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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행복 권하는 사회 - 심리학은 어떻게 행복을 왜곡하는가
김태형 지음 / 갈매나무 / 2021년 3월
평점 :
인간은 행복이나 불행이 아니라 ‘불안’ 혹은 ‘권태’로 무너진다. 근대의 발명품인 낭만적 사랑만큼 개념과 범위가 모호한 ‘행복’은 거대한 산업으로 자리잡았다. 생존과 번식을 넘어 사람답게 살며 행복을 누리는 인류의 삶은 어디까지 왔을까. 비교 지옥을 유도하는 특급 도우미 SNS와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으로 우리는 조금 더 행복해졌을까. 자유에 따른 세금처럼 당연한 불안, 물질적 풍요로움과 성취 이후에 찾아오는 권태가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한다는 분석에 동의할 수 있을까.
김태형은 ‘가짜’ 감별사로 나선다. 가짜 사랑, 가짜 행복은 무엇이며 진짜 사랑, 진짜 행복은 또 어떠해야 할까.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주장과 선명한 노선은 자칫 이분법적 사고로 그것을 설명하는 데 논리적 균열이 생기고 합리적 판단에 앞서 감정적 선동으로 흐리기 쉽다. 저자의 주장이 모호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조심스럽게 다양한 요소를 점검하며 독자에게 제안과 질문으로 마무리하는 글이 읽을만하다는 게 개인적인 의견이다. 그래서 김태형의 글은 다시 읽고 싶지 않다.
“돈의 만족점이 1년간 1만 5000~2만 달러라고 주장”했다는 영국의 경제학자 리차드 레이어드Richard Layard가 만족점satiation point을 설명한 「행복, 새로운 과학에서 얻는 교훈(Happiness: Lessons from a New Science)」은 2006에 출간됐다. 2005년 논문을 바탕으로 출간된 책이니 거의 20년 전 소득기준이다. 그러나 어디에도 연구 시기와 조사 시점을 밝히지 않아 2021년에 출간된 책을 읽는 독자 입장에서는 스스로 찾아 확인하지 않았다면 기만이라고 느낄만 하다.
한국인들은 행복해지고 싶으면 월 430만 원 이상은 벌지 않는 것이 좋다. - 47쪽
책 전반에 걸쳐 에필로그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월 430만 원을 행복의 척도로 제시하며 그 이상의 돈은 오히려 행복가 멀어지게 한다고 주장한다. 이 설문, 통계 자료의 출처는 2011년에 방영한 KBS 다큐멘터리 <행복해지는 법>이다. 돈과 행복의 상관관계에 대한 조사 연구는 2010년에 진행됐다. 이 다큐는 월 430만 원이 행복의 변곡점이라 했다. 이것이 ‘결별점’ 혹은 ‘만족점’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2021년 출간 도서를 읽는 독자들은 혼란스럽다. 당연하게도 저자는 조사 시기를 밝히고 현재와 비교할 수 있도록 설명해야 하는 의무가 있지 않을까. 2018년 11월, 고등학교 2학년 모의고사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다뤘다. 노벨상 수상자인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1000명의 미국 거주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통해, 돈이 인간의 행복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했다. 카너먼은 이 연구 결과를 발표하면서, 한 사람이 일 년에 7만 5천 달러를 벌면 생존에 필요한 기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고 밝혔다. 물론 미국 기준이지만 2018년(출간 3년 전) 기준으로 한화 8천 5백만 원, 월 700만 원 정도다. 상당한 액수다. 자료를 확인해보니, 2018년 기준 근로자 소득 상위 5%에 해당하는 고소득자에 해당한다. 대한민국 상위 5% 정도면 돈이 행복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아닌가.
자연과학과 달리, 인문‘과학’, 사회‘과학’으로 명명하기 위해서는 검증 가능한 이론을 확립하고 연구 방법의 객관성을 확보해야 한다. 과정과 결과에 대한 책임성을 바탕으로 신뢰할 만한 성과가 누적된다. 모든 분야의 학문적 성과는 인류의 지식으로 누적되어 문명발달의 초석이 되었다. 분트가 심리학의 아버지로 인정받는 이유는 실험심리학의 기초를 다졌기 때문이다. 동일한 상황에서의 개인 차가 심리학의 대체적인 연구 대상이다. 김태형의 주장대로 심리학이든 다른 분야든 ‘개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와 실험이 모두 ‘엉터리’일 수 있을까. 그것이 주류라는 이유로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동일한 상황에서 느끼는 스트레스, 불편함, 기쁨, 슬픔, 만족감의 개인 차는 분명하다. 기질, 성향, 경험에 따라 개인은 다양하게 반응한다. 불합리한 선택, 비이성적 판단 등 인간의 심리 변화는 다양한 학문 분야에 적용되는 등 높은 성취를 폄훼하기 어렵다. 그러나 각자도생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와 빈자라는 필연적 구도를 해결할 방법이 난망하며 그 결과에 따른 삶의 만족도, 성취, 행복을 모두 ‘개인’의 책임으로 규정하는 사회는 모두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김태형이 예로 든 덴마크(오연호,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의 사례 등은 미국의 자본주의와 분명히 구별된다. 대한민국의 현실을 살피며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사례와 벤치마킹해야 할 사례들은 이미 사회학, 경제학 분야의 다양한 고민과 제안들로 가득하다. 김태형의 주장, 그 목적과 방향에 동의한다고 해도 주류 심리학을 싸잡아 비난하거나 오로지 개인이 아닌 사회적 상황에‘만’ 초점을 맞추는 방식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우리는 모두 생존 불안과 존중 불안에 시달린다는 저자의 정확한 지적에 공감한다. 경제적 토대가 마련되지 않으면 두 불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거미줄 같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시스템안에 갇힌 우리가 서은국의 『행복의 기원』을 통해 진화심리학적 욕망을 긍정하는 건 잘못된 삶이 아니다. 학문적 관점의 비판과 싸잡아 ‘쾌락주의 행복론’이라고 비난하는 저자의 몰이해를 일일이 지적하고 싶지는 않다. 건강한 논쟁과 비판은 성장의 바탕이며 발전의 가능성을 내포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언급한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긍정의 배신』, 탁석산의 『행복 스트레스』, 대니얼 길버트의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처럼 조금 나름의 방식대로 현실을 비판하고 대안을 찾도록 고민하는 정도의 제안이었으면 어땠을까.
‘심리학은 인민의 아편’이라는 극단적 주장 대신 진짜 행복은 삶의 목적을 고민하며 인간 본성인 사랑과 자유를 찾아 자기 삶의 주인 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며 사상과 문화의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노력, 이웃과 연대하는 공동체 의식, 창조적 활동 등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를 조금 더 고민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태도가 행복한 삶, 더 좋은 삶을 위한 토대라는 정도면 어땠을까 싶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