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리커버 개정판) - 국내 최초 수메르어·악카드어 원전 통합 번역
김산해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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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없는 역사는 존재 자체가 부정된다. 최초의 인간이 지구에 살았던 모든 순간이 기록된 건 아니다. 땅속에 묻혀 흔적이 남아 있거나 기록이 발견되지 않으면 우리가 과거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문명을 이루며 문자를 발명한 후에도 인간은 상상력을 발휘한다. 그러고 보면 과대 포장과 확대 해석은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어느 민족이나 국가의 역사도 만들어진 신화에 불과하다. 어쩌면 객관적 사실을 기록하는 일은 불가능한 지도 모른다. 기록자는 전쟁에서 승리한 자이며 권력과 부를 거머쥔 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가장 오래된 역사는 무엇일까.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발생한 수메르의 역사다. 고대 그리스의 일리아스, 오뒷세이가 역사와 신화의 혼재인 것처럼 길가메쉬라는 실존 왕에게 입힌 화려한 신화의 옷은 당대의 현실을 가늠하려는 시도를 불가능하게 한다. 시간이 흐르면 왜곡된 사실도 역사가 되고 신화가 되는 것일까.

실증주의 역사관의 관점에서 보면 과장된 기록으로 인류의 과거를 가늠하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 신화일까. 보헤미아 프라하 출신의 독일 시인 릴케는 길가메쉬 서사시를 ‘죽음의 공포에 대한 서사시’라고 했다. 초야권까지 소유한 실존 인물 길가메쉬가 현실에서 채우고 싶은 욕망은 없어 보인다. 단 한 가지, 죽음을 극복하려는 일련의 과정이 길가메쉬 서사시의 뼈대를 이룬다. 21세기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죽음에 대한 공포. 인간이 달나라에 가는 시대에도 단 한 번뿐인 삶에 정답을 찾지 못한 건 아닐까. 모두 죽는다는 전제가 삶의 목적과 방법을 오히려 왜곡하기도 하고 허무주의에 빠지게 하며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고 이상적 가치를 추구하도록 독촉하는 건 아닐까.

수메르어는 그림문자(5100년) 이전에 발명된 것으로 보인다. 뒤이어 악카드어(4600년), 에블라어(4300년), 히브리어(3000년)으로 이어지는 기록의 역사는 현존재를 먼지만큼 아득하게 만들어버린다. 천문학과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겸손’이다. 타인과 세상을 보는 눈이 어떠하든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든 존재의미를 찾기 어렵다. 수천 년 전 수메르에는 엔메르카르-루갈반다-두무지-길가메쉬로 이어지는 막강한 권력자가 있었다. 이들에 대한 기록인 수메르가 “그리스에 미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특히 길가메쉬 서사시는 호메로스의 ‘교과서’ 중 하나였을 것이다. 오디세이아뿐만 아니라 고대 영국의 영웅 서사시이며, 게르만족 최고의 서사시인 〈베어울프(Beowulf)〉에서부터 북유럽의 신화 연대기 〈잃어버린 이야기들(The Book of Lost Tales)〉의 집필자인 톨킨(John Ronald Reuel Tolkien)의 장편소설 〈반지의 제왕(The Lora of The Rings)〉에 이르기까지 영웅 문학의 출발점이요, 최고(最古) 정점에 길가메쉬 서사시가 우뚝 서 있다! ”

수메르의 권위자가 쓴 영역본을 충실하게 번역했다는 책을 고민했으나 라틴어를 공부한 천병희의 판본을 믿듯 수메르어와 악카드어 기록을 직접 해석한 김산해의 책을 선택했다. 그는 길가메쉬 서사시를 “악카드어의 기록은 길가메쉬 서사시의 여러 판본으로 치자면 최후대에, 달리 말하면 마지막 개작(改作)DP 해당되는 것이었지만 성서의 기록보다 적어도 수백 년이나 앞서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학자들은 혼란에 빠졌다. 인간이 2000여 년간이나 믿어온 ‘진실의 혼돈’이었다.”라고 말한다. “히브리 신호와 그리스 신화에 앞서 악카드어로 기록된 원본들이 있었다! 악카드어로 기록되기 전에 수메르어로 기록된 진짜 원본들이 있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제 최초의 신화, 최초의 서사시를 접할 수 있는 시기에 태어난 행운을 잡은 것이다. 이것은 4000여 년 전 수메르가 지구상에서 사라진 뒤부터 부활하기까지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누리지 못한 특혜인 셈이다! ”라는 감탄은 길가메쉬 서사시가 가진 역사적 의미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한 권의 책으로 남은 기록이 아니니 순서를 정하고 수메르어 기록과 악카드어 기록의 조각들을 맞춰 배열하는 작업은 오롯이 번역자의 몫이다. 450쪽에 달하는 부담스러운 분량이지만 지루함을 덜기 위해 사진과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하기 때문에 전혀 지루하지 않다. 번역투의 문장도 없고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어나 고대어가 등장하지도 않는다. 배경 지식에 해당하는 긴 각주는 본문을 읽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건너뛰지 말고 꼼꼼하게 살피는 편이 낫다.

신의 노동을 대신하기 위해 엔키가 창조한 ‘인간’은 오늘도 고단하다. 매일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 눈을 뜨는 건 어쩌면 하루살이로 매일 다시 태어나는 게 아닐까. 또 하루 저물어 가고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의 이유로 오늘을 살았을 테지만 어둠이 내리면 잠자리에 들고 다시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내일을 산다. 그 종착역이 어디든 4800여 년 전 길가메쉬가 느낀 두려움 대신 자기 삶의 끝을 가늠해 보면 지금 이 순간, 그리고 얼마나 계속될지 모를 미래를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잠자는 자와 죽은 자는 얼마나 똑같은가! 죽음의 형상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도다! 바로 그것이다. 너는 인간이다! 범인이든 귀인이든, 꼭 한 번은 인생의 종착역에 도착하고, 하나처럼 모두 모여든다. -3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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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08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읽고 갑니다 ~ 리뷰 당선되신거 축하드립니다 *^^*

sceptic 2022-03-08 18:21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