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뒤흔든 공산당 선언 세계를 뒤흔든 선언 1
데이비드 보일 지음, 유강은 옮김 / 그린비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스물아홉 살의 청년 맑스와 스물일곱 살의 청년 엥겔스는 1848년 <공산당 선언>(이하 <선언>)을 발표한다. 혁명의 해를 기억하기 위해 나는 ‘이판사판’으로 그 해를 기억했었다. 150여전에 발표된 선언의 혁명 정신과 계급 의식은 여전히 이 시대에도 유효하며 미래에도 변하지 않는 의미를 간직할 것이라고 믿는다. 세계 곳곳에서는 아직도, 공장체제로 인한 인간 소외는 <선언>이 제기한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이며, 21세기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지금까지의 철학자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는 맑스의 말은 <선언>의 기초가 된다. 역사 발전 과정 속에서 문제는 늘 행동과 실천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침묵하는 대중에게는 언제나 행동하는 혁명가가 필요하다. 인간의 삶과 사회의 불안정을 경제적 불평등과 자본의 소수 집중의 문제로 보았던 맑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만이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제까지 사회의 모든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라고 <선언>을 시작했으며,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고 <선언>을 끝맺고 있는 것이다.

  맑스의 장례식에서 엥겔스는 “다윈이 유기체의 발전 법칙을 발견한 것처럼, 맑스는 인간 역사의 발전 법칙을 발견했다”고 그의 삶을 요약한 것처럼 인류의 삶에 결정적 <선언>을 했던 것이다. 그것은 1917년 혁명가 레닌에 의해 러시아에서 현실로 나타났고 뒤이어 마오에 의해 중국에서도 성공을 거두었으며 동구 유럽에서 도미노 현상처럼 실현되었다. 쿠바의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를 우리는 마지막 공산주의 혁명가로 기억한다. 선언의 현실은 스탈린과 같은 전체주의와 1인 독재에 의해 왜곡되기도 하고 이전의 상황보도 훨씬 더 지독한 고통을 인류에게 안겨 주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두 번째 세계 혁명의 해였던 1968년의 실패 뒤로 맑스주의는 대학으로 들어가 버렸고, 이제는 학문의 영역으로 남겨져 버린 느낌이다.

  부르주아지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둘 다 피할 수 없는 길이라는 확신 속에서 <선언>은 작성 되었으며,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적 지배권을 이용하여 부르주아지로부터 모든 자본을 차례로 빼앗을 것이다. 그리고 생산도구를 국가의 수중에,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시키며 가능한 한 신속히 생산력을 증대시킬 것이다.”라는 핵심 실천 강령을 통해 노동자 계급에게 <선언> 되었다. 원문에 나타나는 당시의 노동 계급에 대한 맑스의 견해는 분명했고, <선언>의 대중성과 선동성은 지금까지의 어떤 다른 선언과도 비교할 수 없다. 물론 이십대의 청년 맑스의 상징성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평생을 이 선언에 대한 이론적 작업에 몰두한 것이 <자본Das Kapita>이다. 박제가 되어버린 혁명과 선언이라고 하기엔 그가 인류에게 미친 영향이 너무 크다. 현재에도 미래에도 불평등한 사회구조가 유지 되는한 그의 선언은 언제나 유효하다고 믿는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의 견해를 감추는 일을 경멸한다”고 원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맑스는 혁명을 역사 발전의 필연 법칙으로 인식했다. 그렇기 때문에 당당하게 견해를 밝히고 “현존하는 사회 ․ 정치 질서에 반대하는 모든 혁명운동을 지지”한다고 밝힌 것이다.

  선언 당시 혁명은 좌절되었으나 맑스와 그의 영원한 동반자 엥겔스는 한번도 역사 발전의 필연적 법칙을 의심하지 않은 듯하다. 그것은 두 사람의 관계를 유지시켜주고 신념을 지켜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이후 지구 곳곳에서 벌어진 혁명의 현장을 바라보며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러나 <선언>은 혁명으로 가는 길만을 보여줄 뿐, 혁명 이후의 정치나 사회의 모습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있다. 그래서 위험하고 선동적인 인식되었는지도 모른다.

  세계를 뒤흔든 <선언>은 당대의 ‘시대정신’을 가장 선명하게, 그리고 가장 급진적으로 드러낸 문서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선언> 자체에 대한 평가보다도 나는 개인적으로 인류의 미래를 위해 맑스가 제시한 꿈을 더 좋아한다. 그가 말한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가 진정한 유토피아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사회제도나 경제 체제의 변화는 그가 살았던 당시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맑스가 다시 살아나 오늘의 세계를 돌아본다면 괴로운 신음 소리를 낼지도 모른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물결 속에 고통받고 눈물 흘리는 불평등한 노동자 계급과 심지어 어린이들까지 노동 현장에 투입되는 제 3세계의 현실을 맑스는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계급 투쟁’의 역사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선언할까 <선언>의 원문 마지막에서 맑스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잃을 것이라곤 족쇄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쳤다. 극한 대립을 조장하는 선전선동의 구호가 아니라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울분에 호소한 말이다. 인류가 역사 발전을 끊임없이 지속하고 있다면, 맑스의 <선언>이 더 이상 과거의 추억(?)이 될 수 있다면 인류에게 진정한 평화와 행복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하는 헛된 상상을 하며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아니 어쩌면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지도 모르는 불평등한 현실을 들여다본다.

  해제를 쓴 고병권의 마지막 평가로 이 책의 의미를 대신한다.

  나는 선언을 세 가지 이름으로 부른다. 그것은 위험한 책이자, 생산하는 책이며, 미래의 책이다. 그것은 위험한 복음이자, 혁명-기계이며, 영원회귀하는 유령이다. 하지만 누군가 하나의 이름으로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것은 ‘위대한 책’이다.



2005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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