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멀리 바라보려 해도 인간의 눈은 한계가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마주치는 모든 인연과 무수한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때때로 길을 잃는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사람마다 살아가는 이유와 삶의 목표가 다르겠지만 일상의 갈피 사이에서 사람들은 서로 다른 감동에 휩싸이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한다. 가장 큰 행복이 사람인 것처럼 가장 큰 절망도 사람에서 비롯된다는 자명한 사실. 시를 읽는 행위는 무의식으로 억눌린 감정선의 피복을 벗겨내는 일처럼 조심스럽고 아프다. 타인의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상상의 즐거움을 넘어 확인할 수 없었던 미세한 생의 감각을 일깨우고 타인과의 관계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해주는 것이 시 읽기의 즐거움이다. 최영철의 『찔러본다』는 긴 호흡의 문장에서 만난 쉼표처럼 반갑다. 자연과 일상을 바라보는 개성적인 언어는 공감의 목소리로 잔잔하게 들려오고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특별하지만 낯설지 않다. 시간이 마련해준 듯한 특유의 가락과 리듬은 시 읽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노을 한 열흘 대장장이가 두드려 만든 초승달 칼날이 만사 다 빗장 지르고 터벅터벅 돌아가는 내 가슴살을 스윽 벤다 누구든 함부로 기울면 이렇게 된다고 피 닦은 수건을 우리 집 뒷산에 걸었다 서시에 해당하는 노을은 시인의 나이를 짐작케 한다. 책날개를 슬며시 열어본다. 1956년생. 누구나 한번쯤 기울지 않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다. ‘함부로’가 아니라 ‘선택’과 ‘열정’이었음을 모르지 않을 텐데 시인은 가슴살을 스윽 베인 듯 서늘한 초승달을 바라본다. 차갑고 냉정한 이미지가 전해주는 달의 목소리가 아니라 주관적 시선으로 빚어낸 시인의 목소리에 공감할 수 있어 아슴찮다. 개인적 자아와 사회적 존재의 갈등은 인간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꽃을 기르고 산에 오르고 바다를 바라보는 것은 존재의 시원을 향한 인간의 몸부림이다. 때로는 가슴 벅찬 웃음으로 행복해하지만 눈물과 한숨으로 절망하기도 하는 것이 우리들의 생이다. 그 생의 감각을 오롯이 전해 줄 수 있다면 좋은 시가 아닐까. 눈꽃 이다지 얼어붙은 자리에도 몇 송이 꽃 피울 수 있다니 가타부타 언약 없이 떠난 것들 완고하게 묻고 말았던 땅의 노여움 풀릴 수 있으려나 속삭이다 안 되면 노래하고 노래하다 안 되면 꺼이꺼이 느껴 울던 뜨내기 새의 부리에도 물오를 수 있으려나 삭풍에 묻고 말았던 그날의 맹세, 노여움, 후회 네가 문득 되짚어주었네 글쎄 그 간절한 빛깔이 이 뜨거움이었다는 듯 이 서늘함이었다는 듯 나무의 체온에 기대어서도 녹을 줄 모르는 눈물 한 방울, 두 방울 한 권의 시집을 읽고 가슴에 닿는 시 몇 편을 적어보는 것은 ‘그날의 맹세, 노여움, 후회’처럼 아련한 추억으로 남기도 한다. 그 간절함과 뜨거움 그리고 서늘함을 잊지 않기 위하여 때때로 또 다른 시집을 뒤적이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렇게 아프게 시에 찔린다. 햇살과 비와 바람에 찔려본다. 찔릴 수 없는 것들에 찔리는 것, 찌를 수 없는 것들로 찌르는 것. 그것이 어쩌면 우리 삶의 숙명이 아닌가. 단 한 순간도 기다려주지 않고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시간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인간의 숙명이 아닌가. 묵묵히 제 길을 걸어갈 뿐. 높은 목소리와 큰 기대는 실망을 가져올 뿐이다. 사소함을 넘어선 모든 순간에 감사하며,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싶어 너를 쿡쿡 찔러본다. 찔러본다 햇살 꽂힌다 잠득 척 엎드린 강아지 머리에 퍼붓는 화살 깼나 안 깼나 쿡쿡 찔러본다 비 온다 저기 산비탈 잔돌 무성한 다랑이논 죽었나 살았나 쿡쿡 찔러본다 바람 분다 이제 다 영글었다고 앞다퉈 꼭지에 매달린 것들 익었나 안 익었나 쿡쿡 찔러본다 110213-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