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 - 히가시노 게이고 에세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은모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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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는 신문기사와 같다. 하루만 지나도 쓰레기통에 처박히기 일쑤다. 대게 누군가 혹은 잡지사의 의뢰를 받고 쓴 글이라 딱히 값어치가 크지도 않다. 책으로 엮어 낼 필요까지는 없다는 말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한국인이 사랑하는 소설가다. 그가 쓰는 글 대부분이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사이언스>도 마찬가지다. 정직하게 말해 굳이, 라는 생각이 든다. 일단 시의성이 제로다. 2003년에서 2005년에 걸쳐 발표된 글들이라 와 닿지가 않는다. 더우기 주제가 과학인데. 내비게이션에 푸념하는 내용을 읽고는 한숨이 나왔다. 휴대폰 하나면 다 해결되는 세상인데. 


물론 이과 출신 작가라 번뜩이는 내용이 있기는 하다. 기후변화나 생물다양성에 대한 언급은 매우 잘 정리되어 있다. 그럼에도 아쉬운 건 적어도 최첨단 기술에 대한 언급은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일본 프로야구 플레이오프 방식이나 요미우리 자이언츠 부진 원인 따위로 지면을 낭비하다니. 한마디로 게이고 답지 않다.


덧붙이는 말 


혹시나 싶어 찾아봤는데 일본어 제목도 사이언스다. さいえんす? 양심상 물음표를 붙인 것 같은데 과연 과학이야기가 있나 싶다. 본인도 후기에서 그건 아니라고 했는데. 하루키였다면 이런 타이틀은 절대 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다 작가?라고 짓지 않았을까? 그게 더 적절한 듯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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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나무를 오르기는 잘 하지만 내려오기는 잘 못한다. 그런데 새끼 고양이는 그걸 모른다. 열심히 올라가기는 했는데, 자신이 얼마나 높이 올라왔는지를 알고는 오금이 저렸으리라. _무라카미 하루키, <고양이를 버리다>


뭔가 일이 터져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사람을 보는 마음은 복잡 미묘하다. 특히 그 인간을 직간접적으로 아는 경우는. 내게도 그런 경우가 생겼다. 아주 오래는 아니지만 꽤 안다고 자부하는 편이었다. 불행하게도 좋은 기억 쪽은 아니다. 그는 매우 똑똑하고 순발력 좋고 윗사람 비위도 잘 맞추고 아래 직원들과도 잘 어울렸다. 이런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단점이 있었으니 그건 쉽게 판단하고 단정 짓는 성격이었다. 곧 상황을 재빠르게 판단하고 바로 결정을 내렸다. 어찌 보면 직장생활에서는 큰 덕목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는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다.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들이 대표적이다. 더디 가도 충분히 공감을 얻어야 마땅한 일도 늘 최단거리 주자처럼 달리다보니 상처받는 사람들은 갈수록 늘어났다. 그는 알았어야 했다. 자신이 올라갈 위치는 딱 일급 조언자까지였음을. 스스로가 최고 결정자가 되어 칼날을 휘둘러서는 안 되었다. 물론 갖은 고생 끝에 쟁취한 왕관이 자신을 옥죄는 족쇄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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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전 찌뿌둥한 몸을 책장에 기대고, 참고로 우리 집에는 소파가 없다, 리모컨으로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 허지웅을 만났다. 고민사연을 상담해주는 내용이었다. 딱히 무대장치도 없고 자신의 집 응접실에서 하는 것으로 보아 개인 방송인 듯싶었다. 화면 아래 날짜가 나와 보니 2020년 2월이었다. 큰 병을 치르고 난 후여서인지 과거처럼 날카롭게 일침을 날리기보다는 좋게 좋게 충고하는 형식이었다. 특이한 건 그가 말끝마다 삶의 확대경 혹은 돋보기를 치우라는 말을 했다. 곧 누구나 걱정을 안고 사는데 자신만 유별나게 고생한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맞는 말이다. 내 눈 안의 티는 천근만근이기 마련이다. 


문제는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해도 마음은 따로 논다. 나도 마찬가지다. 요 며칠 남들이 들으면 헛웃음을 칠 일로 골머리를 앓았다. 잠을 잘 자지 못할 정도였다. 어찌 어찌 극복하고 있지만 언제 또 터질지 모르는 지뢰밭이다. 이럴 때 필요한 건 회피다. 곧 비슷한 상황에 처하는 걸 원천 차단하는 거다. 가장 좋은 방법은 환경을 바꾸는 것이다. 아예 집이나 일터를 옮기는 수도 있지만 잠시 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다. 익숙함과 결별하는 것이다. 코로나가 심한 지금같은 처지에 어렵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주변을 변화시켜야 한다. 하다못해 매일 오고가는 길에서 멀어져 다른 통로를 개척해보시라. 그래야만 비로소 삶을 확대경과 돋보기에서 벗어나 평범한 일상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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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나는 운이 좋았다. 학교폭력을 가하거나 당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사소한 일들은 있었다. 초등학교 때 골목길에서 중학생 형에게 운동화를 뺏겼다거나(새거였다. 아버지께서 일본에서 사다주신 아식스 흰색 런닝화였다. 이렇게 세세하게 기억하는 걸 보면 아직도 분이 덜 풀렸나 보다), 중학교 때 썩 친하지 않은 아이와 버스정류장에서 투덕거리거나, 고등학교 때 글러브를 끼고 권투흉내를 낸 것 정도였다. 물론 정정당당했다. 3분 3라운드라는 규칙도 정확하게 지켰다. 


그러나 세상에는 나 같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이들도 꽤 있다. 이재영 선수가 쏘아올린 학폭은 그칠 줄 모르고 퍼져나가고 있다. 한 때 미투운동이 붐인 적이 있었는데 그 때보다 규모나 확산속도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폭력은 일종의 일상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단지 때리지 않았다고 해서 면피가 되는 것도 아니다. 왕따는 대표적인 예이다. 인간의 속성상 집단을 이루게 되면 당연히 이런 저런 파벌이 생기고 특히 학교처럼 폐쇄적이고 스트레스가 많은 사회에서는 따돌림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해결책도 뜬구름 잡기에 그치고 만다. 


적절한 격리와 분리, 그리고 해당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맞춤 교육만이 정답이다. 비록 지루하고 먼 길일지라도. 개인적으로는 글쓰기 교육도 나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글이란 머릿속에 마구 떠오르는 감정을 정리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곰곰 떠올려보니 뭔가 잘못을 한 아이에게 반성문을 제출하게 한 건 꽤 좋은 방안이었다. 내용을 떠나 최소한 그 시간동안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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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사람은 소수다. 자신에게 닥치면 사정이 달라진다. 바로 응징하고 싶어진다. 문제는 결과가 의도와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쌍방폭행을 떠올려 보라. 인터넷과 에스엔에스가 발달하면서 예전 같으면 뉴스거리도 되지도 못하는 사건들이 크게 화제가 되고 있다. 지하철 객차 안에서 오줌을 싼다거나, 케이트엑스 안에서 마스크를 내리고 햄버거를 먹는다거나, 편의점에서 껌이나 과자를 훔친 아이의 사진을 가게 앞에 붙이거나. 본인 생각에는 정의를 실현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법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명예훼손이다. 아무리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해도 사전 동의없이 공공연하게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간에 영상이나 사진을 게재하는 건 불법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신고하면 된다. 굳이 동영상을 제공할 필요도 없다. 공권력은 이런 일을 하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성에 차지 않을 것이다. 망신을 당해도 싸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모든 불의를 사적 보복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횡횡하는 사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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