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특별판) 문학동네 시인선 2
허수경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독일로 간 그녀는 인간의 시원을 밝히고 있을까. 고대 동방문헌학을 연구하고 있다는 허수경의 시인의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특별판을 아껴가며 읽었다. 떡제본이 아니라 실로 제본하고 표지까지 풀로 붙여 정성을 들였다. 노트만한 크기의 시집을 눕혀 위로 넘기면서 한 줄 한 줄 읽어나가니 제법 색다른 맛이 났다.

시인을 처음 만난 건 『혼자 가는 먼 집』이었다.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이후 오랜만에 만나는 그녀의 목소리는 깊고 넓어졌다. 차고 뜨거운 것을 구별할 줄 아는 것은 심장의 몫이다.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직관과 감성적 본능이 앞설 때가 많다. 장정일은 젊은 날 시를 썼던 사실을 부끄러워하지만 시는 여전히 자신의 몫이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웅변한다. 허수경의 시는 그 목소리가 크지 않으면서도 울림이 크다.

차가운 해가 뜨거운 발을 굴릴 때

문득 나는 한 공원에 들어서는 것이다
도심의 가을 공원에 앉아 있는 것이다
이 저녁에 지는 잎들은 얼마나 가벼운지
한 장의 몸으로 땅 위에 눕고

술병을 들고 앉아 있는 늙은 남자의 얼굴이 술에 짙어져갈 때
그 옆에 앉아 상처 난 세상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으며
차가운 해가 뜨거운 발을 굴리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얼마나 다른 이름으로 나, 오래 살았던가
여기에 없는 나를 그리워하며
지금 나는 땅에 떨어진 잎들을 오지 않아도 좋았을
운명의 손금처럼 들여다보는데

몰랐네
저기 공원 뒤편 수도원에는 침묵만 남은 그림자가 지고
저기 공원 뒤편 병원에는 물기 없는 울음이 수술대에 놓여 있는 것을

몰랐네
이 시간에 문득 해가 차가워지고 그의 발만 뜨거워
지상에 이렇게 지독한 붉은빛이 내리는 것을

수도원 너머 병원 너머에 서서
눈물을 훔치다가 떠나버린 기차표를 찢는
외로운 사람이 당신이라는 것을

나는 몰라서
차가운 해는 뜨거운 발을 굴리고
지상에 내려놓은 붉은 먼지가 내 유목의 상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술 취해 잠든 늙은 남자를 남기고
나는 가을 공원에서 나오는 것이다

5월 밤 선선한 저녁 공기가 살갗에 닿는 시원함. 푸른 시간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어슬렁거리며 동네를 한 바퀴 산책한다. 그래봐야 아파트 단지 사잇길과 단지 앞에 공원이나 탄천이 대부분 흙을 밟을 수 없는 길들이지만 그나마 야트막한 언덕과 산길이 이어져 있긴 하지만 콘크리트 숲 속에 고립된 섬처럼 애처롭다. 뜨거운 태양과 달리 차가운 달빛이 교교한 밤이 되면 또 하나의 세상과 조우하는 느낌이다.

시인은 유목의 상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여기에 없는 나를 그리워했고 술 취해 잠든 늙은 남자를 남기고 돌아선다. 차가운 해가 뜨거운 발을 굴리는 동안만.

난 존재를 안고 있는 허당이었어요

너는 중얼거렸다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차 소리가 났다 잎새들이 바깥에서 지고 있었다

너는 중얼거렸다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난 존재를 안고 있는 허당이었어요

단 한 번도 뿌리와 소통을 해보지 않은 나뭇잎

울 수도 없었다. 울기에는 너무 낡은 정열이었다

뿌리에서 떠나 다시 뿌리를 덮어주는 나뭇잎

웃을 수도 없었다 웃기에는 너무 오랜 정열이었다

소통 불가능성에 대한 내밀한 고백.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고 그 섬에 가고 싶다고 노래한 정현종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사람들 사이에는 작은 섬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너는 중얼거렸지만 나는 알아듣지 못했고, 한 몸이면서도 나뭇잎은 뿌리와 단 한 번도 소통을 해 보지 못했다. 그러니 우리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의미해지는 순간이 온다. 허당은 너가 아니라 바로 나라는 자명한 인식.

웃음이 사라진 사람에게 ‘웃기에는 너무 오랜 정열’이었음을 고백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아프다. 말의 갈피 사이에서 의미가 부서지고 이미지 대신 신음소리만 웅얼거리는 듯하다.

입술

너의 입술이 나에게로 왔다
너는 세기말이라고, 했다

나의 입술이 내 봄 언저리를 지나갔다
나는 세기초라고, 했다

그때 우리의 입김이 우리를 흐렸다

너의 입술이 내 눈썹을 지나가자
하얀 당나귀 한 마리가 설원을 걷고 있었다

나의 입술이 너의 귀 언저리를 지나가자
검은 당나귀 한 마리가 석유밭을 걷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거리의 모든 쓰레기를 몰고 가는 바람

너의 입술이 내 가슴에서 멈추었다
나의 입술이 네 심장에서 멈추었다

너의 입술이 네 여성을 지나갔다
나의 입술이 네 남성을 지나갔다

그때 우리의 성은 얼어붙었다

말하지 않았다
입술만 있었다

입술만 기억하는 사랑에 대한 시 한 편. 감각적이고 관능적이어서 슬픈 장면들이 수많은 이미지를 오버랩 된다. 말하지 않았고 입술만 있었던 시간을 추억하며 너의 입술이 나에게로 오고 그 입술은 말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은 얼어붙은 심장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니다. 그것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쓸쓸함이거나. 다시 돌아오지 않을 추억에 대한 회한이거나. 이도저도 아니면 인간에 대한 공포이거나 더 이상 두근거리지 않을 심장이거나.


110608-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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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1-08-18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그 섬에 가고 싶다..라고 말을 한 시인이 정현종 시인이군요. 저는 최근에야 정현종 시인을 알게 되어 시집을 사려하는 중이에요. 사람 사이의 섬. 눈에 보이는 듯하면서 어느새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섬.
허수경의 시는 유적을 발굴하는 느낌처럼 오래되고 버석거리는데도, 불타는 심장이 느껴지는 신기한 시 같애요.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인식의 힘님. ^^

sceptic 2011-11-16 23:07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