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c² -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방정식의 일생
데이비드 보더니스 지음, 김희봉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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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통과 구토로 이틀을 앓았다. 2개의 모임과 캠핑 여행을 취소했다. 인간의 몸은 때때로 내, 외부적인 힘의 작용으로 에너지를 소진한다. 질량에 속도가 결합하여 상상을 초월하는 에너지를 발휘하는 E=mc²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 인생이다. 당황스러운 타인의 정신적, 신체적 가해, 예측하기 어려운 교통 사고, 미리 알 수 없는 건강 이슈, 뉴스 같은 지인들의 인생사가 직, 간접적으로 현재를 만들고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 어쩌면 인간과 세상에 관한 이 불가해한 일들에 대한 호기심과 질문이 과학 발전의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자유의지는 없다’고 선언하며 저항하고, 또 누군가는 저 머나먼 별빛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궁금해하고, 또 누군가는 휜 시간과 공간을 상상하기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원자 폭탄 등에 관한 영화 『오펜하이머』, 다큐멘터리 영화 『아인슈타인과 원자 폭탄』등이 E=mc²에 대해 설명해 줄 수는 없다. 다만 이론 물리학이 어떻게 현실을 지배하는지, 인간의 삶과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고민이 계속될 뿐이다. E=mc²에는 아무 잘못이 없다. 숫자와 기호로 환원되어 자연의 질서가 밝혀지든, 원시 시대처럼 온갖 두려움과 경외감으로 무지의 상태를 유지하든 사실 하루하루 우리가 사는 인생에 그 영향을 성찰하거나 삶의 태도에 영향을 받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우리 인간은 생각보다 단순하고 짐작보다 무지하다.

그리하여,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이론 물리학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전공자를 위한 책이 아니다. 과학적 지식이나 특수 상대성 이론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서 재밌다. E=mc²그 자체의 자서전에 가깝다. E, =, m, c²각각이 탄생과 성장 그리고 이들의 결합 과정이 얼마나 지난했으며 또 때로는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는지 살피는 과정이 노잼일 리 없다. 스토리텔링은 식욕, 성욕 다음으로 강한 인간의 본능이 아닌가. 뒷담화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는 주변 사람들을 떠올려 보라. E=mc²에 관한 데이비드 보더니스의 끈적한 후일담은 독자들의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과 TMI(to much information) 본능을 충족시킨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김상욱의 『울림과 떨림』,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 등 기억할만한 과학 서적들이 가진 각각의 특징과 개성만큼 데이비드 보더니스의 글쓰기 방법은 강렬하고 매력적이다.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를 읽으면서 얼마나 고개를 끄덕였는지 모른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리처드 파인만과 스티븐 핑거, 리처드 도킨스, 최재천, 장대익, 슈뢰딩거, 제임스 크릭 등 과학자들이 쏟아내는 팩트fact가 문학에 절여진 픽션fiction의 뇌를 깨웠다. 천상 대문자 F인줄 알았으나 누구보다 강렬한 T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게 아니라 시간이 사람을 변하게 했을 수도 있지만 그때, 누군가 과학의 재미를 알려줬더라면 아마 다른 길을 걸었을 거라는 생각을 가끔 한 적이 있다. 지금도 자기 취향과 성향과 전공과 직업을 충분히 알아본 후에 진로를 선택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다. 대한민국에서 특권 계급으로 정부에서조차 인정을 준비 중인 의사나 판사 등 특정 직업의 선택에서부터 문, 이과 선택, 직종과 직업 선택의 순간까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그렇게 우리는 문과형 혹은 이과형 인간으로 불과 10대에 결정한 다음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는다. 마치 여자라는 이유로 리제 마이트너, 마리 퀴리 같은 여성 과학자들의 탁월한 성취가 묻힌 이야기들처럼. 아니 어떤 여성들은 과학에 접근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시대의 이야기들이다. 물론 초점과 거리가 먼 이야기지만 주인공 아인슈타인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권위에 의심을 품고 어느 것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하는 과학적 태도는 아인슈타인을 고립시킨다. 교수 자리를 얻고 안정적인 과학자의 길을 걸었다면 아인슈타인 뇌도 제도에 순응하며 기존 과학의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하지 않았을까. 고독한 천재가 아니라 현실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아인슈타인이 혼자 E=mc²를 어느 순간 불현듯 떠올렸다는 신화 혹은 영웅담과 거리가 먼 책이지만 결국 이 간단한 여섯 개의 기호를 나열하는 데 관여했던 수많은 과학자들과 기나긴 과학의 역사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질문들이 이 책 곳곳에서 미로찾기처럼 연결되어 있다. 수천 피스의 퍼즐을 맞추듯, 그렇게 역사는 수천 조각들의 우연과 필연이 결합한 사건이다.

영화 시나리오처럼 드라마틱하고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 능력에 인물들의 후일담은 쿠키 영상처럼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의미에 재미를 더한다. 좋은 책이 갖춰야 할 요소들을 꽉찬 육각형 모양으로 채운 듯하다. 과학은 지루하지 않다. 다만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쉽게 설명하지 못하는 건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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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드 오브 타임 - 브라이언 그린이 말하는 세상의 시작과 진화, 그리고 끝
브라이언 그린 지음, 박병철 옮김 / 와이즈베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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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의 단편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아름다움은 나를 멸시한다』 수록)은 아니었고...윤대녕의 단편이었나? 기억나지 않는다.(아시는 분 있으시면 알려주세요.) 진공상태의 우주에서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상대를 밀어주고 그 반작용으로 춥고 어둡고 아득한 먼 우주로 하염없이 멀어지는 우주인. 그 인상적인 장면이 어느 단편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칼 세이건의 『코스모드』를 읽을 때도 브라이언 그린의 『엔드 오브 타임』을 읽을 때도 머릿속에서 계속 맴도는 장면이다. 지구 반대편으로 떠난 그 우주인은 아직도 멀어지고 있을까, 언제까지 멀어지다가 우주의 끝에 도달했을까, 우주 공간에 끝이라는 개념이 적용될 수 있을까, 공간의 끝이 없다면 시간도 영원할까, 시간의 끝이라는 개념은 물리학의 이론으로만 존재하는 걸까, 실제 그 순간이 온다는 말인가.

우주의 기원, 세상의 저편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시절이 따로 있었던 게 아니라 여전히 하늘을 쳐다보는 이유가 혹시 무의식에 남은 유년시절의 기억들 때문일까.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나 데이비드 크리스천의 『시간의 지도』를 읽을 때의 개인적 감동은 오롯이 상상력에 기반한 나만의 세계였을 것이다. 과학의 시선은 실제계에서 벌어지는 객관적 사실을 향하고 있으나 그 결과에 대한 해석은 과학자의 몫이 아닐 수도 있다. 브라이언 그린도 물리학이라는 도구로 우주와 생명을 포함한 세상의 기원과 작동 원리를 들여다보면서 끊임없이 인문학을 끌어들인다. 철학과 문학적 소양은 일반인에게 적절한 설명 도구로 유용할 뿐 아니라 결국 앎이 삶이 되어야 한다는 소리 없는 웅변처럼 들렸다. 안다고 달라지는 게 별로 없다. 아는 것과 이해한다는 건 다른 문제다. 시간의 끝,이라는 개념은 오히려 개인의 죽음에 닿아 있다. 눈을 감으면 모든 게 사라진다. 사후 세계의 믿음이나 내세와 무관한 물리적 현상으로서의 죽음이 시간이 끝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제외한 타인의 삶, 지구의 종말, 우주의 끝에 대한 호기심과 과학적 상상력은 왜 필요한가.

자유의지가 있느냐 없느냐는 논쟁이 이어지며 일요일 밤 3시간이 넘도록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우주는 무엇이며 그것은 각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아니 그 호기심으로 얻은 얇은 지식과 생각들은 어떤 태도로 현실에 반영되어 어떤 방향으로 우리를 이끄는 걸까. 명쾌하고 분명한, 논란이 없는 수학과 과학도 환원주의 관점으로 회귀하지 않으려면 거시 세계의 인간을 돌아볼 수밖에 없다.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나는 누구인지 매일 묻지 않으면 단 하루도 견디기 어려운 세상이다. 세계를 바꿀 수 없다면 내가 변해야 한다는 적응과 실용적 자기계발식 금언이 아니다. 어차피 우연의 우연의 우연이 겹쳐 필연을 가장한 존재와 관계라고 해도 선택의 문제, 의지의 표상이 우리를 괴롭힌다. 인간이 ‘위대한 존재’인지 ‘먼지같은 존재’인지 논쟁을 하다가 ‘위대한 먼지’로 타협했다는 분의 이야기가 새삼스러웠다. 우리는 ‘위대한 먼지’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스크린 속에 이미 펼쳐져 있든, 무한한 순환 고리로 연결되어 있든, 연쇄적인 반응의 결과이든 상관없다. 곧 봄이 온다는 소식이 들리고 인간의 삶은 바늘로 찍은 점보다 짧은 찰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정도만 자각할 수 있어도 충분하겠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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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의 뇌 - 더 좋은 삶을 위한 심리 뇌과학
아나이스 루 지음, 뤼시 알브레히트 그림, 이세진 옮김 / 윌북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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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전체 2퍼센트 정도에 해당하는 무게 1.4 킬로그램의 뇌는 신체가 만들어내느 전체 에너지의 20퍼센트나 소비한다. 효율과 거리가 멀어보이지만 860억 개의 뉴런이 상상을 초월하는 네트워크를 구성하며 소통하며 이성과 감정을 통제하며 선택과 갈등을 해결한다. 사피엔스의 뇌는 기계적, 단계적 발전 과정을 거치지 않은 진화와 적응의 결과다. 왜 이런가,라는 질문보다 어떻게 작동하는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뇌의 미래를 예측할 수도 없으며 보다 효과적인 활용 방법을 가늠하기도 어렵다. 다만, 뇌의 작동 방식과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뇌를 안다는 것은 ‘나’를 이해한다는 의미이며, ‘너’의 말과 행동을 짐작하고 해석할 수 있다는 뜻이다.

브랜드와 차종이 같은 자동차도 운전자의 능력에 따라 속도와 활용에 차이가 많다. 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마다 유전, 환경적 요소가 다르니 같은 뇌는 없다. 비슷하다고 해도 이해, 공감, 학습, 창의성, 상상력 등 뇌를 활용도는 개인차가 매우 크다. 신경과학을 연구한 임상심리학자 아나이스 루는 ‘쉬고 재미있게’ 뇌를 설명한다. 신경과학, 심리학, 진화생물학 등 다양한 연구 결과를 통해 더 좋은 삶을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뇌’의 다양한 얼굴을 보여준다.

연구자가 아니라면 전문 서적을 통해 뇌의 구조를 상세히 들여다볼 필요는 없다. 우리가 무엇을 상상하든 뇌는 초능력에 가까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정도면 충분하다. 뿐만 아니라 뇌가 착각과 오류를 일으키는 지점을 잘 들여다봐야 한다.

쉽고 재밌는 책의 한계가 늘 그러하듯이, 심리학과 뇌과학에 관한 책을 몇 권 살펴본 독자라면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얻기는 힘들다. 이해를 돕는 만화, 삽화를 통해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 실제 생활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 등이 이 책의 장점이다. 다양한 미디어가 검색 기능을 대체하고 정보 활용 방법이 이전과 다른 시대를 살고 있다. 텍스트는 분명한 장점을 갖고 있으나 접근 방식과 전달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이런 형식의 책은 미디어와 텍스트를 사이를 이으려는 노력으로 이해된다. 가볍지만 깊이를 담보해야 하는 고민을 담은 듯하다.

예를 들어, ‘공감’이 능력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남성과 여성으로 양분할 순 없으나 대체로 여성들은 정서적 공감, 즉 느낌이 발달해 있으며 이는 상향처리bottom-up 방식에 해당한다. 남성들은 이해를 바탕으로 인지적으로 공감하기 쉬우며 이는 하향처리top-down이라는 설명이 그렇다. 현상을 비교하고 분석하며 체계화하는 일은 다양한 사례를 중심으로 예외까지 점검해야 한다는 점에서 수고로운 일이다. 그것이 공인된 이론으로 발전하든 논쟁의 중심에 서든 검증을 거치는 동안 다양한 의견이 보태지고 억지 주장과 주관은 배제된다. 불행하게도 우리 뇌는 이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개인은 그럴만한 여유와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분명한 뇌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 ‘나’를 알고, ‘너’를 이해하는 첫 걸음이 아닐까.

낯선 길을 찾아가고, 외국어를 배우고, 셀럽이 등장하는 광고에 흔들리고, 서로 다른 추억에 절망하고, 낭만적 사랑을 꿈꾸고, 불현듯 데자뷰를 느끼는 순간이 있다면 가만히 ‘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지켜보자. 모든 뇌가 다르듯, 나의 뇌에서 벌어지는 일, 나의 뇌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이해한다면 조금은 다른 태도로 타인을 이해하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을까. 3주간 3번의 장례식에 다녀왔다. 뜨거운 여름 날씨보다 더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뺨 위에는 이제 흔적만 남았을까. 탄생과 소멸만큼 분명하고 확실한 진실이 없어보인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사이에도 때때로 바람이 분다. 뇌가 젊어지는 운동법을 모르고, ‘농담의 쓸모’를 알지 못한다면 나이가 몇이든 당신의 ‘뇌’는 제 기능을 잃고 삶의 주인으로 기능하지 못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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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팬지 폴리틱스 - 권력 투쟁의 동물적 기원
프란스 드 발 지음, 장대익.황상익 옮김 / 바다출판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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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亡者에 대한 슬픔은 나이에 반비례한다. 어디 눈물 없는 장례식이 있을까마는 숱한 죽음들, 무덤과 화장터 사이를 떠도는 회한悔恨은 인간의 숙명이니 극복이 아니라 수용과 성찰이 필요하다. 한 시대가, 아니 한 계절은 잠시 머물다 떠난다. 하지만 우리 삶은 매 순간 어느 시대 혹은 어느 계절의 복판에 서 있다. 지금이 절정이다. 지나간 모든 것이 아름답지 않듯, 남은 시간이 두렵지만은 않기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정치’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면 인류 문명은 정치 발달의 문화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주정에서 민주정으로 ‘발전’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각자의 욕망과 기대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 행위의 반복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 아니겠냐는 말이다. 우주에 발자국을 남기고, 인공지능 시대를 산다고 해도 인간은 어쩌면 ‘털없는 원숭이’에서 한발도 더 나아가지 못한 건 아닐까. 진화를 거듭한 현생 인류의 모습이 침팬지의 군집생활과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은 놀랍지 않다. 충분히 예상하고도 남을 만큼, 사회뉴스 정치인들의 정치 행태, 끔찍한 사회뉴스가 매일매일 이를 증명하지 않는가.

햄릿은 ‘to be or not to be’를 고민했으나 오늘의 한국인들은 이쪽이냐 저쪽이냐로 정의와 공정과 상식과 현재와 미래까지 판단하며 선택한다. 망국적 극단적 전체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될 만큼 필터 버블이 작동하는 알고리즘에 반성은 없는 듯하다. 혹시 프란스 드 발의 『침팬지 폴리틱스』조차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으려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으나 저자의 의도, 책 내용과 무관하지 부디 댓글만 남기지 않기를.

물론, 그 정치 행위의 근간에는 ‘욕망’이 자리잡고 있다. 성욕과 식욕, 즉 생존과 관련된 침팬지의 모든 정치 행위는 선악의 저편에 놓여 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진화의 결과일 뿐이다. 그것을 인간의 관점으로 ‘해석’하려는 관찰자들은 다양하다. 제인 구달로 상징되는 1세대 동물사회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없었다면 출발이 조금 어려웠을지 모르지만 수많은 영장류를 통해 인간의 본능과 욕망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모르고 내 안엔 내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40여 년 전에 출간된 이 책의 핵심 내용은 단순하다. 침팬지의 사회구조가 인간과 다를 바 없이 인간사회와 매우 흡사하다는 결론을 향한 거대한 관찰의 기록물이다. 그것이 놀라운가, 아니면 반가운가. 그래서 어쩌자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어떻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우리 인간의 정체는 무엇인가”라는 질문만 또다시 남는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 침팬지와 인간의 유사성과 차별성에 논문은 과학자들의 몫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이에룬의 보안관 행동이나 마마가 가진 모성의 힘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해야 한다. 100층이 넘는 빌딩 꼭대기에 앉아 있어도 한 인간의 개인적, 사회적 욕망은 라윗과 니키 혹은 마마, 이미, 테펄의 그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뭐가 다르겠는가. 누구든 식욕과 성욕이 전부일 수 있으며, 누구든 더 큰 야망과 욕심의 허망함에 무너지지 않겠는가.

네덜란드 아른험에 위치한 뷔르허스 동물원Burgers Zoo(1971년 8월 개관)의 야외 사육장이 있다. 여기 사는 침팬지들의 이야기다. 집필시기는 1979~1980년(1982년 출간), 주요 침팬지는 수컷 에룬, 라윗, 니키, 단디, 암컷 마마, 호릴라, 프란예, 이미, 테펄, 파위스트 정도다. 이름으로 호명되는 각각의 침팬지의 행동은 인간과 다를 바 없다. 앞서 말했듯 이 책은 인간과의 유사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읽을 필요가 없다. 98%의 유전자가 인간과 동일한 침팬지의 행동이 인간과 비슷하리라는 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인간의 정치적 행위란 무엇인가, 그 기저에 깔린 본능과 욕망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가 등의 문제다.

권력투쟁과 기회주의, 호혜성, 전략적 삼각관계, 화해, 연합, 평화 협정, 중재, 분할 지배 등 인간사회에서도 매일 벌어지는 일들이 침팬지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놀랍다. 크든 작든 모든 관계와 조직과 공동체와 국가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마찬가지다. 침팬지 폴리틱스는 호모 사피엔스폴리틱스의 축소판이 아니라 오히려 현대사회의 원형prototype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는 게 쉽지 않다는 건 생존 혹은 정치(관계)를 일컫는다. 쉽고 재밌는 일이 더 많은 인생을 꿈꾸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오늘도 안녕하지 않은 일들로 가득 채운 하루를 보내며 사람들은 또 어떤 내일을 꿈꿀까. 부디 시간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일들에 매달리지 않기를. 자기 위로와 합리화를 위해 너무 애쓰지 않기를. 침팬지 폴리틱스도 협력, 호혜, 연합, 중재, 의존이 강력한 힘을 발휘할 때가 더 많다. 이해관계에 매몰된 걸 모두 아는데, 정의와 공정, 상식과 합리, 자유와 평화로 포장한들 사람들이 더 이상 속지 않는다는 걸 정치인들만 모르는 걸까. 아니면 우리는 알면서도 매번 속는 걸까. 이도저도 아니면 대안이 없거나 상상력이 부족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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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착각 - 뇌는 어떻게 인간의 정체성을 발명하는가
그레고리 번스 지음, 홍우진 옮김 / 흐름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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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함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안목과 신체적 능력을 표현한다. 보통 사람에게 발견할 수 없는 예민함과 날카로움 혹은 지적 상상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철학은 이제 뇌과학이나 신경과학에 자리를 내주기 시작한 걸까. 주체성, 자유의지, 자아의 문제까지 다양한 주제가 ‘과학’의 영역과 중첩된다. 인공지능이나 챗GPT에게 내줄 수 없는 고유한 인간의 영토가 점점 줄어든다면 최후의 순간까지 ‘나’를 나라고 주장할 수 있는 ‘나’는 무엇일까.

스스로 생각하고 분석하며 자아라고 믿는 대상이 망상에 불과하다는 도발적인 발언은 심리학자, 신경과학자, 정신과 의사인 저자의 탁월한 분석일까. ‘나’는 과거의 서사에 바탕을 둔 기억의 집합일 뿐이다. 그것도 수많은 사건 중에서 특정 부분을 편집하고 맥락을 이어 붙인 ‘나에 대한 편집된 이야기’. 그러면 끊임없이 현재를 살며 이야기를 만들고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상황에 대처하고 일상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나’는 누구일까. 연속선상에서 과거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추론은 가능하지만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같을 리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순간도 시간 위에 머물지 않으며 변화, 발전, 성장하거나 후퇴하고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유동하는 자아에 대한 확신은 용감한 오해가 아닐까.

내가 너를 잘 안다는 착각보다 내가 나를 잘 안다는 믿음이 더 위험해 보인다. 기억나지 않는 장면이나 모호한 기억 속에서 내가 그랬을 리 없다는 확신, 다른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사실 나는 다른 존재라는 주장, 그보다 너는 너를 잘 몰라도 오래 너를 지켜본 내가 너를 잘 안다는 생각들이 모두 ‘망상’에 불과하다는 주장의 이면을 들여다보라. 자아가 뇌의 발명품이라면 믿음과 확신은 사전적 의미가 바뀌어야 하는 게 아닐까.

수만은 다중인격에 관한 드라마와 영화들이 떠올랐다. 서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한다면 편집된 자아에 불과한 나는 누구일까. 진화는 개인주의를 싫어하기 때문에 나의 선택이라는 착각이 만들어진다. 만들어진 ‘신’을 주장하는 리처드 도킨스보다 만들어진 ‘나’를 주장하는 그레고리 번스의 주장이 낯설다. 하지만 이 주장의 이면에는 ‘내가 원하는 나’와 ‘내가 믿는 나’ 사이의 간극에 대한 고민이 놓여 있다. 우리가 가진 몸은 분명한 실체가 있으나 그 안에 깃든 자아는 불안정하며 다양한 면을 갖는다. 자아 정체성이라는 개념이 뇌가 만들어낸 허구라면 ‘나’라고 말할 수 있는 무엇은 실체가 없다. 무수히 많은 자아가 내 안에 숨어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라고 노래하던 가수의 노랫말이 떠올랐다. 분명하고 구체적인 ‘나’ 하나로 규정할 수 있는 ‘나’는 착각과 망상에 불과하다면 진짜 나의 모습을 찾으려는 노력보다 지금, 이 순간에 나에 집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무엇을 선택하든 그 결과의 총량이 각자의 인생이다.

결국 이러한 노력은 후회를 줄이고 변화를 지향하며 미래를 준비하기 위함이다. 저자가 안내하는 우리의 마음, 생각, 뇌의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는 강박과 불안, 후회와 갈등에서 조금 자유롭기 위한 노력이라고 생각했다. 정답 없는 문제집을 푼 적이 없는 학창 시절을 거치고 세상에 나가면 단 하나의 정답도 찾을 수 없는 순간들, 그 결과를 책임져야 하는 선택지들이 만기가 도래한 어음처럼 우리를 기다린다. 내가 해봐서 안다는 충고도 도움이 되지 않고, 고전과 철학에게 물어도 답이 없으니 현대인의 혼란과 번뇌는 계속된다. 각자 정답을 외치는 세상에서 목소리 큰 사람이나 쉽고 빠른 비법을 파는 사람에게 속기도 쉽다. 자연과학이나 예술 분야의 책이 진정한 자기계발서라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하는 건 뇌가 착각한 ‘나’처럼 인생의 의미나 성공한 삶에 대한 망상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책은 책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현실로 고개를 돌리면 또 다시 책 속에서 길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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