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진, 세상을 어떻게 통찰할 것인가
데이비드 바사미언.하워드 진 지음, 강주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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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잠을 깬 사자처럼 일어서라
쓸러지고 또 쓰러지더라도!
잠든 동안에 그대에게 떨어진
이슬처럼, 사슬을 벗어 던져라.
너희는 다수이고 그들은 소수이지 않느냐!   - 셸리, ‘무질서의 가면’중에서(P. 113)


  어른이 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질 줄 알았다. 나이가 많은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었던 순진했던 시절이 오히려 행복했을까? 세상에 대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던 생각이 이제는 부끄럽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으면서 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하는 지도 알게 되었고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나이를 통해 얻게 되는 세상살이에 대한 경험과 통찰의 깊이가 얼마나 깊어지는 것인지도 알게 되었다. 두 가지 말이 다 그럴만한 연유가 있지만 결론은 나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백남준이 죽는 순간까지 ‘청년’으로 불린 이유를 생각해 보자. 나는 청년이라고 외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있는가? 나의 꿈은 영원히 늙지 않는 것이다. 몸이 아니라 영혼이. 환갑을 넘긴 생각을 가진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흰머리 휘날리며 젊은이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어르신들이 계시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고 부끄럽지 않게 그리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그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세상과 타협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불의를 외면하거나 말로만 외칠 뿐 행동하지 않거나 긍정적인 것과 순종적인 것을 구별하지 못하거나 부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혼동하거나 안정과 자본의 논리에 복종하거나 자신의 욕망을 은밀하게 감추거나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해 신념을 저버리거나 아예 신념이 없거나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거나 이제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고 말하거나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를 늙은이라고 부른다.

  하워드 진은 좌파라고 불린다. 촘스키와 더불어 미국을 욕하는 대표적인 미국 백인이다. 욕만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지성인으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역사를 전공한 그의 견해는 여전히 유효하며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가고 있으며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그의 꿈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참 아름다운 생이다.

  <하워드 진, 세상을 어떻게 통찰할 것인가>는 ‘청년’ 하워드 진을 다시 만나게 해준다. 역사와 정치의 대화라는 원제에 충실한 이 책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환상을 걷어준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이승만으로부터 촉발된 미국과 한국과의 관계는 미국과 다른 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정학적 요충지, 이념 대립의 최전선에서 상호 이익을 위해 관계가 형성되었지만 언제나 우리는 그들에게 환상과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미국이 없는 한국을 생각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래된 동맹국과 정치적 역학 관계 속에서 미국의 역할과 외교관계가 불필요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미국과 한국이 어떤 관계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보다 깊은 관심과 비판적 관점에서 출발할 수 있다.

  인터뷰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데이비드 바사미언의 적절하고 충실한 질문의 내용과 하워드 진 특유의 날카롭고 분석적인 이야기가 어우러져 있다. 그의 생각을 잘 이끌어내고 정리하며 적절한 질문을 던지는 인터뷰어를 칭찬할 만하다. 인터뷰이가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충분이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터뷰어의 능력에 달려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두 사람의 대화를 흥미롭게 따라갈 수 있다. 과연 세상을 통찰한다는 표현이 가능할 만큼 미국은 대단한 나라가 되었다. 세상을 이해하려면 미국을 알아야 한다.

  구 소련의 붕괴로 현실 사회주의가 사라지면서 힘의 균형이 깨지고 미국의 패권주의가 독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찰국가를 자임하는 미국은 세계의 깡패 국가가 된지 오래다. 겉으로 내세우는 명분과 그들의 논리는 모순되며 거짓과 위선은 만천하에 폭로되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감추고 버티기를 계속하고 있다. 부시의 임기가 끝난다고 해서 새로운 세상이 열릴까?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규정했던 이명박 정부의 지난 5개월을 돌아보라. 끔찍하기만 하다. 아직도 4년 7개월이 남았다.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게 되어 있다는 김규항의 말이 이제는 저주로 들린다.

  대량 살상 무기로 이라크를 침략한 미국과 자원 전쟁의 더러운 내막을 알고도 모른채 최대 인원을 파병한 대한민국 정부는 영혼의 샴 쌍둥이에 불과하다. 이 책을 통해 미국의 추악한 뒷모습을 엿보는 게 아니라 우리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아 못내 씁쓸하다. 자본주의 위기는 구조적인 위기라는 자명한 이야기로 이 책의 인터뷰는 시작된다. 지배계급의 논리가 어떤 것인지, 전쟁에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문화예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역할은 무엇인지, 왜 비판적 사고와 의심하는 능력을 키워야 하는지 하워드 진은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

스터즈 터클은 미국인이 국가적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고 말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역사를 잊는다는 거지요. - P. 32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에 대한 충고를 잊지 않는 하워드 진은 역사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지나온 인류의 발자취 속에서 아무것도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망각은 미래를 위한 시금석이며 디딤돌이다. 그래도 저자는 여전히 세상에 대한 믿음과 평화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고 있다. ‘국경없는 세계’는 그렇게 하워드 진의 꿈이 되었다.

선생님은 아주 소박한 이유 때문에 역사를 공부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다.” 그 목표를 얼마나 성취했다고 생각하십니까? - P. 248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이 책을 통해 드러난다. 한 사람에 의해 세상이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하워드 진은 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힘을 믿고 있다. 역사는 그렇게 이어져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나아갈 것을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생애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에게는 믿음직스럽고 존경할 만한, 행동하는 지성인으로 불리워질 만한 사람이 누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지적 활동을 중단하신 리영희 선생님은 안녕하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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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의 눈
금태섭 지음 / 궁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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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은 착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법이란 착한 사람에게는 필요 없다는 전제가 되는데 과연 그럴까?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일정한 규칙이 없이 생활하는 게 가능할까?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인간 본성에 관한 철학자들의 일갈에 대해 살펴 볼 필요도 없이 세상은 지옥이 될 것이다. 성선설을 믿든 성악설을 믿든 백지설을 믿든 모든 인간은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욕망’이라는 것이 선천적이든 학습에 의한 후천적인 것이든 그 접점에서 갈등은 시작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 디케Dike는 눈을 가리고 있다. 왼손에는 천칭을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은 상징적이다. 불편부당한 법의 원칙을 강조하는 엄숙한 손짓은 믿음직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그 천칭이 균형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던 ‘無錢有罪 有錢無罪’의 원리는 디케의 칼보다 무서운 원칙으로 작용한다.

  돈과 권력의 유무와 상관없이 동일한 법 적용이 이루어지는 사회가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과 그 대상이 되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쉽게 답하지 못하 것이다. 현실과 이상은 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세상을 이끌어 온 것인지도 모른다. 법은 법대로 현실은 현실대로 움직여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법적용의 원칙과 취지는 이상적이지만 현실에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법에 기대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억울함과 부당함을 호소하는 많은 사람들과 그렇지 않다고 외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법은 언제나 진실을 밝혀주는 등불이 되어 주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아마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쉽게 타협하지 않으려 하지만 냉정한 현실과 마주할 때면 흔들리고 또 흔들린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법을 가장 큰 권력이라고 생각한다. 법을 집행하고 법을 다루는 사람이 되려는 노력은 부와 권력을 거머쥐는 것과 동일시한다. 그 행위의 숭고함과 냉정함에 대해 고려해 볼 여지도 없이 현실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한겨레 신문에 ‘현직 검사가 말하는 수사 제대로 받는 법'(2006. 9. 11)이라는 기고문으로 화제가 되었던 금태섭 변호사의 <디케의 눈>은 법에 대한 고민들이 담담하게 서술되어 있다. 피의자가 됐을 때 행동지침을 서울중앙지검 검사 신분으로 일간지에 실었으니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지금은 변호사가 되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오히려 그 때의 시선과 용기가 훨씬 숭고하게 느껴진다.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해, 그 집단의 이익에 반하는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다. 내부 고발자는 아니더라도 용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 책은 영화 ‘라쇼몽’으로 출발한다. 개인적으로도 자주 인용하는 영화라서 일단 반가웠다. 디케의 눈을 속이기 위한 사람들의 치열한 거짓말 혹은 스스로 사실이라고 믿는 것들에 대한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법의 존재 의의는 바로 그 지점에서 탄생한다. 검사보로 일하던 시절의 사건을 통해 혹은 유전자 감식의 발달로 인해 진화해 왔다고 하지만 법의 심판은 지금도 여전히 진실의 발끝만 매만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진실을 찾는 것은 맨손으로 물을 움켜쥐려는 것처럼 어렵고 때로는 불가능하기까지 하다.”는 저자의 말은 순결한 고백처럼 느껴진다. 법으로 진실을 규명할 수 없다는 비관론이 아니라 법을 집행하고 혹은 법의 심판을 받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진지한 외침이다. 정의正義를 무엇이라고 정의定議할 수 있을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LA폭동이나 두순자 사건, 패리스 힐튼 사건은 흥미 있게 법과 현실 사이의 고민을 읽어낼 수 있게 한다. 특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미란다 경고의 유래를 통해 과연 우리 사회의 법이 지향해야 할 곳은 어디인가 고민해 볼 만하다.

  미국와 우리는 역사와 문화가 다르다. 하지만 가끔 그들에게 배워야 할 혹은 부러운 구석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메리칸 드림도 맹목적인 반미도 우리에겐 필요없다. 냉정하게 판단하고 합리적으로 현실의 문제를 고쳐 나갈 만한 이해와 용기가 필요하다. 1년에 88건의 사건을 맡는 미국의 대법원과 그보다 200배가 넘는 사건을 판결해야 하는 우리의 현실을 비교하는 것도 현실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고민의 한 자락을 펼쳐 놓는다.

  저자의 ‘법으로 세상읽기’는 실제 생활과 관련된 사건이나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법과 연결시켜 일반들도 ‘리걸 마인드 legal mind'가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한다. 안다. 누구나 그것이 필요한 줄을 안다. 하지만 현실에서 누가 얼마나 법의 원칙을 따져가며 살며 많은 관심이 있는가. 억울하고 고통스런 순간에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하는 것이 법이기도 하고 자신의 억울함과 분노를 해결해 줄 대상으로 법을 찾기도 한다. 우리가 법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은 그것이 언제라도 힘없고 돈 없는 사람들의 편이라는 사실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세상에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국경없는 의사회’만 있는 것이 아니듯이. 금태섭 변호사의 <디케의 눈>은 사람들의 눈을 밝혀 주길 바라지만 폭넓은 시야와 실용적인 상식을 제공하기 보다는 ‘법’ 자체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담겨 있는 책이다. 저자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법을 통해 세상과 사람을 읽어가고 있는 변호사의 진솔한 이야기로 읽힌다.

  즐거움과 정보를 함께 전해주며 고민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면 기꺼이 금태섭의 다음 책도 사 줄 용의가 있다. 완결된 구조를 지닌 잘 짜여진 책은 아니지만 현실에서 마주치는 문제들에 대해 혹은 유사한 상황들에 대해 한번 쯤 돌아볼 수 있는 좋은 성찰의 기회가 되었다. 인권은 멀고 자본과 권력은 가깝다. 우리 사회가 조금 성숙했다고 느낄 수 있는 판결과 합의들이 계속 이루어지길 바랄 수밖에. 그래도 나는 법과 저만치 멀리 떨어져 살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을 해 본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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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 지식인, 그들은 어디에 서 있나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엮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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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날의 기억은 영등포 여고 교지에 수필 형식의 글로 실렸으며 어딘가 책장 구석에 그 교지가 한 권쯤 남아 있을 것이다. 1987년 서울역 앞에서 전경 버스가 불타오르던 순간 나는 시내버스 안에서 멍하게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신문 1면에 실렸던 그 장면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시위에 참가했던 건 아니었고 글자 그대로 ‘세상 구경’을 위해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탔던 것이다. 말하자면 세상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노선이 길었던 그 버스는 혜화동을 출발해서 마포대교를 건넜다. 한강 둔치에서 평화롭게 테니스를 치는 사람들, 강변을 거닐던 사람들이 생각난 건 이글이글 타오르던 버스의 불꽃 속에서였다. 사회적 의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궁금증과 호기심에 가까웠다고 기억한다. 대학 신입생이었던 선배들이 가끔 들러 토요일 오후에 <철학의 기초이론>과 <철학에세이>를 던져 주고 돌아갔다. 하얀 한복을 입고 길가에 앉아 시위대를 향해 손수건을 흔들던 할머니 빌딩 창문마다 매달려 함께 소리치던 넥타이 부대, 길거리를 가득 메우고 구호를 외치던 사람들 - 내게 1987년은 사진처럼 선명하게, 혹은 단편적인 흑백사진으로 남아 있다.

  수업 시간에 ‘노동의 새벽’을 읽어주셨던 선생님이 계셨고, 황지우와 김정환, 신경림, 김지하, 조태일의 시집을 뒤적이던 시절이었다. 뭐가 뭔지 세상은 뒤죽박죽이었고 첫사랑은 아득했으며 아무도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 풀리지 않는 수학문제처럼 혼자 끙끙거리던 시절이 1987년이었다. 친구 녀석과 처음 음악다방엘 갔던 것도 아마 1987년이었지 싶다.

  그리고 20년이 흘렀다. 2007년에 후마니타스에서 출판된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은 단순한 책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개인적인 감회를 더해 우리 사회가 걸어온 길에 대한 분명한 뒤돌아보기 작업이다. 이 책은 경향신문사 특별취재팀이 이룬 값진 성과이며, 21세를 향한 디딤돌이며, 지금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기 위한 거울이다. 누구에게나 권할 만한 책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읽지 않았다면 두고두고 후회했을 책이다.

  한겨레만 쳐다보며 이렇게 훌륭한 기획과 이슈를 모르고 지나쳤을 아둔함에 발등을 찍는다. 참 아는 게 없고 단순하며 정보에 어둡고 뭐든 잘 까먹는 개인적인 버릇들이 때때로 원망스럽다. 그래도 이 책을 만나 며칠 동안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내용은 결코 행복하지 않지만 독자로 만난 이 책은 올 해 만난 책 중에 가장 값진 책 중의 하나가 될 듯하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말이 떠오릅니다. ‘세계를 개선시키려는 그대의 눈빛이 날 근심케 한다.’ 사회를 뜯어고치려는 그 열정이 우리를 불안케 하는 거죠. - P. 37페이지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고병권의 말은 역설적으로 이명박을 떠올리게 한다. 현실은 늘 비관적이었는지 모른다. 고병권의 말대로 만하임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방황하지만 객관적 인식이 가능한 ‘자유 부동하는 지식인’, 그람시의 전체를 바라보는 계급의 눈으로서 ‘유기적 지식인’, 사르트르의 통치 계급 이해에 복무하면서 지배계급의 유기적 지식인으로서의 ‘기능적인 지식인’으로 보는 것이 전통적인 지식인에 대한 정의였다. 하지만 이런 전통적인 의미에서 지식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

  지식인들의 현실 인식은 많은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진다. 우리 사회가 절차적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이전에는 더욱 그러했다. 시대가 변했고 지식이 대중화 되면서 지식인의 역할과 위상도 달라졌다. 이영희 선생님과 같은 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만들어질 수 있는 사회적 상황도 아니지만 그것을 단지 시대의 변화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그렇다고 지식인이 특정한 역할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고 볼 수도 없다.

  어쨌든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지식인은 이 책의 49페이지에 정리된 ‘2007년 한국 지식인 이념 분포도’를 참고하면 된다. 매스미디어나 책을 통해 자주 접했던 낯익은 얼굴과 이름들이 이념 성향에 따라 분포되어 있어 공간적인 개념으로 시각화 되어 있다. 다소 낯설지만 잘 정리되어 있다. 은퇴했거나 작고한 사람이 제외되어 있고 나름의 한계가 있겠지만 일목요연하게 일괄할 수 있어 많은 도움이 된다.

  한국 지식인의 풍경과 오늘날의 상황을 살펴보고 지식인의 위기에 대해 살펴본 후 정치, 경제, 문화 권력과 지식인의 관계를 점검하고, 시민운동과 정책지식과 지식인의 관계를 정리했다. 지식인 생산 공장이 되어 버린 미국과 학술진흥재단을 검토했으며 마지막으로 대중지성을 살펴보는 것으로 책을 마무리했다. ‘지식인의 죽음’을 넘어라는 좌담은 결론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이 책은 ‘지식인’을 주제로 현재 우리 사회에서 ‘지식인’이 탄생하는 과정의 문제점과 그들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어떤 식으로 다양한 권력 관계를 형성하는지 혹은 그 지식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으며 대중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꼼꼼이 따져보고 있다. 이것을 또 다시 몇몇 지식인에게 분석을 의뢰하는 아이러니는 어쩔 수 없는 한계(?) 볼 수 있다.

  취재과정에서 부딪히고 고민했을 내용들이 고스란히 책에 드러난다. 그것을 읽어나가는 입장에서 얼마나 잘 소화하는지는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진다. 이 책에서도 소개되지만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나 <전환시대의 논리> 등 한 권의 책이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시대가 변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논리가 달라졌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시대정신’은 민주주의나 민중해방이 아니라 경쟁과 자본일지도 모르겠다. 지식인의 역할과 위상도 당연히 변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기댈만한 혹은 믿을 만한 지식인이 존재하지 않을까? 아무리 자유로운 소통과 대중지성의 시대와 왔다고 할지라도 ‘지식인’으로 불릴 만한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그들의 역할과 임무는 쉽게 말해질 수 없다. 그것은 우리들의 요구가 그들의 몫이다. 대중과 지식인은 이제 서로 믿을 수 없는 관계를 이루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구나 대중이며 누구나 지식인이 될 수 있는 시대를 점검하기 위해 이 책은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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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from 행복을 찾아서... 2009-05-19 14:34 
    저는 경향신문을 좋아합니다. 경향신문의 기사를 쓰는 시선이라고 해야하나, 독특한 관점이 있는데, 이걸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서점에서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이라는 글귀만 보고 냉큼 사서 보게 된 책이 바로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입니다. 지식인의 죽음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후마니타스, 2008년) 상세보기 300페이지도 채 되지 않는 책이라, 금방 읽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습니다. 책에..
 
 
 
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다 - 우리 시대와 나눈 삶, 노동, 희망
하종강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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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고대 멸종 언어처럼 기억이 가물거리는 영어 문장 하나가 떠오른 것은 왜일까? 오래전 어느 영문법 책에서 보았겠지만 경험으로 체득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글을 쓴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의 의사소통 과정이며 내밀한 고백의 시간이다. 작가의 고백을 듣고 독자는 자신의 경험과 더하여 또 따른 의미망을 직조해 낸다. 책은 그렇게 큰 울림으로 독자에게 다가갈 때 전체로 완성된다.

  ‘책은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다’라고 말한다면 그 또한 모순이다. 언어 기호의 분석이 가능한 일차적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 일이 책읽기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단 읽는다는 행위 속에 전제된 능력과 기능들을 논하지 않는다면 책의 내용은 책의 전부일 것이다. 책을 읽고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생각이 달라지고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개인적인 영역에 속한다. 적어도 내게는 그러하다.

  한 권의 책을 통해 내가 변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렇게 조금씩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책읽기는 고통스런 시간 때우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현실과 동떨어진 책상물림들의 한가한 소일거리로 비춰질 수 있는 행위 속에 현실의 최전선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접하게 되면 독자들은 당황하게 된다. 저널리즘의 의무와 역할은 이 중간쯤에 위치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하종강의 글이 내게 주는 충격파는 만만치가 않다. <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다>는 쉽게 감동하지만 절대로 눈물 흘리지 않는 내 눈을 적신 몇 안되는 책 중의 하나이다. 하종강의 책이 처음은 아니다. 한겨레에서 매년 봄 특강을 진행하지만 매년 책으로만 만나고 있다. <7인 7색 21세기를 바꾸는 교양>, <21세기에는 지켜야 할 자존심> 등의 책과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이라는 책을 통해서 만난 하종강의 모습이 이 책을 통해 갑자기 달라진 건 아니다.

  하지만 이제 그의 몸도 나이가 들어가고 있고 시간의 흔적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 먼 미래의 소멸에 대해 이야기한다. 건강이 악화되어 쉬는 동안 준비했다는 이 책의 내용은 그가 살아온 흔적들이다. 쌓여온 세월들이고 이 땅의 노동 현실에 대한 침착한 보고서이며 21세기 우리 사회를 돌아보는 자화상이다. 그래서 숙연해지고 마음 아프며 책장을 넘기다 문득문득 하늘을 보게 된다. 고인 눈물 흐르지 않기 위해서.

  감상적이고 문학적인 글이 아닌 철저하게 생활과 현실에 기초한 책의 내용이 전하는 감동은 특별하다. 그것은 하종강이 살아왔고 겪어왔던 이 땅의 노동자들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아직도 ‘노동자’라는 말조차  꺼리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의식이다. 자신이 노동자이면서도 그 용어를 싫어하고 미래에 노동자가 될 예정이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우리 사회가 정상은 아니다. 중고등학교에서부터 철저하게 노동 기본권을 배워 익히고 의무적으로 노동법을 가르치는 유럽의 선진국들의 예를 들 필요도 없이 우리 사회의 노사 관계에 대한 인식은 왜곡되어 있고 모순에 가득하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대통령이 당당하게 당선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기업하기 나쁜 나라였다는 말인데 그 말은 사용자의 편이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이나 정책들이 노동자의 편이었다는 말인가? 지나가던 견공이 웃을 일이다. 20여 년간 노동자들에게 상담과 강연을 해주며 그들의 함께 울고 웃었던 하종강의 글들은 머리도 가슴도 아닌 발이 썼다. 발로 쓴 책의 감동은 발로 시작되었지만 뜨거운 가슴을 거쳐 차가운 머리에까지 도달한다. 분노와 아픔을 넘어 변혁과 실천의 문제까지 고민하게 만든다.

  단순한 생활인의 주변 이야기가 아니라 대표적 개인으로 볼 수 있는 노동자들의 면면이 가슴 아프게 눈에 밟힌다. 차라리 이 책이 소설이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먼 미래에 이런 시절도 있었노라고 추억할 수 있는 순간이 올 거라는 믿음이 없다면 하종강은 그 긴 세월동안 ‘희망’을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희망을 버릴 때는 아닌 것 같다. 서로 손잡고 함께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지 않는 학교와 더 높은 곳을 향해서 앞만 보며 달려가는 사람들로 가득한 현실에서 하종강이나 그가 만난 사람들은 패배자이며 낙오자라고 볼 수 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현실을 견뎌내는 유일한 힘이 ‘희망’인 사람들에게 모욕이다.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과 대책을 세워나가자는 원론적인 감상이 아니라 먼저 생각을 바꿔야 한다. 그들이 누구인지 그들은 저 멀리 있는 ‘노동자’들인지 아니면 우리들 모두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의 문제이며 내 가족의 문제이고 우리들 모두의 현실이라는 사실을 똑바로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나눈 대화의 기록과도 같은 하종강의 이야기는 삶과 노동 그리고 희망에 대해 따뜻한 시선으로 말을 건네고 있다. 당신은 행복하냐고. ‘부채감’ 때문에 평생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하종강의 말이 과장은 아닐 거라고 믿는다. 우리는 하종강에 대한 부채감 때문이라도 그가 말하는 희망에 대해 한 번쯤 고민해 보아야 한다.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우리의 생각이 먼저 변해야 한다. 생각이 변하면 행동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면 세상이 바뀐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은 작은 행동과 실천이 하종강이 말하는 희망은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08040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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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 지구를 뒤덮다 -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
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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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럼slum의 어원은 slumber선잠이다. 피곤하고 고통스런 삶을 이어가는 빈민층에게는 숙면조차 사치일지 모른다. 편안하고 안락한 잠자리는 거주 조건을 단적으로 말해줄 수 있지만 그것조차 영위하지 못하는 빈민층이 사는 곳을 슬럼이라고 하는 지도 모르겠다. 또한 슬럼은 도시와 별개의 개념으로 생각할 수 없다. 인간 문명의 눈부신 결과물인 도시의 거주형태는 슬럼이라는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있게 마련이다.

  왜 인간은 한 곳에 모여 살아야 하는 것인가는 우매한 질문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서로 협력하지 않고 군집 생활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다만 얼마만한 거리에서 어떤 거주 형태로 모여 살아야 하는 문제는 그 답이 쉽지 않다. 도시의 발달은 통치 목적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노동 집약적인 산업 혁명의 이후 급속하게 확산되기에 이른다. 효율성을 우선으로 하는 공장식 기계 산업은 보다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보다 많은 노동 시간이 필요했다.

  농업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그리고 정보화 사회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도시는 필연적으로 확대되었지만 70년대 이후 벌어지는 도시의 집중 현상은 새로운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거대도시의 필요성에 따라 계획적으로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물결에 밀려 황폐화된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드는 가난한 사람들이 슬럼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마이크 데이비스의 <슬럼, 지구를 뒤덮다>는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도시의 갱년기가 만들어내는 자연스런 슬럼현상은 일부 서구 유럽의 선진국에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멕시코와 인도를 비롯한 후발 개도국이나 아프리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 도시화와 급작스런 슬럼의 형성은 참혹하기만 하다.

  슬럼은 다음 몇 가지 유형을 지닌다. 도심이 빈곤해지거나 해적형 도시화가 이루어지거나 눈에 띄지 않는 셋방살이 형태이거나 변두리의 밑바닥을 이루거나. 이들 슬럼 주민은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먼저 스쿼터, 즉 남의 땅에 들어와 집을 짓고 사는 주민이 있고 두 번째로 해적형 분양지의 피분양자, 세 번째로 세입자, 네 번째로 강제퇴거 주민, 농촌 유민, 국내외 난민들이다.

  이 책은 전지구적으로 벌어지는 슬럼 현상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이며 우려할 만한 미래에 대한 묵시록이다. 국가별로 슬럼의 유형과 원인 슬럼의 주거 조건들을 살펴보고 있는 부분에서는 할말을 잃는다. 6장 슬럼의 생태학에서 이런 생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재난과의 동거, 죽음과 질병을 부르는 도시, 똥통생활, 유아살해범에 관한 상세한 내용들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조금만 눈을 들고 멀리 내다보면 내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행성은 모순과 재앙으로 가득하다. 저자는 물론 이런 현상들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과 대책을 촉구하기 위해 이 책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독자들에게는 우울한 우리들의 자화상을 확인하는 것에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강제 철거에 대한 세계사적 기록은 한국이 보유하고 있다. 1988년 올림픽을 개최하기 위해 서울과 인천에 살고 있는 빈민 72만을 강제 이주시킨 기록은 영원히 기록될만한 충격적인 사례로 이 책에 소개되고 있다. 어느 나라보다도 철저하게 개인의 사유 재산에 대한 공적 제재가 빈번하고 강력한 나라 대한민국은 토지 수용과 강제 철거에 관한한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는 것이다. 책을 읽다가 소개되는 대한민국의 사례들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도심 재개발이나 신도시 개발로 인한 강제 철거는 21세기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슬럼 화재 사건을 다룬 대목에 이르면 독자들의 충격은 극에 달할 것이다. 일찍 죽어버리는 개는 쓰지 않고 쥐나 고양이에게 불을 붙혀 화재를 일으키는 방법을 사용하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1990년대 이후 급속도로 진행되는 농촌의 파괴는 도시의 슬럼을 가속화고 있으며 도시 주변의 슬럼은 또 다른 형태로 자본의 이익에 복무하고 있다. 상하수도 문제, 인구과밀, 전기 등 공공설비의 부재 -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재앙은 계속되고 있으며 미래는 불투명하다.

  제 3 세계 도시들의 초호화 주택 단지들은 슬럼과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으며 빈민들의 세금이 부유층의 공간과 설비에 투자되고 있는 현실을 폭로하고 있다. 금융 제국주의와 부패 권력, 중간계급의 헤게모니가 빚어내는 빈곤과 억압의 슬럼화는 지구의 미래를 보여주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러한 최근의 지구 상황을 비교적 차분하고 객관적인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다. 그래서 더욱 섬뜩한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슬럼은 우리와 동떨어진 다른 나라의 특별한 상황일까? 빈부 격차의 심화, 비정규직의 확대, 고용 없는 성장, 한국형 재벌의 성장, 순환 출자 구조를 통한 비정상적인 지배구조, 계급을 고착화시키는 교육기회의 대물림, 청년실업률 급증, 사회 복지 비용의 감소 등 최근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몇 가지만 떠올려 보아도 우리는 안전지대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저자의 의도가 미래에 대한 부정적 전망이나 위협이 아니라 암울한 현실에 대한 반성과 대책 마련에 있는 것이라면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어떤 측면을 다시 돌이켜 보아야 하고 현실의 어떤 부분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고민의 방향을 제시해 준다.

  서로 다른 관점에서 뜨거운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이 책의 의미는 책을 읽어나가면서 현실과의 접점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 도시 행정, 경제 개발, 정책 결정 등 다양한 분야의 관련자들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 모두의 문제라는 인식이 우선 필요하다. 무서운 미래, 암울한 세계는 바로 지금 우리들의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다가온다. 나는 지금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가? 먼 우주에서 바라보는 나의 삶과 나를 둘러싼 세계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 이 책은 그것에 대한 아주 작은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어 우울하다.


080323-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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