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 인권만화 세트 - 전3권 창비 인권만화 시리즈
손문상 외 지음,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 창비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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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존재 그 자체로 존중받았던 시절은 없다.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끊임없는 투쟁 과정이라고 정의한 신채호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아주 오래된 질문과 응답이 이어지지만 사람이 주인되는 세상,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은 언제나 미래형이다. 현실은 언제나 불편부당하지 않으며 편견과 차별로 가득하다. 성별과 나이는 물론 직업과 재산에 따라 ‘사람’ 대접이 다르다. 인간답게 살 권리는 모든 인간에게 주어지는 자연의 섭리와 같다. 굳이 존 로크를 소환하고 서양 근대 역사를 뒤적일 필요도 없다. 민주주의가 정착한 국가에서 인권은 숨 쉬는 공기와 같다. 너무 자연스러워 ‘인권’이라는 용어 자체를 들먹이거나 사용하는 일이 없어져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2013년에 꿈꾸던 ‘차별 없는 세상’은 2024년에 현실이 되었을까.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으면 그 손해는 고스란히 주권자인 국민에게 돌아간다. 어떤 현실을 원하는지, 무엇을 꿈꾸는지, 미래는 어떠해야 하는지 말해주는 사람은 없다. 정답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며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2013년,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했던 인권만화가 2024년에도 낡아 보이지 않고 과거의 추억처럼 아련하지 않은 현실에 대한 독자들은 생각은 어떨까.

우리 사회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공동체의 목적지는 어디이며, 어디에 가치를 두고 살고 있는지, 더 나은 삶은 무엇이며, 이웃과 함께 사는 세상을 향해 가고 있는지, 차별과 편견과 혐오는 사라졌는지에 대한 질문들이 이 만화책들 사이사이에 숨어있다. 목적이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는 말을 실감하지 못한다면 자본주의는 언제든 사람을 괴물로 만든다. 민주주의와 태생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경제체제를 우리 사회에 적용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에 대한 고민은 계속되야 한다.

출간 20년이 넘은 시리즈의 개정판을 다시 읽는다. 노동, 계급, 여성, 이주민, 장애인, 군인권, 퀴어, 사교육, 비정규직, 장애, 외국인 노동자, 성 소수자, 사교육, 성폭력, 비정규직 등 우리 사회는 숱한 문제를 살아간다. 한 번에 해결할 수 없고, 사람들의 의식이 하루 아침에 바뀌지도 않는다. 다만, 우리 사회의 지향점, 공동체가 합의한 최소한의 가치에 대해서는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20년 동안 어떻게 변했는지 그리고 다시 우리에게 남은 미래는 어떠해야 하는지 말이다.

만화는 진입장벽이 매우 낮다. 남녀노소 가릴 일 없이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책장을 여는 순간 마음 한구석이 무겁고 불편할 수 있다. 자신의 경험이거나 내 가족과 이웃이 겪은 일들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바꾸고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각자의 생각과 행동은 어떤 노력과 변화가 필요한지 살펴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세상을 바꾸려는 희생과 숭고한 희생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사소한 생각의 차이, 타인을 위한 배려와 이웃을 향한 시선의 문제다. 무엇이 문제인지 인식조차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벽’을 만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생각하는 힘이 빠지고 실천하는 근육이 사라지면 우리 사회가 아니라, 각자의 삶이 무너진다. 우리 모두 인간이라는 단 하나의 조건만이라도 존중받는 사회를 만드는 게 불가능한 일인가. 아니, 그리 힘들고 어려운 일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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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행복 권하는 사회 - 심리학은 어떻게 행복을 왜곡하는가
김태형 지음 / 갈매나무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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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행복이나 불행이 아니라 ‘불안’ 혹은 ‘권태’로 무너진다. 근대의 발명품인 낭만적 사랑만큼 개념과 범위가 모호한 ‘행복’은 거대한 산업으로 자리잡았다. 생존과 번식을 넘어 사람답게 살며 행복을 누리는 인류의 삶은 어디까지 왔을까. 비교 지옥을 유도하는 특급 도우미 SNS와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으로 우리는 조금 더 행복해졌을까. 자유에 따른 세금처럼 당연한 불안, 물질적 풍요로움과 성취 이후에 찾아오는 권태가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한다는 분석에 동의할 수 있을까.

김태형은 ‘가짜’ 감별사로 나선다. 가짜 사랑, 가짜 행복은 무엇이며 진짜 사랑, 진짜 행복은 또 어떠해야 할까.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주장과 선명한 노선은 자칫 이분법적 사고로 그것을 설명하는 데 논리적 균열이 생기고 합리적 판단에 앞서 감정적 선동으로 흐리기 쉽다. 저자의 주장이 모호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조심스럽게 다양한 요소를 점검하며 독자에게 제안과 질문으로 마무리하는 글이 읽을만하다는 게 개인적인 의견이다. 그래서 김태형의 글은 다시 읽고 싶지 않다.

“돈의 만족점이 1년간 1만 5000~2만 달러라고 주장”했다는 영국의 경제학자 리차드 레이어드Richard Layard가 만족점satiation point을 설명한 「행복, 새로운 과학에서 얻는 교훈(Happiness: Lessons from a New Science)」은 2006에 출간됐다. 2005년 논문을 바탕으로 출간된 책이니 거의 20년 전 소득기준이다. 그러나 어디에도 연구 시기와 조사 시점을 밝히지 않아 2021년에 출간된 책을 읽는 독자 입장에서는 스스로 찾아 확인하지 않았다면 기만이라고 느낄만 하다.

한국인들은 행복해지고 싶으면 월 430만 원 이상은 벌지 않는 것이 좋다. - 47쪽

책 전반에 걸쳐 에필로그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월 430만 원을 행복의 척도로 제시하며 그 이상의 돈은 오히려 행복가 멀어지게 한다고 주장한다. 이 설문, 통계 자료의 출처는 2011년에 방영한 KBS 다큐멘터리 <행복해지는 법>이다. 돈과 행복의 상관관계에 대한 조사 연구는 2010년에 진행됐다. 이 다큐는 월 430만 원이 행복의 변곡점이라 했다. 이것이 ‘결별점’ 혹은 ‘만족점’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2021년 출간 도서를 읽는 독자들은 혼란스럽다. 당연하게도 저자는 조사 시기를 밝히고 현재와 비교할 수 있도록 설명해야 하는 의무가 있지 않을까. 2018년 11월, 고등학교 2학년 모의고사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다뤘다. 노벨상 수상자인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1000명의 미국 거주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통해, 돈이 인간의 행복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했다. 카너먼은 이 연구 결과를 발표하면서, 한 사람이 일 년에 7만 5천 달러를 벌면 생존에 필요한 기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고 밝혔다. 물론 미국 기준이지만 2018년(출간 3년 전) 기준으로 한화 8천 5백만 원, 월 700만 원 정도다. 상당한 액수다. 자료를 확인해보니, 2018년 기준 근로자 소득 상위 5%에 해당하는 고소득자에 해당한다. 대한민국 상위 5% 정도면 돈이 행복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아닌가.

자연과학과 달리, 인문‘과학’, 사회‘과학’으로 명명하기 위해서는 검증 가능한 이론을 확립하고 연구 방법의 객관성을 확보해야 한다. 과정과 결과에 대한 책임성을 바탕으로 신뢰할 만한 성과가 누적된다. 모든 분야의 학문적 성과는 인류의 지식으로 누적되어 문명발달의 초석이 되었다. 분트가 심리학의 아버지로 인정받는 이유는 실험심리학의 기초를 다졌기 때문이다. 동일한 상황에서의 개인 차가 심리학의 대체적인 연구 대상이다. 김태형의 주장대로 심리학이든 다른 분야든 ‘개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와 실험이 모두 ‘엉터리’일 수 있을까. 그것이 주류라는 이유로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동일한 상황에서 느끼는 스트레스, 불편함, 기쁨, 슬픔, 만족감의 개인 차는 분명하다. 기질, 성향, 경험에 따라 개인은 다양하게 반응한다. 불합리한 선택, 비이성적 판단 등 인간의 심리 변화는 다양한 학문 분야에 적용되는 등 높은 성취를 폄훼하기 어렵다. 그러나 각자도생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와 빈자라는 필연적 구도를 해결할 방법이 난망하며 그 결과에 따른 삶의 만족도, 성취, 행복을 모두 ‘개인’의 책임으로 규정하는 사회는 모두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김태형이 예로 든 덴마크(오연호,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의 사례 등은 미국의 자본주의와 분명히 구별된다. 대한민국의 현실을 살피며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사례와 벤치마킹해야 할 사례들은 이미 사회학, 경제학 분야의 다양한 고민과 제안들로 가득하다. 김태형의 주장, 그 목적과 방향에 동의한다고 해도 주류 심리학을 싸잡아 비난하거나 오로지 개인이 아닌 사회적 상황에‘만’ 초점을 맞추는 방식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우리는 모두 생존 불안과 존중 불안에 시달린다는 저자의 정확한 지적에 공감한다. 경제적 토대가 마련되지 않으면 두 불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거미줄 같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시스템안에 갇힌 우리가 서은국의 『행복의 기원』을 통해 진화심리학적 욕망을 긍정하는 건 잘못된 삶이 아니다. 학문적 관점의 비판과 싸잡아 ‘쾌락주의 행복론’이라고 비난하는 저자의 몰이해를 일일이 지적하고 싶지는 않다. 건강한 논쟁과 비판은 성장의 바탕이며 발전의 가능성을 내포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언급한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긍정의 배신』, 탁석산의 『행복 스트레스』, 대니얼 길버트의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처럼 조금 나름의 방식대로 현실을 비판하고 대안을 찾도록 고민하는 정도의 제안이었으면 어땠을까.

‘심리학은 인민의 아편’이라는 극단적 주장 대신 진짜 행복은 삶의 목적을 고민하며 인간 본성인 사랑과 자유를 찾아 자기 삶의 주인 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며 사상과 문화의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노력, 이웃과 연대하는 공동체 의식, 창조적 활동 등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를 조금 더 고민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태도가 행복한 삶, 더 좋은 삶을 위한 토대라는 정도면 어땠을까 싶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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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법 - 생존을 위한 두 가지 요건에 관한 이야기
장혜영 지음 / 궁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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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은 법과 질서를 바로 세우고 국민의 안녕과 인권을 지키는 최고의 법집행기관이자 인권보호기관”이라는 검찰청 홈페이지의 소개글이 현실에 부합하는가. “검사는 국민에 대한 봉사자이며 공익의 대표자로서 범죄를 수사하고 공소를 제기하여 피고인에게 그의 범죄행위에 합당한 형이 선고되도록 합니다.”라는 검사의 업무는 어떤가. 국민이 합의한 국가공권력을 위임받은 기관들의 역할과 의무는 이상에 불과한가. 수임료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변호사의 직업윤리는 논외다. 법조인들이 가진 도덕적 의무와 역할을 기대하기 어려운 시대는 불행하다.

17년 넘게 검사로 일하다 변호사로 변신한 장혜영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지 않다. 글쓴이 개인에 대한 관점과 태도는 매우 중요하지만 직업인으로서, 생활인으로서 개인은 영화에서 배역에 충실한 배우의 사생활을 들추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변호사 홍보용, 정치권에 줄을 대기용, 직업상 취득한 범죄 사례와 피해 사례를 각색한 책들과 거리가 먼 법조인의 글을 만나기 힘들다는 점에서 장혜영의 『사랑과 법』은 짧지만 결코 가볍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대체로 검사 시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나 개별 사건과 사례를 중심으로 자기 경험에 지나치게 몰입한 직업인의 애환과 다른 측면이 눈에 띤다. 그것은 인간과 세상을 ‘사랑’과 ‘법’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카테고리로 엮는 관점 때문이다. 어떤 직업을 갖고 세상을 살아가든 결국 삶을 대하는 태도와 방법이 한 인간의 깊이와 넓이를 결정하고 각각의 인생을 규정한다고 믿는다.

이 책에는 일곱 편의 글이 실려 있다. 변사, 책임, 사기, 학대, 합의, 중독, 시효와 관련된 이야기를 ‘사랑’으로 엮었다. 물론 이 사랑은 파토스와 로고스 그리고 에토스의 세계를 넘나들며 죄와 벌을 묻고 인생의 길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대개 좋은 글들은 어떻게 살 것인지, 무엇을 위해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지 묻는다. 정답 없는 인생이니 좋은 글에는 이정표 대신 물음표와 질문만 넘친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과 『남아 있는 나날』을 소개하는 저자의 목소리는 크지 않으나 단단하다. 시를 읽는 장혜영은 다양한 인문학적 소양을 자랑하지 않되 곳곳에 생각의 깊이와 넓이를 확보한 출처를 밝힌다. 그러면서 “사회를 구성하는 토대이자, 사람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두 가지 요건”을 사랑과 법이고 규정한다. 어느 하나를 결여한 사회가 제대로 작동할 리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아니 부족한 건 무엇일까. 사랑이라면 누구를 위한, 어떤 방식의 사랑이 필요할까. 법이라면 입법 취지와 목적 그 시행 과정과 결과가 만족스러운가. 대한민국 법률 체계와 헌법 정신에는 큰 문제가 없다. 어느 분야나 그러하듯 시스템이 아니라 그 자리에 놓인 ‘사람’이 문제를 일으킨다. 법 위에 서려는 자는 범죄자 뿐만 아니라 법을 다루는 자를 포함한다. 사랑이 부족하거나 사랑을 외면하는 자가 저지르는 범죄와 같이.

저자의 능력주의meritocracy 비판이 신선하다. 생각의 균형추는 현실 정치의 이쪽을 넘나들며 이념 논리에 갇히지 않을 때 작동한다. 능력주의에 대한 문제는 이쪽과 저쪽의 문제가 아니다. 재앙에 가까운 저출생 문제부터 세금과 부동산과 주식 문제가 모두 양궁 대표선수 선발 시스템처럼 공정하고 투명할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을 쓰려는 시늉 정도는 하려는 세상이 돼야 하지 않을까.

독자로서, 변호사가 된 장혜영에게 기대하는 건 없다. 다만, 이 책에서 보여준 관점으로 의뢰인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또 다른 관점으로 살필 수 있다면 좋은 글을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어느 자리에서 무엇을 바라보는지, 어디를 향해 어떤 태도를 갖는지에 따라 앞으로 나올 책을 기대하거나 실망하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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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소시오패스의 사정 앤드 앤솔러지
조예은 외 지음 / &(앤드)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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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가 촉발한 ‘무의식’에 대한 관심과 열정으로 현대인의 말과 행동은 ‘이해’와 ‘오해’를 넘어 ‘분석’과 ‘해석’의 대상으로 탈바꿈한 지 오래다. 타인은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이 속담처럼 인용되지만 근대가 탄생시킨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영역, 자유의 한계, 평등의 기준은 여전히 논쟁적이다. 대접받고 싶은 대로 타인을 대접하라는 금칙은 ‘타인’의 재산, 권력, 성별, 직업, 나이 등에 따라 달리 적용된다. 타인에 대한 이해는 불가능하며 타인은 오로지 오해의 대상이라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아도 우리는 항상 진상, 빌런, 벤(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과 함께 산다. 주변에 그런 사람이 없다면 바로 당신이 ‘그’라는 경고는 모골이 송연하다. 흔히 그를 ‘사이코패스’ 혹은 ‘소시오패스’라 부른다.

둘의 차이는 정신분석학이나 의학적 관심의 대상이니 현실 혹은 소설의 캐릭터를 구별할 필요는 없다. 반사회적 인격장애 정도로 해석되는 소시오패스는 선천적이고 충동적이며 공격적인 사이코패스보다 덜 위험하지만 후천적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25명 중 하나, 전체 인구의 4%가 가정과 사회적 환경에 따라 소시오패스가 될 수 있다는 건 흥미로운 진단이며 심각한 현대인의 질병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혹은 이웃과 동호인 중에 반드시 ‘그’가 있다. 우리는 소시오패스와 함께 산다.

앤솔로지 『이웃집 소시오패스의 사정』에는 다섯 명의 소시오패스가 등장한다. 인터넷 게시판을 만들어 익명의 소시오패스를 소개하는 코너를 만들면 소설보다 흥미로운 사례가 넘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직업별로 살펴보면 정치인이 소시오패스 비율이 가장 높지 않을까. 사회면 뉴스에 소개되는 사이코패스에 가까운 범죄자와 각종 인터넷 게시판에 화제가 되는 소시오패스는 일일이 떠올리기도 어렵다. 오로지 제목에 이끌려 선택한 책 한 권을 읽는 동안 현실에서 만난, 간접적으로 경험한 실존 인물들이 떠올랐고, 그들에 비하면 소설 속 소시오패스들의 말과 행동은 애교 수준으로 느껴질 만큼 오히려 현실이 더 참담하다.

소설같은 현실을 외면할 수 없고, 개연성 없는 픽션은 취향과 거리가 멀어 SF나 장르 소설에 몰입하기 어려운 개인적 취향이 문제일까. 아니, 다이내믹한 대한민국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다가올 미래가 소설보다 현기증을 유발하기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 본다. 요즘 유행하는 MBTI는 인간을 16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4가지로 규정하는 혈액형보다 세분화한 듯 보이지만, 사실 E/I, S/N, T/F, J/P처럼 양자 택일에 가깝다. 문제 해결problem solving이 중요한 T 성향은 대개 남성, 정서적 지지emotional support가 우선인 F 성향은 여성들의 속성에 가깝다. 상황과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지만 일반적 성향은 비율이 큰 쪽을 선택하는 흑백 논리를 강요한다. 자연스럽게 사이코패스 혹은 소시오패스의 비율이 높은 MBTI가 궁금해서 검색했다. 확률과 통계 그리고 편견은 어떤 식으로 작동할까.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확인하시길.

앤솔로지는 출판사와 작가에게 각각 장, 단점이 있다.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들이다. 독자 입장은 조금 다르다. 옴니버스 영화처럼 뷔페를 즐기는 독특한 매력이 있으나, 작품마다 차이가 심할 때는 불편함도 크다. 책임 분산 효과라고 하면 지나치겠으나 소설가의 역량이 확연히 구별된다. 영화나 드라마의 옥의 티처럼 세심하지 못한 실수가 아니라 상식에 벗어난 설명과 구성은 독자를 황당하게 한다. 특정 장면을 소개하고 싶지는 않다. 습작은 습작으로 끝내야 한다. 자꾸 고친다고 완성도가 높아지진 않는다.

반면 “설득보다 속이는 게 쉽고, 속이는 것보다 죽이는 게 더 편하다.”라는 클리셰 같은 문장을 훌륭하게 변주한 「없는 사람」처럼 구성과 내용이 모두 흥미로운 단편을 만난 즐거움을 놓칠 수는 없다. 다섯 편의 소설에는 소시오패스, 나르시시스트, 히키코모리, 경계선 인격장애, 리플리증후군, 사이코패스 등 다양한 주인공이 등장한다. 농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들은 우리 안에 있고, 우리는 또 그들의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게 아닌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흥미로운 사건과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단편을 쓰는 건 어느 작가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장편보다 단편이 주는 재미를 찾는 독자도 많다. 앤솔로지 소설집이든 장편소설이든 유튜브와 짧은 영상이 범람하는 시대의 작가들에게는 만만치 않은 작업일 듯싶다.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작가들에게 응원과 박수를 보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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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가 바꾼 역동의 세계사 - 강대국을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폴 몰런드 지음, 서정아 옮김 / 미래의창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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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의 결과는 다양하고 지속적이며 심층적이지만 그 원인 역시 마찬가지다. - 19쪽

2023년 출생아 수는 23만 명으로 2022년에 비해 7.7% 감소했다. 인구 절벽이라는 표현에 걸맞은 현실이다. 1959년~1971년생은 동갑내기가 100만 명이 넘는다. 그들은 이제 은퇴 시기를 맞는다. 대한민국은 급격하게 늙는 중이다. 결혼, 육아, 주택, 사교육, 연금, 노후를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개인은 아무도 없다. 각자도생을 위한 몸부림조차 무의미해지는 시대를 맞았다. 정부의 대책, 사회적 책무, 개인의 선택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는 듯하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걷어차며 세습 자본주의를 공고히 하는 세상에서 결혼과 출생은 곧 특권이 될 수도 있다. 누가 감히 이 험한 세상에서 행복을 꿈꾸는가. 디스토피아를 예견했던 숱한 소설과 영화는 미래에 대한 경고로 그치지 않고 현실이 되고 있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

폴 몰런드의 ‘The Human Tide’(『인구가 바꾼 역동의 세계사』)는 제목으로 인해 오해받기 쉬운 책이다. 이 책은 역사책이 아니라 심각한 사회과학의 한 분야로 정치, 경제, 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다뤄야 할 인류학의 보고서다. 지나간 역사로 한정하거나 치부될 수 있는 ‘세계사’라는 협소한 제목이 안타깝다. 오랜만에 누구에게나 권하고 싶은 좋은 책을 만났다. 새로운 관점, 알지 못했던 정보, 현실 적용 가능성, 실천과 변화를 위한 고민이 모두 담겨 있어 직업, 나이, 성별, 세대와 무관하게 진지하게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인구’는 역사적 사건과 문명사의 변화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변화를 이끌고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추동하는 힘으로 작용했다. 인과관계를 뒤바꿔 생각했던 편견을 버리자. 거대한 인구 물결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과거도 현재도 그리고 미래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내내 출생과 사망, 결혼과 이주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남아 있는 한 인구는 역사의 경로를 결정할 것이라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인구는 밀물과 썰물처럼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해왔다. 인구 물결 혹은 인구 전환은 언제나 중요했고 앞으로도 중요할 예정이다. 물론 인구가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인구의 변화와 흐름이 인류 문명사의 흐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는 동안 특별한 영웅이 아니라 평범한 개인의 삶에 주목하게 된다. 그들은 바로 우리들이다.

폴 몰런드는 출산율 하락의 원인으로 ‘경제 발전, 여성 문해율 상승, 도시화’을 꼽는다. 아이를 낳지 않고 사는 사람도 많은 시대에 인구 문제는 못 배우고 가난했던 시절의 이야기로 치부될 수 있으나 자연스러운 인구 감소가 초래할 미래는 밝지 않다. 인위적으로 인구를 늘리자는 대안과 거리가 먼 이 책은 앵글로색슨인, 독일과 러시아, 1945년 이후 서구와 동구권, 일본, 중국, 동아시아, 중동, 북아프리카까지 지구 곳곳의 인구 변화와 그 영향을 톺아본다.

부록으로 수록된 기대수명, 합계출산율 산출 방법을 알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의미를 간과할 수는 없다. 대한민국의 인구 소멸은 괜찮은지,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지, 장기적인 대책은 무엇인지 묻는 듯하다. 인구 문제는 정부에만 맡겨놓기에는 너무 중요하지 않은가. 아이는 온 마을이 키워야한다는 오래된 금언을 되새기며 출생, 육아, 교육, 취업, 주택, 연금, 노후 문제까지 폭넓게 전 생애의 과정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행복한 삶이 가능한지에 대한 질문으로 읽힌다. 어쩌면 이 책은 미래의 꿈과 희망에 대해 묻고 있는건 아닐까.

인구 고령화와 인구 후퇴를 겪는 일본의 상황을 반면교사 삼지 않으면 우리 역시 같은 길을 걷게 된다. 아니 이미 그 길에 접어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는 오래된 미래다. 단순히 옛날엔 그랬었지 정도의 회고담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하고 직접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인구’의 안부를 물을 때다. 저자는 단순하고 일원론적이며 결정론적 역사관을 내세우지 않는다.

오지 않는 미래를 걱정하지 말고 현재를 즐기며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는 토닥임에 현혹될 때가 아니다.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안목 없이 원빈처럼 오늘만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니들은 내일만 보고 살지. 내일만 사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한테 죽는다.”

미래에 어떤 일이 기다리든 한 가지 확실한 점이 있다. 과거에 그러했듯이 인구와 인류의 운명은 앞으로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을 것이다. 출생과 사망, 결혼과 이주가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남아 있는 한 인구는 역사의 경로를 결정할 것이다. - 4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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