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고원 - 자본주의와 분열증 2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지음, 김재인 옮김 / 새물결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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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이란 무엇일까요? 내용의 난해함과 무관하게, 개역 작업을 하지 않는 새물결 출판사는 <구별짓기>를 비롯해서 거의 모든 책들을 독점 번역 후 전혀 신경쓰지 않고 독자들의 지적과 요구를 무시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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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별짓기 -상 -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21세기총서 3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최종철 옮김 / 새물결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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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동안 책값을 이정도 올리고 인쇄만 해서 판매하셨으면 책임질 때가 됐습니다. 다른 출판사에 판본을 넘기든 개역판을 내셔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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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국을 말하다
장강명 외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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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는 메시지다’(『미디어의 이해』)라는 마셜 매클루언의 말은 언제나 유효할 예정이다. 1964년에 출간되었으나 60년간 변화된 과학기술의 급격한 변동에도 구조와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발신자-매체-수신자’의 소통 구조에서 레거시 미디어는 정보를 독점했다. 그러나 1인 미디어 시대에 접어들면서 언론의 신뢰도, 정보의 유통 시스템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수신자가 발신자로 거듭났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모두 정보 유통의 허브 역할을 하는 수신자이면서 동시에 발신자이다.

픽션인 문학의 역할과 의미가 축소된 건 미디어의 발전 속도와 그 궤를 함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설보다 흥미진진한 현실이 생중계되고, 뉴스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들이 실시간으로 전해진다. 소설은 갈 길을 잃고 중심을 잡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그건 소설가의 탓이 아니라는 항변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종이 신문은 소설 유통의 중요한 통로였으며 문단권력을 주도하던 영광의 기억도 간직하고 있다. 사람들이 소설을 읽지 않는 건, 아니 책보다 재밌는 미디어가 계속 출현하는 건 소설가나 출판사의 잘못이 아니다.

‘지금-여기’ 한국 사회를 픽션으로 보여주겠다는 한 신문사의 기획이 아니러니하다. 그러나 소설, 문학이 아니라면 피상적 현실을 톺아볼 수 있는 안목은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객관적 사실 뒤에 숨은 진실은 어떻게 말해질 수 있을까. 양극화된 정치와 이념 사회로 회귀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개탄한들 사람들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소란스럽고 자극적인 미디어다. 텍스트를 통해 상상하며 생각에 잠기고 이면의 진실을 찾기 위한 노력은 귀찮기만 하다. 하지만 ‘~카더라’ 통신도 하루 이틀이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진실은 드러나는 법이라지만 왜곡된 사실과 숨은 진실이 끝내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흔하다. 사람들은 지연된 정의는 관심이 없듯,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지금-여기가 중요하다.

결국,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라 이야기로 만들어졌을 때 명징해지는 은유와 상징이 아니라면 이 책은 읽을 필요가 없다. 장강명의 「프롤로그 소설 2034」부터 최진영의 「식단 삶은 계란」까지 21편의 짧은 이야기로 드러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은 독자 개인의 관점과 태도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 문제가 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개인과 대중이 문제다. 문제가 없는 게 아니라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태도가 문제다. 과연 그런가. 현실의 인식 방법은 소설이 아니라도 좋다. 다만, 무엇을 향해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는 사실에는 모두 동의해야 한다. 여기는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

어느 시대든 소설은 시대의 거울 역할을 해왔다. 개연성 없는 허구에 몰입하는 독자층이 두터워지는 건 시절 탓일까. 웹소설과 환타지가 현실에 대한 외면은 아니겠으나 현실 극복 의지라고 볼 수도 없다. 본격, 순수 소설이 우월감을 갖던 시대도 끝났다. 소설은, 아니 문학은 이제 과거의 빛나는 왕관을 내려놓고 지금-여기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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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 대한 연민 - 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방법
마사 C. 누스바움 지음, 임현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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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님 가운데 토막 같은 말씀,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도 한 생애가 필요하다. 자기 범죄를 부인하거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을 ‘용서’하는 일은 종교인도 어렵다. 타인을 향한 서운함에서 분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감정을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표현하고 처리할까. 인간의 본능에 가까우며 가성비 최고라는 ‘뒷담화’가 정답일까. 문제는 알고 외면하는 사람보다 무엇이 잘못인지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의 말과 행동을 합리화하거나 인지부조화로 극복하는 인간이 더 심각하다. 물론 이 유형에는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모두 포함된다. 공자님 가운데 토막 같은 사람도 견디기 어려운 세상이다.

마사 누스바움은 ‘타인에 대한 연민’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두려움과 혐오에 맞서는 대중 행동은 보복과 증오가 아니라 희망, 화해, 사랑이라고 강조한다. 포용적 연대를 지향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라 실천하기 어려운 덕목이 아닐까 싶은 회의가 든다. 넓게는 정권 교체마다 반복되는 과거 청산 혹은 정치 보복에서 좁게는 연인과 친구, 가족은 물론 직장동료, 지인에 이르는 ‘관계’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갈등에 이르기까지 인류 사회는 적절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문화와 관습에 따라 법률로 처벌하거나 공동체의 암묵적 질서로 배제하거나 개인적으로 보복하거나...

‘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법’이라는 부제에 낚이지는 않는다. 그런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모두 개싸움을 하는 시대에 혼자 우아하게 산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상대가 진흙을 던지는 데 우아하게 대처한다는 발상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허나, 폭력을 폭력으로 이길 수는 없다. 개같은 상대를 개가 되어 물 수도 없다. 그래서 마사 누스바움은 ‘두려움’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시도한다. ‘두려움의 군주제’라는 원제 뒤에는 우리의 정치 위기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저자는 ‘우아하게 건너는 법’ 따위를 언급한 적조차 없다.

현대인들은 사회경제적 지위가 불안해지고 계급과 계층 간의 갈등이 속출하며 기후 변화가 미래의 불안을 경고하는 시대를 지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침묵’을 지킨다. 그것은 두려움의 다른 표현이다. 희망의 반대말은 절망이 아니라 두려움이라는 해석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를 향한 철학자의 경고다. 현실을 외면하고 회피하며 그럴듯한 포장지로 자기를 감쌀 때, 타인을 향한 혐오에 내 일이 아니라며 침묵할 때, 상대를 공격하고 제거함으로써 두려움을 해소할 때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는 ‘희망’을 떠올린다.

이 책은 주로 미국 사회를 분석하고 있으나, 준거 집단을 미국으로 삼는 대한민국에도 거의 그대로 적용되는 이야기들이다. 정치적 분노, 차별과 혐오, 시기와 비난, 성차별과 여성 혐오 등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근본적인 원인을 살피고 분석하는 글이 부족한 현실에서 돈벌이에 혈안이 된 유튜버만 날뛴다. 분석과 해석이 아니라 감정의 배설과 증오 마케팅이 판을 친다. 이런 현실을 톺아볼 수 있는 차분한 시간, 넓은 안목과 사유의 도구를 제공하는 마사 누스바움의 태도는 시종 일관 차분하지만 날카롭다.

논리를 갖춘 객관적 태도는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숭고함이다. 글을 읽는 사람의 눈에 어떻게 비치든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글쓴이의 관점과 태도가 냉정하고 합리적일 때 비로소 새로운 논의가 시작될 수 있다. 감정적 선동이나 정답을 제시하는 오만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떤 분야에서 어떤 직업을 갖고 일하든 마찬가지다. 겸손과 성찰은 기본이며 조심스런 태도로 좌고우면해야 실수를 줄이고 자기 성장을 지속할 수 있다. 오랜 시간 누적된 사유의 흔적들이 배어 있는 글은 어떤 형태로든 아름답다. 편안하게 읽히지만 뼈를 때리는 문장들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깊이 사고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두려워하고 비난하기란 쉬운 선택지다. - 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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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읽는 법
류시현 지음 / 따비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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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이 『인간다움의 순간들』에서 “개인은 자기를 기록함으로써 태어난다.”라고 썼다. 어떤 블로그의 인상적인 기록 혹은 일기 혹은 단상들을 읽다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적이 있다. 나탈리 제인 데이비스의 『마르탱 게르의 귀향』,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 카를로 진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를 읽을 때처럼 미시사의 관점으로 한 개인을 통해 시대와 문화를 읽었다. 학창시절의 나이브한 귀여운 감성뿐만 아니라, 김연수의 말대로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버린 청춘의 고민, 자책, 방황, 불안에 이어 성장과 인정 욕구에 이르는 과정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나의 독서일기처럼, 오랜 시간 공들여 적은 누군가의 일상과 기록 그 많은 흔적들이 한 ‘개인’을 완성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역사다.

그렇게, 역사는 대단한 위인과 영웅들의 이야기로 구성되지 않는다. 내가 아이였을 때 『플루타크 영웅전』은 읽은 적이 있다. 천병희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다시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로저 에커치의 『밤의 문화사』를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든 이유는 분명하다. 역사는 세종과 나폴레옹처럼 뛰어난 개인뿐 아니라 이완용이나 히틀러처럼 저열한 개인의 충격과 영향에도 불구하고 이름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일상으로 채색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평생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친 류시현의 『역사를 읽는 법』은 감동 그 자체다. 역사는 동일한 사건에 대한 관점, 즉 사관史觀에 따라 전혀 달리 해석 가능하다. ‘사실은 없다. 오직, 해석만 있을 뿐.’이라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출토된 문화재, 텍스트로 남은 기록 등 숱한 사료를 재구성하고 연결지어 그들(he)의 이야기(story)를 만드는 작업이 역사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류시현은 그들의 이야기를 읽는 법, 역사를 보는 관점과 태도에 대하여 자신의 경험과 고민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결국 역사는 기록된 자료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지극히 사적인 관점으로 해석하는 즐거움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물론 사건의 인과관계를 살피고 시간 순서와 주고 받은 영향을 살펴 재해석하는 일이 독자 개인에게 버거울 수 있으나 주체적인 인식의 힘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모든 지식은 ‘동료 압박’이라는 착각과 검색 정보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 대개 대중적 역사서로 출판되는 책들은 재미와 가독성, 이면의 진실, 엇갈린 해석에 관한 것들이라면 류시현은 역사란 무엇인지, 그것은 어떤 의미가 있으며 우리 삶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과거의 기록으로서 텍스트가 아니라 오늘, 여기를 사는 우리의 문제를 살피라고 요구한다.

흔히, 역사를 ‘오래된 미래’라고 한다. 그래서 역사는 언제나 살아숨쉬며 오늘을 만들고 미래를 꿈꿔야 한다고 요구하는 듯하다. 기원과 시간성, 시대적 맥락과 시기 구분, 사료의 선택, 우연과 필연, 해석과 관점, 인물의 평가, 역사교육과 상상력 등 각 장은 에세이 형식으로 저자의 소회와 경험이 녹아 있어 감성 독자든, 인문 독자든 모두에게 감동과 통찰을 줄 수 있다. 독특한 형식과 서술이라서가 아니라 저자의 ‘진심’은 좋은 책을 만드는 기본 요소다. 강만길의 『해방 전후사의 인식』, 이영희의 『전환 시대의 논리』, 박세길의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님 웨일즈의 『아리랑』, 이사벨라 비숍의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등을 읽으며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에 만났던 이야기들을 떠올렸기 때문이 아니다. 같은 책을 읽은 사람 사이의 공감 때문도 아니다. 자기 삶에 열정을 다한 이의 겸손과 애정이 느껴졌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조금 따뜻해졌다.

“계속 여러 책을 읽고 있다. 그렇지만 역사가 무엇인지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겠다. 게다가 역사가의 역할과 임무가 무엇인지에 관해 여전히 고민하게 된다.” 이제 환갑이 된 역사가의 고백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없다. 겸손한 태도와 끊임없는 질문과 고민이 없는 책을 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시간은 없고 책은 많다. “역사학자가 되었지만, 인문학자가 되고 싶었다.”라며, “문제에 관한 갈증을 해소하고자 책을 준비했는데, 갈증이 심해져간다.”라는 고백이 가장 마음에 드는 개인적인 이유는 설명하기 어렵다. 이해와 공감은 관점과 태도에 기인한다.

생각을 유연하게 하고 싶다. 생각이 유연한 것은 균형 감각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삶, 나의 판단, 나의 결정 등을 정답이라고 주장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 맺음말, 3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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