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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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환은 심장을 동경하듯이 인간의 유전자에는 폭력이 내재해 있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다. 영화 <뮤직박스>를 거쳐 <인생은 아름다워>, <베를린 천사의 시>, <쉰들러 리스트>를 보고 <피아니스트>에 이르기까지 난 주로 각색된 이미지를 통해 아우슈비츠를 기억했던 것이다. 사실에 바탕을 둔 역사적이고 체계화된 방식으로 유대인 학살에 대해 공부하지 못했다. 이 책 저 책을 통해 단편적으로 혹은 인상적으로, 피상적으로만 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현실이고 나의 역사 인식의 한계이다.

그래서 좀 더 가까이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아픈 기억을 훑어내듯이, 차마 감았던 눈을 다시 뜨듯이 지나간 시간을 들여다 볼 때가 있다. 간접적인 추체험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준다. 대학에 들어가 광주 비디오를 봤을 때 느꼈던 충격이 그러했다. 이후 크게 심호흡을 하고 세상을 바라보면 온통 절규와 혼돈으로 가득했으며 비관적 전망으로 암울했다. 지금도 기본적인 태도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면 과장일까?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살아 숨쉬는 보고서이다. 그녀 역시 유대인이었으며 시온주의자들을 위해 활동하다 체포되어 심문을 받은뒤 1933년에 프랑스에 망명한 뒤 1941년 다시 미국으로 망명한 한나 아렌트는 2차 세계 대전의 포화를 피해 떠난 수많은 유대인 중 하나였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수많은 유대인 지식인 계층 중 한 사람이었지만 그녀가 남긴 논쟁거리는 여전히 잠재워지지 않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책의 말미에 언급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이다. 유대인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만한 이 개념은 아이히만 개인의 문제에서 인류에게 내재해 있는 보편적 원리의 개념으로 바꿔버린 데 있다.

히틀러나 괴벨스, 아이히만으로 대표되는 개인들의 경악할만한 범죄 본능이나 야만적 폭력성에서 그 이유를 찾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당시 상황으로 비추어 볼 때 저자의 개념이 얼만큼 커다란 후폭풍을 일으켰을지는 짐작이 간다. 어쨌든 정치 철학의 지평을 연 그녀의 저작 중 가장 대중적이고 쉽게 읽히는 책이라는 데 위안을 가지고 책장을 열었다.

유대인 학살의 주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은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 비밀 경찰에 의해 체포된다. 다음 해에 예루살렘 지방법원에서 독일인 변호사 세르바티우스 박사의 도움을 받아 재판을 받지만 교수형에 처해진다. 예정된 수순을 밟듯 진행된 재판에서 인류에 대한 범죄(mankind of crime)와 인간성에 대한 범죄(humanity of crime)라는 미묘한 관점을 짚어내는 저자의 눈이 날카롭게 번득인다. 그녀 자신이 유대인이면서도 미국에서 이 재판을 취재하기 위해 이스라엘로 날아간 저자의 생각은 <뉴요커>에 게재된 이 책의 내용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이히만을 통해 국가 권력에 의한 한 개인의 희생이라는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본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450만에 600만으로 추정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대학살의 책임을 몇몇 개인에게서 찾는다는 것 또한 희극에 가깝다. 유리 상자 안에 들어앉아 원숭이처럼 살아남은 자들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아이히만에 대한 동정심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회의와 분노를 먼저 확인하게 되는 것이 이 책의 의미이다.

유대인 학살에 대한 과정과 방법은 이 책에서 부수적으로 다루어진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소에서 확인된 사실들을 재삼 언급하지도 않는다. 15여년이 흐른 후에 뒤늦게 체포된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은 저자에게 새로운 의미로 보여졌을 것이다. 미국에서 건너간 그녀의 시선은 동족을 살해한 살인자의 재판을 바라보는 시선은 분명 아니다. 이 책의 가장 큰 재미는 여기에 있으니 직접 확인해 볼 일이다.

전체 15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추방, 수용, 학살로 이어지는 3, 4, 5장이 잘 알려진 내용이고 나머지 부분들은 아이히만의 활동과 행동 반경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그리스, 루마니아, 헝가리, 스로바키아에 이르기까지 전 유럽이 참여한 이송과 학살센터에 관한 증거와 증언들이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아이히만에 대한 판결과 항소 그리고 처형으로 끝을 맺는다.

한 번 시도된 악은 반드시 인류에 의해 재발할 수 있다는 그녀의 후기가 섬뜩하게 읽힌다. 난징 대학살이나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즈 등 헤아릴 수 없는 학살의 예가 있다. 얼마나 죽었나가 문제가 아니라 왜 죽였냐가 문제다. 명분이 무엇이든 방법이 어떠하든 여전히 계속되는 폭력과 살인은 어쩌면 인간의 원죄인지도 모른다. 지나간 역사에서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것은 단순한 교훈만이 아닐 것이다. 예루살렘에 나타난 아이히만을 바라보며 우리는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 안에 숨어있는 아이히만을 말이다.


06113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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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악의 평범성 : 희생양 제의 뒤 추악함들에 대한 묘사 -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2006
    from Fly, Hendrix, Fly 2009-07-07 14:48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한길사 PD저널 헨드릭스의 책읽기 2009년 7월 4일 지행네트워크의 예사인(예술, 사상-사회, 인문) 세미나의 두 번째 책은 한나 아렌트의 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한길 그레이트스트 북스에서 나온 책을 완독했다. 책은 손의 질감과 눈으로 느끼는 두께보다 훨씬 빽빽했다. 다른 사회과학서를 읽을 때 보통 시간당 100페이지를 읽는 데, 이 책은 시간당 30페이지 읽기가 쉽지 않..
 
 
짱꿀라 2006-12-01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악에 대한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주시는군요. 기독교에서는 악이란 과녁을 벗어난 것이라고 하던데요. 저는 아직도 악이란 정말 잘 모르겠더라구요. 한달 밖에 남지 않은 올해도 좋은 일 많이 생기시고 잘 마무리 하시기를 바랍니다.

sceptic 2006-12-01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12월이니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소리 들립니다. 님도 건강하고 행복한 마무리 하시기 바랍니다.

kleinsusun 2006-12-01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나치와 아우슈비츠를 "각색된 이미지"로만 갖고 있어요.ㅠㅠ
미루고 있었던 책인데, 님의 글을 읽고 보관함에 넣었어요. 감사합니다.^^


sceptic 2006-12-02 13: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 말씀을요...많이 긴장하지않고 편안하게 읽어볼만 합니다. 즐거운 독서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