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말하기도 새삼스러운 사실이지만 나는 남달리 끈기가 없다. 두 권 이상으로 이어지는 소설을 읽은 것은 손으로 꼽을 수 있고(사실은 딱 두 번), 열심히 챙겨 본다 하더라도 드라마를 마지막 회까지 본 것도 꼽을 정도다(아마 두세 번?). 하지만 나도 사람이라 새로운 이야기에는 언제나 끌린다. 그런 이유로 나는 소설의 첫 문장과 드라마의 첫 회를 아주 좋아한다. 이 이야기를 앞으로 얼만큼 좋아할지는 대체로 여기서 판가름 난다.
무얼 읽어야 할지 무얼 써야 될지 몰라 거실만 서성대던 얼마 전 주말, 케이블 티비에서 '선덕여왕'의 한 장면을 보았다. 그게 하필 인구에 회자되는 (얼굴에 피가 튄) 고현정 씨의 "사람은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씬. 나는 그만 깜짝 놀라서, 하나티비로 이 드라마의 1,2회를 연달아 보았다. 진흥대제(이순재 분)가 미실(고현정 분)을 아끼고, 그런데 자신이 죽을 때는 미실에게 암살자를 보내고, 그런데 그 암살자가 사실은 미실의 정부이고, 미실은 왕의 유서를 조작하고, 이어 황후 자리를 노리고 낳은 아이를 "미안하다 아가야, 나는 이제 니가 필요 없다" 하고 차갑게 버리고, 왕이 바뀌고 또 바뀌고, 미실은 황후를 죽이려 하고, 황후는 기어이 살아 돌아오고, 국선 문노(꺅! 정호빈 분)는 머리 아프게 멋있고, 문노는 싸움도 잘 하고, 문노는 계속 멋있고, 왕은 두 아이와 아내와 자신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딸 하나를 궁 밖으로 버리고, 미실은 눈 앞에서 놓친 물증 때문에 쌍둥이 사건은 심증으로만 묻어둔 채 짜증이 나고, 하여간 숨 돌릴 틈 없이 전개되는 이야기에 단박에 매료되었다. 물론 때로 논리적이지 않은 장면 연결도 있고, "어출쌍생이면 성골남진이라"와 "북두의 별이 여덟이 되는 날..." 과 같은 요상한 말은 살짝 신경질이 날 만큼 자주 나왔지만(진짜예요;;; ), 그런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이 얼마만에 보는 박력 넘치는 서두란 말이냐.

사진이 마땅치 않아서... 그냥 공익을 위해 승호군(김춘추 역)의 제작발표회 사진을;;;
이 드라마의 미덕은 여러 가지가 있겠다. 고현정 씨의 연기는 '잘 돌아왔어요, 우리에게!' 하고 안아주고 싶을 정도고, 여인들의 옷은 한결같이 아름답다. '어미' 또는 '부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 부자(父子)가 모여 공모하는 장면이라든가, 덕만(어린 선덕여왕)이가 '아빠는 필요없고 하여튼 엄마는 내가 지킨다'고 다짐하는 장면처럼 그간 사극 속의 체증을 날려주는 장면도 좋다. 덕만이가 엄마(라고 믿는 양엄마)를 잃은 날, 덕만이의 쌍둥이 언니 천명공주 역시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같은 시각 울고 있는 설정도, 꿈과 현실을 절묘하게 연결하는 편집도, '사막에선 눈물을 아껴야 한다'는 말이 '사막에선 눈물이 빨리 마른다'는 말로 발전(!)해가는 것도 좋다. 하지만 무엇보다 좋은 것은 사막에서의 고된 유년기를 끝낸 덕만이가 신라에 돌아온 이유가 '아버지를 찾아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세상에 무슨 드라마를 이렇게 잘 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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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대제가 "전쟁은 용감한 신하가 있으면 되고, 결정은 현명한 신하가 하면 되고, 왕은 사람을 잘 두면 된다"(정확한 인용은 아니에요)고 할 때, 덕만이가 중국의 제후에게 "백성의 말을 들을 시간이 없는 자는 황제가 될 시간도 없다"고 일갈할 때, 특히 미실이 정적을 죽인 다음 그의 빈소를 찾아 조문한 뒤 유족을 꼭 끌어안고 협박할 때, 생각했다, 참 지독한 반복이구나. 오늘 방송분 현재 '선덕여왕'의 주요인물들은 열다섯 안팎의 나이로 십대를 보내고 있었다. 숲 속에서 수련을 한다, 사막을 건넌다, 절벽을 오른다, 화살을 맞는다, 실종된다, 돌아온다, 하면서 나쁜 놈들에 맞서 신라를 구하겠다고 죽도록 고생하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애들에게 못할 짓 시킨다. 예고편을 보니 이젠 시골 출신의 어린 김유신이 천명공주를 따라 서라벌에 입성해 '서울 귀족' 화랑들의 텃세에 부딪히기까지 할 모양이다. 김유신의 무리에는 화랑으로 분한 덕만이도 있다. 이렇다 보니 앞으로 내가 과연 이 드라마의 하이라이트를 배겨낼 수 있을지, 마지막회까지 울지 않고 잘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얘들아, 부디 잘 자라라. 드라마 안에서라도, 아무도 아프지 말고 죽지도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