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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세트 - 전3권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월
평점 :
“서로 연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 위선자들이에요! 모두 아버지의 죽음을 원하고 있었어요. 파충류 한 마리가 다른 파충류를 잡아먹는다 이겁니다. 만일 부친 살해가 없었다면, 모두들 화가 잔뜩 나서 툴툴거리며 흩어졌을 거예요……. 구경거리겠지! 〈빵과 구경거리!〉라고 말하지 않던가요? 물론 나도 좋은 사람은 아니죠. 어디 물을 가지고 계신 분 없습니까? 제발 물 좀 마시게 해주세요!”(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이대우 역, 열린책들, 2009.12.20.)
톨스토이보다 도스토옙스키를 선호하는 독자들의 성향을 미뤄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스물여덟에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사면됐고 쉰일곱에 셋째 아들을 떠나보낸 경험이 『죄와 벌』, 『지하로부터의 수기』,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등 그의 작품에 직, 간접적으로 분명한 흔적을 남겼겠죠. 그러나 작가의 전기적 사실을 통해 소설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부차적입니다. 소설의 인물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되는 주제 의식은 조금씩 달리 해석됩니다. 인간의 욕망과 심리에 대한 내밀한 탐구, 사회적 상황에 대한 이해와 설명, 상속을 둘러싼 갈등과 충돌, 신과 인간 그리고 구원의 문제, 과학적 이성주의에 대한 반발 등 무엇을 읽어내는지 개별 독자의 관심과 나이와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버지 표도르, 첫째 드리뜨리, 둘째 이반, 셋째 알료샤, 그리고 사생아 스메르쟈꼬프는 뚜렷한 개성을 가진 인물들입니다. 형제들이지만 닮은 구석이 없고 각자 삶의 길이 다르죠. 서구의 합리주의와 니힐리즘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절 니콜라이 체르니솁스키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통해 이성의 힘과 공리주의를 강조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이에 반발합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고 외쳤던 프랑스와즈 사강의 생각은 아마도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어쨌든 우울하고 끈적한 분위기가 읽는 사람들 내내 답답하게 만들고 바닥으로 끌어내릴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생각은 신의 섭리, 전통 윤리에 대한 도전과 반항입니다. 도스토옙스키가 신의 죽음을 예견했을까요. 오히려 니체에게 영향을 준 러시아 소설가의 인간에 대한 관찰과 사회 변동에 대한 예민한 감각은 소설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소설의 내용이나 맥락과 상관없이 툭툭 던져지는 문장들 혹은 이반이 스메르쟈꼬프의 생각을 바꿔 놓은 장면들은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프로파간다』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이성적 합리주의와 니힐리즘의 영향을 받은 이반 역시 철학적 프로파간다, 즉 시대적 흐름과 유행처럼 번지는 사상에 동조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심리적 지배를 받은 스메르쟈꼬프의 부친 살해는 해석과 논쟁이 앞으로도 계속될 듯 싶습니다.
카프카의 『소송』에서 ‘법 앞에서’ 우화처럼 도스토옙스키는 ‘대심문관’ 에피소드로 자유의 대가는 ‘빵과 기적’을 주는 권위에 복종으로 언제든 대체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고 고통스럽더라도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 싶은 고뇌하는 소크라테스형 인간이 얼마나 될까요. 어쩌면 도스토옙스키가 원하는 인간형이겠으나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오히려 작은 이익과 안전한 미래, 물질적 풍요 앞에서 생각보다 많은, 아니 거의 모든 걸 포기할 의향이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러다보니 프로이트의 조카 에드워드 버네이스가 자기 PR용으로 남긴 저작 『프로파간다』가 새삼스럽게 읽힙니다. 인간의 욕망과 집단 동조, 권위에 복종하는 오류가 겹쳐 정치적 선전선동 못지않게 자본주의가 보여주는 환상과 유토피아에서 헤매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베이컨을 팔기 위해 의사를 동원하고, 젊고 예쁜 여성들에게 담배를 물려 선전하는 전략이 먼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연예인과 인플루서언서로 대상만 바뀌었을 뿐 대중의 선호와 호기심은 변함없이 계속되는 세상이 신기해 보이기도 합니다. 명품백과 수퍼카를 떠올릴 필요도 없고 베르너 좀바르트의 『사치와 자본주의』를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마치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아 놀랍기만 합니다. 속고 속이는 판매자와 소비자의 관계가 아니라 자기 욕망과 자유의지라는 착각에 대한 성찰이 우선입니다. 그 다음은 각자의 선택과 판단이겠죠.
러시아의 푸틴이 장기 집권할 수 있었던 바탕이 무엇인지, 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모스크바 상황을 들려주신 분,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라고 선언했던 조지오웰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림을 그리고 아트페어를 통해 관람객과 그림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메시지에 대해 고민하신 분, 문화예술 전공으로 전시 기획이나 그림에 대해 진로 고민을 하시는 분 등 어느 때보다 ‘프로파간다’라는 주제가 흥미로웠던 모임이었습니다. 토스토옙스키를 옆집 남편의 입장에서 둘째 부인 이야기와 곁들여 평가하는 수다도 즐거웠습니다. 같은 책을 읽고 이렇게 매번 다양한 반응을 들을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인공지능이 전해주는 정보들, 입맛에 맞는 답변들, 그 알고리즘 뒤에서 조종 가능한 프로파간다는 먼 미래가 아니라 바로 오늘의 고민과 경계 대상이라는 데 대체로 동의했습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은 얼마나 남았을까요. ‘자본주의와 욕망’을 주제로 한 세 번의 모임이 끝났습니다. 이제 ‘민주주의와 일상’을 주제로 여섯 권의 책을 만날 차례입니다.
우리는 사실 우리 자신에게 필연적으로 낯선 존재로 있고,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며, 우리 자신을 혼동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 존재이다’라는 명제는 우리에게 영원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 자신에게 우리는 ‘인식하는 자’가 아닌 것이다…….(도덕의 계보학, 프리드리히 니체, 홍성광 역, 연암서가, 2020.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