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한국을 말하다
장강명 외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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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는 메시지다’(『미디어의 이해』)라는 마셜 매클루언의 말은 언제나 유효할 예정이다. 1964년에 출간되었으나 60년간 변화된 과학기술의 급격한 변동에도 구조와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발신자-매체-수신자’의 소통 구조에서 레거시 미디어는 정보를 독점했다. 그러나 1인 미디어 시대에 접어들면서 언론의 신뢰도, 정보의 유통 시스템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수신자가 발신자로 거듭났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모두 정보 유통의 허브 역할을 하는 수신자이면서 동시에 발신자이다.

픽션인 문학의 역할과 의미가 축소된 건 미디어의 발전 속도와 그 궤를 함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설보다 흥미진진한 현실이 생중계되고, 뉴스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들이 실시간으로 전해진다. 소설은 갈 길을 잃고 중심을 잡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그건 소설가의 탓이 아니라는 항변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종이 신문은 소설 유통의 중요한 통로였으며 문단권력을 주도하던 영광의 기억도 간직하고 있다. 사람들이 소설을 읽지 않는 건, 아니 책보다 재밌는 미디어가 계속 출현하는 건 소설가나 출판사의 잘못이 아니다.

‘지금-여기’ 한국 사회를 픽션으로 보여주겠다는 한 신문사의 기획이 아니러니하다. 그러나 소설, 문학이 아니라면 피상적 현실을 톺아볼 수 있는 안목은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객관적 사실 뒤에 숨은 진실은 어떻게 말해질 수 있을까. 양극화된 정치와 이념 사회로 회귀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개탄한들 사람들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소란스럽고 자극적인 미디어다. 텍스트를 통해 상상하며 생각에 잠기고 이면의 진실을 찾기 위한 노력은 귀찮기만 하다. 하지만 ‘~카더라’ 통신도 하루 이틀이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진실은 드러나는 법이라지만 왜곡된 사실과 숨은 진실이 끝내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흔하다. 사람들은 지연된 정의는 관심이 없듯,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지금-여기가 중요하다.

결국,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라 이야기로 만들어졌을 때 명징해지는 은유와 상징이 아니라면 이 책은 읽을 필요가 없다. 장강명의 「프롤로그 소설 2034」부터 최진영의 「식단 삶은 계란」까지 21편의 짧은 이야기로 드러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은 독자 개인의 관점과 태도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 문제가 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개인과 대중이 문제다. 문제가 없는 게 아니라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태도가 문제다. 과연 그런가. 현실의 인식 방법은 소설이 아니라도 좋다. 다만, 무엇을 향해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는 사실에는 모두 동의해야 한다. 여기는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

어느 시대든 소설은 시대의 거울 역할을 해왔다. 개연성 없는 허구에 몰입하는 독자층이 두터워지는 건 시절 탓일까. 웹소설과 환타지가 현실에 대한 외면은 아니겠으나 현실 극복 의지라고 볼 수도 없다. 본격, 순수 소설이 우월감을 갖던 시대도 끝났다. 소설은, 아니 문학은 이제 과거의 빛나는 왕관을 내려놓고 지금-여기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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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 대한 연민 - 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방법
마사 C. 누스바움 지음, 임현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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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님 가운데 토막 같은 말씀,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도 한 생애가 필요하다. 자기 범죄를 부인하거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을 ‘용서’하는 일은 종교인도 어렵다. 타인을 향한 서운함에서 분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감정을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표현하고 처리할까. 인간의 본능에 가까우며 가성비 최고라는 ‘뒷담화’가 정답일까. 문제는 알고 외면하는 사람보다 무엇이 잘못인지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의 말과 행동을 합리화하거나 인지부조화로 극복하는 인간이 더 심각하다. 물론 이 유형에는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모두 포함된다. 공자님 가운데 토막 같은 사람도 견디기 어려운 세상이다.

마사 누스바움은 ‘타인에 대한 연민’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두려움과 혐오에 맞서는 대중 행동은 보복과 증오가 아니라 희망, 화해, 사랑이라고 강조한다. 포용적 연대를 지향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라 실천하기 어려운 덕목이 아닐까 싶은 회의가 든다. 넓게는 정권 교체마다 반복되는 과거 청산 혹은 정치 보복에서 좁게는 연인과 친구, 가족은 물론 직장동료, 지인에 이르는 ‘관계’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갈등에 이르기까지 인류 사회는 적절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문화와 관습에 따라 법률로 처벌하거나 공동체의 암묵적 질서로 배제하거나 개인적으로 보복하거나...

‘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법’이라는 부제에 낚이지는 않는다. 그런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모두 개싸움을 하는 시대에 혼자 우아하게 산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상대가 진흙을 던지는 데 우아하게 대처한다는 발상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허나, 폭력을 폭력으로 이길 수는 없다. 개같은 상대를 개가 되어 물 수도 없다. 그래서 마사 누스바움은 ‘두려움’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시도한다. ‘두려움의 군주제’라는 원제 뒤에는 우리의 정치 위기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저자는 ‘우아하게 건너는 법’ 따위를 언급한 적조차 없다.

현대인들은 사회경제적 지위가 불안해지고 계급과 계층 간의 갈등이 속출하며 기후 변화가 미래의 불안을 경고하는 시대를 지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침묵’을 지킨다. 그것은 두려움의 다른 표현이다. 희망의 반대말은 절망이 아니라 두려움이라는 해석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를 향한 철학자의 경고다. 현실을 외면하고 회피하며 그럴듯한 포장지로 자기를 감쌀 때, 타인을 향한 혐오에 내 일이 아니라며 침묵할 때, 상대를 공격하고 제거함으로써 두려움을 해소할 때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는 ‘희망’을 떠올린다.

이 책은 주로 미국 사회를 분석하고 있으나, 준거 집단을 미국으로 삼는 대한민국에도 거의 그대로 적용되는 이야기들이다. 정치적 분노, 차별과 혐오, 시기와 비난, 성차별과 여성 혐오 등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근본적인 원인을 살피고 분석하는 글이 부족한 현실에서 돈벌이에 혈안이 된 유튜버만 날뛴다. 분석과 해석이 아니라 감정의 배설과 증오 마케팅이 판을 친다. 이런 현실을 톺아볼 수 있는 차분한 시간, 넓은 안목과 사유의 도구를 제공하는 마사 누스바움의 태도는 시종 일관 차분하지만 날카롭다.

논리를 갖춘 객관적 태도는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숭고함이다. 글을 읽는 사람의 눈에 어떻게 비치든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글쓴이의 관점과 태도가 냉정하고 합리적일 때 비로소 새로운 논의가 시작될 수 있다. 감정적 선동이나 정답을 제시하는 오만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떤 분야에서 어떤 직업을 갖고 일하든 마찬가지다. 겸손과 성찰은 기본이며 조심스런 태도로 좌고우면해야 실수를 줄이고 자기 성장을 지속할 수 있다. 오랜 시간 누적된 사유의 흔적들이 배어 있는 글은 어떤 형태로든 아름답다. 편안하게 읽히지만 뼈를 때리는 문장들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깊이 사고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두려워하고 비난하기란 쉬운 선택지다. - 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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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읽는 법
류시현 지음 / 따비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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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이 『인간다움의 순간들』에서 “개인은 자기를 기록함으로써 태어난다.”라고 썼다. 어떤 블로그의 인상적인 기록 혹은 일기 혹은 단상들을 읽다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적이 있다. 나탈리 제인 데이비스의 『마르탱 게르의 귀향』,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 카를로 진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를 읽을 때처럼 미시사의 관점으로 한 개인을 통해 시대와 문화를 읽었다. 학창시절의 나이브한 귀여운 감성뿐만 아니라, 김연수의 말대로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버린 청춘의 고민, 자책, 방황, 불안에 이어 성장과 인정 욕구에 이르는 과정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나의 독서일기처럼, 오랜 시간 공들여 적은 누군가의 일상과 기록 그 많은 흔적들이 한 ‘개인’을 완성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역사다.

그렇게, 역사는 대단한 위인과 영웅들의 이야기로 구성되지 않는다. 내가 아이였을 때 『플루타크 영웅전』은 읽은 적이 있다. 천병희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다시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로저 에커치의 『밤의 문화사』를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든 이유는 분명하다. 역사는 세종과 나폴레옹처럼 뛰어난 개인뿐 아니라 이완용이나 히틀러처럼 저열한 개인의 충격과 영향에도 불구하고 이름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일상으로 채색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평생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친 류시현의 『역사를 읽는 법』은 감동 그 자체다. 역사는 동일한 사건에 대한 관점, 즉 사관史觀에 따라 전혀 달리 해석 가능하다. ‘사실은 없다. 오직, 해석만 있을 뿐.’이라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출토된 문화재, 텍스트로 남은 기록 등 숱한 사료를 재구성하고 연결지어 그들(he)의 이야기(story)를 만드는 작업이 역사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류시현은 그들의 이야기를 읽는 법, 역사를 보는 관점과 태도에 대하여 자신의 경험과 고민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결국 역사는 기록된 자료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지극히 사적인 관점으로 해석하는 즐거움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물론 사건의 인과관계를 살피고 시간 순서와 주고 받은 영향을 살펴 재해석하는 일이 독자 개인에게 버거울 수 있으나 주체적인 인식의 힘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모든 지식은 ‘동료 압박’이라는 착각과 검색 정보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 대개 대중적 역사서로 출판되는 책들은 재미와 가독성, 이면의 진실, 엇갈린 해석에 관한 것들이라면 류시현은 역사란 무엇인지, 그것은 어떤 의미가 있으며 우리 삶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과거의 기록으로서 텍스트가 아니라 오늘, 여기를 사는 우리의 문제를 살피라고 요구한다.

흔히, 역사를 ‘오래된 미래’라고 한다. 그래서 역사는 언제나 살아숨쉬며 오늘을 만들고 미래를 꿈꿔야 한다고 요구하는 듯하다. 기원과 시간성, 시대적 맥락과 시기 구분, 사료의 선택, 우연과 필연, 해석과 관점, 인물의 평가, 역사교육과 상상력 등 각 장은 에세이 형식으로 저자의 소회와 경험이 녹아 있어 감성 독자든, 인문 독자든 모두에게 감동과 통찰을 줄 수 있다. 독특한 형식과 서술이라서가 아니라 저자의 ‘진심’은 좋은 책을 만드는 기본 요소다. 강만길의 『해방 전후사의 인식』, 이영희의 『전환 시대의 논리』, 박세길의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님 웨일즈의 『아리랑』, 이사벨라 비숍의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등을 읽으며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에 만났던 이야기들을 떠올렸기 때문이 아니다. 같은 책을 읽은 사람 사이의 공감 때문도 아니다. 자기 삶에 열정을 다한 이의 겸손과 애정이 느껴졌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조금 따뜻해졌다.

“계속 여러 책을 읽고 있다. 그렇지만 역사가 무엇인지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겠다. 게다가 역사가의 역할과 임무가 무엇인지에 관해 여전히 고민하게 된다.” 이제 환갑이 된 역사가의 고백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없다. 겸손한 태도와 끊임없는 질문과 고민이 없는 책을 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시간은 없고 책은 많다. “역사학자가 되었지만, 인문학자가 되고 싶었다.”라며, “문제에 관한 갈증을 해소하고자 책을 준비했는데, 갈증이 심해져간다.”라는 고백이 가장 마음에 드는 개인적인 이유는 설명하기 어렵다. 이해와 공감은 관점과 태도에 기인한다.

생각을 유연하게 하고 싶다. 생각이 유연한 것은 균형 감각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삶, 나의 판단, 나의 결정 등을 정답이라고 주장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 맺음말, 3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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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 - 노르웨이에서 만난 절규의 화가 클래식 클라우드 8
유성혜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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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시간과 공간의 좌표 위에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관점을 달리하고 안목을 넓히는 일은 쉽지 않다. 자기 삶의 목적과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데도 대개 직업과 연봉으로 비교 지옥에 스스로 몸을 던진다. 지금 당신은 어디에 서서 무얼하고 있는가. 지금-여기here and now에서 ‘나’를 지탱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라 본 것을 그린다.”라는 뭉크의 말은 왜 우리 삶에 통용되지 못할까.

1863년에 태어난 뭉크의 시간은 노르웨이 크리스티아니아(오슬로)에서 파리, 니스, 베를린을 지나 에켈리에서 1944년에 멈춘다. 그가 관통했던 시간과 공간들 - 세기말 데카당스, 벨 에포크, 제1차 세계대전, 나치 점령, 노르웨이 피오르, 니스의 햇빛, 몬테카를로의 카지노, 북유럽의 추위와 강렬한 햇빛 등. 알콜 중독과 도박, 불안과 고독으로 절규했던 뭉크는 행복이나 성공과 거리가 멀다. 어머니와 누이가 죽고 아버지의 학대에 가까운 종교적 규율로 죄책감이 가득했던 유년 시절의 흔적 때문인지 거의 모든 인간 관계에 실패한다. 오로지 그림에 대한 열정 하나로 80년을 버틴 삶이 경이롭다.

뭉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절규>보다 <아픈 아이>를 한참 들여다봐야 한다. 말년에 그린 <별이 빛나는 밤>, 다그니 율을 그린 <마돈나>, 강렬한 첫사랑의 추억으로 남은 유부녀 밀리와의 <키스>가 뭉크의 절규다. 붉은 석양이 인상적인 에케베르그 언덕의 <절규>는 자연의 비명이다. 유성혜는 『뭉크』에서 “절규. 누가 처음 한국어로 번역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노르웨이어 스크리크Skrik는 있는 힘을 다하여 부르짖는 ‘절규’보다는 너무 놀라 지르는 외마디 소리인 ‘비명’으로 해석하는 게 더 적절하다. 이 그림을 더 정확히 이해하는 데도 ‘비명’이라는 단어가 도움이 된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듯, ‘절규’라고 번역한 사람 역시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이 소리를 내는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뭉크의 노트에 따르면, 소리를 내는 쪽은 인물이 아니라 자연이다.”라고 설명한다. 기나긴 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더움을 견뎌야 하는 노르웨이라는 공간적 상상력을 배제한 채 뭉크를 이해할 수는 없다.

불안과 공포, 외로움과 고독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뭉크는 공황 장애, 불면증, 정신 분열, 불안 장애, 환각, 피해망상 등 거의 모든 정신병적 증상들을 그림에 담아냈다. 낸 뭉크에 열광하는 사람은 위험하다. 뭉크의 그림을 통해 무엇을 읽어내든 그의 그림이 어떠하든 사람들은 각자의 관점으로 ‘본다.’ 에피파니epiphany는 ‘우연한 순간에 귀중한 것과의 만남이 주는 깨달음’을 의미한다. 호르몬이 우리 삶의 실질적 지배자라는 의학적 관점은 서글프지만 부정하기 어렵다. 의사 안철우는 호르몬과 미술의 만남을 에피파니가 아니겠냐는 듯 뭉크 씨에게 도파민 과잉이라는 처방을 내린다. 분노조절이 힘든 사람, 모든 게 남탓이고 자신의 말과 행동에 오류가 없는 줄 아는 사람, 언제나 주변 사람의 감정을 살피는 사람, 허무와 고독으로 무기력한 사람……. 이 모든 증상들은 어떤 호르몬이 부족한 걸까. 그림과 함께 적절한 음식과 처방을 달아놓은 『뭉크 씨, 도파님 과잉입니다』는 개인적 감상과 의학적 처방이 더해져 새롭지만 특별함은 없다.

『Edvard Munch』는 질 좋은 도록으로 충분하다. 김기태의 글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 이리스 뮐러 베스테르만의 글은 그림과 어울려 『뭉크, 추방된 영혼의 기록』을 읽을만한 책으로 갈무리하게 만든다. “나는 자신의 심장을 열고자 하는 열망에서 태어나지 않은 예술은 믿지 않는다. 모든 미술과 문학, 음악은 심장의 피로 만들어져야 한다. 예술은 한 인간의 심혈이다.”라는 말로 뭉크를 설명한다. 뭉크는 심장을 열고자 하는 열망으로, 심장의 피로 그림을 그렸다는 의미다. 좋은 글은 뭉크의 그림과 어울려 읽고 보는 즐거움을 배가 시킨다. 수많은 자화상을 통해 인간 뭉크와 그의 예술 세계를 들여다본 이리스 뮐러 베르테르만의 색다른 관점과 통찰력이 빛난다.

석판화가 아닌 유화 <절규>를 보고 싶었으나 경매가 1,200억이 넘는 그림이 예술의 전당에 걸렸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텍스트에 곁들여진 그림 혹은 그림에 설명으로 붙은 텍스트를 읽고 보며 뭉크의 <아픈 아이>, <키스>, <마돈나>, <뱀파이어>, <별이 빛나는 밤>만큼 자화상이 보고 싶어졌다. 이미경의 『뭉크의 별이 빛나는 밤』에서는 현지인으로 답사를 통해 뭉크의 흔적을 더듬으며 디테일하게 써내려 간 유성혜의 『뭉크』가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다. 객관적인 정보와 설명이 충분하고 뭉크 전시회에 맞춰 출간한 책이라서 어렵지 않게 살펴볼 만하다.

화가의 삶에도 ‘사랑’만큼 강렬한 경험은 없다. 김연수는 『청춘의 문장들』에서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라고 썼다. ‘청춘’을 ‘사랑’으로 바꿔 읽으면 뭉크의 그림에서 밀리, 다그니, 툴라의 그늘을 읽을 수 있다. 어머니와 누이 소피에, 아버지와 동생 안드레아스, 라우라 뿐만 아니라 어머니를 대신했던 카렌 이모까지 먼저 떠나보낸 뭉크의 생은 막내 여동생 잉게르가 정리한다. 숱한 메모와 기록들, 그가 몸담았던 크리스티아니아 보헤미안 그룹, 검은 새끼 돼지 클럽 사람들이 뭉크에게 준 영향과 흔적들까지 꼼꼼하게 살펴보면 뭉크와 그의 그림은 물론 당대의 사회, 문화를 함께 읽을 수도 있다. 지식과 정보가 넘쳐 그림 주변만 살피다 정작 스탕달 신드롬을 느낄 수도 있는 뭉크의 그림 앞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다. 아무튼, 예술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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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때가 오면 - 존엄사에 대한 스물세 번의 대화
다이앤 렘 지음, 황성원 옮김 / 문예출판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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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늙고 모두 죽는다.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선택의 영역이다. 주어진 조건과 환경이 다르다고 해도 삶의 목적과 가치, 방법과 태도는 오롯이 개인이 선택한다. ‘성공한 삶’, ‘만족스런 삶’의 기준도 다르지 않다. 그 선택과 기준에 따라 ‘좋은 삶’이 결정된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전제를 부정할 수 없다. 좋은 죽음은 좋은 삶만큼, 아니 때로는 좋은 삶보다 더 중요하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살고 싶은 욕망은 인간의 본능이다. 불로장생의 꿈은 유토피아처럼 영원히 이룰 수 없는 인간의 꿈이다. 그러나 노년과 죽음을 피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멈추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다이앤 렘은 80이 넘은 나이에 ‘나의 때가 오면’ 어떻게 할 것인지 여러 사람에게 묻는다. 남편이나 아내와 사별한 사람, 말기 암 환자와 주치의, 호스피스 종사자, 존엄사 지지자와 반대자 등 스물 세명의 인터뷰이에게 저자는 ‘죽음’을 묻는다. 아니 죽음에 대한 태도와 방법을 질문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보다 쉽지 않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

노화방지 혹은 젊음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에 비해 자신의 죽음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언제 죽을지 아는 사람은 없다. 대개 나이로 생의 마지막을 짐작하지만, 죽음은 예고없이 찾아온다. 그렇다면 마이클 헵의 말대로 평소에 사랑하는 사람과 저녁 식탁에서 죽음을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응급실, 중환자실, 각종의료기기, 요양병원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공식처럼 여겨지지만, 당사자, 가족, 주변인들의 생각과 감정은 제각각이다. 나, 너, 우리 죽음은 어디까지 왔을까. 가족과 친구, 연인의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타인의 죽음을 앞에서 삶의 허무 대신 ‘나’의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게 아닐까.

36년 동안 300만 명이 넘는 청취자가 <다이앤 렘 쇼>를 들었다. 탁월한 진행자였던 저자는 팟캐스트와 북클럽을 운영하며 지낸다. 존엄사 지지자와 반대자들의 생각을 모두 담은 이 책은 가십거리 예능이나 현란한 말장난으로 가득한 팟캐스트와 결이 다르다. 사려 깊은 태도로 ‘의료조력사망’의 관점, 정책, 문제, 대안을 고루 다룬다. 미국 오리건 주가 최초로 자발적, 적극적 안락사를 허용한 법률을 채택한 건 1998년이다. 이후 개인이 ‘의료조력사망medical aid in dying’을 이용해 자신의 고통을 언제 중단할지 선택하도록 허락한 곳은 현재까지 겨우 열 개 주와 워싱턴 DC뿐이다.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아래 몇 개 신문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의료조력사망’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가 생각하는 안락사와 조금 다르다. 의사조력자살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구체적인 범위와 방법에 대해서는 문화, 종교, 나이, 직업 등에 따라 생각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고통 받아야 하는 순간이 ‘나’에게 닥쳤을 때를 생각해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 책은 어떻게 죽을지에 관한 ‘방법’의 문제를 다룬다.

‘의료조력사(조력존엄사)’라고 하면 어감이 좀 다를까. 존엄사라는 말은 좀 나은가. 대한민국은 드디어, 올해 말 65세 이상 고령자가 전체 인구의 20%를 넘어서는 초고령 사회로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통계청에 따르면 고령 인구는 지난해 말 993만 명에서 올해 말 1051만 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이는 전체 인구의 19.2%에서 20.3%로 상승하는 것으로, 5명 중 1명이 고령자라는 의미이다. 연금, 정년, 주택, 의료, 복지 등 다양한 사회 문제와 연계된 ‘초고령 사회’ 진입은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대한민국이 늙고 있다.

이에 비해 2023년, 출생아 수는 23만 명이며 가임기 여성 1명이 가임기간(15~49세) 동안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를 의미하는 합계출산율은 0.72명이다. 한 해 30만명 정도 사망하는 대한민국에서 20여만 명의 아이가 태어난다. 교육, 경제, 국방 등 우리 사회 곳곳에 곧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거라는 예상은 어렵지 않다. 대한민국의 인구는 줄고 있다.

사람이 태어나고 살고 죽는 과정은 반복된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어디쯤 걷고 있을까. 각자의 나이, 종교, 직업, 학력, 재산 등에 따라 죽음을 맞는 방법과 태도가 다르겠지만 아름다운 마무리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법적, 제도적 장치가 미흡하고 사회적 합의가 부족하다면 서둘러야 한다. 인구 감소만큼 심각한 초고령 사회를 맞이하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하는 문제는 바로 ‘죽음’이다.

“내 가족, 주치의, 병원에 전합니다. 제가 정신적 또는 육체적 장애에서 회복할 수 있다는 합리적인 기대를 할 수 없는 상황일 경우 인위적인 방법과 거추장스러운 수단들을 동원해 제 목숨을 연장하지 말고 죽음을 허락해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최후의 시련을 다스릴 수 있는 약물을 자비롭게 투여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제 임종 순간을 앞당기더라도 말입니다. 저를 아끼는 여러분들이 이 절박한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일이라고 느끼면 좋겠습니다.” - 320쪽

81세의 저자는 앤 모로 린드버그의 말을 인용하며 공감과 지지를 보낸다. 그러면서 마지막 인터뷰이로 다트머스 대학 의대생인 18세 손자 벤을 선택한다. “나는 의료조력사망이 필요하다고 믿고 나한테는 내가 죽을 시간과 장소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난 그렇게 죽고 싶단다.”라며 이 책을 마무리 한다. 지식이 실천이 되고, 앎이 삶이 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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