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도종환 지음, 이철수 그림 / 한겨레출판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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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었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평론가 김상욱 교수가 함량 미달이라고 했다는 <흔들리며 피는 꽃>은 시적 긴장감이나 문학적 완성도를 떠나 <담쟁이>와 더불어 도종환 시인과 동시에 떠오르는 시다. 『접시꽃 당신』으로 80년대 후반을 풍미했던 도종환 시인. 이제 25년이 지나 시인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물론 그가 쓴 시와 더불어.

8월에 홍대앞 상상마당에서 고은, 도종환 두 시인의 ‘북콘서트’가 있었다. 2차까지 함께 할 기회가 있어 맥주 한 잔과 더불어 시인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에 담겨 있다. 밝은 표정과 웃음을 잃지 않고 이야기꽃을 피웠던 시인의 삶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일평생 교육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몸담은 시인의 삶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역사와 민주화운동, 문화운동의 한 부분을 오롯이 보여준다. 그때마다 힘이 되어준 시인에게 시는 어떤 의미였으며 그때마다 어떤 시들이 탄생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이 책은 기쁨보다 슬픔이 웃음보다 눈물이 가득하다.

가난했던 유년의 기억부터 위암으로 아내를 잃은 슬픔을 담은 『접시꽃 당신』의 성공, 그리고 최근의 시집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에 이르는 과정은 시인의 삶과 시세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자전적 해설에 해당하는 이 책은 시인의 삶과 시의 관계뿐만 아니라 그가 살아왔던 시대와 우리 사회의 면면을 돌아보게 된다. 우리가 살아왔던 시대를 성찰하는 것은 문학적 진실을 반추하는 기회이며 현재와 미래를 내다보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문학이 한 시대를 증거한다고 볼 수 있을까. 도종환의 시는 현실과 서정 사이에 멈칫거리는 부분이 있다. 정호승의 시 회색이라고 비판을 받았던 것과 달리 도종환의 시는 『접시꽃 당신』에 대한 최두석의 비판부터 끊임없이 논란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시인은 문지에서는 지난 25년 동안 단 한 번도 원고 청탁을 하지 않았다는 서운함을 통해 자신의 문학적 성과에 대한 회의를 드러낸다. 하지만 독자들에게 도종환의 시가 과연 함량 미달로 느껴질까. 그것의 판단 기준은 비평가의 몫일까. 여전히 자신의 삶과 시에 열정을 잃지 않은 시인의 작품세계를 평가하는 것은 조금 더 뒤로 미뤄야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은 시인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을 수 있다는 장점과 함께 그의 삶을 통해 작품 세계까지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 도종환의 시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고개를 끄덕이며 읽을 수 있고 아직 그의 시를 읽어보지 않은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그의 시에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삶과 문학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인간적인 약점과 한계를 물어뜯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받은 시인의 이야기는 가슴이 아프다. 타인의 불행과 삶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사람보다 그 상처를 잘 견뎌낸 그의 시가 아름답다.

시인의 말대로 가슴으로 쓴 시는 독자에게 가슴으로 전해지고 울면서 쓰면서 쓴 시는 눈물까지 전달된다. 시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써야한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이야기들부터 군데군데 묻어나는 한숨과 눈물은 그의 시만큼 가슴을 적신다. 한 편의 시는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 편의 소설만큼.

손잡고 함께 걷는 일은 어렵다. 사람마다 다른 생각, 다른 관점, 내부적 갈등…….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할 수 없고, 시인 같은 심성만 가진 사람들로 가득하지도 않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담쟁이>는 도종환의 삶과 시를 보여줄 수 있는 대표적인 시가 아닐까 싶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2011112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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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11-11-26 1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오랫만에 와보네요.
여전히 좋은 글 쓰고 계시네요.

sceptic 2011-11-26 21:00   좋아요 1 | URL
책에 코를 박고 잉크냄새를 킁킁거리고 싶은 유혹을 버릴 수는 없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