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연출의 사회학 - 일상이라는 무대에서 우리는 어떻게 연기하는가
어빙 고프먼 지음, 진수미 옮김 / 현암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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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액면 그대로 바라보지 마라Don’t take the world at face value”

50cm, 사회적 거리다. 아무리 친밀한 관계라도 이 프라이빗한 거리 안으로 허용되는 사람은 극히 제한적이다. 사적인 영역을 침범하거나 허락받지 않은 신체 접촉은 형사 처벌의 대상이다. 물리적 거리는 심리적 거리를 증명한다. 가족, 친구, 연인은 물론 선후배, 동료, 지인 사이에도 적용되는 일반적 거리를 무시하는 사람들의 친근감을 포장한 무례와 범죄는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라는 변명에 불과하다. 관계는 물리적 거리로 입증되며 친밀함은 온기로 전해지는 법이다.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와의 거리에 대한 연구가 인류 전체에 적용될 순 없으나 이와 같은 일반론에 현대인의 일상은 대체로 포섭된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 욕망하지 않으면 비난 가능성도 낮아진다. 사랑받는 대신 사랑하라는 에리히 프롬의 조언도 별반 다르지 않다. 상대가 원하는 걸 해주고 싶은 마음 또한 자기 욕망의 반영에 불과하다. 대개 사랑으로 포장하는,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이 대표적인 사례다. 지배 욕망, 배타적 소유욕이 채워지지 않으면 대상을 비난하기 일쑤다. 관계의 기본은 상대가 원하지 않는 말과 행동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싫다는 것만 조심해도 인간관계는 그럭저럭 유지된다. 하지만 대체로 틀어진 관계로 상대를 비난할 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여기에 있다는 걸 차단된 후에도 감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인간’이라는 종의 특성을 연구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그 결과들을 공부하거나 익히려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다양한 형태로 소비되는 처세술, 자기계발서의 얄팍한 술수로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대증요법과 임기응변의 기술 연마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지 못할까. 자기 자신으로 사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어빙 고프먼의 이 책은 사회학 고전이다. 일상생활에서 자아를 연출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 사회가 내재한 연극성 때문이다. 저자는 연극적 관점과 접근법으로 우리의 사회생활을 톺아본다. 현미경으로 나를 직면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개인의 타고난 성품이 인자하고 위엄 있으며 거들먹거리거나 착하고 난폭하고 합리적이거나 고지식하고 방탕하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에 불과하다. 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는 『사람일까 상황일까』에서 때와 장소, 즉 맥락에 따라 인간은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인다고 지적한다. 말과 행동이 동일한 사람의 것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한 인간에게서 배신감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것은 대체로 사회적 조건과 환경에 적응하는 하나의 전략적 행동이라는 분석은 이제 심리학자나 사회학자 혹은 사회생물학자와 뇌과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고문 기술자 이근안이 손에 고문 기구를 들고 아이들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전화를 거는 모습이나 아우수비츠 죽음의 수용소 바로 옆 주택으로 귀가한 독일군 장교의 따뜻한 미소와 다정한 표정은 그들이 특별한 괴물이어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연출하는 사회적 가면의 일부가 아닐까.

공연자는 현재 공연의 관객이 나중에 자기가 상반된 모습을 연출하게 될 공연에는 들어오지 않아야 편하고, 또 과거 자기의 공연을 본 관객은 그와 상반된 현재 공연을 보지 않아야 편하다. 현저하게 지위가 상승했거나 추락한 사람들은 단호하게 고향과 절연함으로써 관객을 분리한다. 공연자는 관객에 따라 배역 연기가 달라야 편하고, 같은 배역 연기라도 관객을 분리하는 게 더 편하다. - 175쪽

일상이라는 무대에서 우리는 매일매일 자아를 연출한다. 고프먼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는 사람들의 일상적 삶을 넘어선 견고한 실체라기보다 ‘지금, 여기’에서 개인들의 구체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실현, 유지, 변형되는 것이다. 10년 전 부모와 자식은 현재와 다른 모습이다. 친구와 연인은 물론 부부와 동료, 지인은 말할 것도 없다. 다른 공연을 하는 데 같은 사람이 들어오거나 같은 공연을 하는 데 다른 사람이 들어온다면 자아는 불안하고 불편함을 느낀다. 각각의 관객에 맞는 연출과 연기가 다르다. 고프먼은 우리의 삶이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우리의 자아를 연출하는 공연과 같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인생을 고칠 수 없는 단 한 번의 연극에 비유한 저자의 관점이 독특하면서도 탁월하다. 실제 우리는 매일매일 똑같은 사람 혹은 낯선 사람들 앞에서 사회적 페르소나를 통해 실제같은 연기를 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자연스러운 연기,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표정과 말과 행동은 관객의 반응과 상관없이 자아 만족감과 성취감을 통해 보상받는다. 그러나 간극이 벌어지기 시작하면 가족, 친구, 연인 사이에서도 균열이 발생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반복 실험과 검증된 이론들은 모두 불가역적 사건과 시간에 대한 ‘해석’과 ‘의미부여’에 불과하다.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허망함이 대체로 여기에서 기인한다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소회일 수도 있으나, ‘그래서?’, ‘어떻게?’에는 답을 주기 어렵다. 그 결과를 예측한다고 달라지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다양한 개별 독자, 각각의 자아를 위한 분석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만하다. 결국, 모든 텍스트의 종착역에서는 ‘나’가 놓여 있다. 거울을 바라보는 일, 스스로 변화를 시도하고, 성장을 도모하거나, 지금 이대로를 외치든,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고 고집을 부려도 각자의 연기는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어떤 연기로 관객을 사로잡을지 ‘선택’은 모두 ‘나’에게 주어진 숙명 혹은 노력의 결과다. 점점 선택의 폭은 좁아지고 해가 저문다. 서로 다른 조건이지만 자아 연출 능력은 얼마든지 변화, 발전, 성장 가능하다. 성별, 외모, 국적, 인종, 부모 등 어차피 주어진 조건이 같지 않더라도 드라마, 영화 속 배우들의 연기는 서로 다르지 않은가. 관객들의 감탄과 박수가 주연과 조연, 여성과 남성, 외모와 나이를 가리지 않는 이유를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다만, 거울 속에 비친 ‘나’의 연기를 모니터링 하지 않거나 애써 외면할 뿐. 그것이 이 책이 우리, 아니 나에게 던져 준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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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제1조, 파시즘을 쏘다: - 세계 15개국 헌법으로 본 민주주의의 얼굴
박홍규 지음 / 틈새의시간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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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임명직이 아니다. 자격시험도 없다. 그러나 언론은 유형, 무형의 권력을 누리기 시작한 지 오래다. 레거시 미디어는 비판과 감시 기능 대신 행정, 입법, 사법 혹은 자본 권력과 공생 관계를 이뤄, 아니 기생한 지 오래다. 인터넷과 함께 뉴미디어 시대가 열렸고 순기능과 역기능이 혼재하는 현실에서 필터링은 이제 개인의 몫으로 남겨진 듯하다. 필터 버블 현상을 극복하려는 노력 없이는 길들어진 관점으로 살 수밖에 없다. 비판적 사고력은 주체적인 삶을 위한 필수 도구다. 생각의 근육은 헬스장에서도 기를 수 없다. 학력과 상관없는 사유 능력과 판단력을 어떻게 할 것인가.

검찰과 사법부의 부패는 공화국을 위태롭게 하지만 그들의 거대한 카르텔은 진영의 논리로 해결하기 어렵다. 감시와 처벌은 요원하고 제 기능을 상실한 공권력의 해악은(아니 그 제도를 운용하는 자들이 스스로 권력기관이라 착각하는) 일상생활 곳곳에 침투하여 타인과 세상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흔들고 공동체의 질서와 규범에 균열을 일으킨다. 어쩌면, 동서양의 역사를 막론하고 기득권의 공고한 암묵적 카르텔보다 무서운 건 그 카르텔에 편입하기 위한 각자도생의 경쟁이 아닐까. 상식과 공동체의 질서는 난해하거나 복잡하지 않다. 대체로 상식과 진리는 단순하고 간명하다.

변화와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고 온건주의자와 혁명가들의 충돌은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진영을 넘어 삶의 태도와 방향으로 나타난다. 직업과 나이, 성별과 지역의 문제로 환원할 수 없는 이성적 판단 능력과 논리적 사유의 문제다. 허나 현실은 서로 이해할 수 없는 ‘해석’의 문제로 귀결된다. 어떤 현상에 대한 관점과 인과 관계가 엇갈리면 더 이상 토론과 합의는 가능하지 않다. 최소한의 합의로 굴러가는 민주정과 법치는 보이지 않는 ‘선line’이 존재한다. 진보와 보수는 단순한 관점의 차이다. 오프사이드offside 룰을 어겼는지에 관한 심판 판정에 불만이 있을 수는 있으나 오프 사이드 라인에 대한 기준이 서로 다를 수는 없다. 타인과의 갈등, 세상에서 벌어지는 부패와 범죄를 ‘해석’의 문제라고 우기는 사람들은 대체로 질서를 위반하고 범죄를 저지른 자일 확률이 높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근대 국가의 틀을 형성하면서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합의한 하한선, 마지노선, 최저선이 헌법이다. 말하자면 최소한의 합의에 해당한다. 링 위에서 상대 선수의 귀를 물어뜯은 타이슨도 있고, 박치기로 상대 선수의 코피를 터트린 축구 선수도 있었지만 그 순간 패배자가 되고 더 이상의 게임은 무의미해진다. 현실이 스포츠와 같을 수는 없으나 진영 논리에 갇힌 사람들의 주관적 해석과 갈등 국면에서 각자의 억울함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헌법이 그 판단 기준이라면 현상과 사건을 해석하는 헌법재판소는 또 어떤가. 또다시 제도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로 환원되는 걸까.

온 국민이 헌법을 공부하는 시대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로 시작하는 대한민국 헌법을 다시, 각자 ‘해석’해 보자. 이 문장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의미일까. 유행처럼 출판된 헌법 관련 책들이 차고 넘친다. 법과 관련된 책들을 꾸준히 읽어 온 사람도 새삼스럽게 다시 들여다봐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증거다. 박홍규 선생님의 책을 집어든 건 순전히 개인적 취향이겠으나 ‘파시즘’이라는 키워드로 대한민국의 헌법을 살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에서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 15개국의 헌법을 살피면서 다시 한번 정치가 아니라 각자의 삶과 현실을 점검해야 한다. 법은 법률가들의 소유가 아니다.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기준과 합리성을 바탕에 둔 법률이 아니라면 언제든 수정 가능한 약속에 불과한 법의 적용 문제는 무지의 베일이 적용돼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에 담긴 이야기만으로도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와 방법을 각자 점검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숨 쉬는 공기는 물론 내 몸의 뼛속까지 정치적이다. 지지하는 정당과 정치인을 언제든 바꿀 수 없다면 자기 도그마에 갇혀 살 수밖에 없다.

비교는 절대적이고 고정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상대적 관점을 갖게 하는 것이고, 이로써 자유로운 사고가 가능해진다. 그러나 여러 가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그 여러 가지에 내재하는 공통된 보편성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 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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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온 미래 - AI 이후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
장강명 지음 / 동아시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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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 2003년, 작가 윌리엄 깁슨이 한 말입니다. 과거를 거쳐 현재에 이르렀고, 현재를 통해 미래를 전망한다는 연속적 시간 개념에 익숙한 우리에게 미래가 이미 와 있다는 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물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사람마다 미래에 도달하는 시간은 차이가 있겠죠. 누군가는 미래를 준비하고 만들어 가지만, 누군가는 현실에 적응하기도 버겁습니다. 점점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오늘 하루를 버티기도 힘겹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사는 미래를 위해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요?

2025년의 화두는 여전히 인공지능입니다. 10여 년 전부터 예측했던 미래가 이제 현실이 되었습니다. 생성형 AI에서 에이전트 AI로 넘어가는 단계라고 하니 곧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물리적 형태를 갖춘 AI가 상용화될 겁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생활에 스며들어 조금씩 그 영역을 확대하는 인공지능의 미래는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필수가 된 인공지능, 그 활용 여부와 가치 판단에 관한 논쟁을 시작해야 합니다.

2016년 3월 9일은 특별한 날입니다. 알파고AlphaGO가 전 세계 바둑 일인자 이세돌 9단을 이긴 날이며, 동시에 불가능해 보이는 인간의 영역으로 인공지능이 진입한 날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지 바둑 팬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었습니다. 당시 생중계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충격이 생생합니다. 체스와 달리 바둑은 경우의 수가 거의 무한대에 가까워 인공지능이 접근할 수 없다고 생각한 건 착각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소설가 장강명은 프로 바둑 기사 수십 명을 인터뷰하며 수천 년 동안 이어온 바둑의 전통과 역사를 살피며 과거와 현재를 돌아봅니다. 신문기자였던 저자는 허구의 세계가 아니라 객관적 사실을 확인하고 기록합니다. 인공지능이 바꿔버린 현실, 아니 먼저 와 버린 미래를 실감나게 보여주는 르포르타주가 훌륭합니다.

마치 디스토피아 SF의 도입부처럼 인간만이 펼칠 수 있는 예술이자 스포츠라 믿었던 바둑의 세계가 무너진 현실은 AI 이후 세계의 축소판 같아 보입니다. 바둑뿐만 아니라 문학, 음악, 회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와 같은 고민은 연쇄적으로 발생하며 논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인공지능의 역할과 인간적인 삶의 의미일 것입니다. AI와 함께 살아갈 인류는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직로와 직업을 고민하는 청소년부터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청년세대는 물론 불안한 노후를 맞아야 하는 중장년층까지 AI는 희망과 기대보다 아직도 불안한 미래의 상징처럼 여겨집니다.

때때로 과학기술의 진보는 조금 더 공평하고 평평한 세상을 만들어 줄 거라는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인간에 대한 믿음, 변하지 않는 가치들이 모두 사라지는 세상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AI로 인해 급변하는 현실은 목적도 없고 방향을 잃은 채 흔들리며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장강명은 이런 상황에서 AI를 향한 불안과 공포 대신 인간적인 삶의 방법과 태도를 묻고 있는 듯싶습니다. 특히 9장 ‘가치가 이끄는 기술’과 마지막 10장 ‘인공지능이 아직 하지 못하는 일’은 저자의 고민과 생각이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먼저 시선을 돌려 깊이 들여다보고 관찰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 후에야 비로소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자기 생각을 정리하고 태도를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올바른 선택을 위해 중요한 자세입니다. 그리하여 읽고 쓰는 삶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먼저 온 미래를 즐거운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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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망상의 시대 - 자기기만의 심리학
어맨다 몬텔 지음, 김다봄 옮김 / arte(아르테)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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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드 모파상의 「목걸이」나 『여자의 일생』을 읽었다면 그녀의 인생이 달라졌을까.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타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한 인간의 지나친 ‘욕망’은 범죄다.

합리성에 관한 판단을 넘어서 견고하게 자리한 판단 기준은 때때로 개인과 사회를 위험에 빠뜨린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직 종사자, 소수 권력자와 정치인들이 오히려 확증편향의 우를 범한다. 다양한 인지 편향cognitive bias을 인정하는 것이 자기 객관화의 시작이다. 사람과 상황을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던 지난 시간을 떠올려 보지만 여전히 쉽지 않다. 관점을 바꿨고, 시선이 달라졌으나 그것이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와 실천으로 이어졌다고 단언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그것이 인지적 무의식으로 작동하며 새롭고 낯설게 대상을 바라보고 상황을 파악하는 연습으로 이어져 질문과 의심을 멈추지는 않고 있다.

선악을 명확히 구분하는 확신과 신념은 때때로 ‘합리적 망상’이 된다. 인지 편향의 가장 주된 원인은 엄청나게 늘어난 정보다. 대학생 수준(chatGPT-3)에서 이제 박사(chatGPT-4) 수준으로 업그레이드 됐다는 인공지능을 24시간 뇌의 일부로 활용하며 사는 현대인들은 더욱더 자기 확신에 빠질 위험이 높다. “모른다”는 진술은 회피와 외면의 변명이 아니라면 내뱉을 일이 별로 없는 시대를 맞이한 게 아닐까. 조금만 찾아봐도 검색과 요약으로 핵심을 전달받을 수 있다면 누가 누구에게 뭔가를 가르치고 설명하는 일도 필요 없어질지 모른다. 학교의 기능, 학습의 형태, 공교육의 체계, 자격증과 전문성을 가늠하는 기준에도 상상할 수 없는 변화가 올 날이 멀지 않다.

어맨다 몬텔이 ‘주술적 과잉 사고’라고 명명한 개념은 유튜브에 절인 뇌를 가진 대다수 현대인에게 ‘잠시 멈춤!’이라고 외친다. 심리학에서 주로 다뤘던 11가지 인지 편향은 익숙한 개념들이다. 그러니 이 책 또한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렴풋한 문제를 선명하게 들여다보는 과정이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현상을 분석하는 대개의 저자들이 그러하듯 몬텔도 명쾌한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제시했더라도 모두에게 적용될 리 없다. 편향의 항목과 정도가 다를 테니 당연한 일이겠으나 모든 독서는 개별화 작업이다.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이 편할 리 없고, 남들 눈에 좋아 보일 리도 없다.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숭고하던 시절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이제 철 지난 추억담으로만 남았다. 문해력은 텍스트 뿐만 아니라 미디어를 넘어 사람과 상황에까지 적용돼야 한다. 무엇이든 읽어낼 수 있는 분석 능력과 그것들의 인과 관계를 파악하고 전체 맥락을 이해하는 종합적 통찰력을 기르지 않는다면 합리적 망상의 시대를 온몸으로 즐기는 사람이 될 것이다.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합리적 의심이 전제되지 않은 생각들, 아니 ‘의견들’은 하나의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옳다고 변명하거나 확신에 찬 신념으로 확정한다면 이름 없는 자기 종교에 불과할 것이다. 믿음에 관한 논쟁은 불가하니 서로를 존중하면 그뿐이지만 이들은 대개 타인의 생각과 판단은 ‘틀렸다’고 선언하기 일쑤다. 몬텔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 가득한 시대를 합리적 망상의 시대라고 명명한다. 편향을 인정하지 않는 다수의 사람들이 모인 집단, 그러한 시대는 공포스럽다.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가졌던 원시 시대 인류보다 폭력적이고 위험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그것이 아마도 이 책의 저자가 현생 인류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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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는 인간을 먹고 자란다 - 인공지능 신화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노동자들
마크 그레이엄.제임스 멀둔.캘럼 캔트 지음, 김두완 옮김 / 흐름출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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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형 AI에서 에이전트 AI 시대로 넘어간다. 극소수 과학기술 종사자들이나 개발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터넷의 대중화를 넘어선 파도가 밀려온다는 희망 섞인 기대 혹은 일자리에 대한 공포가 혼재한 현실은 산업 혁명 시절 러다이트 이래 반복되고 있다. 이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면 마크 그레이엄과 제임스 멀둔, 캘럼 캔트의 이야기에도 귀 기울여보자.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가든 현실 적응 문제는 개인의 삶을 지배한다. 취향과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 생활의 문제로 진입한 AI 이야기다. 우간다의 데이터 주석 작업자, 영국의 머신러닝 엔지니어, 아이슬란드의 기술자, 아일랜드의 예술가, 영국의 물류 노동자, 미국의 투자자, 나이지리아의 노조 활동가 등 일곱 명의 ‘노동자’의 삶을 밀착 카메라로 들여다보는 이유는 자명하다. 곧 나와 너, 우리들의 모습일 예정이기 때문이다. 직종과 세부적인 업무가 달라도 AI가 미치는 거대한 파고를 넘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인류가 지난 200여 년 동안 자본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의 삶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해왔다면 이제는 AI로부터 소외될지도 모르는 인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일곱 명은 대표자가 아니라 사례에 불과하다. 전문직부터 단순 노무직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사회 변동은 인류의 삶, 인간의 생각과 태도를 일순간에 바꿔버린다. 전통적, 아니 각자의 세계관, 인간과 세상은 그러할 것이라는 일종의 관성적 태도와 믿음에 균열이 발생하는 건 오랜 학습과 사유의 과정을 거치기보다 충격적 경험과 하나의 사건 때문일 수도 있다.

원제는 ‘Feeding the Machine’는 AI가 인간을 먹고 자란다는 제목만큼 공포를 느끼게 한다. 일종의 사회적 경고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보통 사람들에게는 막연한 두려움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미래를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노동 환경의 변화에 대해서는 예의주시해야 한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구조와 기능은 이 역사적 변화를 모두 견디며 잉여가치를 몰빵 해왔다.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듯하지만 손 놓고 기다릴 수만은 없는 현실이다. 실제 노동 현장에서 겪는 고충, 우리가 겪어야 할 미래, 변화에 대처하는 태도가 모두 개인의 몫일 수도 없다. 다만 커다란 변화의 흐름을 읽는 안목과 비판적 사고는 언제나 나를 나로 살게 하는 기본적 덕목이다.

장밋빛 전망, 디스토피아적 경고를 넘나들며 조금 더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적응과 실천의 문제라면, 모든 일이 그러하듯 생각하고 준비하고 실천한 만큼 자기 인생에 변화를 가져온다.

비봉출판사에서 출간한 『자본론』을 완역한 김수행 교수가 정년 퇴임한 후 서울대에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자를 임용하지 않았고, 경제학과에 과목조차 개설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다. 류동민 교수의 책을 몇 권 읽으면서 척박하지만 새로운 시선과 활력을 불어넣는 관점이 유지된다고 생각한 건 순전한 착각이었다. 일명 ‘서마학’에서 여름학기에 개설한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입문 강의가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다음 주에 종강이다. 메시지만큼 메신저의 매력도 중요하다는 점에서 아주 조금 아쉽지만, 오랜만에 온라인 강의를 들으며 현실에 필요한 이야기들을 다시 곱씹는 중이다. 노동자로 살면서 노동조합을 비난하거나 그 중요성과 필요성을 간과하는 사람들은 AI와 무관하게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문제나 해결책을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기 어렵다. 정답 없는 세상에서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거나 내일을 꿈꾸는 우리에게 AI와 카를 마르크스는 가까이하기에 너무 먼 주제일까. 그렇지 않다.

이 책에 등장하는 AI 관련 노동자들도 어디에서 일을 하든 어떤 일을 하든 결국 비슷한 상황과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혐오와 배제를 무기로 극단으로 치닫는 사람들이 넘치게 된 이유를 정치 유튜버에게만 돌리는 것은 매우 손쉬운 진단이다. 저자들은 마지막 8장에서 ‘인공지능 시대의 노동전략’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AI와 무관하게 인간의 문제로 환원된다. 기계가 아닌 사람에 대한 고민이 언제나 바탕을 이룬다. 그들의 결론과 나의 결론 그리고 너의 결론이 다를 수는 있으나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는 이론이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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