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왜 전쟁을 멈추지 못하는가 - 트럼프와 1조 달러 전쟁 기계의 야망
윌리엄 D. 하텅.벤 프리먼 지음, 백우진 옮김 / 부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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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루라도 지구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날이 있을까요? 어쩌면 인류의 역사는 잔혹한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생존과 번식이라는 동물적 본성을 버리지 못한 인간에게 치열한 경쟁과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필연일 수도 있습니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논리가 지배하는 생태계는 인류의 문명발달 과정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제 그 원인과 결과를 찬찬히 들여다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직간접적으로 그 영향이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은 기록으로만 남아 있으나 6.25 전쟁을 기억하는 세대의 어르신들이 아직 생존해 계십니다. 대한민국의 역사, 아니 근현대사는 정말 다이내믹했습니다. 역동성은 발전과 변화를 이끌지만 언제나 두렵고 불안한 미래를 살아야 한다는 숙명을 내포합니다. 현재, 북아메리카의 군사 강대국 미국이 이스라엘과 함께 중동의 이란을 상대로 벌이는 전쟁은 우리와 무관할까요? 미국은 왜 전쟁을 멈추지 못할까요? 『징비록』을 남긴 유성룡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요? 과거의 전쟁 그리고 현재 상황을 살피기 위한 두 권은 무관한 듯 보이지만 시공을 넘어 오늘의 현실과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에게 꼭 필요해 보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국가 안보 전략’은 기본적으로 ‘먼로주의(개입 축소주의)’를 표방했으나 당선 후에는 군산복합체를 확대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저자는 “미국은 1조 달러짜리 전쟁 기계를 만들었지만, 이 기계는 고장 나 있다.”라는 말로 오늘의 현실을 지적하며, “전쟁 기계는 오늘날 미국 사회 구조 자체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라고 분석합니다. 이 책이 출간된 후 벌어진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폭격은 예상된 시나리오였을까요? 자본과 권력의 결합이 빚어낸 비극은 참혹한 죽음과 파괴된 문명 앞에서 할 말을 잃게 만듭니다. 언제나 전쟁의 명분으로 내세우는 이유는 결국 핑계에 불과해 보입니다. 인류가 ‘평화’를 최우선 가치에 두고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전쟁과 폭력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수많은 사람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습니다. 단순히 무기를 만드는 회사의 이익 추구를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우려하는 부분은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미국 사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을 뿐 아니라, 지구 곳곳을 멍들게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책은 피상적 현실 너머의 속살을 헤집어 본질을 파악하고 대안을 고민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 능력이 오히려 민주주의와 평화, 안전과 번영의 토대를 훼손한다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습니다. 군수산업이 선거와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이 평화를 위협하며 전 세계를 고통과 불행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주장은 명백한 증거와 현실 분석으로 뒷받침되어 있습니다.

‘고장난 전쟁 기계’로 명명된 미국의 현실과 한반도의 상황이 오버랩됩니다. 지구에서 가장 위험해 보이는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대한민국은 언제나 안보 위기 상황입니다. 평범한 사람들도 미국이 전쟁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를 확인해야 하는 이유는 결국 내가 사는 현실에 대한 걱정과 고민의 출발이기 때문입니다. 미디어, 할리우드, 게임산업, 빅테크 등 다양한 분야와 연계된 거대한 자본주의 산업은 과연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미래를 보여줄 수 있을까요?

전쟁 기계에서 평화 기계로,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고민하며 책장을 넘기다 보면 대한민국의 정치와 경제 위기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일론 머스크와 도널드 트럼프 시대의 전쟁 기계를 다시 한번 언급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현실적 우려와 걱정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루하루 일상에 매몰되어 살아갑니다. 그러나 미국과 이스라엘, 이란의 전쟁이 바로 ‘나’의 일상을 뒤흔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생각이 말을 바꾸고 다른 행동을 촉발합니다. 전쟁은 나와 상관없는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코 앞에 놓인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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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혁명, 인간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차명식의 역사 강의 1
차명식 지음 / 북튜브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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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에 사회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심장이 없는 것이고, 나이 마흔에 여전히 사회주의자인 사람은 이성이 마비된 사람이라는 이야기는 너무 자주 인용돼 생각지도 않고 흘려보내는 말 중 하나다. 그렇다면, 스무 살에도 사회주의자인 사람이 거의 없는 오늘의 현실은 행복한가, 불행한가. 통계조사를 인용할 것도 없이 좀 산다는 나라 17개국 중 유일하게 행복의 첫째 조건을 물질적 풍요로움, 즉 돈이라고 응답한 나라 대한민국의 현실은 괜찮은가.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사회주의를 꿈꾸는 사람은 현실 부적응자이며 비정상적인 소수자에 머물러야 할까. 그래도 스스로 예수를 자처하는 세계 최강국의 정신병자나 홀로코스트를 생명 연장, 아니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자보다는 낫지 않은가.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는 데 그걸 해내겠다는 사람이 가끔 리더의 자리에 오른다. 개인적 지지와 무관하게 눈물겨운 투쟁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그렇게 아주 조금씩 진보를 거듭해 온 인류의 역사가 놀랍기만 하다. 반개혁, 반혁명 세력의 지지 기반이 궁금한 적은 없다. 유사이래 정과 반이 합을 이뤄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했는데 도로 제자리이거나 한발 물러선 것 같은 착각이 들지 않을 때가 있었나 싶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뒤를 돌아보면 과거로 회귀하거나 역진 현상이 벌어지는 게 아니라 나선형의 진화 과정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밀란 쿤데라의 1968년, 프라하의 봄을 기억하는 사람이 여전히 생존하고 있는 시대다. 1445년 구텐베르크가 성경 활판 인쇄를 시작했고 뒤이어 1492년 콜럼버스의 배를 타고 떠나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 꼭 100년 후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벌어졌고. 1789년 프랑스 대혁명, 1876년 벨이 전화를 발명해 특허를 냈다. 1894년 동학혁명이 벌어졌으며 1929년 대공황이 시작됐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되고 인터넷이 등장하기 23년 전, 그러니까 4.19 혁명 8년 후에 유럽에서 시작된 68혁명은 1980년 5.18 광주민주화 운동이나 2001년 미국 무역센터 9.11 테러보다 그 여진이 더 길고 진동이 크다.

차명식은 “인간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68혁명’을 도구로 삼아 근대, 아니 현대 사회의 근간을 이룬 사상적 토대와 인류의 행동 방식을 들여다본다. 흔히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한다고 믿는다. 자유 의지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며 자율적인 삶을 영위한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과연 그런가. 혁명과 반혁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자율 신경계와 진화한 존재로서 생물학적 반응에 관한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듣고 싶은 대로 들으며 보이는 것조차 외면하는 습성을 가진 인간의 삶에서 ‘희망’을 찾아보려는 노력이다. 그래서 저자는 ‘인간은 스스로의 실천을 통해서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존재’라고 굳게 믿고 싶은 게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지금 우리에게 68혁명은 왜 필요한가.

그래도, 여전히 근본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존재의 시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저 연어들처럼 과거로 회귀하는 사람들, 취향과 안목에 대해 살피려고 장 보드리야르와 부르디외를 소환하는 사람들, 자본주의의 삶이 주는 안락함에 안주하지 못하고 개인적 손해를 감수하는 사람들, 그 수많은 작은 희생과 보이지 않는 흔적들을 더듬는 일이 바로 일상 속의 ‘혁명’이며 68년에 벌어진 사소함이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는 왜 네타냐후의 얼굴과 오버랩되며 구토를 유발할까. 체 게바라와 실존주의 , 마틴 루터 킹과 맬컴 X, 한나 아렌트와 위르겐 하버마스를 살핀 후에는 이제 꼰대가 되어버린 세대의 성찰과 회한이 아니라 ‘핏덩이’들의 혁명이 필요할 때가 아니냐는 역설로 들린다. 여덟 번의 강의를 모은 책이다. 2권으로 나뉘어 ‘세계를 바꾸기 위한 세 가지 방법’으로 이어진다.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로 대표되는 비트 세대, 히피와 여피, 페미니즘 등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는 혁명의 후유증, 아니 오늘의 바탕을 이루는 이야기들은 억지스런 인과관계로 읽히지 않는다. 나와 현재를 돌아보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정확한 방법은 뒤를 돌아보는 일이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영화 《프라하의 봄》으로만 기억하는 68혁명은 어쩐지 좀 서글픈 느낌도 없지 않다.

내가 보낸 시간의 총합이, 시간의 누적이, 말과 행동의 결과가 나다. 그 누구도 아닌 각자의 어제와 오늘이 그렇다. 변화를 시도하거나 새로움이 없다면 관성의 법칙은 예외 없이 적용될 것이다. 불온한 단어로서의 ‘혁명’이 아니라도 좋다. 중국 은나라 탕왕이 세숫대야에 새겨둔 ‘일신우일신신일신우일신(日新日新又日新)’이야말로 혁명의 할애비가 아닌가. 다른 길로 가보자, 어제 간 길 말고.

68혁명은 ‘이기의 시대에 일어난 되기의 혁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너는 ~이어야 한다”는 명령에 맞서, 그 명령에 반해 다른 존재가 되고자 한 사람들의 ‘운동’이었다는 것이지요. ‘이기’는 존재를 정의함으로써 국면을 확고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그 가능성을 제약합니다. ‘되기’는 불확실한 미래를 향한 도약이고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은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스스로를 열게 하는 거고요. - 1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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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연출의 사회학 - 일상이라는 무대에서 우리는 어떻게 연기하는가
어빙 고프먼 지음, 진수미 옮김 / 현암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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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액면 그대로 바라보지 마라Don’t take the world at face value”

50cm, 사회적 거리다. 아무리 친밀한 관계라도 이 프라이빗한 거리 안으로 허용되는 사람은 극히 제한적이다. 사적인 영역을 침범하거나 허락받지 않은 신체 접촉은 형사 처벌의 대상이다. 물리적 거리는 심리적 거리를 증명한다. 가족, 친구, 연인은 물론 선후배, 동료, 지인 사이에도 적용되는 일반적 거리를 무시하는 사람들의 친근감을 포장한 무례와 범죄는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라는 변명에 불과하다. 관계는 물리적 거리로 입증되며 친밀함은 온기로 전해지는 법이다.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와의 거리에 대한 연구가 인류 전체에 적용될 순 없으나 이와 같은 일반론에 현대인의 일상은 대체로 포섭된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 욕망하지 않으면 비난 가능성도 낮아진다. 사랑받는 대신 사랑하라는 에리히 프롬의 조언도 별반 다르지 않다. 상대가 원하는 걸 해주고 싶은 마음 또한 자기 욕망의 반영에 불과하다. 대개 사랑으로 포장하는,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이 대표적인 사례다. 지배 욕망, 배타적 소유욕이 채워지지 않으면 대상을 비난하기 일쑤다. 관계의 기본은 상대가 원하지 않는 말과 행동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싫다는 것만 조심해도 인간관계는 그럭저럭 유지된다. 하지만 대체로 틀어진 관계로 상대를 비난할 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여기에 있다는 걸 차단된 후에도 감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인간’이라는 종의 특성을 연구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그 결과들을 공부하거나 익히려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다양한 형태로 소비되는 처세술, 자기계발서의 얄팍한 술수로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대증요법과 임기응변의 기술 연마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지 못할까. 자기 자신으로 사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어빙 고프먼의 이 책은 사회학 고전이다. 일상생활에서 자아를 연출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 사회가 내재한 연극성 때문이다. 저자는 연극적 관점과 접근법으로 우리의 사회생활을 톺아본다. 현미경으로 나를 직면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개인의 타고난 성품이 인자하고 위엄 있으며 거들먹거리거나 착하고 난폭하고 합리적이거나 고지식하고 방탕하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에 불과하다. 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는 『사람일까 상황일까』에서 때와 장소, 즉 맥락에 따라 인간은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인다고 지적한다. 말과 행동이 동일한 사람의 것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한 인간에게서 배신감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것은 대체로 사회적 조건과 환경에 적응하는 하나의 전략적 행동이라는 분석은 이제 심리학자나 사회학자 혹은 사회생물학자와 뇌과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고문 기술자 이근안이 손에 고문 기구를 들고 아이들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전화를 거는 모습이나 아우수비츠 죽음의 수용소 바로 옆 주택으로 귀가한 독일군 장교의 따뜻한 미소와 다정한 표정은 그들이 특별한 괴물이어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연출하는 사회적 가면의 일부가 아닐까.

공연자는 현재 공연의 관객이 나중에 자기가 상반된 모습을 연출하게 될 공연에는 들어오지 않아야 편하고, 또 과거 자기의 공연을 본 관객은 그와 상반된 현재 공연을 보지 않아야 편하다. 현저하게 지위가 상승했거나 추락한 사람들은 단호하게 고향과 절연함으로써 관객을 분리한다. 공연자는 관객에 따라 배역 연기가 달라야 편하고, 같은 배역 연기라도 관객을 분리하는 게 더 편하다. - 175쪽

일상이라는 무대에서 우리는 매일매일 자아를 연출한다. 고프먼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는 사람들의 일상적 삶을 넘어선 견고한 실체라기보다 ‘지금, 여기’에서 개인들의 구체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실현, 유지, 변형되는 것이다. 10년 전 부모와 자식은 현재와 다른 모습이다. 친구와 연인은 물론 부부와 동료, 지인은 말할 것도 없다. 다른 공연을 하는 데 같은 사람이 들어오거나 같은 공연을 하는 데 다른 사람이 들어온다면 자아는 불안하고 불편함을 느낀다. 각각의 관객에 맞는 연출과 연기가 다르다. 고프먼은 우리의 삶이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우리의 자아를 연출하는 공연과 같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인생을 고칠 수 없는 단 한 번의 연극에 비유한 저자의 관점이 독특하면서도 탁월하다. 실제 우리는 매일매일 똑같은 사람 혹은 낯선 사람들 앞에서 사회적 페르소나를 통해 실제같은 연기를 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자연스러운 연기,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표정과 말과 행동은 관객의 반응과 상관없이 자아 만족감과 성취감을 통해 보상받는다. 그러나 간극이 벌어지기 시작하면 가족, 친구, 연인 사이에서도 균열이 발생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반복 실험과 검증된 이론들은 모두 불가역적 사건과 시간에 대한 ‘해석’과 ‘의미부여’에 불과하다.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허망함이 대체로 여기에서 기인한다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소회일 수도 있으나, ‘그래서?’, ‘어떻게?’에는 답을 주기 어렵다. 그 결과를 예측한다고 달라지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다양한 개별 독자, 각각의 자아를 위한 분석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만하다. 결국, 모든 텍스트의 종착역에서는 ‘나’가 놓여 있다. 거울을 바라보는 일, 스스로 변화를 시도하고, 성장을 도모하거나, 지금 이대로를 외치든,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고 고집을 부려도 각자의 연기는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어떤 연기로 관객을 사로잡을지 ‘선택’은 모두 ‘나’에게 주어진 숙명 혹은 노력의 결과다. 점점 선택의 폭은 좁아지고 해가 저문다. 서로 다른 조건이지만 자아 연출 능력은 얼마든지 변화, 발전, 성장 가능하다. 성별, 외모, 국적, 인종, 부모 등 어차피 주어진 조건이 같지 않더라도 드라마, 영화 속 배우들의 연기는 서로 다르지 않은가. 관객들의 감탄과 박수가 주연과 조연, 여성과 남성, 외모와 나이를 가리지 않는 이유를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다만, 거울 속에 비친 ‘나’의 연기를 모니터링 하지 않거나 애써 외면할 뿐. 그것이 이 책이 우리, 아니 나에게 던져 준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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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제1조, 파시즘을 쏘다: - 세계 15개국 헌법으로 본 민주주의의 얼굴
박홍규 지음 / 틈새의시간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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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임명직이 아니다. 자격시험도 없다. 그러나 언론은 유형, 무형의 권력을 누리기 시작한 지 오래다. 레거시 미디어는 비판과 감시 기능 대신 행정, 입법, 사법 혹은 자본 권력과 공생 관계를 이뤄, 아니 기생한 지 오래다. 인터넷과 함께 뉴미디어 시대가 열렸고 순기능과 역기능이 혼재하는 현실에서 필터링은 이제 개인의 몫으로 남겨진 듯하다. 필터 버블 현상을 극복하려는 노력 없이는 길들어진 관점으로 살 수밖에 없다. 비판적 사고력은 주체적인 삶을 위한 필수 도구다. 생각의 근육은 헬스장에서도 기를 수 없다. 학력과 상관없는 사유 능력과 판단력을 어떻게 할 것인가.

검찰과 사법부의 부패는 공화국을 위태롭게 하지만 그들의 거대한 카르텔은 진영의 논리로 해결하기 어렵다. 감시와 처벌은 요원하고 제 기능을 상실한 공권력의 해악은(아니 그 제도를 운용하는 자들이 스스로 권력기관이라 착각하는) 일상생활 곳곳에 침투하여 타인과 세상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흔들고 공동체의 질서와 규범에 균열을 일으킨다. 어쩌면, 동서양의 역사를 막론하고 기득권의 공고한 암묵적 카르텔보다 무서운 건 그 카르텔에 편입하기 위한 각자도생의 경쟁이 아닐까. 상식과 공동체의 질서는 난해하거나 복잡하지 않다. 대체로 상식과 진리는 단순하고 간명하다.

변화와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고 온건주의자와 혁명가들의 충돌은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진영을 넘어 삶의 태도와 방향으로 나타난다. 직업과 나이, 성별과 지역의 문제로 환원할 수 없는 이성적 판단 능력과 논리적 사유의 문제다. 허나 현실은 서로 이해할 수 없는 ‘해석’의 문제로 귀결된다. 어떤 현상에 대한 관점과 인과 관계가 엇갈리면 더 이상 토론과 합의는 가능하지 않다. 최소한의 합의로 굴러가는 민주정과 법치는 보이지 않는 ‘선line’이 존재한다. 진보와 보수는 단순한 관점의 차이다. 오프사이드offside 룰을 어겼는지에 관한 심판 판정에 불만이 있을 수는 있으나 오프 사이드 라인에 대한 기준이 서로 다를 수는 없다. 타인과의 갈등, 세상에서 벌어지는 부패와 범죄를 ‘해석’의 문제라고 우기는 사람들은 대체로 질서를 위반하고 범죄를 저지른 자일 확률이 높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근대 국가의 틀을 형성하면서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합의한 하한선, 마지노선, 최저선이 헌법이다. 말하자면 최소한의 합의에 해당한다. 링 위에서 상대 선수의 귀를 물어뜯은 타이슨도 있고, 박치기로 상대 선수의 코피를 터트린 축구 선수도 있었지만 그 순간 패배자가 되고 더 이상의 게임은 무의미해진다. 현실이 스포츠와 같을 수는 없으나 진영 논리에 갇힌 사람들의 주관적 해석과 갈등 국면에서 각자의 억울함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헌법이 그 판단 기준이라면 현상과 사건을 해석하는 헌법재판소는 또 어떤가. 또다시 제도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로 환원되는 걸까.

온 국민이 헌법을 공부하는 시대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로 시작하는 대한민국 헌법을 다시, 각자 ‘해석’해 보자. 이 문장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의미일까. 유행처럼 출판된 헌법 관련 책들이 차고 넘친다. 법과 관련된 책들을 꾸준히 읽어 온 사람도 새삼스럽게 다시 들여다봐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증거다. 박홍규 선생님의 책을 집어든 건 순전히 개인적 취향이겠으나 ‘파시즘’이라는 키워드로 대한민국의 헌법을 살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에서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 15개국의 헌법을 살피면서 다시 한번 정치가 아니라 각자의 삶과 현실을 점검해야 한다. 법은 법률가들의 소유가 아니다.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기준과 합리성을 바탕에 둔 법률이 아니라면 언제든 수정 가능한 약속에 불과한 법의 적용 문제는 무지의 베일이 적용돼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에 담긴 이야기만으로도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와 방법을 각자 점검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숨 쉬는 공기는 물론 내 몸의 뼛속까지 정치적이다. 지지하는 정당과 정치인을 언제든 바꿀 수 없다면 자기 도그마에 갇혀 살 수밖에 없다.

비교는 절대적이고 고정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상대적 관점을 갖게 하는 것이고, 이로써 자유로운 사고가 가능해진다. 그러나 여러 가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그 여러 가지에 내재하는 공통된 보편성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 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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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온 미래 - AI 이후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
장강명 지음 / 동아시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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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 2003년, 작가 윌리엄 깁슨이 한 말입니다. 과거를 거쳐 현재에 이르렀고, 현재를 통해 미래를 전망한다는 연속적 시간 개념에 익숙한 우리에게 미래가 이미 와 있다는 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물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사람마다 미래에 도달하는 시간은 차이가 있겠죠. 누군가는 미래를 준비하고 만들어 가지만, 누군가는 현실에 적응하기도 버겁습니다. 점점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오늘 하루를 버티기도 힘겹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사는 미래를 위해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요?

2025년의 화두는 여전히 인공지능입니다. 10여 년 전부터 예측했던 미래가 이제 현실이 되었습니다. 생성형 AI에서 에이전트 AI로 넘어가는 단계라고 하니 곧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물리적 형태를 갖춘 AI가 상용화될 겁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생활에 스며들어 조금씩 그 영역을 확대하는 인공지능의 미래는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필수가 된 인공지능, 그 활용 여부와 가치 판단에 관한 논쟁을 시작해야 합니다.

2016년 3월 9일은 특별한 날입니다. 알파고AlphaGO가 전 세계 바둑 일인자 이세돌 9단을 이긴 날이며, 동시에 불가능해 보이는 인간의 영역으로 인공지능이 진입한 날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지 바둑 팬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었습니다. 당시 생중계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충격이 생생합니다. 체스와 달리 바둑은 경우의 수가 거의 무한대에 가까워 인공지능이 접근할 수 없다고 생각한 건 착각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소설가 장강명은 프로 바둑 기사 수십 명을 인터뷰하며 수천 년 동안 이어온 바둑의 전통과 역사를 살피며 과거와 현재를 돌아봅니다. 신문기자였던 저자는 허구의 세계가 아니라 객관적 사실을 확인하고 기록합니다. 인공지능이 바꿔버린 현실, 아니 먼저 와 버린 미래를 실감나게 보여주는 르포르타주가 훌륭합니다.

마치 디스토피아 SF의 도입부처럼 인간만이 펼칠 수 있는 예술이자 스포츠라 믿었던 바둑의 세계가 무너진 현실은 AI 이후 세계의 축소판 같아 보입니다. 바둑뿐만 아니라 문학, 음악, 회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와 같은 고민은 연쇄적으로 발생하며 논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인공지능의 역할과 인간적인 삶의 의미일 것입니다. AI와 함께 살아갈 인류는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직로와 직업을 고민하는 청소년부터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청년세대는 물론 불안한 노후를 맞아야 하는 중장년층까지 AI는 희망과 기대보다 아직도 불안한 미래의 상징처럼 여겨집니다.

때때로 과학기술의 진보는 조금 더 공평하고 평평한 세상을 만들어 줄 거라는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인간에 대한 믿음, 변하지 않는 가치들이 모두 사라지는 세상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AI로 인해 급변하는 현실은 목적도 없고 방향을 잃은 채 흔들리며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장강명은 이런 상황에서 AI를 향한 불안과 공포 대신 인간적인 삶의 방법과 태도를 묻고 있는 듯싶습니다. 특히 9장 ‘가치가 이끄는 기술’과 마지막 10장 ‘인공지능이 아직 하지 못하는 일’은 저자의 고민과 생각이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먼저 시선을 돌려 깊이 들여다보고 관찰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 후에야 비로소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자기 생각을 정리하고 태도를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올바른 선택을 위해 중요한 자세입니다. 그리하여 읽고 쓰는 삶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먼저 온 미래를 즐거운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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