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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그때 나는 초등학생이었고, 친구 생일 선물을 사려고 나왔다가 그 일을 맞닥뜨렸다. 살다 살다 그렇게 매운 냄새는 처음이었다. 코가 뜯겨져 나가는 것 같았고 목에는 불이 붙은 것 같았다. 눈물이 계속 나왔다. 매워서인지 숨이 막혀서인지 무서워서인지, 토할 것만 같았다. 어차피 눈을 뜬다 해도 앞이 잘 보이지 않았을 거다. 나와 내 친구는 무작정 어른들을 따라 뛰었다. 한 무리의 어른들이 맞은편에서 똑같이 이쪽으로 뛰어 왔다. 그쪽 아저씨 한 분이 외쳤다. "이쪽에도 전경들이 있습니다! 돌아서 가야 돼요!" 누군가 또 외쳤다. "이쪽으로 가면 골목이 나와요!" 나는 예정보다 한나절이나 늦게 겨우 집에 들어왔다. 잔뜩 쫄아 있었는데 엄마는 나를 혼내는 대신 찬 물로 얼굴을 계속 씻게 하고는 내가 쪼그리고 앉아 세수하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87년 5월이었다. 나는 명동에서 효창동까지 걸어(혹은 쫓겨) 온 시위대에 휩쓸렸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명동성당에서 나오는 길에 철거민을 보면서 우리집이 길바닥에 나앉게 될까봐 겁에 질리고, 명동 입구의 버스 정류장에서 현기증 나도록 많은 사람들에 부대낀 것도 같은 해의 일이겠다. 1987년.
그게 가까이에서 최루탄이 터졌기 때문이라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그보다 더 나중에, 천천히, 87년 6월에 대해 학교에서 TV에서 책에서 술자리에서 들어 알게 되면서 나는 이따금 그때 일을 떠올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때 초등학생이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나처럼 의지가 약하고 겁 많고 참을성 없는 사람이 그때 대학생이었다면, 아아 얼마나 인생이 고달팠을까. 나서지도 모른척하지도 못하고 쩔쩔 매다가 결국은 모른척했을 거야, 분명. 그리고 괴로워했겠지. 정말 다행이야. 그 시간이 그쯤에서 나를 비껴가서. 나는 나의 그런 행운에 진심으로 고마워하면서 좋은 시민으로 살려고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시간이 단선적으로 흐른다고, 역사에는 (진보 또는 발전하는 쪽으로) 방향성이 있다고 믿던 때의 이야기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어느정도 이루어졌고 이제 세부적인 것만 천천히 고쳐가면 된다고. 이명박을 욕하고 민주당의 무능(이것보다 더한 말은 없나?)에 고개를 흔들면서도 '민주화의 흐름'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고 손쉽게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썬글라스 낀 보수들의 집회를 희화화하고 이명박의 외모를 혐오하면서, 그래도 시간은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안다. 내가 그렇게 무시했던 그들 역시 시간은 자신들의 편이라고 생각하고 지난 10년을 가열차게 싸워왔다는 걸. 오히려 '흐름'은 돌이킬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열심히 궐기하고 열심히 규탄하고 열심히 가스통을 들었다는 걸. 또 그들은 역사가 거꾸로 갈 수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저토록 사력을 다해 광장을 닫는 것이라는 걸 이제 안다. 나는 또 안다. 세상에 정말 공짜는 없다는 걸. 비껴간 게 비껴간 게 아니었다는 걸.
만화 『100℃-뜨거운 기억, 6월 민주항쟁』은 내가 '비껴간 역사'라고 여겨온 그해 6월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한다. 애초에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에서 의뢰를 받아 중고등학생을 위한 교재로 만들어진 만화로, 그 역할에 맞게 이 항쟁에서 꼭 기억해둬야 할 일들도 짚고 만화다운 재미와 극적인 요소도 확보하고 있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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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 아무것도 아닌 걸 위해 수많은 사람들-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처럼 터무니없이 약하고 겁 많고 평범한 사람들-이 피와 땀을 흘렸고 제 삶의 기회를 포기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지키는 것이 생각보다 무척 어려운 일이고 우리의 민주주의가 안심할 정도로 튼튼하지도 않으며 끊임없이 강화하고 보완하려는 노력 없이는 어느날 사람 좋아 보이는 도둑놈에 의해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얘기까지 하고 싶었다(이런 얘기는 이 작품이 인터넷에 발표됨과 동시에 집권한 현 정부에 의해 충분히, 현장체험을 곁들여 잘 교육되고 있는 중이다). -「작가의 말」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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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또래의 작가는 '직접적 기억'도 아는 바도 없는 상태에서 공부하고 취재하고 고민하면서 이 만화를 그렸다. 그날의 모자이크를 완성한 평범한 학생들, 어머니들, 회사원들의 이야기는 그간 많이 보아온 영화나 소설 속의 그것처럼 비장하지도 신파로 흐르지도 않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나게 한다. 그것은 사실 슬프게도, 전경이 늘어선 87년 거리의 풍경이 오늘날과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침착하게 '빨갱이'에 대한 오랜 혐오와 공포로부터 그날의 '축제'를 지나 전사들이 얻어낸 '그것 없이는 꿈꿀 수 없는 약하면서도 소중한 그런 백지' 에 이르기까지를 사람 냄새가 훅 끼치는 만화로 그려냈다. 그러면서도 자기답게 "독립투사들도 술 마실 땐 만담하고 그랬을 거야" 하는 식의 블랙유머를 잊지 않는다. 책 뒤에는 이른바 본격 민주주의 학습만화인 "그래서 어쩌자고?"가 실려있다. 무릇 민주화는 가슴에서 시작하되 머리도 함께 가야 하는 것. 이한 씨의 강의 교안을 토대로 내용이 꽤 빡빡한 민주주의의 기초를 꼼꼼하게 따져보는 학습만화다. 다수결, 여론조사, 사실명제와 당위명제의 위험한 연결 등 한번쯤 머리로 정리해두어야 할 개념들을 정리해주었다. 심지어 이 부록 만화의 결론은 '짬을 내서 공부해라' 다. 놀기만도 바쁜 세상, 학교 졸업한 게 언젠데 공부라니 내 팔자야 소리가 절로 난다.
모르면 모를까, 참혹한 실패를 경험케 한 그 길을 다시 걸어야 한다는 건 슬프고 두려운 일이다. 그래도 조금 좋은 소식은 만화가 최규석이 우리와 같은 시대에 산다는 것이다. 조금 더 좋은 소식은 그가 지금 광장에 서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