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 -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불편한 공존
마이클 샌델 지음, 이경식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23년 3월
평점 :
우리는 소비자일 뿐만 아니라 민주적 시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 개정판, 서문
이 한마디를 깨닫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자본주의는 숨 쉬는 공기와 같습니다. 달콤한 사탕과 과자를 먹으려면 종이 지폐와 동전을 내밀던 시절을 지나 요즘 아이들은 엄카를 들고 편의점에 갑니다. 방법이 달라졌지만 ‘돈’의 중요성은 가르치지 않아도 자기 욕구 충족을 위한 필수 조건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심각한 문제에 부딪치지 않으면 그 중요성을 간과하며 살아갑니다. 경제 시스템인 자본주의와 정치 제도인 민주주의가 사실 한 몸이라는 걸 이해해도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해석은 전혀 달라집니다. 마이클 샌델이 1996년에 ‘성장’과 ‘분배’ 문제를 처음 들고 나온 건 아닙니다. 2023년 개정판 서문에 다시 한번 이 문제를 들고나온 건 30년이 지난 오늘도 해결이 난망하기 때문일 겁니다. 국가의 역할과 개인의 자유는 상충합니다. 모든 개인이 가진 조건과 상황이 다르고 ‘공동체’의 관점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 아닐까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시대를 지나면서 부의 편중 현상과 공동체의 의식이 어떻게 붕괴됐는지 살피는 건 철학자의 관심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국가 공동체를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거대 국제금융 자본의 등장, 국경이 무의미한 다국적 기업과 초부자의 탄생은 능력주의와 결합해 현대판 계급제를 내면화하는 원인이 되었을 겁니다.
대한민국의 정치 상황은 한 번도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줍니다. 자고 일어나면 계엄령이 선포됐다가 해제됐다는 뉴스를 듣게 되고, 하룻밤 사이에 대선 주자가 교체되기도 합니다. 검찰과 사법 기관의 착각을 지켜보면서 기득권과 거대한 이익 카르텔이 얼마나 견고하게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지 확인합니다.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은 교과서에나 배우는 유토피아일까요. 현실에서 실현 불가능한 가치일까요. 마이클 샌델이 사는 미국의 건국 정신과 자본주의 발달의 역사는 대한민국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문화와 전통, 각자의 욕망이 다르고 삶의 목적과 지향점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비슷하다 해도 도달하는 방법과 태도는 많이 다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궁합이 잘 맞지 않는 민주주의는 여전히 삐그덕거리며 세계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정치와 경제가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 정치경제학이 실제 삶의 지배원리라는 걸 안다고 해도 ‘나’의 삶이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바뀌어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아주 오랜만에 개정판을 낸 이유는 7장 ‘무엇이 잘못되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1990년 이후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살피는 건 오늘 우리들의 문제를 이해하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한국인은 미국을 준거집단으로 삼고 있으니까요. 선진국의 사례를 운운하는 관료, 학자 등 전문가 집단은 대개 미국식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들이댑니다. 영국, 독일, 프랑스와 북유럽 등 사회주의가 결합된 복지국가 모델이나 수정 자본주의는 ‘빨갱이’들의 주장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의 신념은 종교적 믿음보다 강고합니다. 자신의 정치적 이념이 아니라 경제적 이해관계나 삶의 질을 따져보면 생각이 조금 바뀔까요? 마이클 샌델은 오바마와 트럼프를 거쳐 바이든 정부에서 개정판을 냈습니다. 또 다시 트럼프가 집권하리라는 생각은 해 본적도 없었을 겁니다. 그것이 미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세계 질서와 민주적 가치를 어떻게 훼손하고 있는지에 대해 또다시 고민하며 후속편을 쓰고 있을까요.
마이클 샌델이 말하는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의 핵심은 경제 문제일 겁니다. 돈 문제와 상충하는 민주적 가치들, 개인의 욕망과 부딪치는 공동체의 질서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까요. 미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상황입니다. 중도우파 정당인 민주당이 진보, 좌파라는 평가를 받고 극우 이익집단인 국민의힘이 충돌하는 대한민국의 미래는 어떠할까요. 거대 양당에 대한 지지여부와 무관하게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동거는 대한민국에서 어떤 형태로 지속 가능할까요. 비 오는 토요일, 책 한권을 마주한 사람들의 속내는 제각각이었을 겁니다.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든 반대하든 미국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현실의 문제를 더 깊이 고민했을 테지만 정답과 결론은 언제나 난망합니다. 길이 정해져 있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었을까요. 대부분의 사람은 없는 길을 만드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러 선택지 앞에서, 자기 삶의 방법과 태도를 돌아볼 뿐입니다. 그 작은 변화가 보이지 않는 파문을 일으키고 동심원의 바깥으로 퍼져나가며 또 다른 물결과 부딪치며 앞으로 나아가리라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여기는 언제나 끔찍해 보입니다. 희망없이 살아갈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대안을 찾는 게 아니라 작은 관심과 참여가 변화를 가져올 거라는 작은 믿음은 지나치게 나이브한 생각일까요.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책의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불편한 공존’이라는 부제처럼 어차피 우리는 수많은 불편한 상황, 불편한 사람, 불편한 미래와 마주해야 합니다. 그 불편함을 인식하는 지점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다음 모임에는 대통령도 국무총리도 ‘있는’ 나라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듯싶습니다.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변화무쌍한 민주주의가 불편한 자본주의를 어떻게 바꿔나가는지도 눈여겨볼 차례입니다. 아니, 자본주의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이끌어가는지도 살펴야 합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오랫동안 불편하게 공존했다. 자본주의는 개인적 이익을 위한 생산적 활동의 조직화를 추구하는 반면, 민주주의는 시민의 자치 참여를 위한 권한의 부여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시민의식의 정치경제학은 두 개념을 조화롭게 만들겠다는 의도로 등장했다. - 3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