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굳이 소설가
강남역 알라딘 중고매장에 들러 스티븐 킹의 <샤이닝> 원서를 구입했다. 언제 다 읽을지 살짝 걱정은 되지만 일단 뿌듯하다. 설레는 마음으로 첫 페이지를 열었다. 책에 쏟아진 간단한 찬사(?)에 이어 작가 본인이 직접 쓴 소개 글이 보인다. 이 맛에 오리지널을 읽는 거지, 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이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돈을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다, 고 확신한다. 마치 짧은 단편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왜 번역본에는 없는지 의아하다.
여하튼 킹은 그 짤막한 글에서도 현란한 비유와 직유로 독자들을 농락하는데.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샤이닝>은 내 작품의 갈림길에 쓴 것이다. 대부분의 소설가는 히트작을 내고 나서는 그 다음 책은 비슷한 주제를 다루거나 조금 더 나은 내용에 그치는데 나 같은 경우는 완전히 다른 문법으로 글을 써나갔다. 아, 벌써부터 두근대지 않는가?
그러면서도 글쟁이로서의 근면함도 또다시 강조한다. 직업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는 매일 3천 자 정도를 쓰겠다고 다짐했다. a4지 2장 반 가량의 분량이다. 에게? 그런 거라면 나도 하겠다. 물론 하루 이틀은 가능하다, 그러나 매일 같이 반복한다고 상상해보시라. 지옥이 따로 없다. 결국 킹은 하루에 1,700자 정도를 쓰는 것으로 타협했다. 이 또한 대단하다. 장편소설은 원고지 매수로 하면 약 1,200에서 1,300매 정도인데, 글자 수로 환산하면 약 260,000자 정도 된다. 곧 쉬지 않고 계속 쓰는 데는 대략 152일이 걸린다. 이런 계산은 최상의 경우다. 소설을 구상하고 초고를 쓰고 다듬고 고치고 덧붙이고 빼고를 생각하면 세배에서 네 배는 기본이다. 요컨대, 장편소설 하나를 완성하는데 걸리는 기간은 총 600일이 넘게 걸린다. 꼬박 2년 가까이 소요되는 셈이다.
사정이 이러니 누가 소설가가 되겠다고 하면 뜯어말리고 볼 일이다. 어떻게 어떻게 글을 쓸 수 있다고 하지만 그동안 생계는 누가 책임지나? 최소 2년 동안의 생활비가 보장되어야만 제대로 된 장편소설을 완성할 수 있다. 물론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만. 불행하게도 이 조건에 걸맞는 작가는 극히 드물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베스트셀러 소설가는 하늘의 별만큼 아득한 존재다. 어쩔 수 없이 미리 원고료를 받는 청탁글이나 소설과 상관없는 칼럼이나 짧은 에세이 아니면 강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사정을 모를 때는 왜 작가들이 저렇게 여기저기 얼굴을 내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속내를 알고 나서는 안타까움이 더 크게 들었다.
그럼에도 굳이 소설가가 되고 싶다면 매일 꾸준히 일정하게 글을 쓰는 방법밖에 없다. 그것도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하루에 몇 글자의 글은 무조건 작성하겠다와 같은. 문학에 대한 로망이 있는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이 정도 각오 없이 직업적인 작가가 되겠다는 건 도둑놈 심보나 다름없다. 소설가중의 소설가인 헤밍웨이도 매일 아침 의자에 앉아 탁자 위 종이에 500자를 다 쓰기 전까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방탕한 것으로 잘 알려진 그였는데도 말이다.
덧붙이는 말
참고로 이 글은 몇 글자일까요? 확인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다들 한글로 글을 쓰는데 익숙하실 것이다. 어떤 버전이든 상단의 맨 왼쪽에는 파일이 있다. 파일을 누르고 쓱 내려가다 보면 문서정보가 있다. 이 정보 안에 문서통계를 클릭하면 글자와 원고지 수를 알 수 있다. 낱말, 줄, 문단, 쪽도 볼 수 있는데 그다지 중요한 내용은 아니니 패스하시길. 정답은 제목을 제외하고 총 1,748자, 원고지 매수로는 9.3매다. 어쨌건 하루 할당량은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