하지 않다.
철학을 전공한 정신과 의사인 저자는 뇌과학에도 관심이 많다.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접근이다. 사람의 생각과 행동과 감정의 근원을 들여다보는 방법은 다양하다. 앞서 언급했듯 그렇다고 해서 정답을 제시하거나 단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원제 그대로 ‘인간 알레르기’ 증상 있다는 전제로 개별 독자는 ‘나’를 점검할 것이다. 이 책이 그걸 요구한다. 어제까지는 좋았는데 오늘은 싫어지는 이유, 인간 알레르기의 역사 등이 그렇다. 다만 마지막에 ‘이유를 아는 순간 인간관계의 봉인이 풀린다’라는 주장은 좀 의심스럽다. 5장 “나는 나를 조종할 수 있다!”라는 저자의 권유는 인류 역사에서 가능했던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가능하지도 않을 것 같아 그렇다. 읽는 사람마다 속이 시원할 수도 있고 저자의 주장에 공감하기도 하겠으나 답이 없다는 걸 전제로 한 번쯤 들여다보면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
대인 관계의 어려움, 대인 기피증, 성격장애, 적응장애 같은 단어보다 ‘인간 알레르기’라는 메타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당혹스럽겠지만, 자극적인 표현보다 이면에 숨은 저자의 의도와 개별 독자의 상황과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앞부분의 잔인한 처형 묘사에 책장을 덮는 사람도 있고, 오징어를 씹으며 심드렁하게 넘어가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다르다. 인간은.
내가 싫어하는 그 사람은 ‘악인’이 아니다. 괴벨스, 아이히만, 노덕술도 따뜻한 아버지였다. 모든 관계는 상대적이다. 상황이 인간을 지배한다. 개인적인 대인 관계도 그렇다. 상대방의 거친 말과 성난 얼굴은 때로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 사람이 ‘악인’이라서가 아니라서가 아니라 바로 ‘나’에게만 악인일 수도 있다. 그 정도까지 생각이 열린다면 이 책은 충분히 의미를 만들 것이다. 다만 부록으로 ‘싫어하는 사람 대응 매뉴얼’ 같은 걸 적어 놓은 건 ‘나’에게는 무의미한 “착하게 살자”는 선언처럼 들린다. 모르는 게 아니라 알아도 실천할 수 없는 게 있다.
우리는 종종 사소한 일을 계기로 방금 전까지 친밀함과 애정을 느꼈던 존재에게 결코 용서할 수 없을 만큼 분노를 느끼곤 한다. 일단 그 사람에 대한 거부 반응이 나오면 접촉할 때마다 경멸이 가득 차고 혐오감이 솟구쳐 올라 마음이 어지러워진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인내하면서 살거나 적절한 거리를 두는 것, 이 두 가지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