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 전란을 극복한 불후의 기록
유성룡 지음, 이민수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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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6년 별시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선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으로 선조를 모시고 평양으로 파천했으며, 병조판서를 겸하여 도체찰사로 전쟁 전반을 총괄한 인물입니다. “내 지난 일을 징계하고 뒷근심이 있음을 삼가노라.”라는 뜻을 담은 징비록(懲毖錄)은 단순한 전쟁 후일담이 아니라 가장 생생한 전쟁 기록이며 두고두고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살펴볼 수 있는 역사의 장면들입니다.

임진왜란의 발발 원인과 과정 그리고 그 결과는 450년이 지난 오늘에도 한국인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습니다.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한 후 한양을 점령하는 데 단 20일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직도 믿기지 않습니다. 세습 왕조의 무능, 실용적인 학문과 현실적인 정책이 아니라 성리학에 매몰된 신하들의 당쟁이 결합해 국가의 존립이 위태롭던 시대였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1636년 병자호란이 벌어졌으나 조선의 제도와 체제는 크게 바뀌지 않았고 변화와 혁신은 남의 나라 일이었습니다. 결국 일제 강점기로 이어지며 침략의 비극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깊은 상처로 남아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듯합니다.

“나같이 못난 몸이 당시의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감히 나라의 중책을 맡아 위태로움을 바로잡지도 못했고, 또 기울어지는 형세를 붙들지도 못했다. 생각하면 그 죄를 몸이 죽어도 다 갚지 못할 것이다.”라는 고백이 뼈아픕니다. 무능한 리더를 대신해 전쟁을 이끄는 유성룡의 목소리에 한숨과 회한 그리고 후회와 자책이 깊게 배어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군사력, 현실 대처 능력, 정부의 대책, 위기관리 시스템은 처참해 보입니다. 일명 ‘국뽕’에 젖어 조선 왕조를 미화하거나 당대의 현실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책을 다시 살펴야 하는 이유는 자명합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는 식상한 금언 때문입니다. 어제를 잊은 사람에게 내일의 희망이 보일 리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지나간 시간을 톺아보고 오늘을 성찰하며 변화를 통해 한발씩 나아가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의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 불행이 반복될 것입니다. 그것이 아마도 21세기에 다시 읽는 ‘징비록’의 의미가 아닌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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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의 역사 - 중세부터 현재까지 혼자의 시간을 지키려는 노력들
데이비드 빈센트 지음, 안진이 옮김 / 더퀘스트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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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은둔의 역사』를 쓴 데이비드 빈센트의 『사생활의 역사』는 프라이버시의 역사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로저 샤르티예Roger Chartier는 “1500년에서 1800년 사이에 인간이 문자와 맺는 관계가 달라지면서 개인이 공동체로부터 물러나 혼자가 되어 새로운 사적 영역을 창조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 바 있다. 그것은 개인의 내면에 대한 탐구가 증가하고 독립성이 커지는 과정이기도 했다.(67쪽) 16세기 인쇄술의 발명이 근대의 문을 열어젖혔다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다. 종교개혁과 민주화는 깨어있는 개인의 탄생이 촉발한 자연스런 결과였다. 사생활에 관한 기준과 한계는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달리 적용된다. 아니 각자 서로 다른 태도를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남이가’ 정서, 언니/오빠/형/누나 등의 일반적 호칭, 부부 일심동체라는 착각, 연인을 소유물로 생각하는 태도, 공적 마인드가 결여된 공무원과 정치인 등 한국적 정서와 문화적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은 헛소리다. 혼자 있을 권리가 시작된 중세, 군중 속에서 나를 지켜야 하는 이유, 전화와 편지에 대한 호기심, 국가의 사찰 등을 살피는 저자의 목소리는 높아지지 않는다. 다만 인터넷 시대, 2025년을 사는 한국인들의 프라이버시는 무엇을 위해 얼마나 지켜지고 있는지 살필 따름이다. 개인정보는 무엇이며 어디까지 노출이 허용할 수 있을까. 아니 친소 관계와 무관하게 사적인 질문은 어디까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남이 하면 프라이버시 침해이고 내가 하면 관심인가. 사생활의 역사는 앞으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쓰이겠으나 기본에 대한 합의는 아득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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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읽는 법
류시현 지음 / 따비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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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이 『인간다움의 순간들』에서 “개인은 자기를 기록함으로써 태어난다.”라고 썼다. 어떤 블로그의 인상적인 기록 혹은 일기 혹은 단상들을 읽다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적이 있다. 나탈리 제인 데이비스의 『마르탱 게르의 귀향』,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 카를로 진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를 읽을 때처럼 미시사의 관점으로 한 개인을 통해 시대와 문화를 읽었다. 학창시절의 나이브한 귀여운 감성뿐만 아니라, 김연수의 말대로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버린 청춘의 고민, 자책, 방황, 불안에 이어 성장과 인정 욕구에 이르는 과정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나의 독서일기처럼, 오랜 시간 공들여 적은 누군가의 일상과 기록 그 많은 흔적들이 한 ‘개인’을 완성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역사다.

그렇게, 역사는 대단한 위인과 영웅들의 이야기로 구성되지 않는다. 내가 아이였을 때 『플루타크 영웅전』은 읽은 적이 있다. 천병희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다시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로저 에커치의 『밤의 문화사』를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든 이유는 분명하다. 역사는 세종과 나폴레옹처럼 뛰어난 개인뿐 아니라 이완용이나 히틀러처럼 저열한 개인의 충격과 영향에도 불구하고 이름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일상으로 채색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평생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친 류시현의 『역사를 읽는 법』은 감동 그 자체다. 역사는 동일한 사건에 대한 관점, 즉 사관史觀에 따라 전혀 달리 해석 가능하다. ‘사실은 없다. 오직, 해석만 있을 뿐.’이라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출토된 문화재, 텍스트로 남은 기록 등 숱한 사료를 재구성하고 연결지어 그들(he)의 이야기(story)를 만드는 작업이 역사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류시현은 그들의 이야기를 읽는 법, 역사를 보는 관점과 태도에 대하여 자신의 경험과 고민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결국 역사는 기록된 자료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지극히 사적인 관점으로 해석하는 즐거움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물론 사건의 인과관계를 살피고 시간 순서와 주고 받은 영향을 살펴 재해석하는 일이 독자 개인에게 버거울 수 있으나 주체적인 인식의 힘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모든 지식은 ‘동료 압박’이라는 착각과 검색 정보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 대개 대중적 역사서로 출판되는 책들은 재미와 가독성, 이면의 진실, 엇갈린 해석에 관한 것들이라면 류시현은 역사란 무엇인지, 그것은 어떤 의미가 있으며 우리 삶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과거의 기록으로서 텍스트가 아니라 오늘, 여기를 사는 우리의 문제를 살피라고 요구한다.

흔히, 역사를 ‘오래된 미래’라고 한다. 그래서 역사는 언제나 살아숨쉬며 오늘을 만들고 미래를 꿈꿔야 한다고 요구하는 듯하다. 기원과 시간성, 시대적 맥락과 시기 구분, 사료의 선택, 우연과 필연, 해석과 관점, 인물의 평가, 역사교육과 상상력 등 각 장은 에세이 형식으로 저자의 소회와 경험이 녹아 있어 감성 독자든, 인문 독자든 모두에게 감동과 통찰을 줄 수 있다. 독특한 형식과 서술이라서가 아니라 저자의 ‘진심’은 좋은 책을 만드는 기본 요소다. 강만길의 『해방 전후사의 인식』, 이영희의 『전환 시대의 논리』, 박세길의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님 웨일즈의 『아리랑』, 이사벨라 비숍의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등을 읽으며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에 만났던 이야기들을 떠올렸기 때문이 아니다. 같은 책을 읽은 사람 사이의 공감 때문도 아니다. 자기 삶에 열정을 다한 이의 겸손과 애정이 느껴졌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조금 따뜻해졌다.

“계속 여러 책을 읽고 있다. 그렇지만 역사가 무엇인지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겠다. 게다가 역사가의 역할과 임무가 무엇인지에 관해 여전히 고민하게 된다.” 이제 환갑이 된 역사가의 고백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없다. 겸손한 태도와 끊임없는 질문과 고민이 없는 책을 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시간은 없고 책은 많다. “역사학자가 되었지만, 인문학자가 되고 싶었다.”라며, “문제에 관한 갈증을 해소하고자 책을 준비했는데, 갈증이 심해져간다.”라는 고백이 가장 마음에 드는 개인적인 이유는 설명하기 어렵다. 이해와 공감은 관점과 태도에 기인한다.

생각을 유연하게 하고 싶다. 생각이 유연한 것은 균형 감각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삶, 나의 판단, 나의 결정 등을 정답이라고 주장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 맺음말, 3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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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폴리스
마르얀 사트라피 지음, 박언주 옮김 / 휴머니스트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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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남부의 고대 유적 도시 페르세폴리스는 지명 그 자체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오리엔탈리즘만큼 위험한 옥시덴탈리즘이 서양 혹은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듯 한 몸처럼 움직이는 이스라엘에 대한 편견을 드러낸다면 중동 혹은 이슬람 문화에 대한 구별 없는 편견은 또 우리 안에 어떻게 자리잡고 있을까.

이란 여자 마르얀 사트라피의 그래픽 노블 『페르세폴리스』는 크게 두 개의 층위를 드러낸다. 중동을 부분과 전체로 구별해야 하는 관점, 중동 안에서 또 다른 개체인 여성 차별의 관점. 이란의 ‘강남좌파’라 할 수 있는 테헤란 북부 좌파 마르지(작가)는 혁명과 전쟁 혹은 여성에 대한 차별을 피해 유럽으로 도피(유학)할 수 있는 재력을 가진 여성이다. ‘3루’에서 태어났으나 히잡을 쓰고 홈베이스를 향해 슬라이딩을 해야 하는 불리함을 극복하는 정도라고 하면 지나칠까.

『팔레스타인의 눈물』을 통해 70여 년간 이어진 분쟁의 실상을 실감나게 표현했던 작가들과 달리 마르지는 자신의 ‘경험’을 그대로 보여준다. 흑백의 담담한 그림체는 선과 악, 남성과 여성, 부자와 빈자, 유럽과 중동, 근본주의와 민주주의 등 양립할 수 없는 이란 사회의 갈등과 충돌을 이분법으로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1969년생 외동딸이다. 그리 많지 않은 나이의 동시대인이지만, 어떤 인생은 그 자체가 그대로 한 편의 소설이며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미국의 무역센터가 무너지는 장면을 생중계로 시청한 세대에게 각인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폭력’을 이해시킬 수 없는 것처럼, 한 이란 여성의 일상과 경험으로 중동의 문화와 전통, 종교와 차별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훌륭한 한 편의 자전적 그래픽 노블은 내밀한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르지는 “일단 한계를 넘어서면,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는 유일한 방법은 그냥 웃어넘기는 것이다.”(275쪽)라는 말로 개인의 무력감을 표현한다. 목숨을 건 일상적 혁명과 종교적 도그마에 매몰된 근본주의자들의 만행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을까. 이념과 종교로 포장된 권력과 정치세력은 놀랍게도 다수 대중의 지지를 받기도 한다. 명분으로 챙긴 실리 때문일지 모르겠으나, 더디게 한발씩 앞으로 나아가도 어느 순간 도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경우를 우리는 수없이 목도했다.

마르지는 단순히 현상의 나열에만 그치지 않는다. 4년 동안 경험한 서구문화는 이란의 전통문화와 충돌을 일으키며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온다. 일반적인 사춘기 소녀와 다른 시간을 통과한 마르지의 경험이 단순히 부모의 사랑과 올곧은 태도로 극복될 수는 없다. 모든 인간은 단 한 번의 인생을 산다. 타인의 그것을 대리 경험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누구나 공평하다. 각자 처한 상황에 맞게 목적과 방향을 가늠하지만 태도를 결정하는 건 쉽지 않다. 페르세폴리스를 통해 이슬람 문화와 전통을 조금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마르지의 선택과 고민이 어디를 향하는지 눈여겨볼 수도 있다. 물리적 공간만 다를 뿐, 어쩌면 전쟁 같은 일상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혁명은 자전과 같아서 바퀴가 멈추면 끝장이다. 인생도 크게 다르지 않다. 넘어지면 깊은 상처를 감당해야 하며 남은 길은 어떻게든 스스로 페달을 밟아 나가야 한다. 아무도 대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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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사
알베르 소불 지음, 최갑수 옮김 / 교양인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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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자유여! 그대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범죄가 저질러지는가?”(롤랑 부인) - 87쪽

시간이 흐르고 나면 얼마나 많은 말이 허망해지는가.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약속이 부질없어지는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앞에 ‘자유’를 붙여 전가의 보도로 휘두르는 얼치기가 날뛰고 준엄한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위정자들이 또 얼마나 개인의 안위와 이익을 위해 불철주야 헛된 말들과 약속을 남발하고 있는가.

독학자의 서재를 채우는 귀한 가르침을 만날 때마다 옷깃을 여민다. 알베르 소불의 『프랑스 혁명사』는 대중의 인기와 시류에 영합했던 작가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와 대조되는 위대한 작가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시작하며 필연적으로 만난 책이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일처럼 어떤 책과의 인연도 시절과 맥락이 존재한다. 선택이 오롯이 개인의 자유의지가 아니듯 숱한 책을 만나고 읽고 잊는 일도 경험과 나이와 시기에 따라 자연스레 물 흐르듯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빠져 나간다.

알베르 소불은 프랑스 혁명을 계급 충돌의 관점으로 바라보며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습격 사건으로 상징되는 혁명을 제3신분 부르주아가 헤게모니를 거머쥔 사건으로 규정한다. 대다수 농미노가 장인은 신흥자본가와 이해관계가 다르다. 성직자, 귀족을 위한 앙시앙 레짐의 혁파에는 공감하지만 국가의 질서와 체제에 대해서는 관점이 같을 수 없다. 1792년 8월 10일 혁명이 민주주의 혁명에 가깝다면 그 이후에 벌어진 공포정치와 밀물처럼 밀려왔던 반동과 또 다른 혁명과 좌절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과 프랑스의 역사를 다시 보게 한다. 빅토르 위고가 『레 미제라블』 2권 ‘워털루 전쟁’에서 장엄하게 묘사했듯 “만약에 1815년 6월 17일과 18일 사이의 밤에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유럽의 미래는 달라졌으리라.” 유럽의 헤게모니를 넘겨준 프랑스는 1830년, 1848년 그리고 1968년에도 계속해서 ‘혁명’의 끈을 놓지 않았다. 마치 혁명의 활화산처럼 폭발하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준비하며 유럽의 역사뿐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1792년 이후, 유럽의 모든 혁명들은 프랑스혁명에 불과하다. 자유는 프랑스로부터 사방으로 비쳐 간다. 그것이야말로 태양의 행위 같은 것이다. 그것을 보지 못하는 자는 소경이다! 그렇게 말한 것은 보나파르트다.”라는 빅토르 위고의 말이 프랑스 혁명의 중요성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우리에게 각인된 1789년 이전과 이후의 전후 맥락을 상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영국과 프랑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역학관계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연동한다. 합스부르크가의 이야기가 여전히 숱한 영화, 드라마로 재생산되며 흥미를 유발하는 건 단순히 지나간 시간에 대한 향수 때문이 아니라 숱한 우연과 필연이 빚어내는 결정적 순간에 대한 아쉬움 혹은 환희가 아닐까.

알베르 소불의 이야기에 파묻혀 3박 4일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혐오, 분노, 좌절, 환희, 안타까움, 희망, 비참, 안도, 허망...... 거대한 파노라마처럼 숱한 감정의 회오리를 경험했다. 여전히 논쟁 중인 혁명에 대한 분석과 해석은 ‘관점’의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최갑수가 역자 후기에서 상세히 밝히고 있듯 소불에 대한 다양한 평가는 역사들의 몫이다. 지구 반대편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프랑스 혁명사를 들여다보며 느낀 감회는 남다르다. 문학, 역사, 철학, 사회,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며 그 빛과 그림자가 여전한 프랑스 혁명의 세세한 기록을 살피는 일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1789년 조선은 영조 13년으로 수원 팔달산 화산에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현륭원을 조성한다. 11살에 뒤주에서 죽어가는 아버지를 목격한 아들의 슬픔이 수원화성으로 빚어질 무렵이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보나파르트의 워털루 패배가 밤새 내린 비와 숱한 우연의 겹침인 것처럼 역사는 때때로 아이러니하게도 ‘가정법’을 허락하지 않는다. 성직자와 귀족의 비율, 그들이 점유한 토지...왕의 절대 권력과 신의 이름을 팔아 교회와 수도원, 성직자들이 누린 특권, 세습 귀족이 가진 부와 명예를 필연적으로 붕괴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이라는 생각은 결과론적 판단이 아니다. 오로지 생존의 극단에서 벌어진 반란과 혁명의 불씨가 횃불로 번진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으며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 그것이 당대 프랑스와 유럽 그리고 현재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그들의 생각과 삶의 태도를 반영한 정치인들의 발언이 단순한 ‘말실수’ 용인되고 친 재벌 정책과 사학재단의 비리에 관대한 시민들의 시선과 태도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경제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의 간극이 메워지지 않는 건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알지 못하는 부족한 현실 인식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와 그냥 민주주의는 어떻게 다른가. 프랑스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끝날 수 없다.

구체제에 위기가 부르주아 혁명과 민중 운동을 초래하고 혁명정부가 들어섰으나 결국 유산자가 지배하는 부르주아 공화국으로 귀결됐다. 알베르 소불은 결론을 덧붙여 혁명과 현대 프랑스를 조망한다. 국민적 통합과 권리의 평등 그리고 혁명의 유산을 살피는 과정은 대한민국의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현대사회는 거대한 인류 공동체로 기능하기 때문에 당연할 수도 있으나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과 미래를 돌아보는 데도 『프랑스 혁명사』는 매우 중요한 텍스트다.

혁명, 그것은 ‘위로부터’ 강제될 수 없다. ‘개혁’이 ‘위로부터’ 주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혁명은 필연적으로 ‘아래로부터’ 강제되는 것이다. 개혁은 사회의 기본 구조를 흔들지 않으며, 오히려 지배적인 사회 범주들의 지속적인 이익을 위해 기존의 구조를 보듬는다. - 혁명이란 무엇인가(‹사상› 제217~218호, 1981년 1월~2월, ‘국가’와 ‘사회’ 특집호), 7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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