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 1 - 상 - 2015년 개역판, 정치경제학비판 자본론 1
카를 마르크스 지음, 김수행 옮김 / 비봉출판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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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내게 매력이 없을 수 있듯, 신성한 고전도 나에게 울림이 없을 수 있다. 그런 책이 한둘일까 마는 태어나 읽은 책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책은 아마도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일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수없이 마주쳤지만 <경제학 철학 수고>를 제외하고는 2차 저작들만 읽었다. 몇번의 실패 경험이 원전에 대한 두려움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긴 호흡으로 언젠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 앉아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짧지만 남은 날을 내다볼 힘을 빌릴 수 있으리라는 기대 아닌 미련이 남아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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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개역판이 나오자마자 품절되고 안타까워하다가 다시 잊었다. 이제서야 2021년 11쇄를 샀다. 겨우 몇 천권도 안되는 서가의 책들 사이에서 자본론 1권은 다른 모든 책을 압도하는 듯하다. 지나친 의미부여가 아니라 그간 혼자 만든 마음의 빚 때문이기도 하다. 1989년에 초판이 나온 후 1991년, 2001년, 2015년에 걸쳐 다듬어진 문장에 뭐라 할 말이 없어진다. <2015년의 개역에 부쳐>을 읽다가 번역의 시간들이 눈앞에 떠올라 울컥했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자본론>을 쓴 마르크스에 비하면...번역에만 매달려도 한 평생이라는 한탄아닌 한탄이 새삼스럽다. 번역은 커녕 일독을 하는대도 일평생이 걸리는 사람도 있다.

​1권 1장 상품을 꼼꼼하게 읽었다. 번역자의 노고와 고민이 우둔한 독자 한명을 구하셨다. 놀랍게도 읽힌다. 그간의 숱한 2차 저작과 인용, 개념 설명, 이론과 적용을 통해 눈동냥을 한 탓도 있겠으나 천천히 읽기를 시작한다. 행여 오독은 재독으로 가리고 난독은 지독으로 이겨내며 눈이 침침할 때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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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에서 노동의 가치를 읽어내고 본래적 사용가치와 구분되는 교환가치가 화폐로 전이되는 과정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서술되어 있다. 문장의 호흡이 조금 길거나 설명과 논리가 건조하지만 충분히 읽을 수 있을만큼 다듬어진 번역이다. 시간이 많이 흐르고 세월의 두께도 한몫 하겠으나 각자의 재미와 즐거움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필요가 없다. 읽고 궁구하다 지칠 때까지.

상품과 상품의 교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노동가치의 문제는 화폐와 상품의 유통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의 연속선상에서 당시 상황을 통해 상품과 화폐의 유통 과정을 상세히 설명한다. 셰익스피어의 대사가 등장하고 고대 철학자들의 날카로운 통찰이 인용되어 경제학이라기보다 마치 사회학에 가깝다. 본질적으로 경제는 인간과 사회의 구조 그리고 그 안에서 작동하는 욕망과 가치의 교환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수밖에 없는 것일까.

화폐의 유통은 지금 현재도 그대로 적용되는 기본적 개념이지만 '퇴장화폐'라는 용어를 보는 순간 슬픔이 밀려왔다. 지불, 유통수단이 아니라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무한한 축적 가능성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화폐의 관계를 면밀히 살핀 다음 이제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살핀다.

고전 경제학과 당대 경제학자들의 이론에 문제점을 찾고 논리적 헛점을 지적하는 고단한 작업을 통해 마르크스가 바라본 세계의 변화 과정과 고민의 시간이 엿보이기 시작한다. 근본적인 문제를 살피고 본질을 헤아리면 현실과 미래가 조금 달리 보인다.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가는지 살피라고 했더니, 쿠이보노cuibono만 외치며 아전인수를 시작한 '기득권들'의 전쟁이 시작된 건가. 어느 한 놈도 국민을 팔지 않는 놈이 없다. 도대체 국민은 누구이며 어느 나라 국민인가.

상품과 화폐 그리고 자본의 차이를 분명하고 알기 쉽게 설명하는 자본론이 왜 쉼게 읽히지 않았을까. 배경지식의 부족이나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지 않을까. 흥미있고 재밌는 서술이다. 아재개그로 너스레를 떨기도 하고 비아냥거리기며 기존 이론이나 다른 경제학자들의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비틀어버리기도 한다. 분명한건 상품자본과 산업자본 그리고 이자 낳는 자본의 일반공식과 그 모순을 지적하는 내용이 흥미롭다는 점이다.

자연스럽게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가 등장했고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으로 접어들었다.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하는 과정, 노동력이 상품에 결착되는 과정또한 이미 익숙한 내용이지만 생생한 목소리가 분명하게 들린다. "자본은, 오직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의 소유자가 시장에서 [자기 노동력의 판매자로서] 자유로운 노동자를 발견하는 경우에만 생긴다."라는 문장이 그렇다. 노동과정과 가치 증식과정은 이제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으로 넘어가기 전 단계다.

긴 설명과 이론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간단할 수도 있어 보인다. 이렇게 길고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고전 경제학과 자본주의가 태동하며 본격적으로 궤도에 진입할 무렵의 다양한 이론들과 차별화된 '노동'에 대한 관점, 그 가치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는 지난한 과정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지구 반대편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는 손흥민을 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축구 종주국-맨체스터와 리버풀 등 노동자들의 유일한 낙이었던 축구에 미친 나라 영국의 150여 년전 이쪽과 저쪽을 살피면서 지금, 여기를 생각한다. 노동절이다. 누군가는 여전히 죽음의 외주화를 정당하게 여기며 누군가는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임금격차를 노력의 차이, 살아온 결과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얼만큼 나아진 걸까.

노동은 가변자본이다. 잉여가치율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단 한순간도 멈춘 적이 없다. 시급 인상을 자영업자들의 어려움으로 치환하며 을들의 전쟁으로 유도하는 그들보다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사회 경제적 계급 앞에 번번히 고개를....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각자의 관점과 태도가 자기 인생의 목표와 가치를 결정한다. 우리는 어디로 걷고 있을까.

하루 1850년 영국의 공장법은 하루 10시간으로 노동 시간을 규제한다. 그나마 법적 제한이 없는 산업 분야의 노동자들의 삶은 마르크스의 표현대로 단테의 상상한 지옥을 능가한다. 인간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끔찍한 행동을 해왔다. 날은 쉽게 저물고 시간도 생각보다 빨리 흐른다. 우리는 제대로 하고 있을까.

출판 마케팅에 대한 이해가 눈꼽만큼이라도 있었더라면 칼 마르크스는 <제10장 노동일>을 맨 앞에 배치했으리라. 확인해보니 <제15장 기계와 대공업>과 <제25장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을 제외하고 1권 전체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그만큼 중요하고 심각하게 당대 노동현실을 직시했다는 의미다. 스스로 밝히듯 상품과 화폐는 어렵고 딱딱하다. 처음부터 독자를 질리게 하지 않고 현실을 분석한 다음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상품과 화폐부터 차근차근 설명했다면 어땠을까. 혼자서 자본론 1권 전체를 재구성해 보았지만 훨씬 나은 방법이라는 데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제10장을 읽는 동안 왜 그간 자본론을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스스로 부끄러웠다. 진입장벽이 높아 아마도 긴장하고 읽은 제1편에서 번번이 넘어지지 않았나 싶다. 어쨌든, 11장 잉여가치율과 잉여가치량, 12장 상대적 잉여가치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고전 경제학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당대 경제학자들의 논리를 날카롭게 지적하는 분석과 체계적 설명은 놀랍다. 정교한 구조와 달리 설명과 예시, 문장 구석구석에는 위트와 재치가 숨어 있고 예상 반론에 대한 재반론 근거까지 숨겨 놓았다. 40대에 마르크스가 영국의 현실과 자본주의 구조를 바라보는 관점은 근본적으로 다른 곳에서 출발한다. 하나의 전제가 무너지면 이론 전체가 무너질 수 있는 위험성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자신감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사람은 늙어도 생각은 낡지 않은 사람을 만나기가 힘들다. 나이는 젊지만 관점이 늙은 사람이 더 많다. 한 인간의 성장과 성숙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무엇을 향해 어디로 걷든 관점과 태도가 현실을 바라보는 각자의 창문이 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며 자본론이 점점 흥미롭게 펼쳐진다. 자본론을 필사하며 읽는 동안 조금 더 천천히 그리고 넓고 깊게 세상을 바라볼 준비가 되어 있는지 나에게 물었다.

먼 옛날, 인간의 협업과 공동체 생활은 개별적으로 약한 존재인 인간의 생존 전략이었다. 농경사회를 거쳐 산업 혁명 이후에 '매뉴팩처'로 일컬어지는 공장은 가내수공업과 길드를 지나 본격적으로 자본주의적 성격을 띤다. 협업은 잉여가치 생산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으며 이는 분업으로 세분화된다. 협업과 분업은 전통적인 인간의 생산활동이었으나 공장제 수공업인 매뉴팩처 단계에서는 인간을 부품으로 전락시킨다. 굳이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1936)를 떠올리지 않아도 중장년층에겐 익숙한 방식이다. 대한민국의 눈부신 성장도 결국, 70년대 산업화의 역군으로 일컬어지는 노동자들에 의해 가능했기 때문이다.

"매뉴팩처 시대에 비로소 독립된 과학으로 등장한 경제학"은 '인간'을 지우기 시작한 게 아닐까. 생산성, 성장률, 통계 등 숫자로 표현되는 인간의 가치는 현재와 미래에도 변함없이 지속되지 않을까. 과거를 돌아보며 오늘을 살피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관점의 문제가 아니라 목표와 가치의 문제라는 사실로 귀결된다. '성장이냐, 분배냐'의 문제로 치킨 게임을 벌일 필요가 있을까. 성장이든 분배든 누가 얼만큼 가져가야 하는 고민보다 '인간'이냐 '자본'이냐의 문제로 환원할 순 없을까.

느린 호흡으로 읽다보니 이제 겨우 1권(상) 절반을 살폈다. 큰 흐름과 논리정연한 체계가 조금 보인다. 1800년대를 통찰했던 마르크스의 이야기가 왜 21세기에도 유효할 수밖에 없을까. 그것은 경제학 이론이나 천재의 혜안 때문이 아니라 여전히 대다수 노동자-스스로 아니라고 우기는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없이-들의 고통과 불행이 계속되기 때문이 아닐까. <팩트풀니스>에서 한스 로슬링은 인간의 삶이 얼마나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과거에 비해 말할 수 없이 풍요로워졌음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절대 빈곤과 삶의 질을 1800년대와 비교하는 게 가당치 않다. 그것은 몇몇 천재나 재벌들의 힘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일군 땀의 결실이기 때문이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아동노동 조사위원회 보고서』가 지속적으로 인용된다. 현재 우리 사회의 노동부가 이런 역할을 담당한다. 공장법을 제정하고 노동자들의 실태와 현황을 파악한다. 감독관은 법을 어긴 자본가를 기소한다. 노동자와 인터뷰한 내용을 지속적으로 인용하며 마르크스는 1800년초부터 중반까지 매뉴팩처에서 대공업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리카도와 존 스튜어트 밀, 맬더스(인구론 전체가 파렴치한 표절이라고 평가), J. S. 밀, A. 스미스 등 당대 경제학자들의 공과 과를 정확히 짚어가며 오류를 지적하고 '정치경제학'이 현실을 얼마나 도외시했는지 노동자의 관점에서 비판한다.

제15장 기계와 대공업은 180쪽 분량으로 1권 전체에서 가장 많은 분량이다. 엥겔스가 불어판, 독일어 4판에 추가한 내용이 포함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으나 협업과 분업을 넘어 매뉴팩처가 어떤 방식으로 상대적 잉여가치를 극대화하고 있는지 그 과정을 꼼꼼하게 살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용(아동노동 조사위원회 보고서 등)하며 잉여가치가 어떤 식으로 인간(성인, 아동, 여성 등 가족 구성원 전부)을 착취하는지 설명한다. 소름끼치는 것은 21세기의 김용균은 19세기에 출발했다는 사실이며 그것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채 계속된다는 점이다.

문제없는 제도와 완전한 행복을 이룩한 사회는 없다. 모든 사람이 만족할 만한 경제체제도 인류사회에 실현한 적은 없다. 하지만, 반성 없는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면 나만의 행복은 불가능하다. 타인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는 세상은 가능할까. '자유'와 '민주주의'는 '평등' 앞에서 갈등한다. 누구를 위한, 누구에 의한 미래일까.

게도 상식과 정의와 공정과 자유와 평등의 기준은 제각각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것처럼 노동자를 노동자라 부르지 못하는 노동부 장관을 보며 현대판 홍길동전을 보는 기분이다. 노동의 가치와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그토록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피땀흘려 싸웠으나 우리는 여전히 자본가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 그건 아마도 언젠가 나도 자본가가 되겠다는 욕망에 교육체계, 사회적 편견이 덧씌워진 결과가 아닐까.

절대적,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과 시간급, 성과급에 대한 분석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기본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팔것이라고는 몸뚱아리 밖에 없다는 한탄이 고급 지식 노동자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착각이 노동 경시 풍조를 만들어 온 게 아닐까. 화이트 칼라든 블루 칼라든 노동력을 제공하고 영여가치를 생산하는 역할은 크게 다르지 않다. 잉여가치가 자본으로 전환되는 과정은 눈물겹다. 이제 그 자본의 축적 과정에 대해 살펴볼 차례다.

아주 더딘 발걸음을 옮기며 길고 긴 호흡으로 찬찬히 살펴보며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현실과의 접점을 찾는다. 얼마나 달라졌을까, 어디까지 왔을까. 우리가 숨쉬고 사는 세상은 150여 년 전과 어떻게 변했을까. 양적 팽창과 물질적 풍요로움을 부정할 수 없으나 자본이 움직이는 시스템과 교묘한 잉여가치의 축적은 더욱 세련된 방법으로 그리고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보이지 않게 우리를 길들인다. 조금 다른 시선이 필요하다. 언제든, 모든 순간에.

자본시장에서 노동력을 팔기 위한 몸부림과 피나는 경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대학은 이미 자본의 하수인이 된지 오래다. 학과의 개설과 커리큘럼을 직접 설계하며 신입생 선발부터 입사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노동력의 임도선매는 소름끼친다. 분야가 달라지고 형태와 방법이 바뀌었을 뿐 가만히 살펴보면 마선생님이 고민하던 시절에서 현실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상당한 분량을 할애한 제25장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은 단순하다. 자본이 축적되는 과정에서 노동력의 수요가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가변자본의 비율은 상대적으로 감소한다. 그러니 노동력의 과잉, 산업예비군이 생기고 노동자 간에 경쟁이 치열해진다. 인구의 증가, 감소에 따른 변화가 아니라 자본 축적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구조적 문제다. 여기에 과학 기술의 발달 등 생산수단이 점차 노동력 감소를 촉발한다. 그래서 “가난한 나라에서는 대중들이 편안하게 살아가고, 부유한 나라에서는 대중들이 일반적으로 가난하다.”라는 역설이 가능해진다. 이후 제5절에서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등 실제 사례를 통해 이를 증명한다. ​

구체적인 자료와 현실을 다룬 부분은 어떤 소설보다 끔찍하다. 읽다가 잠깐씩 숨을 고르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1861)이 정확히 이 시대를 반영한다. 성인 남성 노동자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과 아이들까지 모든 인간의 생존 조건이 소설보다 참혹하고 생각보다 비현실적이다. 21세기를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물질적 번영과 삶의 질을 비교할 수 없다. 그러니 충분히 긍정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받아들이고 현실적 대안 마련에 집중하는 것이 현명할까.

급진주의와 온건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의 차이다. 기본 구조와 시스템은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자본가와 노동자, 정부의 역할이 비교할 수 없을만큼 정교하고 복잡해졌으며 국가마다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신자유주의가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흉터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여전히 노동자를 근로자로 명명해야 하는 현실 인식은 유럽식 사민주의나 변형된 자본주의의 제도 개선에 큰 걸림돌이다.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고 세상을 이해하는 관점의 변화는 끊임없는 공부와 자기 혁신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독서 현실, 토론 문화, 타협과 똘레랑스의 정신은 어디까지 왔을까.

긴 호흡으로 달려온 자본론 1권은 이른바 시초축적, 즉 자본의 근원을 캐묻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신학에서 원죄의 구실과 같은 정치경제학에서 시초축적은 땀흘릴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을까. 당연하게도 그 반대에는 임금노동자가 존재한다.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없으면 일하지 않고 먹고 사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자본주의제체를 창조하는 과정은 노동자를 자기가 소유하던 노동조건으로부터 분리하는 과정―한편으로는 사회적 생활수단과 생산수단을 자본으로 전환시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적 생산자를 임금노동자로 전환시키는 과정―이외의 어떤 다른 것일 수가 없다. 따라서 이른바 시초축적은 생산자와 생산수단 사이의 역사적 분리과정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에 비밀이 숨어 있다. 무소유는 법정 스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시초축적의 출발이다.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누구나 노동자가 된다. 지적 능력이든 육체적 노동이든 무언가를 노동시장에 내다 팔아야 한다. 형태와 방법이 고상하다고 해서 본질적인 관계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을 팔며 산다.

그 행위를 거부하는 일이 얼마나 힘겨우며 부질없는 짓인 줄 알기 때문에 모두 '건물주'를 향한 열망을 불태우는 걸까. 가장 편리하고 단순한 방법으로 유한계급이 되는 방법일 테니 연예인, 공무원, 정치인, 운동선수, 예술가, 종교인 할 것없이 모두 부동산과 건물에 쏟는 정성은 자본가가 토지와 생산수단을 소유하려는 욕망과 다름없다. 자본주의 시스템을 온몸으로 체감한 인간의 생존 전략이며 그칠 줄 모르는 당연한 욕망이다. 그러나, 그건 정의롭고 상식적인 세상과 거리가 멀다. 우리가 생각하는 공정과 합리의 정신은 열심히 일한 사람이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이라고 믿지만

태어나는 순간부터 삶의 조건이 다른 사람들이 촘촘한 자본의 그물망을 뚫고 희망과 행복의 길을 안내하는 네비게이션은 자꾸만 출시가 늦어진다. 아니, 어쩌면 만들지 못하는 건가. 수많은 경제전문가, 사회학자, 정치인이 나서지만 현실은 우리의 바람과 멀어진다. 어찌보면 이유는 단순하다. 자본가가 아니어도 제 잇속만 차리는 소수에게 집중된 권력과 자본 때문이다. 이해충돌 방지법, 김영란법이 그들만의 리그, 침묵의 카르텔을 깰 수 있을까. 무엇을 위해, 어디를 향해 우리는 나아가는 걸까.

농민들로부터 토지를 빼앗고, 길드를 해체하고 가내 수공업이 사라진 자리에 매뉴팩처와 대공장이 들어서며 세상을 바꾸는 동안 그 달콤한 열매는 누가 다 가져갔을까. 자본주의적 차지 농업가가와 산업자본가의 탄생 과정은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근대적 식민이론으로 마무리되는 1권은 서유럽에서 미국으로 그 시선을 돌린다. 지역적 특색과 국가별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른 형태로 자본주의는 변화해왔다. 우리가 사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자본주의는 안녕하신지 모르겠다. 아주 오래된 옛날 이야기를 듣는 기분으로 마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영국의 자본주의 탄생과 현실을 넘어 우리가 걸어온 흔적들이 보인다. 자본론은 경제학 이론서가 아니라 당대 정치사회의 일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역사이며 인간의 탐욕과 현실의 삶을 조망하는 돋보기와 망원경 역할을 동시에 하는 책이다. 이제 2권으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과 축적 방식, 또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는 개인 자신의 노동에 토대를 두는 사적 소유의 철폐, 다시 말해 노동자로부터 노동조건을 빼앗는 것을 기본조건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 10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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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만든 사람
최은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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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1월을 좋아한다. 가을도 겨울도 아닌 11월은 인디언식으로 이름을 붙이자면 ‘쓸쓸해서 옷깃을 여미는’ 달이다. 끝도 시작도 아닌 어색한, 달력에서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놓은 그 11월. 나란히 선 두 개의 1자가 가까워질 수도 멀어질 수도 없는 애매한 거리의 그 11월. 한해 곡식을 거두고 단풍으로 물든 화려함을 지나 낙엽이 지고 앙상하게 나목과 회색빛 하늘의 그로테스크한 표정이 오히려 안도감을 준다. 흰 눈으로 덮여 환상을 품은 동화 나라 같은 겨울이 오기 전 그 11월은 한없이 부드럽고 헤픈 봄과 너무 뜨거운 열정이 부담스러운 여름과 전혀 다른 표정이다. 그 어느 계절에도 속하지 않는 듯 저만치 혼자 팔짱을 낀 모습이 11월의 맨 얼굴이다. 고통을 견디고 슬픔을 이겨내기 위한 몸부림과 비교할 수 없는 차디찬 명징함,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을 듯 단단한 표정으로 멀리서 관찰하듯 11월은 그렇게 사람들을 바라본다.

물론, 북쪽의 11월과 남쪽의 11월은 다르다. 각자 선 자리에서 다른 풍경이 보이듯, 최은미의 소설집 『눈으로 만든 사람』에 실린 아홉 편의 단편을 읽고 나서 11월의 무표정한 얼굴이 떠올랐다. 체념도 인내도 아닌 명징한 표정의 얼굴들이 스친다. 사람과 사람 사이 놓인 그 수많은 감정들 – 사랑, 증오, 환희, 고통, 애틋함, 연민, 안타까움, 회한, 공감, 후회 같은 것들이 없을 리 없다. 삶은 때때로 잠시 내뱉는 한숨 같은 것이다. 우물쭈물할 틈도 없이 시간은 지나가 버리고 지나간 일들은 상처가 되거나 아쉬움을 남긴 채 ‘추억’이라는 이름의 포장지를 뒤집어쓰기도 한다. 허나, 사는 동안 사람은 명쾌한 답을 얻을 만큼 그리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최은미는 영지, 나리, 강윤희, 강수영, 승미, 은석, 창용, 은형... 들을 통해 그 이유를 설명하는 듯하다.

오랜만에 아주 잘 쓴 소설을 읽었다. 소설집 한 권으로 최은미를 평가하기 어렵지만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는 미시적 방법에 흡입됐다. 직접 보여주지 않되 비껴가지 않기란 쉽지 않다. 본질에 천착하되 분명하게 설명하기도 어렵다. 최은미는 체험이 아니고서는 건져 올릴 수 없는 디테일을 통해 사실성을 확보하고 인물들의 감정선을 놓치지 않는다. 작위적인 느낌도 없고 억지스런 설정도 보이지 않아 잘 읽혔다. 개인차가 있겠으나 나는 디테일을 놓치고 정교함이 떨어지는 소설에 몰입하지 못한다. 특히, 사소설이라 명명될 만큼 개인의 감정에 몰입하고 그 감정을 일반화하지 못한 경우에는 아주 난감해진다. 공감하는 독자가 없지 않겠으나 소설의 역할과 의미를 의심케하는, 아니 소설 읽는 재미를 반감시키는 소설이 점점 늘어가기 때문에 소설 읽기에 점점 흥미를 잃어가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최은미의 소설은 ‘여성/가족’을 주제로 독서 모임에서 선정한 책이다. 9편의 단편의 주인공은 모두 여성이다. 그들이 기억과 현실이 맞닿는 지점이 고통스럽게 전해진다. 소설을 사회학으로 읽을 수는 없으나 각각의 인물이 살아온 이력과 그들이 놓인 상황은 그대로 우리들의 현실이며 과거이자 미래다.

「눈으로 만든 사람」, 「나와 내담자」, 「내게 내가 나일 그때」는 연작으로 읽힌다. 소설집 전체가 옴니버스식 구성을 취한 듯 하나의 주제로 수렴된다고 하면 지나칠까. 친족성폭력 앞에 무력한 주인공은 처절한 절규와 분노를 선택하지 않는다. 아니 최은미는 지금, 여기 놓은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굳이 상처를 헤집고 고통을 설명하는 대신 과거의 기억과 현실의 상황을 객관적 거리에서 묘사하듯 담담하게 서술한다. 독자에 따라 전혀 다른 맥락으로 읽을 수 있겠으나 적어도 감정이 서사를 잡아먹지 않도록 조절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할 만하다. 「보내는 이」, 「여기 우리 마주」, 「11월행」, 「점등」은 조금 다른 이야기로 읽히지만 여전히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섬에 관한 이야기다. 불가해한 관계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건 어쩌면 모든 소설가의 운명이 아닐까. 그것이 연인이든 부모, 형제든 ‘이해’ 불가능한 타인에 대한 관심이 아이러니하다. 허나, 모든 인간은 또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조금 다른 관점에서, 소설적 상상력이 아쉽다. 남성 화자로 쓴 단편이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최은미의 소설을 모두 읽지 않은 탓이겠으나 사건과 서사의 힘이 주인공들을 이끌어나가는 이야기도 듣고 싶어졌다. 문학이라면, 아니 소설에 대해서는 모두 할 말이 많다. 읽는 재미, 다양한 상상력과 작가에 대한 매력, 현대소설과 고전의 차이, 시대마다 다른 주제와 시선들, 가장 쉽고 가장 친근하며 가장 매력적인 ‘이야기’를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 형식과 내용은 변치 않고 많은 사람에게 관심을 받는다. 소설이 전하는 슬픔과 기쁨이 오롯이 현실과 닿아 있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세상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일 터.

*단편 「美山」, 「내게 내가 나일 그때」 부근을 읽을 때 문득 생각나서 11월 이야기를 끄적였다. 그리고 단편 제목 「11월행」을 보고 조금 놀랐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기시감, 타임 루프, 평행이론 같은 것들이 실제로 현실과 무의식을 넘나들며 우연에 우연을 더할 때. 책은 개별 독자가 온몸으로 읽을 때 비로소 비밀의 문을 활짝 열고 미처 자기도 알지 못했던 부분까지 펼쳐 보여준다. 내린천휴게소에 가 무망한 산 그림자를 보며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어졌다. 내게 내가 나일 그때가 내겐 언제였는지 알 수 없으나 유정이 창용오빠를 만난 그 휴게소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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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질문들 - 현대 과학의 최전선
이명현 외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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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묻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플라톤의 말은 지나칠까. 질문하지 않는 사람은 습관적으로 숨을 쉴 뿐일까. 들여다 볼 분야와 대상은 점차 늘어간다. 단순한 호기심과 관심을 넘어 사람들이 움직이는 목적, 세상이 흘러가는 방향이 궁금하다. 기본적으로 문학과 역사와 철학이 바탕이라고 하지만 과학과 예술은 응용 분야가 아니다. 한 분야에 천착한 사람들의 성과와 눈부신 성과도 좋지만 “동시대성을 이야기하면서 과학을 빼놓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아니, 과학을 이야기해야만 동시대를 호흡하고 향유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과학을 이해하는 것, 과학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 더 나아가서 과학을 누린다는 것이야말로 현대적이 동시대적인 태도이자 삶의 양식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지금부터 2,600년 전쯤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주장했다. 엠페도클레스가 ‘물, 불, 흙, 공기’라고 발전시킨 생각도 먼 옛날의 돌도끼를 던지던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인류 문명발달의 척도는 과학이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알기 어려운 분야도 있고 한동안 벽에 부딪쳐 머물러 있는 분야도 있다. 『궁극의 질문들』은 지금,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과학의 첨단을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인터넷 이전과 이후의 인간은 사고방식은 물론 삶의 태도까지 전혀 다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에서 길을 잃은 애매한 세대의 기준을 마이클 해리스는 1985년생으로 잡는다. 이전에 태어난 세대의 혼란과 아날로그의 추억은 적응을 더디게 하지만 이후 세대는 너무나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디지털, 인터넷 맞춤형 인간으로 세상을 산다. 이들의 축복을 나는 ‘지식의 일반화와 대중화’로 표현한다. 15세기 활판 인쇄술이 종교개혁을 이끌어 중세의 벽을 무너뜨렸다면 21세기 인터넷은 지식의 독점과 권력을 형해화해버렸다. 피터버크는 『지식은 어떻게 탄생하고 진화하는가』에서 ‘지식의 절반은 어디서 찾으면 될지 아는 것’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18세기 영국 시인이자 평론가 새무얼 존슨이 친구 보스웰에게 말했듯이 “지식에는 두 종류가 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어디서 관련 정보를 찾을 수 있는지 아는 것이다. 한 주제를 조사하려 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해당 주제를 다룬 도서 찾기다. 이는 도서 목록을 보거나 도서관의 책 표지를 살펴보는 과정으로 이어진다.”라고 진단했다. 19명의 저자를 통해 각 분야에서 관련 정보를 얻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과학의 최전선에서 각자의 분야에 몰입하는 연구자들의 이야기는 그대로 인류의 최대 관심사일 것이다. 우주, 생명, 행성뿐 아니라 통계 물리학, 네트워크 과학, 인공지능 등 전통 과학에서 첨단과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현대인의 독서 습관과 입맛을 고려한 책이다. 그 장점은 그대로 단점이 된다. 서너 쪽 분량의 짧은 글들은 잘 차린 뷔페가 아니라 시식 코너의 맛보기에 불과하다. 본문 200쪽이 안 되는 분량에 19가지 주제를 담았으니 깊이를 포기하고 넓이를 확보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래도 읽는 행위를 통해 ‘관련 정보’를 확인하고 그 고리를 연결하는 작업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입자물리학, 양자역학, 진화론, 기후위기, 통섭, 코로나 시대의 종교 등의 주제는 과학이 연구자의 실험실이 아니라 세상 밖으로 나와 사람들과 소통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명현의 서론처럼 과학에서 최전선, 궁극이란 결국 인간의 삶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생각보다 빠르게 변한다. 느낄 겨를도 없이 지나가는 계절처럼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이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순식간에 달라진다. 기술발달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일반인을 위한 교양으로서 과학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으로서 세상의 흐름과 맥락을 파악하기 위한 과학에 대한 설명으로는 충분해 보인다.

교양이라는 말이 사라진 시대다. 책이 아니면 지식과 교양을 얻기 어려운 시대를 지났으니 교양에 대한 새로운 의미 부여가 필요하겠다. 예술적 감수성, 인문학에 대한 이해, 과학적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 어느 시대인들 환영받지 못할까마는 누구나 고급지식과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고 믿는 시대에는 오히려 지식과 교양을 내면화한 사람을 찾기 힘들다. 근사한 포장지로 사용되거나 보여주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자기 삶의 주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교양이 오히려 귀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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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과학이 필요하다 - 거짓과 미신에 휘둘리지 않고 과학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힘
플로리안 아이그너 지음, 유영미 옮김 / 갈매나무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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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무엇을 믿어야 할까요? 요즘처럼 헷갈리는 세상에서 무엇을 신뢰할 수 있을까요? 과학의 세계를 여행하며 마주치는 중요한 생각들은 우리가 세상을 제대로 보도록, 세상에 쉽사리 속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 14쪽

‘불신과 혐오를 넘어설 지적 모험을 시작하며’라는 제목을 단 프롤로그 첫 문장이다. 서로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넘치는 세상이다. 우리 편은 선이고 저쪽 편은 악이라는 이분법이 판친다. 어제오늘 일이 아니니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정치, 사회뿐만 아니라 가정, 직장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자기 생각의 논리와 패턴, 오류와 허점을 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개인적 이해득실, 정파적 세력 다툼으로 침묵의 카르텔이 작동한다. 그 공고한 현실 앞에서 과학은 과연 증오와 갈등, 불신과 혐오를 넘어설 도구를 제공할 수 있을까.

과학저널리스트이자 물리학자인 플로리안 아이그너는 “과학은 우리가 모두 함께 신뢰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나가는 활동”이라고 선언한다. 서로 다른 상식, 각자의 기준, 높낮이가 다른 관점은 타인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작동한다. 누구나 신뢰할 만한 진리, 모두가 합의한 질서,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원칙이 존재한다면 인류사회의 갈등과 전쟁은 훨씬 줄어들지 않을까. 도덕의 최소한이 법이라고 생각하지만 정교한 논리와 내적 정합성보다 더 중요한 건 그 법을 이용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람이다.

과학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수학에 기초한 명징한 과학의 세계가 그 어느 분야보다 확실하고 분명한 정답을 제시할 것 같지만 과학자의 태도와 방법에 따라 숱한 오해와 착각만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플로리안 아이그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과학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한다. 과학 대신 직감을 믿을 수는 없다. 라마누잔의 직관이 수학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활용한 예를 들어 설명하기도 하지만 대개 과학은 인간의 삶을 여기까지 이끌어 온 가장 정교한 사고체계에 해당한다.

생각하는 힘을 길러 세상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관찰하고 타인을 이해하는 폭을 넓히기 위한 과학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저자는 이 책을 과학에 대한 사랑 고백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과학 자체에 대한 깊은 애정과 신뢰가 곳곳에 묻어난다. 그 대상을 사랑하는 사람의 글은 자연스럽게 독자의 관심을 유도한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설명도 중요하지만 이성과 논리, 합리적 태도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오히려 애정과 관심도 필요하다. 힐베르트, 버트런드 러셀, 헴펠, 러커토시 임레, 토머스 쿤,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과학자들을 등장시켜 이들의 과학적 태도와 방법이 세상을 어떻게 조금씩 바꿔왔는지 설명하는 부분들이 인상 깊다. 인류사회에 공헌하기 위한 원대한 꿈을 안고 과학자가 되는 이는 드물다. 정교하고 명징한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로 시작해서 맹목적 믿음과 애매한 추측을 걷어내는 과정에 매혹된 사람들이 과학자다. 나름의 이유로 과학에 입문하고 자신의 연구에 몰두한 결과물이 세상을 조금 나은 곳으로 만들어왔다. 다만 저자가 주목한 것은 위대한 성과물이나 천재들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그 과정에 필요한 과학적 사고의 중요성이다.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열린 자세, 반증 가능성을 동반한 과학 이론,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은 인간과 세상의 숨은 비밀들이 주된 관심사다.

학창시절, 겨우 세상에 눈뜰 무렵 문과와 이과로 나뉘고 다시는 그 벽을 넘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야 하는 교육제도 탓은 아니겠으나 합리적 사고, 과학적 태도가 익숙하지 못한 문과형 인간들이 세상을 주도하는 난장판에 이성에 바탕을 둔 논쟁이 오가고 논리적 근거를 앞세운 대안들이 제시될 수는 없을까. 저자가 말하는 우리에겐 과학이 필요하다는 말은 이론과 지식이 아니라 타인과 세상을 판단하는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를 돌아보라는 충고다. 열린 자세로 경청하고 자기 생각과 행동이 변할 수도 있다는 여지가 남아 있다면 우리 앞에 생이, 저기 저 세상이 조금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자신을 바꾸라는 충고는 이기적 기회주의자로 살라는 조언과는 결이 다르다.

우리는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기에 그들보다 조금 더 멀리 볼 수 있습니다. 거인의 어깨 비유는 과학의 발전을 설명할 때 애용되는 비유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발을 디딘 거인이 그리도 커보이는 것은 그들 역시 다른 사람들의 어깨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거인은 없고, 서로 키가 다른 난쟁이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피라미드만 있을 뿐인지도 모릅니다. - 2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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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4-22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읽기 좋게 정갈하시네요. 잘 읽고 갑니다.

cognizer 2022-04-23 09:06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제니 오델 지음, 김하현 옮김 / 필로우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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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산텔라는 “일을 미루는 사람이 그러듯이 결코 직선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한 가지 일에서 등을 돌려 다른 일로 향했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일은 차츰차츰, 조금씩 진행될 뿐이다. 아무것도 구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지식을 손에 넣고 욕망을 채울 수 있으리라.”(『미루기의 천재들』)는 말로 세상의 모든 미루기의 천재들을 빙자한 게으름뱅이에게 용기를 주었다. 일찍이 마르크스의 사위 폴 라파르그가 주장한 『게으를 수 있는 권리』는 자본주의형 인간의 탄생을 예고했음이 틀림없다. ‘개미와 베짱이’는 모든 게으른 자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베짱이처럼 굶어 죽을 처지라는 극단적 사례가 아니라면 우리는 얼마나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피땀 흘려 일해야 하는가. 욕망의 크기를 줄이고 삶의 방법과 태도를 바꾸면 전혀 다른 세상이 열리지 않을까. 고대 철학자들이 말한 행복의 조건과 현대인의 행복은 그 결이 다를까. 관습적 사고를 깨뜨리는 제목을 달고 등장하는 수많은 도발적 책들을 가끔 집어 든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류의 책은 보지 않았으나 각종 배신 시리즈와 전복적 사고를 유도하는 책은 마다할 이유가 없다. 깊이와 넓이가 어느 정도 확보되어 주관적 편향에 흐르지 않는다면 저자의 경험과 생각의 조각들은 대체로 밴드왜건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수도 있다. 생각 없이 살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오래된 금언이 ‘나’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믿는 수많은 헛똑똑이를 위해 이런 종류의 책은 멈추지 말고 정수리에 찬물을 들이붓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렇게 열심히 살 필요가 있나?”라는 깨달음은 촌각을 다퉈 ‘노오력’의 끝을 본 사람이 뱉을 수 있는 질문이다. 가보지 않은 길을 예측하고 추론만으로 진리를 확신할 수는 없다. 하루 3시간만 일하면 충분하다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나 인류의 역사는 노동 시간 단축의 역사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리오 휴버먼에게 현대인의 삶은 자본으로부터 소외된 기계적 노동자, 중세의 농도의 삶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내세우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자발적 노예로 살아가기 쉽다. 자본주의 욕망과 가상세계의 밈들이 현대인의 뇌를 점령한지 오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은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천정에 자기 망상을 투영하거나 방바닥에 엎드려 장판을 디자인하는 법과는 거리가 멀다. ‘열심히’ 안 해도 ‘잘’하면 되는 나이와 위치가 되는 일의 기쁨과 슬픔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무언가 계속하고 있는 것’이라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제니 오델의 데뷔작은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매력적이다. 누가 얼마나 열심히 사는지 그 치열함으로 부와 권력이 나눠진 시대를 나는 알지 못한다. 더구나 현대인의 하루, 평범한 사람들의 인생에 노력과 열정이 빠져 좌절하거나 실패하는 경우도 드물다. 도대체 우리는 어떤 삶을 원하는가.

손바닥 안에 네모난 화면을 들여다보면 그 어떤 환각제보다 강렬한 세상이 펼쳐진다. 욕망을 자극하고 쾌락을 주며 웃음과 눈물을 창조한다. 디지털 디톡스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의 생각에 동의하기 어렵지 않은가. 그게 좋으면 그만인 세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이라는 말은 일시적으로 소비될지언정 변화를 일으킬만한 트렌드로 자리잡긴 어렵다.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고 공원에 앉아 새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꽃이 지고 바람이 부는 계절을 느끼는 일은 대개 일시적 휴식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하루하루 우리 삶을 돌아보면, 그 시간이 누적되어 자기 인생이 된다고 해도 괜찮은가. 왜 다르게 살 순 없을까. 정말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고,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인가. 저자는 독자를 다그치지 않는다. 조용한 목소리로 쓸모없음의 쓸모에 생각해보라고 속삭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그 자리에서의 저항”이며, 이는 곧 “스스로를 자본주의적 가치 체계에 쉽사리 이용당하지 않는 모습으로 만드는 것”이다. 자기만의 저항법은 매우 중요하다. 각자 선 자리가 다르다. 바틀비처럼 아무 힘도 없어 보이는 사람도 자신의 위치에서 자기 삶을 단단하게 지켜내려는 저항은 그 자체로 숭고하다. 저자는 상업적 소셜 네트워크, 즉 관심 경제에 관심을 집중한다. 지금, 현재 우리의 삶을 특징짓는 여러 가지 요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관심 경제다. 디지털 디톡스가 필요한 시대를 살면서 그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개인적 성공과 성취가 어떠하든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긴 매우 어렵다. 생산성이라는 신화에서 벗어나 저항, 유지, 회복, 돌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시점이다. “악당은 상업적 소셜미디어의 침략적 논리이며, 이득을 취하려고 우리를 불안과 질투, 산만한 상태에 머무르게 하는 소셜미디어의 금전적 동기다. 더 나아가 악당은 이러한 플랫폼에서 자라나 오프라인의 자기 모습과 실제로 살아가는 공간에 대한 사고방식에 악영향을 미치는 개인주의와 퍼스널브랜드 숭배다.”(20쪽)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은 없다.(15쪽) 바쁜 일상에서 잠시 맛보는 휴식은 달콤하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재충전하는 시간도 소중하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만들어 가는 건 자기 자신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사치도, 시간 낭비도 아니다. 오히려 의미 있는 생각과 발화의 필수 요소다. 자기 삶의 소중함을 자각하는 순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은 세상의 기준과 세속적 성공에서 벗어나 조금 다른 삶을 꿈꾸는 사람들의 태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건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획일적 욕망을 꿈꾸는 세상에서 무지개처럼 다양한 빛깔로 살아가는 건 멋진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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