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 3 - 상 - 2015년 개역판, 정치경제학비판 자본론 3
카를 마르크스 지음, 김수행 옮김 / 비봉출판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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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도록 방치한다. 잉여가치율과 이윤율은 다르다. 그 전환과정에서 총자본과 가변자본 그리고 잉여가치의 비율과 변화에 주목하며 마선생님은 자본론 3권을 시작한다. 이윤율이 불변일 때와 변동하는 경우에 따라 경우의 수를 짚어보는 목적이 무엇일까. 결국 가변자본인 노동력에 대한 관심이다. 노동일, 노동시간, 노동강도는 잉여가치과 이윤율로 직결된다. 여기에 연간 회전율은 생산성의 영향을 받고 이것은 자본가의 이윤과 노동자의 임금, 노동강도와 노동일, 노동시간에 영향을 준다. 어느쪽이 우선하든 이 복잡한 수식 속에 숨은 뜻을 찾아내는 일이 자본론 공부의 핵심이 아닐까. 그것은 다른 경제학자와 다른 마선생님만의 독특한 '관점'이다.

​어떤 사회현상을 바라보는 수백개의 눈이 있다. 아니 수만, 수억 개의 카메라가 있다. 있는 그대로 비추지도 못하는 거울부터 뼈와 살을 꿰뚫어 X-ray처럼 객관적 사실을 투영하는 기계뿐만 아니라 그 원인과 결과를 찬찬히 헤아려보는 인식과 사유의 눈도 있다. 어떻게 볼 것인가, 무엇을 향해 어디로 갈 것인가. 중심축이 없는 회전은 어지럼증을 유발한다. 단단히 뿌리내리지 못한 생각들이 부유하며 세상을 어지럽힌다. 논리적인 근거와 이성적 판단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까.

하지만, 적어도 거짓과 선동을 걸러내고 현상과 본질을 구별하는 안목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 정도는 공유할 수 있지 않나? 합의는 어렵지만 기준과 잣대마저 제각각이라면 그야말로 세상은 난장판이 될 것이다. 과학적 태도가 필요한 건 오히려 정치와 사회 그리고 경제 분야가 아닌가. 때때로 흘러가는 구름에 태양이 가려져 흐린 날도 있고 비가 오는 날도 있다. 곧 장마가 시작되면 청명한 가을 하늘을 기다리는 성급한 사람들도 있다. winter is coming. 무엇을 할 것인가, 레닌도 체르니셰프스키도 했던 고민을 우리가 계속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 그리고 거기에서도.

​자동차는 구입하는 순간부터 감가상각이 시작된다. 10년 동안 한번도 타지 않고 중고차로 팔아도 제값을 받을 수 없음은 물론이다. 농산품은 말할 것도 없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거래되는 거의 모든 상품이 그렇다.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불변자본 사용을 절약한큼 이윤이 높아진다. 더 많은 노동력을 투자해서 초과임금을 지불해도 기계가 노는 꼴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노동자를 희생시키는 노동조건을 절약할 수도 있고, 생산폐기물을 이용할 수도 있으며, 발명에 의한 절약도 가능하다. 이윤을 높이는 또 하나의 요인은 가격변동이다. 원료가격의 변동은 이윤율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자본의 가치가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

잉여가치와 이윤, 잉여가치율과 이윤율 사이에는 다양한 요소가 놓여있다. 이들의 변화, 통제, 조절에 의해 자본가의 이윤율이 달라진다. 단순히 노동자에 대한 착취 뿐만 아니라 불변자본의 변화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마선생님은 3권에서 구체적인 이윤 발생 과정의 변화요소를 점검한다. 1편에서 주로 다룬 내용은 잉여가치율과 이윤율의 함수관계다. 어떤 요소 때문에 잉여가치율과 이윤율이 달라지면 그 요소들이 노동자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행간에 숨어 있는 의미를 읽어내야 한다. 퍼즐을 맞추듯, 레고블럭을 쌓듯 분석과 해석을 통해 하나의 거대한 형상이 만들어지는 걸까.

여러 단계, 혹은 여러 분야의 일반적 이윤율이 형성되는 과정은 상품의 가치가 생산가격으로 전환되는 과정과 다름없다. 마선생님은 여전히 우리가 어떤 상품을 구매할 때 숨어 있는 노동력, 즉 잉여가치의 의미를 되묻고 있는 듯하다. 이제 기업 간에, 상품 상호간에 경쟁이 시작되면 이윤율이 균등화되는 상황이다. 시장가격은 시장가치와 다르다. 초과이윤을 향한 수요, 공급의 자명한 논리도 작용한다. 여기에 임금의 변동이 생산가격에 영향을 미치면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자본가들의 초과 이윤을 향한 열망은 이윤율 저하경향의 법칙 앞에서 좌절한다. 흥미롭다. 일반적인 이윤율이 점차 저하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자본주의 시스템의 필연성이라니. 나의 관심사는 노동력과 임금 그리고 잉여가치와의 관계다. 불변자본의 증가로 인한 이윤율이 낮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까. 규모의 경제를 통해 현대 자본주의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를 극복하고 노동력을 착취하며 인간의 삶보다 자본의 욕망에 충실한 견고한 체제를 구축해왔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윤율 저하를 막기위한 몸부림은 다양한다. 노동력 착취가 증가하고, 임금을 인하하며, 불변자본을 낮추고, 상대적 과잉인구를 이용하며 대외무역을 활용한다. 그런 후에는 상품자본과 화폐자본이 상인자본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살핀다. 상품거래자본과 화폐거래자본을 합쳐 상인자본으로 부른다. 이것이 산업자본과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상업이윤의 특징을 들여다보게 한다. 상업자본의 회전과 가격이 노동자의 삶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유통은 전체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만 여전히 그 중요성이 간과되기도 하고 폭리를 취해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각종 포털 사이트, 인터넷 서점, 홈쇼핑이 그렇다. 마선생님이 지금 이 꼴을 본다면 이들이 착취하는 대상이 노동력 뿐이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대 상업자본이 상품거래와 화폐거래에 지나치게 집중하고 있는 현실이 떠올랐다. 결국 이윤율을 높이기 위한 경쟁과 소상공인, 산업자본의 피해는 각 분야의 노동자들에게 돌아간다. 대체로 산업 구조와 자본의 형태만 달라졌을 뿐, 오늘 우리가 겪는 현실도 이윤 창출의 도구와 그 수혜자는 극소에에 몰려 있다는 사실에는 다름 없다. 기업 상장 후 분할 매각으로 천문학적 거금을 손에 쥔 몇몇 자본가 외에 누가 첨단 산업의 꿀물을 빨고 있는가.

아주 오래된 옛날 이야기에 빠져 생산, 산업, 상업 자본의 구조를 들여다보는 과정이 메마르고 냉혹하다. 감정없는 서술, 마선생님의 분석에 주관적 해석이나 오해가 덧붙여질까 극도로 자기 검열을 하듯 냉정하게 서술하는 엥선생님의 서술 태도가 칼날처럼 예리하다. 1권과 같은 냉소와 문학적 비유도 없고, 행간의 숨은 탄식도 줄었다. 2, 3권의 차분한 분석을 1권과 비교할 순 없지만 자본주의 전체 구조를 살피기 위해서는 반드시 살펴야 하는 대목들이다. 세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생각보다 복잡하다. 그리고 철저하게 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다. 푸른 하늘도 잠시, 하늘은 금세 잿빛이다.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와 노동력이 문제가 아니라 이제 화폐거래자본에 대한 이야기는 상업거래자본처럼 자본 그 자체가 살아있는 유기체로 기능하듯 생산물과 노동력 사이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느낌이다. 상인자본의 역사적 고찰을 통해 아주 오랫동안 유통과정에서 발생하는 상업자본의 존재를 고찰한다. 근대적 중상주의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자를 낳는 자본으로 인해 이제 이윤은 모두 기업가의 이득으로 돌아가지 않게 되었다. 잉여가치의 양적인 분할에서 질적인 분할이 생기고 그것이 또 다른 방식으로 이자율과 가치 사이의 관계를 형성한다.

이자는 이자를 낳고 불황기에 이율이 더 높아지던 '지금 이대로!'를 외쳤던 IMF 시절이 떠올랐다. 결국 호황이든 불황이든 가진 자는 더 큰 혜택을 얻고, 피해는 최소화한다. 제도가 바뀌고 경제상황이 달라져도 마찬가지다. 현실은 자본주의 시스템을 이해한 자와 이용하는 자 그리고 무지한 자와 용감한 자에게 지나치게 가혹하다. 선한 얼굴로 '자유'의 가치와 '평등'의 미소를 짓지만 현실은 칼날처럼 냉혹하다.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가며 그 분배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살피는 제5편의 이야기는 그 원리와 무관하게 여전히 바뀌지 않은 기본적인 체제와 시스템의 구조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한다. 우리는 과연 괜찮은 방향으로 걷고 있을까? 이대고 괜찮은 걸까?

기능자본가에게 귀속되는 산업이윤 또는 상업이윤은 총이윤에서 이자를 제외한 부분이다. 자본이 인격화되어 자기 자본으로 사업을 할 때는 자본의 사용자는 자본의 단순한 소유자와 자본의 사용자로 나뉜다. 이자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대립이 아니라 두 자본가들 사이의 관계로 나타난다. 드디어 이자낳는 자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자본은 신용을 바탕으로 가공의 자본을 창출한다. 화폐자본은 끊임없이 축적되고 신용에 의한 자가 발전이 가능해진다. 신용제도는 생산력의 물질적 발전과 세계시장의 창조를 촉진한다. 이는 현대 금융자본주의의 시금석이 되었으리라.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서 출발한 화폐는 어떻게 자본으로 탈바꿈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이자를 낳고 산업자본, 상업자본으로 변화 발전하는지 살피는 동안 잉글랜드 은행과 금융시스템 전반을 돌아보게 된다.

이미 초기 산업화사회를 지나 돈이 돈을 버는 시스템으로 발전하고 그것이 전세계를 지배하는 과정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마선생님의 분석과 엥겔스의 정리는 냉정하게 현실을 꼼꼼히 들여다보며 기존 정치경제학이 해명하지 못한 부분을 분명히 짚고 그 원인과 결과를 분석한다. 이 지난한 과정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예상되는 문제점, 말하자면 경제공황이나 노동력 착취, 산자본가와 금융자본가에게 집중된 부의 편중이 합법적으로 이 세상이 굴러가는 시스템으로 정착되었으나 문제는 끊이지 않았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과거를 돌아보며 현실을 살피는 안목을 가져야 하는 건 정치인, 기업가가 아니라 바로 우리와 같은 노동자와 평범한 시민이다.

​은행자본은 화폐와 자본으로 구분되어 있다. 화폐가 질제로 가장 뛰어난 자본이라는 주지의 사실을 통해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달한 나라들에서 은행의 준비금이 얼마나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화폐적 자본과 현실적 자본의 차이는 분명하다. 신용을 바탕으로 한 현대 금융의 초기 버전도 지금과 다르지 않다. 산업활동과 상업활동에 '신용'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상상의 질서체계를 통해 인간의 이룩한 문명과 경제 체제는 감탄스럽다. 공황기와 불황기에 화폐자본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자율이 상승하면 증권의 가격이 하락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분석은 자본주의 구조의 근간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화폐가 대부자본으로 전환되고, 신용제도 아래 유통수단으로 활용되는 어음과 은행의 준비금은 어떤 식으로 경제를 움직이는가. 통화주의자들의 주장, 1884년 영국의 은행법 등은 당대 현실에 대한 세밀한 분석으로 지루하다. 자본주의의 발생지인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은행법 제정과 문제점이 오늘에도 시사하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시적 관점으로 이 책을 살피고 싶은 개인적인 이유로 빠르게 넘어갔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 종교, 화폐, 제국, 자본주의 등 '상상의 질서'를 통해 인류 문명을 발전시켜왔다고 분석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걸 믿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그 힘이 왜곡되면 맹목적 신념, 성찰없는 편견을 맹신하게 된다. 당대 정치경제학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통해 걸어야 할 길과 방향을 점검했다는 점에서 마선생님의 자본 이야기는 여전히 숙고할 만한 게 아닌가 싶다. 누구나 각자 옳다. 팩트fact 조차 크로스체크가 안되는 일들이 허다하다. 들은 이야기, 본 이야기, 경험한 이야기, 학문적 이론, 과학적 실험도 그렇지 않은가. 눈을 크게 뜨고 생각을 열어 놓는 태도야말로 한 인간이 죽기 전에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아닐까.

금본위 화폐제도에서 귀금속의 보유량은 수출과 수입에 의해 물가에 영향을 미치고 퇴장화폐을 좌우한다. 환율은 국가경쟁력과 GDP와 국제 신용등급의 영향을 받는데 그 기능과 역할은 18세기부터 조금씩 자리잡아온 질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자본주의 이전에 고리대는 '악'의 표상이었다. 교회가 그 거래를 금했하기도 했고 이자낳는 화폐유통을 용인하지 않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은 그 모든 금기를 무너뜨렸다.

이제 초과이윤이 지대로 전환되는 차액지대설을 살펴보며 마선생님은 농업생산이 자본가에 의해 추친되며 벌어지는 일들을 분석한다. 차액지대의 형태와 생산가격이 불변, 하락, 상승하는 경우에도 자본은 손해보는 일을 하지 않는다. 차지농업가farmer는 공장의 노동자와 어떻게 다를까. 자기 토지를 소유한 자작농과 다른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기 위해 이 복잡하고 지루한 경우의 수를 따져가며 이익이 누구에게 돌아가는지 따지는 건 아닐까.

인간은 이기적 동물이며 자기 본능을 이기기 어렵다. 눈부신 성취를 이루거나 대다수에게 존경받는 이는 인간적 극기를 통해 범상치 않은 욕망을 가진 사람이다. 자본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어디 한군데 '이윤'을 따지지 않아야 하는 곳이 없다. 타인과의 관계, 용기와 절제, 기쁨과 슬픔의 표현마자 그러하다. 누군가는 무엇을 향해 어떻게 살 것인지 묻고 있으나 그것이 팔릴 물건인지 대다수 사람들의 관심과 욕망에 닿아 있는지가 관건이다. 돈이 되지 않으면 만들진 않는 게 자본주의의 속성이다. 무엇을 할 것인지 물었던 수많은 사상가들이 여전히 우리에게 질문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각자 다르게 생각하지 않을까.

리카도는 토지의 지대가 생산물의 가격과 생산비를 초과하는 이윤이 발생할 때 지급된다는 생각이었으나 마선생님은 토지 소유 자체만으로도 지대가 발생한다는 절대지래를 주장했다. 최열등지에서 차액지대가 발생한다는 것은 자연이 가치를 결정하는 건 토지의 위치와 비옥도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생산가격을 넘는 가치의 초과분에서 절대지대가 발생한다는 생각은 토지소유자가 초과이윤을 지대로 환수한다는 분석이다. 차액지대와 절대지대는 토지의 위치와 비옥도 혹은 노동력이라는 초점의 극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생각의 차이는 관점을 차이를 만들고 보는 눈이 다르면 세상의 빛깔과 향기도 다르게 느껴진다. 하나의 고정된 프레임을 깨고 다른 프레임으로 한번쯤 세상을 바라볼 수는 없을까. 이제 이념을 내려놓고 설익은 도덕과 윤리를 벗고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여유를 가질 때도 되지 않았나. 언제까지 '불안 마케팅'에 시달리며 위기를 넘어 또 다른 위기가 온다는 협박으로 자기 삶을, 타인과 국민의 삶을 어둡게 할 텐가. 진짜 위기와 절망 때문이 아니라 더 큰 욕망을 채우고 함께 살아가려는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건 아닐까.

​개개인의 사적 소유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사적 소유와 마찬가지로 불합리한 것이라는 마선생님의 지적이 뼈아프다. 숱한 반론이 있을 수 있으나 가족, 근대국가의 탄생 기반이 된 사적 소유는 인간의 본성도, 필수불가결한 문명의 성립 조건도 아닐 수 없을까. 무한대로 증식되는 인간의 욕망과 실제 현실로 나타나는 빈부격차의 심화가 낳을 결과는 뻔하다. 자본주의는 인류가 발명해 낸 최고의 경제체제가 아니다. 미국과 스웨덴의 자본주의가 다르다. 자본주의적 지대의 기원에서 노동지대, 생산물 지대, 화폐지대로 나누어 분익소작과 소농민적 분할지 소유는 결국 자본, 토지의 소유 여부로 판가름난다. 마지막 7편 수입들과 그들의 원천으로 자본론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48장 삼위일체의 공식에서 '자본-이윤(기업가이득+이자), 토지-지대, 노동-임금; 이것은 사회적 생산과정의 모든 비밀을 지니고 있는 삼위일체의 공식이다.'라는 지적은 고전 경제학과 속류경제학에 대한 지난한 연구 결과에 대한 잠정적 결론이다. 애덤 스미스도 이윤, 지대, 임금을 분석하지만 그 잉여가치의 발생원인과 과정에 대한 해석은 마선생님과 다르다. 자본 나리와 토지 마님이 지배하는 세상은 영원할까.

자본론이 출간된지 150여 년이 지난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산업구조와 문명의 발달은 눈부시지만 자본과 토지 그리고 인간의 노동력이 창출하는 이윤, 지대, 임금의 트라이앵글은 변함없다.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하는 제도와 체제는 불가능할까. 현실 부정이 아니라, 목적지와 방향을 다르게 설정하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모두 함께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 실현 가능한 다수의 행복, 경쟁보다 나눔과 배려가 먼저인 세상은 불가능하지 않다. 결국 고전은 현실을 들여다보는 현미경 혹은 망원경이다. 지금-여기에서 우리 삶의 모습을 돌아보고 내일을 전망하며 마선생님의 고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고 있다.

3권 마지막 부분은 생산과정을 다시 분석한 후, "상품의 가치는 상품에 포함되어 있는 노동량에 의해 결정되며, 임금의 가치는 필요생활 수단의 가격에 의해 결정되고, 임금을 넘는 가치초과분이 이윤과 지대를 형성한다는 것"이라는 말로 경쟁이 더 큰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생각은 접으라고 충고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다른 생산양식과 구별하는 두 가지 특징은 첫째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생남을 상품으로 생산한다는 점이며, 둘째는 잉여가치의 생산이 생산의 직접적 목적이고 결정적 동기라는 점이다. 물물교환과 잉여 생산물의 교환에서 시작한 기나긴 인류역사의 경제 체제가 자본주의라는 견고한 시스템으로 완성된 후 우리는 얼마나 행복해졌을까.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고 과학기술의 발달로 노동조건이 개선되었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하지만 숨어있는 1인치를 발견하고 그 가치를 확인한 마선생님의 노고가 여전히 자본주의 미래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치와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먹고사니즘의 문제로 귀결되는 현실이다. 우리의 모든 관심사는, 가장 인간다운 삶이어야 하는 부분까지도 블랙홀처럼 경제가 빨아들인다. 비인간적인 시스템인 자본주의의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이 놓여 있다.

기나긴 여정을 마쳤다. 꼬박 석달동안(12주) 3,000쪽 분량의 자본론을 조금씩 공부하면서 지난 시간을 정리하고 남은 시간을 살폈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데이비드 실즈)라는 명제 앞에서 익숙하게 죽음의 그림자와 마주앉아 저녁을 먹고 술 한잔을 거넨다. 2022년,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예술, 노동, 환경, 과학 등 거의 모든 분야가 위기와 기회를 맞고 있다. 비단 특정 정치세력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이라는 자각이 없는 천박한 철학 앞에서 자주 절망한다. 정치와 연예인, 인플루언서에 대한 팬덤도 좋고, 불행이 없는 인스타그램의 마취적 행복 코스프레도 좋다. 현실을 바라보는 내정한 시선과 미래를 고민하는 대안 모색이 없는 세상은 절망에 취약하다. 때때로, 마선생님이 인용한 셰익스피어, 냉소적 위트, 당대 경제학자들과 속류 경제학에 대한 비판정신, 엥겔스의 노고와 든든한 지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애정, 미래 사회에 대한 희망까지도 다시 돌아볼 생각이다. 이론의 발뒤꿈치라도 만져봤으니 그 이론을 통해 도달하고 싶었던 세상, 꿈같은 시대를 상상해 본다.

오지 않아도 좋다, 꿈꾸고 상상하며, 기다릴 수 있는 여유가 오늘을 살게 하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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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 2 - 2015년 개역판, 정치경제학비판 자본론 2
카를 마르크스 지음, 김수행 옮김 / 비봉출판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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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틴은 힘이 세다. 운동선수들의 루틴routine은 반복적, 습관적 동작과 절차를 통한 능력향상이 목표다. 그러나 자본의 루틴은 조금씩 변태(탈바꿈)를 통해 순환구조를 만든다. 마치 영원반복의 뫼비우스의 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에셔의 개미처럼 노동자는 자본의 순환구조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제 화폐자본의 순환으로 시작된 자본의 무한 반복과 잉여가치의 증식과정은 충분히 예상되는 과정이다. 각 단계가 반복되며 점차 눈덩이를 굴리듯 불어나는 자본은 제 몸집을 가누지 못하고 그 속도를 감당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까지 왔다.

하루 해가 금세 저물듯 인류의 역사는 돌아보면 순간인듯 보인다. 숱한 희노애락과 기쁨과 슬픔이 흔적도 없이 지나온 자리마다 꽃이 피었을까. 아니면 먼지처럼 사라진 시간의 두께만 켜켜이 쌓였을까. 살아있는 모든 것은 제 목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목적도 방향도 없이 맹목적으로 달려간다. 타인과 세상의 거리만큼 자본과 노동자의 삶의 거리도 좁힐 수 없을만큼 점점 멀어져 간다.

화폐자본이 순환하면 생산자본과 상품자본도 순환한다. 유통과정을 통해 세가지 순환은 서로 맞물려 돌아간다. 자본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화폐, 상품, 생산도구로 탈바꿈한다.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유통 시간과 비용이 발생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하나의 상품을 소비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정교하고 치밀한 과정을 거치며 착취한 노동력으로 잉여가치를 만들어 순환 구조를 만든다.

돌고 도는 세상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환 - 자연의 반복과 변조가 아니라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자본을 통해 확대재생산하려는 욕망을 빗댄 표현이 아닐까. 생로병사의 수레바퀴를 아래서 우리는 태어나 살다 죽는다. 희노애락은 그 과정에서 겪는 짧은 기억이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흔적도 남지 않는다. 그러나 자본이 굴러간 자리에는 분명한 흔적을 남기며 스노우볼처럼 자기 증식을 통해 인간의 욕망과 삶의 태도를 빨아들인다. 자유는 허울좋은 이념에 불과한 게 아닐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와 평등이라니. 지나친 니힐리즘은 건강에 해롭지만 마선생님의 문장 사이 사이에 번뜩이는 통찰은 자본주의의 필연적 순환 논리가 아니라 인류의 삶에 대한 비극적 전망으로 들린다.

어디를 둘러봐도 희망은 잘도 숨는다. 그래도 우리는 내일 향해 쏜다. 별빛을 찾아 하늘을 보고, 푸른 하늘을 향해 웃음 짓는다. 하루하루 우리를 견디게 하는 힘은 아마도 무지에 대한 열망과 미지에 대한 안도감이 아닐까. 때때로 바람이 분다. 그만하면 충분하지 않은가.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카페에 머물기 적당한 시간은 어느 정도일까. 자본의 회전은 식당 회전과 닮았다.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은 가변자본과 불변자본과 다르다. 생산자본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상품자본과 화폐자본이 노동력을 규정한다. 중농주의자들과 애덤 스미스 그리고 리카도는 어쩌자고 노동력을 유동자본으로 확정해서 마선생님을 화나게 했을까. 노동시간과 생산시간은 상품과 업종마다 천차만별이다. 농업, 임업 등 공업과 다른 분야는 노동에 투자하하는 시간과 방법이 다르고 생산 과정과 방법에 따라 순환되는 시간이 천차만별이다.

실제 사례를 들어 설명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이론과 개념으로 묶어내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엥겔스가 정리했다는 2권은 3권과 달리 마선생님 특유의 문장을 읽는 맛을 잃었다. 건조한 설명과 성실한 고민만 드러날 뿐, 문학적 비유도 사이사이 드러내던 아재개그 코드도 없다. 지루하지만 1권에서 보여준 정치경제학의 기본 이론을 충실하게 보충하고 설명을 보태 시야를 넓히고 있다. 당대 주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이론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인간의 노동이 얼마나 중요하며 그것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 밝혀내기 위해 지난한 과정을 거치고 있는 느낌이다. 화폐와 자본, 상품과 생산 너머에 언제나 '사람'이 있다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자본주의 생산과정과 유통 시간은 뗄 수 없는 관계다. 회전 시간이 투하자본에 미치는 영향 또한 절대적이다. 가변자본의 회전은 잉여가치율에 영향을 주며 고정자본과 달리 유동자본(가변적 유동본, 불변적 유동자본)에 영향을 받는다. 마선생님은 실제 사례를 통해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려 다양한 수식을 동원하다가 실수를 범한다. 엥겔스가 이를 바로잡아 정리한 내용이 표기되어 있다. 실제 현실은 이론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모든 이론이 현실을 관통하는 일관성 있는 관점을 유지할 뿐이다. 단순히 생산양식을 넘어 노동력과 화폐자본, 상품자본, 유통기간은 물론 자본의 회전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세상이 굴러가는지 살펴본다. 오늘의 경제는 훨씬 더 복잡해졌으나 기본적인 틀에는 변함이 없다. 사람도 변했지만 욕망이 그대로이듯.

인도에서 면화를 싣고 희망봉을 돌아 영국에 오는 유통 기간의 이야기는 아득하기만 하다. 수에즈 운하 개통 전 이야기를 예로 들며 자본의 회전 시간을 분석하는 일이 쓸데없어 보이지만 우리가 사는 시대는 또 다른 회전 주기로 기업과 노동자는 갈등을 빚는다. 소비 촉진을 위한 트렌드를 만들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이 늘고 있는데 소비자인 우리는 철저한 자본주의의 메커니즘 안에서 움직이는 걸까. 아니면 인간의 욕망을 마음껏 누리고 사는 행복의 나라에 사는 걸까.

잉여가치가 유통되기 시작하면 이제 본격적으로 돈이 돈을 버는 자본주의의 자가 발전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노동력의 착취로 시작된 자본의 몸집 불리기는 마치 그것이 온전히, 당연하게도, 자본가의 것인냥 위세를 떨친다. 퇴장화폐로 일시적 보관이든, 새 정부에 호응하며 재벌기업들이 토해내는 축적된 자본이든 그것은 오롯이 잉여가치의 확대재생산 결과라는 사실이 놀랍지도 않다. 조 단위의 돈은 어떻게 그들이 거머쥐게 되었을까. 어찌보면 단순하고 명쾌하지만 들여다보면 복잡한 다단계를 거쳐 자본주의는 순기능과 역기능을 하며 인류의 삶을 조금씩 나은 곳으로 인도했다. 아니, 그것은 과학기술의 발달과 인류 문명의 혜택이 자본에 집중된 결과이기도 하다. 무엇이 먼저이든 부의 편중과 비정상적인 분배 체계-오너와 신입사원의 급여차이에서 한 국가의 빈부 격차에 이르기까지-로 인한 문제는 수준만 달라졌을 뿐 현재 진행형이다.

자본의 변태와 자본의 회전에 이어 3편 사회적 총자본의 재생과 유통으로 2권은 마무리 될 예정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기본 토대 위에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 있는 사회적 총자본의 재생과 유통을 살펴보기 전에 연구 대상과 관련된 중농학파의 주장과 애덤 스미스, 리카토, 슈토르히, 시스몽디, 존 스튜어트 밀가 간과한 점들을 살핀다. 개별 자본이 아니라 사회적 총자본이 운용되는 시스템도 결국 c+v+s의 결합이 바탕이 되지 않을까. 고정자본과 유동자본 혹은 임금의 관계 설정을 잘못했다고 해서 시스템 자체가 달라지는 않는다. 변하는 건 잉여가치에 대한 관점과 해석이다.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가는가. 아니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가야 하는가.

노동과 임금을 바라보는 차이는 그대로 타인과 세상을 관찰하는 시선에 드러난다. 비판이 아닌 비난으로 자기 삶의 비루함을 포장하지 못하듯, 21세기도 여전히 가치 창출의 방법과 대가에 대한 생각들은 고정된듯 보인다. 살아온 대로 생각하고 경험한 대로 판단하며 주어진 대로 만족하는 삶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정말 괜찮은 걸까.

마선생님이 Ⅱ권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한 부분은 제20장 단순재생산이다. 이것이 어떻게 축적되어 확대재생산 되지는지를 설명하는 제21장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Ⅰ부문과 Ⅱ부문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고 생필품과 사치품이 소비되는 과정 그리고 두 부문에서 불변자본, 가변자본, 잉여가치가 어떻게 연동되어 있는지 밝히는 과정은 다소 복잡하지만 그 원리는 단순하다. 고정자본을 보충하기 위해 마멸가치분을 화폐형태로 보충하고 고정자본을 현물로 보충하는 과정이 왜 스미스, 슈토르히, 람지에게는 보이지 않았을까.

우리가 사는 세상, 오늘의 경제상황을 바라보는 관점도 이와 같은 게 아닐까. 보편복지와 선별복지가 이념논쟁으로 번지지 않고, 노동자를 노동자라고 부르는 세상은 불가능할까. 맹목적 신뢰, 감정적 증오가 과연 정치인들의 탓일까. 현실은 자신의 역량만큼 세상을 보여주고 고민한 대로 관계 맺으며 보이는 만큼 즐기며 산다. 지식의 양과 통장 잔고가 무엇을 말해 줄 수 있을지 점점 알 수 없어진다. 그밖에 남은 건 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의 시선은 도대체 어디에 가 머무는 것일까. 3권을 다 본다고 해서 끊없이 이어지는 질문과 의문에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알수 없는 노릇이지만 내처 걸어볼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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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 1 - 상 - 2015년 개역판, 정치경제학비판 자본론 1
카를 마르크스 지음, 김수행 옮김 / 비봉출판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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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내게 매력이 없을 수 있듯, 신성한 고전도 나에게 울림이 없을 수 있다. 그런 책이 한둘일까 마는 태어나 읽은 책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책은 아마도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일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수없이 마주쳤지만 <경제학 철학 수고>를 제외하고는 2차 저작들만 읽었다. 몇번의 실패 경험이 원전에 대한 두려움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긴 호흡으로 언젠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 앉아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짧지만 남은 날을 내다볼 힘을 빌릴 수 있으리라는 기대 아닌 미련이 남아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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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개역판이 나오자마자 품절되고 안타까워하다가 다시 잊었다. 이제서야 2021년 11쇄를 샀다. 겨우 몇 천권도 안되는 서가의 책들 사이에서 자본론 1권은 다른 모든 책을 압도하는 듯하다. 지나친 의미부여가 아니라 그간 혼자 만든 마음의 빚 때문이기도 하다. 1989년에 초판이 나온 후 1991년, 2001년, 2015년에 걸쳐 다듬어진 문장에 뭐라 할 말이 없어진다. <2015년의 개역에 부쳐>을 읽다가 번역의 시간들이 눈앞에 떠올라 울컥했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자본론>을 쓴 마르크스에 비하면...번역에만 매달려도 한 평생이라는 한탄아닌 한탄이 새삼스럽다. 번역은 커녕 일독을 하는대도 일평생이 걸리는 사람도 있다.

​1권 1장 상품을 꼼꼼하게 읽었다. 번역자의 노고와 고민이 우둔한 독자 한명을 구하셨다. 놀랍게도 읽힌다. 그간의 숱한 2차 저작과 인용, 개념 설명, 이론과 적용을 통해 눈동냥을 한 탓도 있겠으나 천천히 읽기를 시작한다. 행여 오독은 재독으로 가리고 난독은 지독으로 이겨내며 눈이 침침할 때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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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에서 노동의 가치를 읽어내고 본래적 사용가치와 구분되는 교환가치가 화폐로 전이되는 과정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서술되어 있다. 문장의 호흡이 조금 길거나 설명과 논리가 건조하지만 충분히 읽을 수 있을만큼 다듬어진 번역이다. 시간이 많이 흐르고 세월의 두께도 한몫 하겠으나 각자의 재미와 즐거움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필요가 없다. 읽고 궁구하다 지칠 때까지.

상품과 상품의 교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노동가치의 문제는 화폐와 상품의 유통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의 연속선상에서 당시 상황을 통해 상품과 화폐의 유통 과정을 상세히 설명한다. 셰익스피어의 대사가 등장하고 고대 철학자들의 날카로운 통찰이 인용되어 경제학이라기보다 마치 사회학에 가깝다. 본질적으로 경제는 인간과 사회의 구조 그리고 그 안에서 작동하는 욕망과 가치의 교환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수밖에 없는 것일까.

화폐의 유통은 지금 현재도 그대로 적용되는 기본적 개념이지만 '퇴장화폐'라는 용어를 보는 순간 슬픔이 밀려왔다. 지불, 유통수단이 아니라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무한한 축적 가능성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화폐의 관계를 면밀히 살핀 다음 이제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살핀다.

고전 경제학과 당대 경제학자들의 이론에 문제점을 찾고 논리적 헛점을 지적하는 고단한 작업을 통해 마르크스가 바라본 세계의 변화 과정과 고민의 시간이 엿보이기 시작한다. 근본적인 문제를 살피고 본질을 헤아리면 현실과 미래가 조금 달리 보인다.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가는지 살피라고 했더니, 쿠이보노cuibono만 외치며 아전인수를 시작한 '기득권들'의 전쟁이 시작된 건가. 어느 한 놈도 국민을 팔지 않는 놈이 없다. 도대체 국민은 누구이며 어느 나라 국민인가.

상품과 화폐 그리고 자본의 차이를 분명하고 알기 쉽게 설명하는 자본론이 왜 쉼게 읽히지 않았을까. 배경지식의 부족이나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지 않을까. 흥미있고 재밌는 서술이다. 아재개그로 너스레를 떨기도 하고 비아냥거리기며 기존 이론이나 다른 경제학자들의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비틀어버리기도 한다. 분명한건 상품자본과 산업자본 그리고 이자 낳는 자본의 일반공식과 그 모순을 지적하는 내용이 흥미롭다는 점이다.

자연스럽게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가 등장했고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으로 접어들었다.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하는 과정, 노동력이 상품에 결착되는 과정또한 이미 익숙한 내용이지만 생생한 목소리가 분명하게 들린다. "자본은, 오직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의 소유자가 시장에서 [자기 노동력의 판매자로서] 자유로운 노동자를 발견하는 경우에만 생긴다."라는 문장이 그렇다. 노동과정과 가치 증식과정은 이제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으로 넘어가기 전 단계다.

긴 설명과 이론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간단할 수도 있어 보인다. 이렇게 길고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고전 경제학과 자본주의가 태동하며 본격적으로 궤도에 진입할 무렵의 다양한 이론들과 차별화된 '노동'에 대한 관점, 그 가치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는 지난한 과정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지구 반대편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는 손흥민을 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축구 종주국-맨체스터와 리버풀 등 노동자들의 유일한 낙이었던 축구에 미친 나라 영국의 150여 년전 이쪽과 저쪽을 살피면서 지금, 여기를 생각한다. 노동절이다. 누군가는 여전히 죽음의 외주화를 정당하게 여기며 누군가는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임금격차를 노력의 차이, 살아온 결과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얼만큼 나아진 걸까.

노동은 가변자본이다. 잉여가치율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단 한순간도 멈춘 적이 없다. 시급 인상을 자영업자들의 어려움으로 치환하며 을들의 전쟁으로 유도하는 그들보다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사회 경제적 계급 앞에 번번히 고개를....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각자의 관점과 태도가 자기 인생의 목표와 가치를 결정한다. 우리는 어디로 걷고 있을까.

하루 1850년 영국의 공장법은 하루 10시간으로 노동 시간을 규제한다. 그나마 법적 제한이 없는 산업 분야의 노동자들의 삶은 마르크스의 표현대로 단테의 상상한 지옥을 능가한다. 인간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끔찍한 행동을 해왔다. 날은 쉽게 저물고 시간도 생각보다 빨리 흐른다. 우리는 제대로 하고 있을까.

출판 마케팅에 대한 이해가 눈꼽만큼이라도 있었더라면 칼 마르크스는 <제10장 노동일>을 맨 앞에 배치했으리라. 확인해보니 <제15장 기계와 대공업>과 <제25장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을 제외하고 1권 전체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그만큼 중요하고 심각하게 당대 노동현실을 직시했다는 의미다. 스스로 밝히듯 상품과 화폐는 어렵고 딱딱하다. 처음부터 독자를 질리게 하지 않고 현실을 분석한 다음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상품과 화폐부터 차근차근 설명했다면 어땠을까. 혼자서 자본론 1권 전체를 재구성해 보았지만 훨씬 나은 방법이라는 데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제10장을 읽는 동안 왜 그간 자본론을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스스로 부끄러웠다. 진입장벽이 높아 아마도 긴장하고 읽은 제1편에서 번번이 넘어지지 않았나 싶다. 어쨌든, 11장 잉여가치율과 잉여가치량, 12장 상대적 잉여가치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고전 경제학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당대 경제학자들의 논리를 날카롭게 지적하는 분석과 체계적 설명은 놀랍다. 정교한 구조와 달리 설명과 예시, 문장 구석구석에는 위트와 재치가 숨어 있고 예상 반론에 대한 재반론 근거까지 숨겨 놓았다. 40대에 마르크스가 영국의 현실과 자본주의 구조를 바라보는 관점은 근본적으로 다른 곳에서 출발한다. 하나의 전제가 무너지면 이론 전체가 무너질 수 있는 위험성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자신감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사람은 늙어도 생각은 낡지 않은 사람을 만나기가 힘들다. 나이는 젊지만 관점이 늙은 사람이 더 많다. 한 인간의 성장과 성숙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무엇을 향해 어디로 걷든 관점과 태도가 현실을 바라보는 각자의 창문이 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며 자본론이 점점 흥미롭게 펼쳐진다. 자본론을 필사하며 읽는 동안 조금 더 천천히 그리고 넓고 깊게 세상을 바라볼 준비가 되어 있는지 나에게 물었다.

먼 옛날, 인간의 협업과 공동체 생활은 개별적으로 약한 존재인 인간의 생존 전략이었다. 농경사회를 거쳐 산업 혁명 이후에 '매뉴팩처'로 일컬어지는 공장은 가내수공업과 길드를 지나 본격적으로 자본주의적 성격을 띤다. 협업은 잉여가치 생산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으며 이는 분업으로 세분화된다. 협업과 분업은 전통적인 인간의 생산활동이었으나 공장제 수공업인 매뉴팩처 단계에서는 인간을 부품으로 전락시킨다. 굳이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1936)를 떠올리지 않아도 중장년층에겐 익숙한 방식이다. 대한민국의 눈부신 성장도 결국, 70년대 산업화의 역군으로 일컬어지는 노동자들에 의해 가능했기 때문이다.

"매뉴팩처 시대에 비로소 독립된 과학으로 등장한 경제학"은 '인간'을 지우기 시작한 게 아닐까. 생산성, 성장률, 통계 등 숫자로 표현되는 인간의 가치는 현재와 미래에도 변함없이 지속되지 않을까. 과거를 돌아보며 오늘을 살피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관점의 문제가 아니라 목표와 가치의 문제라는 사실로 귀결된다. '성장이냐, 분배냐'의 문제로 치킨 게임을 벌일 필요가 있을까. 성장이든 분배든 누가 얼만큼 가져가야 하는 고민보다 '인간'이냐 '자본'이냐의 문제로 환원할 순 없을까.

느린 호흡으로 읽다보니 이제 겨우 1권(상) 절반을 살폈다. 큰 흐름과 논리정연한 체계가 조금 보인다. 1800년대를 통찰했던 마르크스의 이야기가 왜 21세기에도 유효할 수밖에 없을까. 그것은 경제학 이론이나 천재의 혜안 때문이 아니라 여전히 대다수 노동자-스스로 아니라고 우기는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없이-들의 고통과 불행이 계속되기 때문이 아닐까. <팩트풀니스>에서 한스 로슬링은 인간의 삶이 얼마나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과거에 비해 말할 수 없이 풍요로워졌음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절대 빈곤과 삶의 질을 1800년대와 비교하는 게 가당치 않다. 그것은 몇몇 천재나 재벌들의 힘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일군 땀의 결실이기 때문이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아동노동 조사위원회 보고서』가 지속적으로 인용된다. 현재 우리 사회의 노동부가 이런 역할을 담당한다. 공장법을 제정하고 노동자들의 실태와 현황을 파악한다. 감독관은 법을 어긴 자본가를 기소한다. 노동자와 인터뷰한 내용을 지속적으로 인용하며 마르크스는 1800년초부터 중반까지 매뉴팩처에서 대공업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리카도와 존 스튜어트 밀, 맬더스(인구론 전체가 파렴치한 표절이라고 평가), J. S. 밀, A. 스미스 등 당대 경제학자들의 공과 과를 정확히 짚어가며 오류를 지적하고 '정치경제학'이 현실을 얼마나 도외시했는지 노동자의 관점에서 비판한다.

제15장 기계와 대공업은 180쪽 분량으로 1권 전체에서 가장 많은 분량이다. 엥겔스가 불어판, 독일어 4판에 추가한 내용이 포함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으나 협업과 분업을 넘어 매뉴팩처가 어떤 방식으로 상대적 잉여가치를 극대화하고 있는지 그 과정을 꼼꼼하게 살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용(아동노동 조사위원회 보고서 등)하며 잉여가치가 어떤 식으로 인간(성인, 아동, 여성 등 가족 구성원 전부)을 착취하는지 설명한다. 소름끼치는 것은 21세기의 김용균은 19세기에 출발했다는 사실이며 그것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채 계속된다는 점이다.

문제없는 제도와 완전한 행복을 이룩한 사회는 없다. 모든 사람이 만족할 만한 경제체제도 인류사회에 실현한 적은 없다. 하지만, 반성 없는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면 나만의 행복은 불가능하다. 타인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는 세상은 가능할까. '자유'와 '민주주의'는 '평등' 앞에서 갈등한다. 누구를 위한, 누구에 의한 미래일까.

게도 상식과 정의와 공정과 자유와 평등의 기준은 제각각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것처럼 노동자를 노동자라 부르지 못하는 노동부 장관을 보며 현대판 홍길동전을 보는 기분이다. 노동의 가치와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그토록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피땀흘려 싸웠으나 우리는 여전히 자본가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 그건 아마도 언젠가 나도 자본가가 되겠다는 욕망에 교육체계, 사회적 편견이 덧씌워진 결과가 아닐까.

절대적,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과 시간급, 성과급에 대한 분석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기본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팔것이라고는 몸뚱아리 밖에 없다는 한탄이 고급 지식 노동자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착각이 노동 경시 풍조를 만들어 온 게 아닐까. 화이트 칼라든 블루 칼라든 노동력을 제공하고 영여가치를 생산하는 역할은 크게 다르지 않다. 잉여가치가 자본으로 전환되는 과정은 눈물겹다. 이제 그 자본의 축적 과정에 대해 살펴볼 차례다.

아주 더딘 발걸음을 옮기며 길고 긴 호흡으로 찬찬히 살펴보며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현실과의 접점을 찾는다. 얼마나 달라졌을까, 어디까지 왔을까. 우리가 숨쉬고 사는 세상은 150여 년 전과 어떻게 변했을까. 양적 팽창과 물질적 풍요로움을 부정할 수 없으나 자본이 움직이는 시스템과 교묘한 잉여가치의 축적은 더욱 세련된 방법으로 그리고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보이지 않게 우리를 길들인다. 조금 다른 시선이 필요하다. 언제든, 모든 순간에.

자본시장에서 노동력을 팔기 위한 몸부림과 피나는 경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대학은 이미 자본의 하수인이 된지 오래다. 학과의 개설과 커리큘럼을 직접 설계하며 신입생 선발부터 입사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노동력의 임도선매는 소름끼친다. 분야가 달라지고 형태와 방법이 바뀌었을 뿐 가만히 살펴보면 마선생님이 고민하던 시절에서 현실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상당한 분량을 할애한 제25장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은 단순하다. 자본이 축적되는 과정에서 노동력의 수요가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가변자본의 비율은 상대적으로 감소한다. 그러니 노동력의 과잉, 산업예비군이 생기고 노동자 간에 경쟁이 치열해진다. 인구의 증가, 감소에 따른 변화가 아니라 자본 축적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구조적 문제다. 여기에 과학 기술의 발달 등 생산수단이 점차 노동력 감소를 촉발한다. 그래서 “가난한 나라에서는 대중들이 편안하게 살아가고, 부유한 나라에서는 대중들이 일반적으로 가난하다.”라는 역설이 가능해진다. 이후 제5절에서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등 실제 사례를 통해 이를 증명한다. ​

구체적인 자료와 현실을 다룬 부분은 어떤 소설보다 끔찍하다. 읽다가 잠깐씩 숨을 고르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1861)이 정확히 이 시대를 반영한다. 성인 남성 노동자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과 아이들까지 모든 인간의 생존 조건이 소설보다 참혹하고 생각보다 비현실적이다. 21세기를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물질적 번영과 삶의 질을 비교할 수 없다. 그러니 충분히 긍정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받아들이고 현실적 대안 마련에 집중하는 것이 현명할까.

급진주의와 온건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의 차이다. 기본 구조와 시스템은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자본가와 노동자, 정부의 역할이 비교할 수 없을만큼 정교하고 복잡해졌으며 국가마다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신자유주의가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흉터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여전히 노동자를 근로자로 명명해야 하는 현실 인식은 유럽식 사민주의나 변형된 자본주의의 제도 개선에 큰 걸림돌이다.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고 세상을 이해하는 관점의 변화는 끊임없는 공부와 자기 혁신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독서 현실, 토론 문화, 타협과 똘레랑스의 정신은 어디까지 왔을까.

긴 호흡으로 달려온 자본론 1권은 이른바 시초축적, 즉 자본의 근원을 캐묻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신학에서 원죄의 구실과 같은 정치경제학에서 시초축적은 땀흘릴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을까. 당연하게도 그 반대에는 임금노동자가 존재한다.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없으면 일하지 않고 먹고 사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자본주의제체를 창조하는 과정은 노동자를 자기가 소유하던 노동조건으로부터 분리하는 과정―한편으로는 사회적 생활수단과 생산수단을 자본으로 전환시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적 생산자를 임금노동자로 전환시키는 과정―이외의 어떤 다른 것일 수가 없다. 따라서 이른바 시초축적은 생산자와 생산수단 사이의 역사적 분리과정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에 비밀이 숨어 있다. 무소유는 법정 스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시초축적의 출발이다.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누구나 노동자가 된다. 지적 능력이든 육체적 노동이든 무언가를 노동시장에 내다 팔아야 한다. 형태와 방법이 고상하다고 해서 본질적인 관계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을 팔며 산다.

그 행위를 거부하는 일이 얼마나 힘겨우며 부질없는 짓인 줄 알기 때문에 모두 '건물주'를 향한 열망을 불태우는 걸까. 가장 편리하고 단순한 방법으로 유한계급이 되는 방법일 테니 연예인, 공무원, 정치인, 운동선수, 예술가, 종교인 할 것없이 모두 부동산과 건물에 쏟는 정성은 자본가가 토지와 생산수단을 소유하려는 욕망과 다름없다. 자본주의 시스템을 온몸으로 체감한 인간의 생존 전략이며 그칠 줄 모르는 당연한 욕망이다. 그러나, 그건 정의롭고 상식적인 세상과 거리가 멀다. 우리가 생각하는 공정과 합리의 정신은 열심히 일한 사람이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이라고 믿지만

태어나는 순간부터 삶의 조건이 다른 사람들이 촘촘한 자본의 그물망을 뚫고 희망과 행복의 길을 안내하는 네비게이션은 자꾸만 출시가 늦어진다. 아니, 어쩌면 만들지 못하는 건가. 수많은 경제전문가, 사회학자, 정치인이 나서지만 현실은 우리의 바람과 멀어진다. 어찌보면 이유는 단순하다. 자본가가 아니어도 제 잇속만 차리는 소수에게 집중된 권력과 자본 때문이다. 이해충돌 방지법, 김영란법이 그들만의 리그, 침묵의 카르텔을 깰 수 있을까. 무엇을 위해, 어디를 향해 우리는 나아가는 걸까.

농민들로부터 토지를 빼앗고, 길드를 해체하고 가내 수공업이 사라진 자리에 매뉴팩처와 대공장이 들어서며 세상을 바꾸는 동안 그 달콤한 열매는 누가 다 가져갔을까. 자본주의적 차지 농업가가와 산업자본가의 탄생 과정은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근대적 식민이론으로 마무리되는 1권은 서유럽에서 미국으로 그 시선을 돌린다. 지역적 특색과 국가별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른 형태로 자본주의는 변화해왔다. 우리가 사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자본주의는 안녕하신지 모르겠다. 아주 오래된 옛날 이야기를 듣는 기분으로 마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영국의 자본주의 탄생과 현실을 넘어 우리가 걸어온 흔적들이 보인다. 자본론은 경제학 이론서가 아니라 당대 정치사회의 일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역사이며 인간의 탐욕과 현실의 삶을 조망하는 돋보기와 망원경 역할을 동시에 하는 책이다. 이제 2권으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과 축적 방식, 또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는 개인 자신의 노동에 토대를 두는 사적 소유의 철폐, 다시 말해 노동자로부터 노동조건을 빼앗는 것을 기본조건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 10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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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만든 사람
최은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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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1월을 좋아한다. 가을도 겨울도 아닌 11월은 인디언식으로 이름을 붙이자면 ‘쓸쓸해서 옷깃을 여미는’ 달이다. 끝도 시작도 아닌 어색한, 달력에서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놓은 그 11월. 나란히 선 두 개의 1자가 가까워질 수도 멀어질 수도 없는 애매한 거리의 그 11월. 한해 곡식을 거두고 단풍으로 물든 화려함을 지나 낙엽이 지고 앙상하게 나목과 회색빛 하늘의 그로테스크한 표정이 오히려 안도감을 준다. 흰 눈으로 덮여 환상을 품은 동화 나라 같은 겨울이 오기 전 그 11월은 한없이 부드럽고 헤픈 봄과 너무 뜨거운 열정이 부담스러운 여름과 전혀 다른 표정이다. 그 어느 계절에도 속하지 않는 듯 저만치 혼자 팔짱을 낀 모습이 11월의 맨 얼굴이다. 고통을 견디고 슬픔을 이겨내기 위한 몸부림과 비교할 수 없는 차디찬 명징함,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을 듯 단단한 표정으로 멀리서 관찰하듯 11월은 그렇게 사람들을 바라본다.

물론, 북쪽의 11월과 남쪽의 11월은 다르다. 각자 선 자리에서 다른 풍경이 보이듯, 최은미의 소설집 『눈으로 만든 사람』에 실린 아홉 편의 단편을 읽고 나서 11월의 무표정한 얼굴이 떠올랐다. 체념도 인내도 아닌 명징한 표정의 얼굴들이 스친다. 사람과 사람 사이 놓인 그 수많은 감정들 – 사랑, 증오, 환희, 고통, 애틋함, 연민, 안타까움, 회한, 공감, 후회 같은 것들이 없을 리 없다. 삶은 때때로 잠시 내뱉는 한숨 같은 것이다. 우물쭈물할 틈도 없이 시간은 지나가 버리고 지나간 일들은 상처가 되거나 아쉬움을 남긴 채 ‘추억’이라는 이름의 포장지를 뒤집어쓰기도 한다. 허나, 사는 동안 사람은 명쾌한 답을 얻을 만큼 그리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최은미는 영지, 나리, 강윤희, 강수영, 승미, 은석, 창용, 은형... 들을 통해 그 이유를 설명하는 듯하다.

오랜만에 아주 잘 쓴 소설을 읽었다. 소설집 한 권으로 최은미를 평가하기 어렵지만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는 미시적 방법에 흡입됐다. 직접 보여주지 않되 비껴가지 않기란 쉽지 않다. 본질에 천착하되 분명하게 설명하기도 어렵다. 최은미는 체험이 아니고서는 건져 올릴 수 없는 디테일을 통해 사실성을 확보하고 인물들의 감정선을 놓치지 않는다. 작위적인 느낌도 없고 억지스런 설정도 보이지 않아 잘 읽혔다. 개인차가 있겠으나 나는 디테일을 놓치고 정교함이 떨어지는 소설에 몰입하지 못한다. 특히, 사소설이라 명명될 만큼 개인의 감정에 몰입하고 그 감정을 일반화하지 못한 경우에는 아주 난감해진다. 공감하는 독자가 없지 않겠으나 소설의 역할과 의미를 의심케하는, 아니 소설 읽는 재미를 반감시키는 소설이 점점 늘어가기 때문에 소설 읽기에 점점 흥미를 잃어가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최은미의 소설은 ‘여성/가족’을 주제로 독서 모임에서 선정한 책이다. 9편의 단편의 주인공은 모두 여성이다. 그들이 기억과 현실이 맞닿는 지점이 고통스럽게 전해진다. 소설을 사회학으로 읽을 수는 없으나 각각의 인물이 살아온 이력과 그들이 놓인 상황은 그대로 우리들의 현실이며 과거이자 미래다.

「눈으로 만든 사람」, 「나와 내담자」, 「내게 내가 나일 그때」는 연작으로 읽힌다. 소설집 전체가 옴니버스식 구성을 취한 듯 하나의 주제로 수렴된다고 하면 지나칠까. 친족성폭력 앞에 무력한 주인공은 처절한 절규와 분노를 선택하지 않는다. 아니 최은미는 지금, 여기 놓은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굳이 상처를 헤집고 고통을 설명하는 대신 과거의 기억과 현실의 상황을 객관적 거리에서 묘사하듯 담담하게 서술한다. 독자에 따라 전혀 다른 맥락으로 읽을 수 있겠으나 적어도 감정이 서사를 잡아먹지 않도록 조절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할 만하다. 「보내는 이」, 「여기 우리 마주」, 「11월행」, 「점등」은 조금 다른 이야기로 읽히지만 여전히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섬에 관한 이야기다. 불가해한 관계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건 어쩌면 모든 소설가의 운명이 아닐까. 그것이 연인이든 부모, 형제든 ‘이해’ 불가능한 타인에 대한 관심이 아이러니하다. 허나, 모든 인간은 또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조금 다른 관점에서, 소설적 상상력이 아쉽다. 남성 화자로 쓴 단편이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최은미의 소설을 모두 읽지 않은 탓이겠으나 사건과 서사의 힘이 주인공들을 이끌어나가는 이야기도 듣고 싶어졌다. 문학이라면, 아니 소설에 대해서는 모두 할 말이 많다. 읽는 재미, 다양한 상상력과 작가에 대한 매력, 현대소설과 고전의 차이, 시대마다 다른 주제와 시선들, 가장 쉽고 가장 친근하며 가장 매력적인 ‘이야기’를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 형식과 내용은 변치 않고 많은 사람에게 관심을 받는다. 소설이 전하는 슬픔과 기쁨이 오롯이 현실과 닿아 있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세상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일 터.

*단편 「美山」, 「내게 내가 나일 그때」 부근을 읽을 때 문득 생각나서 11월 이야기를 끄적였다. 그리고 단편 제목 「11월행」을 보고 조금 놀랐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기시감, 타임 루프, 평행이론 같은 것들이 실제로 현실과 무의식을 넘나들며 우연에 우연을 더할 때. 책은 개별 독자가 온몸으로 읽을 때 비로소 비밀의 문을 활짝 열고 미처 자기도 알지 못했던 부분까지 펼쳐 보여준다. 내린천휴게소에 가 무망한 산 그림자를 보며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어졌다. 내게 내가 나일 그때가 내겐 언제였는지 알 수 없으나 유정이 창용오빠를 만난 그 휴게소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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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질문들 - 현대 과학의 최전선
이명현 외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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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묻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플라톤의 말은 지나칠까. 질문하지 않는 사람은 습관적으로 숨을 쉴 뿐일까. 들여다 볼 분야와 대상은 점차 늘어간다. 단순한 호기심과 관심을 넘어 사람들이 움직이는 목적, 세상이 흘러가는 방향이 궁금하다. 기본적으로 문학과 역사와 철학이 바탕이라고 하지만 과학과 예술은 응용 분야가 아니다. 한 분야에 천착한 사람들의 성과와 눈부신 성과도 좋지만 “동시대성을 이야기하면서 과학을 빼놓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아니, 과학을 이야기해야만 동시대를 호흡하고 향유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과학을 이해하는 것, 과학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 더 나아가서 과학을 누린다는 것이야말로 현대적이 동시대적인 태도이자 삶의 양식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지금부터 2,600년 전쯤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주장했다. 엠페도클레스가 ‘물, 불, 흙, 공기’라고 발전시킨 생각도 먼 옛날의 돌도끼를 던지던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인류 문명발달의 척도는 과학이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알기 어려운 분야도 있고 한동안 벽에 부딪쳐 머물러 있는 분야도 있다. 『궁극의 질문들』은 지금,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과학의 첨단을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인터넷 이전과 이후의 인간은 사고방식은 물론 삶의 태도까지 전혀 다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에서 길을 잃은 애매한 세대의 기준을 마이클 해리스는 1985년생으로 잡는다. 이전에 태어난 세대의 혼란과 아날로그의 추억은 적응을 더디게 하지만 이후 세대는 너무나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디지털, 인터넷 맞춤형 인간으로 세상을 산다. 이들의 축복을 나는 ‘지식의 일반화와 대중화’로 표현한다. 15세기 활판 인쇄술이 종교개혁을 이끌어 중세의 벽을 무너뜨렸다면 21세기 인터넷은 지식의 독점과 권력을 형해화해버렸다. 피터버크는 『지식은 어떻게 탄생하고 진화하는가』에서 ‘지식의 절반은 어디서 찾으면 될지 아는 것’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18세기 영국 시인이자 평론가 새무얼 존슨이 친구 보스웰에게 말했듯이 “지식에는 두 종류가 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어디서 관련 정보를 찾을 수 있는지 아는 것이다. 한 주제를 조사하려 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해당 주제를 다룬 도서 찾기다. 이는 도서 목록을 보거나 도서관의 책 표지를 살펴보는 과정으로 이어진다.”라고 진단했다. 19명의 저자를 통해 각 분야에서 관련 정보를 얻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과학의 최전선에서 각자의 분야에 몰입하는 연구자들의 이야기는 그대로 인류의 최대 관심사일 것이다. 우주, 생명, 행성뿐 아니라 통계 물리학, 네트워크 과학, 인공지능 등 전통 과학에서 첨단과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현대인의 독서 습관과 입맛을 고려한 책이다. 그 장점은 그대로 단점이 된다. 서너 쪽 분량의 짧은 글들은 잘 차린 뷔페가 아니라 시식 코너의 맛보기에 불과하다. 본문 200쪽이 안 되는 분량에 19가지 주제를 담았으니 깊이를 포기하고 넓이를 확보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래도 읽는 행위를 통해 ‘관련 정보’를 확인하고 그 고리를 연결하는 작업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입자물리학, 양자역학, 진화론, 기후위기, 통섭, 코로나 시대의 종교 등의 주제는 과학이 연구자의 실험실이 아니라 세상 밖으로 나와 사람들과 소통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명현의 서론처럼 과학에서 최전선, 궁극이란 결국 인간의 삶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생각보다 빠르게 변한다. 느낄 겨를도 없이 지나가는 계절처럼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이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순식간에 달라진다. 기술발달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일반인을 위한 교양으로서 과학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으로서 세상의 흐름과 맥락을 파악하기 위한 과학에 대한 설명으로는 충분해 보인다.

교양이라는 말이 사라진 시대다. 책이 아니면 지식과 교양을 얻기 어려운 시대를 지났으니 교양에 대한 새로운 의미 부여가 필요하겠다. 예술적 감수성, 인문학에 대한 이해, 과학적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 어느 시대인들 환영받지 못할까마는 누구나 고급지식과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고 믿는 시대에는 오히려 지식과 교양을 내면화한 사람을 찾기 힘들다. 근사한 포장지로 사용되거나 보여주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자기 삶의 주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교양이 오히려 귀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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