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읽기의 혁명 - 개정판
손석춘 지음 / 개마고원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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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에 6개월간 한겨레 신문 독자 모니터링을 했다. PDF파일 형식의 편집 상태 신문이 전송되면 신문을 보듯이 클릭해서 관심있는 기사를 보면 된다. 내가 클릭하는 순서와 기사의 내용이 모니터링 되는 것이다. 신문사에서는 어떤 편집에 따라 독자들의 기사 선호도와 관심 정도가 달라졌는지 확인했을 것이다. 때로는 같은 내용을 따른 편집으로 보여줄 때도 있었다. 먼저 클릭하는 기사의 내용이 달라지고 관심도도 조금 변하게 된다. 이것이 편집이다. 같은 기사 내용에 가치가 개입되어 현실이 재단되며 표제에 따라 여론이 춤을 춘다.

  내가 처음 본 신문은 동아일보였다. 물론 부모님의 선택이었고 신문과 뉴스 내용이 내겐 세상의 전부였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지금도 아이들은 부모님이 보는 신문과 TV의 뉴스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그것이 어떤 내용이든 의심 없이, 마치 종교의 경전처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굳게 믿는다. 그것이 내가 세상을 배운 방식이고 아이들이 세상을 배워나가는 기준이다. 물론 지금은 인터넷 매체의 발달로 예전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기는 하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신문과 TV 뉴스의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조선일보를 본 기억은 없고 이후 중앙일보와 한국일보 그리고 최근에 매일경제를 보시는 부모님의 성향은 일반적인 보수성향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일보만은 안 된다고 외쳐서 그런지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하신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경향신문이나 한겨레를 권하는 것은 무리인 듯싶다. 어떤 신문을 보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아니, 어떤 성향의 신문을 보느냐가 중요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신문의 성향과 논조대로 세상을 바라본다. 자신도 모른채 무슨 색이 들어간 안경인 줄도 모르고 투명하게 바라본다고 믿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신문은 다 똑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관연 그럴까? 손석촌의 <신문 읽기의 혁명>은 세상 읽기의 혁명이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현재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책보다 실감나게 읽힌다. 게다가 기자의 글솜씨가 아닌가. 가독성이 극대화되어 어렵고 비판적인 이야기도 술술 넘어간다. 사실 어려운 이야기는 없다. 신문을 둘러싸고 있는 권력과 자본의 먹이 사슬에 관한 냄새나고 지저분한 역학 관계에 대한 새로울 것도 없는 분석이다.

  이 책은 청소년들에게 권할 만하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부모들이 보는 신문이나 자기가 접하고 있는 세계가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는 청소년들에게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 줄 수 있겠다. 현상과 본질의 차이에 대해 아무리 설명을 듣고 책상머리에서 고민해보아도 쉽게 답은 찾아지지 않는다. 직접 부딪히고 경험해 보아야 한다. 한계가 있다면 간접 경험을 통해 그것이 가능하겠다. 신문만큼 좋은 간접 경험은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널리 읽혔겠지만 지속적으로 재개정판이 나오고 후속편도 나왔으면 좋겠다.

  이 책의 초점은 한 곳에 집중되어 있다. 바로 ‘편집’이다. 기사의 내용과 취재 과정 그리고 취재원이나 기사문 작성과 같은 표면적인 이야기들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다. 쉽게 말해 내용면에서 기사문의 형식과 글쓰기에 관한 정보를 접하려는 독자는 큰 코 다치겠다. 이 책은 철저하게 기사 작성 너머의 풍경을 조망하고 있다. 취재가 아닌 편집의 중요성과 절대성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이다. 기사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편집을 알아야 비로소 기사가 보인다는 것이다. 좋은 기사가 나와야 하고 신문은 기본은 취재에서 출발한다고 믿는 많은 독자들에게 이 책은 신문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한다.

  손석춘은 그 명백한 증거들을 실제 신문 기사와 조선, 동아, 중앙, 한겨레를 통해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997년에 나온 초판에 비해 2003년에 나온 개정판은 사료로서의 가치가 존중되고 시대에 뒤떨어진 기사들은 교체되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신문 기사처럼 시대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에 허망함을 느끼는 것은 많지 않을 것이다. 매일 지나간 과거를 써나가는 기자들의 고통과 애환 그리고 치열함을 충분히 읽어낼 수 있다는 점도 현직 기자가 출신의 저자가 쓴 이 책의 장점이다.

  책의 구성은 네 부분으로 간단하게 나누어져 있다. 신문의 편집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지면은 평면이 아니라 입체라는 것, 사설을 읽어야 편집이 보인다는 것, 신문 지면은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을 순서대로 보여주고 있다. 제목처럼 신문 읽기의 혁명이 아니라 신문의 제작과정과 편집과정을 제대로 알고 읽으라고 기자의 안타까운 외침이다. 그래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유효한 책이다. 내 생각의 절반을 내가 보는 신문에게 빚지고 있다면 얼른 이 책을 뒤적여 봐야할 것이다.

독자 자신이 주체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리며 읽어야 한다. 독자 개개인의 입장에서 신문을 재편집할 때 지면 읽기란 신문 편집자와 한 판 장기를 두는 것과 같다. 상대방이 둔 수를 보며 그 의중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 P. 280

  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의도는 쉽게 짐작된다. 한겨레 노조위원장을 거친 저자의 이력이 말해주듯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재벌 신문들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책이기도 하다. 눈뜬  장님으로 살아가거나 그것이 자신의 계급의식이나 삶의 형태와 상관없이 신문사의 의도대로 세뇌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울리는 경종이다.

  하나의 사물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관점들을 가지고 대립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상대방을 인정할 줄 모르는 태도일 것이다. 동일한 사건을 두고 표제를 뽑는 방식도 의도도 다르다. 사설부터 기사의 배치에 이르기까지 의도적이고 계획된 편집들은 여전히 자본의 논리와 사주의 이익에 철저하게 복무하고 있으며 재벌 광고주의 이익과 권력 앞에 비참한 모습으로 무릎 꿇고 있다. 현대사의 굴곡에 따라 변신로봇처럼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각 신문들의 실체를 우리는 여전히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인터넷 포탈 사이트나 인터넷 신문 매체로 인해 종이 신문의 발행부수나 위력은 전에 없이 약화되었다. 하지만 매체가 달라졌을 뿐, 우리가 인식하는 현실의 모습과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에는 큰 변화가 없어 보인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신문 읽기의 혁명 뿐만 아니라 매체 읽기의 혁명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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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만감일기 - 나, 너, 우리, 그리고 경계를 넘어
박노자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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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기의 목적은 무엇일까? 일기는 독자를 전제로 하는가? 일기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객관화하는데 있다. 스스로의 감정과 정리되지 못한 상념들을 적다보면 머릿속에 얽힌 실마리를 풀어낼 수 있다. 일기를 객관적으로 적다는 것은 형식에 대한 모순이다. 주관적인 감상과 생각들을 거침없이 솔직하게 풀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모호했던 느낌과 자신의 태도를 스스로 점검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나는 책을 통해 독서일기를 쓴다. 그러면서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끊임없이 반성하고 사유한다. 도구와 방법은 다르겠지만 모든 사람은 그렇게 자신을 돌아보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독자의 문제를 살펴보자. 일기는 스스로 살아온 날들의 기록이며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들에 대한 하루하루의 역사이기도 하다. 개인의 일상이든 사회적 현상이든 누적된 기록은 기억을 지배하고 하나의 흐름과 관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예전처럼 펜으로 종이에 적는 형식에서 벗어나 블로그 등 사이버 공간에 공개된 일기는 예상 독자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지극히 사적인 일기의 내용과 형식이 자유로운 소통의 형태로 공유된다면 통상적인 의미의 일기와는 성격이 달라진다.

  특히 글을 쓰는 작가나 연구하는 학자, 기자, 연예인 등 공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일기는 책으로 출판되거나 직간접적으로 독자를 염두에 둔 글쓰기의 형태이다.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게 혹은 자기 검열을 거치지 않은 글이기 때문에 생생하고 과격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단순하고 거친 생각의 표현과 만나는 일이 독자들에게는 또 다른 즐거움 일 수 있다.

  이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한국인 <박노자의 만감일기>는 또 하나의 사회비평서이면서 박노자의 일상사까지 조금은 들여다 볼 수 있는 책이어서 신선하다. 일기의 내용이 신변잡기적인 것이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우리, 국가와 민족 그리고 그 경계 넘어 통찰하고 있기 때문에 타인의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즐거움이 아니라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픈 성찰이 드러난다. 때로는 분노와 격정을 섞어 때로는 차분한 반성과 이성적 판단이 드러나는 사색적이고 거시적인 안목이 돋보인다.

  박노자는 스스로 사회주의적 지향점을 지닌 사람이다. 1인 독재나 공산당의 이름을 빌려 국가 권력을 휘둘렀던 스탈린의 방식이 아닌 진정한 사회주의자이다. 이상적인 꿈에 불과하다고 패배주의적 비판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현실 속에서 바꿔나가야 할 부분들이 너무 많다. 지배계급들의 잘못된 행태와 권위주의, 비정규직과 소수자들의 아픔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오슬로에서 생활하면서 한국과 비교되는 장점들, 모국이었던 러시아의 상처들도 박노자의 직접 체험에 의해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다.

  우리는 21세기를 살아가고 있지만 근대적 물신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거센 물결에 부대끼고 있다. 더불어 함께 사는 행복, 타인에 대한 배려, 소수자에 대한 희생 등 사회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에 대해 대체로 무심하다. 이기적 가족주의에 매몰된 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들이 처절하기까지 하다.

“아무생각 없이 생활하는 일상 생활, 그것이 악의 근원이다.”라고 말한 한나 아렌트의 말을 곱씹어 본다. 악의 평범성과 일상성에 대한 반성이 없다면 우리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의 환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내가 살아가는 태도와 나의 사유 방식에 대한 점검이 왜 필요한지 박노자는 묻고 있는 듯하다. 벽안의 러시안이 한국인으로 귀화하여 바라보는 관점이 객관적일 수만은 없을 것이다. 항상 스스로를 타자라고 생각하는 저자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아픈 성찰의 시간을 제공한다.

  주류 사회의 아비투스를 향해 부나비처럼 맹목적으로 덤빌 일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어 나를 넘어 경계를 허물고 모두 함께 꿈꾸고 변화의 노력을 시작할 때 분명, 미래는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라고 믿는다. 박노자도 그런 고민과 사유의 자락들을 일기에 적고 있다.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소통은 시작된다. 세상에는 나와 다른 수많은 ‘나’가 존재한다. 그들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세계의 변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종교나 학문을 통해 혹은 독서와 명상을 도구로 삶이란 무엇인지 고민할 수도 있다. 사유의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길가에 낙엽을 쓸어담는 환경미화원의 손길에서 걷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문턱과 계단을 없애는 노력으로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생긴다. 철학적 사유와 예술을 통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 모두가 꿈꾸는 세상이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 인류는 참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해 오고 있다. 박노자와 같은 개인적 고민들이 사회적 고민으로 확장될 때 공적인 일기나 책읽기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고 믿는다. 일기를 통해 그리고 책을 통해 조금씩 변화해가는 사람들의 마음 언저리를 생각해 본다.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과 세상에 대한 믿음은 사람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언제든 우리는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딜 마음의 준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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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마을이다 - 위험 사회에서 살아남기
조한혜정 지음 / 또하나의문화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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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자기 의지와 무관한 일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의지박약이나 의존적, 외부적, 타인 지향적, 책임 회피 성향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많은 것이 인생이다. 절대로 공평하지 않으며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세상은 쉽게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다. 개인의 입장에서 타인과의 관계나 사회를 조망하는 일은 결코 객관활 될 수 없다. 알면서도 아쉽고 허탈할 때가 많은 법이다.

  자기 삶의 중심을 어디에 놓을 것인가는 개인의 선택이다. 직업과 연령, 성별과 지역을 떠나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며 생에 대한 태도는 다양하기만 하다. 문화인류학과 여성학을 전공한 조한혜정의 렌즈에 투영된 세상은 어떤 것일까. <다시, 마을이다>는 그 기록의 한 켠을 보여주는 칼럼집이다.

  신문에 실린 칼럼들은 시론時論이기 때문에 철지난 노래처럼 들릴 수도 있고 지나간 신문 뭉치처럼 거북하게 여기질 수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이 책도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거의 7, 8년 전 칼럼부터 최근의 글들까지 다양하게 묶여 있기 때문에 기억이 아득할 수도 있고 최근의 일들일 수도 있다. 그것들을 바라보는 한 사람의 관점을 이해하는 일은 무의미할 수도 있다. 다만 나와 다른 관점, 혹은 조금 빗겨선 자리에서 렌즈를 들이대는 사람들의 시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몇 가지 생각의 갈피들을 집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근대에서 탈근대로의 이행기에 접어들었다는 사회학적 평가는 타당한가. 저자는 이론적으로 관점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아니 접근할 수가 없는 분량과 지면이다. 착한 국민 콤플렉스나 미국의 애국주의 혹은 천수만 개발 반대를 위한 삼보 일배 등을 통해 개발 독재 시대와 환경 문제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 남아있는 근대성을 발견한다. 도심 한복판 인사동에서 벌어지는 추석 축제를 통해 우리들이 얻은 것은 무엇이며 잃어가는 것은 무엇인지 되묻고 있다. 개별 가정의 구조와 편의 시설이 문제가 아니라 이웃과 마을을 고려하는 것이 진정한 삶의 조건이 아니냐고 묻고 있다.

  ‘하자센타(http://www.haja.net)’를 운영하면서 이 땅의 청소년들에 대해 가졌던 관심과 애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고 일탈과 방황의 원인 그리고 그 대안과 미래를 고민하는 저자의 열정도 엿볼 수 있다. 우리들의 자화상이며 우리들의 미래인 그들의 모습은 결코 희망적이지 않다. 그들 스스로가 비관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성세대가 보여주고 가르쳐준 것들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가슴 아프다. 가장 아름다운 나이에 가장 불행한 세대라는 ‘88만원 세대’에 대해 주목하고 있지만 그들 또한 과거와 결과물일 뿐이다. 책임 소재를 밝혀보자는 말이 아니라 이대로는 안된다는 위기 의식과 다함께 고민을 나눠야 할 문제라는 공통된 인식부터 필요하지 않은가.

  내 아이는 사교육비를 처발라 일류대를 목표로 경쟁에서 이기고 있으니 니들끼리 얘기해라, 다른 아이는 몰라도 내 아이는 그렇지 않다,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그렇지 우리 아이는 그런 아이가 아니다 등의 생각을 한 번이라도 가져본 부모라면 지금 우리의 현실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공동체의 이데올로기, 이념과 갈등의 시대를 넘어 절차적 민주주의가 정착한 후 이제는 가족과 개인의 행복과 이기적 욕망들이 더욱 거세게 넘쳐날 것이다. 대안교육과 홈스쿨링 등 대안들이 모색되고 공교육 자체의 변화가 절실하게 요구되지만 경쟁과 효율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다면 문제는 해결되기 어렵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어떻게 규정될까? 어느 시대나 갈등과 문제는 있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과 고민들이 사회를 지탱해 왔겠지만 끝없는 경쟁과 시험, 취업 전쟁과 육아 전쟁을 거쳐 주택과 노인 문제로 이어지는 대다수 서민들의 삶에서 희망은 어디에 숨어 있을까? 그 희망은 돈으로 모두 해결될 수 있을까?

  새로움은 발명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로부터 벗어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시간만 흘러간다고 해서 새로운 시대가 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만들어 갈 미래는 어떤 사회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과 합의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과반의 지지’ 혹은 ‘절대적 지지’를 받고 대통령이 되었다고 굳게 믿는 이명박은 우리에게 어떤 세상을 만들어 줄 것인가 하고 손 놓고 기다릴 일이 아니다. 내 손등을 찍고 싶어지지 않도록 스스로 행동하고 책임져야 한다. 그를 찍지 않았다고 해서 면죄부를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정치가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다.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071223-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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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
케빈 패스모어 지음, 강유원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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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력을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랬다. 보름 남은 2007년 때문이 아니라 대통령 선거 3일전이다. 총선과 달리 비례 대표도 없다. 한 놈만 정해서 찍어야 한다. 2002년과 다르다. 다시 5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놈현과 비교될 만 한 놈도 없다. 이제 정치도 개인의 역량과 능력보다 시스템과 제도 그리고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보는 데 그렇게 될 수는 없다. 4천만이 한 마음이라면 그게 어디 사람 살만한 사회인가. 어쨌든 선택과 결정의 순간이 다가오지만 감동도 희망도 없는 선거가 돼 버린 지 오래다. 콘크리트 지지층의 결집은 불을 보듯 뻔하다. 하긴 맹박이가 대통령이 된다고 해서 나라가 망하기야 하겠나. 아니 망해봐야 정신을 차리지. 한국노총이 맹박이 지지선언을 하는 꼴을 마르크스가 봤어야 하는건데. 희대의 코미디가 벌어지는 현실 때문에 더 이상 ‘개콘’이나 ‘웃찾사’는 빛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박정희를 파시스트라고 볼 수 있을까? 21세기에 다시 읽는 파시즘은 무엇으로도 바꾸기 힘든 인간의 욕망과 본성들이 내재해 있다. 대중들의 파시즘에 관한 심리를 가장 탁월하게 읽어낸 사람 중의 하나인 빌헬름 라이히는 <대중심리의 파시즘>을 통해 “파시즘이라는 용어는 자본가라는 단어가 욕설이 아닌 것처럼 욕설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특수한 종류의 대중지도와 대중적인 영향력을 특징짓는 개념이다. 즉 파시즘은 권위주의적이며, 일당체제이며 따라서 전체주의적이며, 또한 권력이 본질적 이해관계보다 우선하며,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사실이 왜곡되는 체제인 것이다.(P. 307)”라고 선언한 바 있다.

  나치의 상징이었던 하켄크로이츠를 인간이 얽혀 있는 성적 상징으로 읽어 낸 라이히는 성경제학과 가족 내의 억압 구조를 통해 대중들의 파시즘에 경도되는 현상을 간파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처음 사용했던 ‘파시스트fascist’라는 용어는 보수와 진보 어디에도 기댈 수 없었던 정치 세력과 20세기 초 근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민족주의와 결합되어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도 했으나 상황과 시기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로 발현되었다. 제 1, 2차 세계 대전을 통해 개혁과 혁명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개별 국가들의 정치 상황과 맞물렸던 파시즘은 투표를 통한 민주주의의 실현과 여성의 정치 참여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유럽을 강타한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 페미니즘과 민주주의 등 다양한 ‘이즘ism’들의 향연 속에서 파시즘은 강렬한 유혹으로 대중들을 사로잡는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보수 세력에게는 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물결이 유럽을 뒤덮고 있던 시기, 바야흐로 혁명의 후폭풍에 시달리면 세상은 불안한 동거가 계속되었고 이탈리아와 독일을 비롯한 나라들에서 서서히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다.

  홀로코스트로 대표되는 히틀러의 광기는 단순하게 우생학과 인종주의로 설명될 수 없다. 유대인의 절멸만이 게르만 민족국가의 완성이라는 단순한 이데올로기는 히틀러나 괴벨스의 개인적 성향의 문제로 귀결될 수는 없다. 케빈 패스모어의 <파시즘>은 유럽에서 자생한 ‘파시즘’의 기원을 추적하고 있으며 본격적으로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파시즘의 광풍이 일어나기 전의 파시즘에 대해서도 고찰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 본격적으로 보수주의와 결합한 파시즘의 현상을 되돌아보며 이것이 민족과 인종과 어떤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지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다. 젠더와 계급과의 관계도 빼놓을 수 없는 관점 중의 하나이다.

공산주의 초기의, 파시즘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의는 1935년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서 나온 것인데, 그것에 따르면 ‘권력을 장악한 파시즘은 가장 반동적이고 쇼비니스트적이며 제국주의적인 금융자본주의 요소의 개방적이고 테러적인 독재체제’다. - P. 35

이 관점은 경제적 관점에서 자본주의 관점에서 바라본 파시즘의 대한 정의이긴 하지만 파시즘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앞서 언급한대로 더더욱 놀라운 것은 파시즘도 결국은 “민주적인 사회를 조직하기 위한 선거와 기술적 수단이 없었다면 파시즘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P. 72)”라는 저자의 주장이다. 결국, 파시즘도 우리들의 선택이었다는 전제가 가능해진다. 이 책은 파시즘의 역사와 변천 과정 현실 정치와 현실과의 관계를 고찰하면서도 여전히 ‘here and now지금-여기’에 초점을 두고 있다.

  폭력과 대응 폭력은 미국의 패권적 제국주의와 이슬람문화와의 갈등 관계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이 무한 순환 구조는 권위주의의 출현과 더불어 파시즘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민족적 대중주의’가 파시즘의 부활을 예고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노파심은 기우에 불과하기를 바랄 뿐이다. 저자는 이것이 단순한 걱정과 우려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언제든지 다시 부활할 수 있는 강력한 흡인력을 지닐 수도 있다고 경고하는 듯하다. 민주주의 제도의 우월성과 단순한 믿음만으로 인류의 역사를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광기와 폭력은 친구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007년의 현실은 어디쯤 위치해 있는 것일까? 하늘 위로 올라가 내려다보고 싶다. 아득한 태초에서 출발해서 보이지 않는 미래로 여행 중이라면 좀 더 멀리 내다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긴다. 아니 지금 현재의 모습보다 먼 미래의 모습보다 짧은 미래라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불안한 미래에 대한 우리들의, 아니 타인들의 희망에 대해 살펴보고 싶다. 그래도 2008년은 시작될 것이고, 우리의 삶도 계속되겠지만 파시즘이 여전히 ‘가능한 선택지’라는 저자의 목소리는 사람들을 공포 속에 몰아넣기에 충분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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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8-11-27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깐 옮겨가도 되겠죠. 지금-여기의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sceptic 2008-11-28 21:59   좋아요 0 | URL
2008년 대한민국의 현실이 저는 무섭습니다. 분노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눈물로 씁니다
박홍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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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런 종류의 책은 어디에 분류해야 할 지 난감하다. 합치고 아우르는 것이 어려운 만큼 나누고 가르는 일도 쉽지 않다. 박홍규의 책 중에서 직설적인 감정이 많이 우러나온 책이다. 감정은 내면이나 의식에서 배어나오는 이성의 작용이다. 이 감정은 사랑이나 우정과 같이 조건 없이 인간관계를 통해 확인되는 감정이 아니다. 사회를 바라보는 태도, 사람들이 가진 삶의 조건, 인생의 가치와 일상의 모습 등을 통한 이성적 작용의 결과물이다. 내면에서 외부로 표출되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정서적인 감정이 아니라 외부 세계를 투과한 감정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거대한 명칭은 듣기에도 부담스럽다. ‘대한민국’은 ‘대영제국’을 모방한 명칭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무튼 위대한 나라 ‘대한민국’의 모습은 어떠하며 정체성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인구수만큼 많은 논의가 이루어질 것이다. 박홍규의 <대한민국을 눈물로 씁니다>는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거울은 사물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비춰주지만 인간의 시선과 관점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주관적 시선을 뒷받침하는 사상과 이념은 객관적인 평가와 이성적인 논의가 가능하다. 우리 사회의 지향점이나 삶의 가치가 다를 경우 저자의 이야기는 허황된 이야기로 들린다. 하지만 우리가 얻는 것보다 잃은 것이 돌아보지 않는 삶은 의미가 없다. 저자는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과연 우리는 단기간에 얼마나 많은 발전과 문명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눈이 부시다는 표현이 과언이 아니다. 빛의 속도만큼 빠르게 과학기술이 발달했고 인간의 생활은 편리해졌다. 물론 비교의 기준은 20세기 이전을 말한다. 그러나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이다. 시속 150km가 넘게 속도를 내면 시야가 좁아진다. 주변의 사물이나 자연 풍경을 감상할 여지가 없어진다. 김광규의 시 ‘젊은 손수 운전자에게’ 처럼 우리는 많은 것들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게 된다. 시간과 속도의 경쟁은 무한하다.

  그렇게 살다보니 타성에 젖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들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다. 시골에서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는 박홍규의 모습이 어떻게 비춰질까? 초등학생들도 들고 다니는 핸드폰 없이 세상을 향해 쓴 소리를 뱉어내는 모습이 과연 불만과 불평을 토해내는 것인가? 개인적인 편협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견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알 수 없는 것은 이런 사회 비평 서적이 나와도 눈여겨보고 자신의 모습이나 우리들의 현재를 반성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늘어나느냐의 문제이다. 항상 결론은 실천이다.

  무엇을 어디에서부터 손대야 할 지 모른다는 것은 자각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는 할 수 없다. 또 한 가지 알면서도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견해는 어떻게 할 것인가. 물욕에 오염된, 돈으로 분단된, 힘으로 왜곡된, 공공이 상실된, 인조로 추악한, 획일로 위기인 대한민국을 어떻게 할 것인가?

  유시민이 <대한민국 개조론>을 한 달 만에 썼다고 했는데 박홍규도 이 책을 일본에서 한 달만에 썼다고 한다. 전혀 다른 관점과 다른 방식으로 쓰여진 두 책을 비교하는 것도 흥미롭다.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고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일등 공신 역할을 했던 유시민과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는 일리히의 책을 번역하고 실천에 옮기며 살아가는 박홍규는 무엇이 다른가를 비교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가는 모습은 어느 쪽이며 똑같이 진보적 가치를 내세우면서도 얼마나 다른 진보와 개혁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지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늘의 별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가치관과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며 세상을 판단하는 가치와 기준도 다르다. 아니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현재와 생활에 이끌려 내 삶을 거기에 끼워 맞추듯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떤가?

  2007년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비현실적으로 해석한 책이 아니다. 우리가 당면한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사상, 가치 등에 대한 총체적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고 여긴다면 읽어볼 만한 책이다. 아니 이 책을 통해 무엇이 문제인가를 한번쯤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면 이 책은 충분한 의미를 지닌 책이 될 것이다.


071215-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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