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과학소설에 대하여 On Science & Science Fiction
The Ascent of Wonder는 하드 SF 앤솔로지랍니다. 편집자들의 홈페이지에 앤솔로지 소개란이 있었고, 거기에 이 글이 있더군요. 나중에 여유가 되면 한 번 구해서 읽어보고 싶은 마음에 번역을 시작했는 데 생각보다 늦게 올리게 되었습니다. 게을러서죠 뭐... 후후... 여기까지 읽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물론 오역은 모두 부덕한 (부지한?) 제 탓이니 뜻이 안통한다고 글쓴이를 핀잔하시기는 마시길...
지은이: Kathryn Cramer
원전: http://ebbs.english.vt.edu/exper/kcramer/anth/Cramer.html
옮긴이: 김묵한
에셔 M.C. Escher는 그의 에세이 "불가능한 것들 The Impossible"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묘사하려는 사람은 일종의 법칙을 따라야만 한다"고 말했다. 과학소설의 대다수는 얻을 수 있는 정보를 가지고 우리의 현재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구성해낸 외삽의 소산이라기 보다는, 에셔가 기하학적 대칭의 법칙 geometric symmetry - 불가능한 상상적내용을 형상화하는 법칙 - 을 사용하듯이 과학의 원리를 사용한 에셔풍의 불가능한 목표이다.
미래에 대한 모든 SF는 아무리 엄밀하게 구성되었다고 하더라도 현재와 과거의 파편에서 미래를 만들어야만 한다; 우리가 구성한 미래들은 우리들 자신만큼이나 현재의 일부이다; 이런 미래들이 결코 실제로 미래가 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미래를 표현할 수는 있다. SF덕분에 우리는 상상된 미래라는 측면에서 우리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다. 그림에서 여러개의 평행선을 두 선이 서로 만나는 모양과 겹쳐서 철도를 연상할 수 있게 하는 원근법에서의 관습과 마찬가지로 SF의 관습에 따라서 묘사된 장면의 프레임은 이를 넘어선 물리적 세계를 상상할 수 있게 해 준다.
"하드" SF가 SF 영역의 핵심이자 중심이며, 모든 다른 SF는 여기를 맴돌고 있다는, 그리고 이 핵심부의 특징은 과학과 기술에 대한 독특한 관점에 있다는 관점이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하드" SF라 부르는 것은 보다 정확하게는 기술애호적 technophilic SF를 말한다.
폴 앤더슨은 1970년대에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과학, 기술, 물질적 성취 등은 기본적으로 좋은 것이다. 이 안에는 인류의 운명, 심지어는 인류의 정신적 및 영적인 운명의 개선을 위한 충분조건은 아니라도 필요조건이 들어있다." 그는 또한 하드 SF를 여타 SF와 차별화했다: "하드 과학소설은 현실적인, 현 시대의 과학 혹은 기술에 기반하고 있으며 여기에 최소한의 상상적인 힘, 물질 혹은 자연법칙을 적용해 이를 확장하는 것이다." 한 소설을 "하드" SF로 부를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소설에 포함된 실제 과학의 총량과는 관계없이 이야기가 전개되는 중에 등장하는 수많은 하이테크 기기에 대해 서술하는 목소리가 실용적이고 결정적이며 실제적인가, 그리고 주인공이 사는 미래 (혹은 명확한 대체현재 혹은 대체과거)가 기본적으로 지금 여기서의 중대한 기술적 변화의 결과인가에 따라 결정된다. 반복을 통해 우리는 이런 서술하는 목소리를 "미래주의적"인 것으로 분류할 수 있게된다.
유토피아 소설과 마찬가지로 과학소설은 보다 나은 세계로의 가능성을 창출하고 예견하려는 욕망에서 자라났다. SF에서 지금보다 나은 세계는 과학과 기술을 통해 창출되고 예견될 것이다: 과학적 외삽과 기술적 혁신은 세계를 구원하려는 정치적인 행위이다. 그러나 민간설화의 전통이 없었다면 SF는 설교조의 종교팜플렛 문학, "유토피아"를 위한 청사진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계몽적이고 합리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충동은 비합리적이고 로맨틱하며 공상적인 민간설화 전통과 만나게 되었다.
민간설화와의 관계와 더불어, SF는 또 하나의 중요한 문학이전의 문화와 관계가 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성직자만이 성경을 읽을 수 있을 때, 평신도들은 종교예술을 일상적인 현실의 재현으로서가 아니라 현실의 기저에 놓인 원리를 밝혀내기 위한 것으로 - 신성한 텍스트를 발견하기 위한 - 보았다. SF는 과학의 종교예술이다. 물론 오늘날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권리가 있듯이 과학적인 문헌을 읽을 권리가 있지만, 종교예술을 "읽는" 습관은 우리가 SF를 읽는 방식으로 전이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인 현실을 재현하기 위해 읽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경험 뒤에 숨은 원리 - 우주의 질서 -를 밝혀내기 위해 읽는다. 철모르는 10대 때는 과학 그 자체를 배우기 위해 과학소설을 읽었을 수도 있다. 성인으로서 우리는 아마 이미 과학 그 자체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읽는 SF를 쓴 몇몇 작가들보다도 더 잘 알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야기 하기와 연결된 과학은 책 없이 세속적인 경험으로는 복제하기 어려운 감정적인 경험을 준다.
1920년대 과학소설부문이 자리를 잡은 이래, 과학은 과학소설을 안내하는 힘이었으며 반대로 과학소설은 과학에 도움을 주는 일도 있었다. 과학소설이 없었다면 우주 계획이 존재하기나 했을까? 일본의 공장에서 차를 만드는 로봇이 _I, Robot_에서의 로봇과 닮은 데라곤 없을 지도 모르지만, 이 로봇들은 아시모프 Isaac Asimov와 그의 동료들이 아니었다면 지금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수세대에 걸쳐 과학자들과 엔지니어들은 SF를 읽으며 자랐으며, 과학이란 게 있다는 걸 배웠다. 그리고 이들이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했다면 놀 수도 있었을 것이다 - 과학소설은 칼 세이건 Carl Sagan이나 고 Gerald Feinberg와 같은 과학자들이 직업을 선택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과학자가 된 수많은 SF 독자들은 노년에 과학소설작가가 되었다: 프레드 호일 Fred Hoyle, Gene Wolfe, John Cramer, 칼 세이건, Joan Slonczewski, Robert L. Forward 그리고 Don Kingsbury 등 이 명단은 일부에 불과하다. 과학과 SF간에는 이런 관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관계의 속성은 대체로 탐구되지 않은 채 남겨져왔다.
SF에 대한 초기의 옹호론을 살펴보자면 과학의 경이감과 이런 경이감이 독자에게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강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 기껏해야, 과학소설은 종종 위대한 결과의 과학적 발견에 의해 대표되는, 무엇이 진실인가를 발견하는 감정적 경험에 대한 소설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었다. 전통적인 하드 SF에서 이야기는 매우 문학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어떤 종류의 영문소설보다도 강력하게 이에 집착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지난 20여년간 과학소설이 과학과의 독특한 관계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미덕에 정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과학소설과 문학과의 관계가 보다 선호되면서 과학과 과학소설간의 관계는 간과되어왔다. 지금까지 이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의 상당수는 SF를 "사변소설 speculative fiction"이라고 부르길 선호해왔는데, 이는 "미래주의자"의 사회적 지위가 "과학소설작가"의 지위보다 바람직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과거와 현재뿐만 아니라 영화롭고 의혹에 싸인 미래를 설명해내는 사변소설은 현재 알려진 혹은 역사적으로 알려진 세계에서 펼쳐지며, 보통 우리가 현실적인 설명에 적절하다고 여기는 등장인물과 상황만을 포함하는 "주류 mainstream"(비과학소설에 대한 SF 세계의 경멸적인 용어)보다 더 광범위한 영역이다. 따라서 정의한 바와 같이, 주류는 과학소설의 부분집합이며, 문학의 명사들은 의도적이건 아니건 사변에 별 재주가 없는 단순한 사변소설작가이다.
존 캠벨 John W. Campbell은 SF에 대한 이런 관점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켐벨의 기술지향적 미래주의에서 이런 관점을 떼어내면 이 관점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과학은 사회적 외삽덕분에 사회에서 무시된다. 평균적인 과학소설의 무미건조한 양식이 개선되어왔다고는 하지만, 최고 작가들의 다수는 과학과 소설의 종합이라는 과업에서 혼란스러워 했으며, 그런 혼란은 계속되었다: 한 편으로는 다섯 개의 달이 있는 행성에 대한 일식, 월식의 속성과 특성에 대해 계산하는 데 하루 종일 고심한 흔적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문단이 있는가 하면, 모든 좋은 이야기들은 "등장인물에 달렸다"는 보수적이지만 현재 유행하는 믿음에 작가가 진지하게 복종하고 있음을 예시하는 주인공의 마음 상태를 주의깊게 묘사한 문단들.
하드 SF는 기술 및 기술을 생산하고 분배하는 관련 제도들과도 상호작용한다. 켐벨이 죽은 이래 20년간 여러 사람들이 그의 과학소설의 기술애호적 전망에 의심을 제기해왔다. 하드 SF적 입장은 그 자체로 과학적 내용과 분리할 수 있는 하나의 판매상품이 되었다. 특히 레이건 시기동안 "하드 SF"는 거대 기계로 사람들을 살상하는 이야기, 과학적 사상이나 이론과는 별 상관없는 판타지 즉, 군 하드웨어에 대한 우익 권력 판타지가 되어갔다.
이 시기에 대다수의 가장 재능있는 젊은 SF 작가들은 과학에 대한 글을 쓰는 데 무관심했는데, 이는 다름아니라 일반적으로 하드 SF로 간주되는 것이 급작스럽게 정치적 알레고리로 타락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도 여러 작가들은 여전히 좋은 하드 SF를 썼다: 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클라크, Charles Sheffield, 조 홀드만, Donald M. Kingsbury, 그레고리 벤포드, 그렉 베어, Paul Preuss, 그리고 Joan Slonczewski. 동시에 브루스 스털링, 윌리암 깁슨 그리고 Rudy Rucker 같은 사이버펑크 작가들 몇몇은 하드 SF의 몇몇 시구를 그들의 포스트모던 프로젝트에 결합시키는 중이었다. 지난 몇년간 Geoggrey Landis, Connies Willis, George Alec Effinger 그리고 Lois McMaster Bujold 같은 작가들은 우수한 하드 과학소설 이야기들을 써냈다.
하드 과학소설에 대한 1983년 Eaton 컨퍼런스에서는 문학비평가들과 Robert L. Forward, 데이비드 브린 및 그레고리 벤포드 같은 "작가/과학자"들이 한데 모였다. 이들은 하드 과학소설의 영향에 대한 수많은 측면에 대해 논의했으나, 컨퍼런스 백서로 판단해보건대, 과학과 소설간의 기본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호한 그대로였다. 컨퍼런스 백서와 다른 자료에서 나는 하드 SF작가들이 하드 SF에 이바지한다는 주장에서 어떤 수사적 패턴을 찾아냈다. 가능한한 언제나, 이들은 매우 하드한 과학소설과 과학 자체간의 차이를 최소화하려고 했다. 예를 들어 데이비드 브린은 "사변적 틈새의 고갈: 하드 SF의 위기? Running Out of Speculative Niches: A Crisis for Hard SF?"라는 에세이에서 하드 SF 이야기중에서 "'과학' 자체가... 주요한 등장인물"이라고 날카롭게 관찰하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어떻게 오히려 하드 SF 작가에게서 [과학에 대한] 상세한 전망이 나오는 지를 묘사한다. 이런 종류의 상호작용적 독서가 하드 SF 작가 및 다른 장르 및 하위장르 작가들 간에 일어나는 한, Eaton 컨퍼런스 백서에 실린 브린 에세이의 일반적인 논조는 따라보자면 - 이 문제에 관한 Forward의 "과학이 소설을 쓸 때 When Science Writes the Fiction", 그리고 벤포드의 "인간조건을 위한 기술적 위치는 존재하는가? Is There a Technological Fix for the Human Condition?"에서도 그렇지만 - 과학과 하드 SF는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과학과 하드 SF의 유사성에 관한 개념은 위의 에세이에 실린 벤포드의 하드 SF의 정의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나의 하드 SF에 관한 최소한의 정의는 하드 SF라면 허구의 바탕에서 새로운 객관적 "현실"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우주의 물리적 사실에 대한 고도의 충실도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지 화학을 내러티브에 통합시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SF는 과학을 사변적인 양식으로 사용해야만 한다. 물리적 과학은 상세한 예측을 (따라서 실험에의한 반증도) 가장 잘 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런 과학들은 소설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미래가능성의 지표이거나 규칙적인 사변을 위한 안정된 기반으로 여겨진다.
하드 SF와 과학간의 관계에 대한 이런 관점은 과도단순화된 것으며, 어떤 중요한 차이점을 생략한 것이다: 수학자 앙리 푸앙카레 Henri Poincare가 지적했듯이, 인류 중 소수만이 수학을 즐거운 것으로 경험한다. 수학이 과학이라는 동물을 지탱하고 있는 골격인데, 과학을 소설에 이용하려면 "뼈를 제거해야"된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독자들은 심지어 하드 SF 독자라하더라도 소설에 수식이 들어가는 걸 거의 참지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Rudy Rucker가 편집한 앤톨로지 _Mathenauts_(역주 - '수학탐험가' 정도 될까요?)에서 조차도 내 계산으로는 수식이라곤 4개 밖에는 없었으며, 이 중 어떤 수식도 고교 1년생 정도의 이해범위를 넘어선 것은 없었다.
비록 몇몇 하드 SF 작가들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림과 과학에 대하여 On Painting and Science"에서 "수학적 증거에 의해 확정되지 않는 한 인간 탐구의 어떤 것도 진정한 과학이라고 불릴 수 없다"고 주장한 것과 같은 입장을 취하면서, 과학적으로 깨인 독자가 계산기를 뽑아들고 외부에 드러난 현상뒤에서 작동하는 수학을 발견해내길 바라지만, 그렇지 않기가 더 쉽다. 이런 측면에서 과학과 하드 SF는 매우 다르다. 하드 SF는 진실과 현실을 발견하는 느낌을 가공하여 과학의 힘과 경이를 잡아내려고 하는 생생하고도 다양한 문학이다. Robert L. Forward의 "노래하는 다이아몬드 The Singing Diamond"와 제임스 블리쉬 James Blish의 "표면장력 Surface Tension"같은 이야기들은 아이디어의 연발로 독자들을 뒤흔든다; 적절한 때, 적절한 상황에 이런 이야기를 읽는다면 위대한 발견을 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드 SF는 지식, 심지어 가장 복잡하고 압도적인 유형의 지식 - 사람들이 이런 지식을 선호하고 미워하는 것을 뛰어넘는 - 의 미학에 대한 것이다. Philip Latham의 "Xi 효과 The Xi Effect", 에드가 알란 포우의 "마에스트롬으로의 강하 A Descent into the Maelstrom" 그리고 아서 클라크의 "지구의 통로 Transit of Earth"에서 이런 지식은 결정적이지만, 이런 지식을 펼치는 일은 신비스럽다. 하드 SF는 그 중심에 있어서 낙관주의와 비관주의의 문제, 기술과 응용의 문제를 넘어선다. 하드 SF는 가장 순수한 인간의 감정인 경이를 인식한다.
대부분의 SF 독자들은 하드 SF가 독특한 느낌, 특별한 유형의 내러티브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이런 입장은 사람들이 교회당에 들어갈 때 보여주는 경의와 별 다를바 없는 과학의 실제의 기초를 이루는 원리를 존중한다. 합리주의적인 우주관은 이런 태도를 동반한다: 어떤 해석보다도 상황의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중요하다는 믿음에 기초한 우주론. 이런 하드 SF의 반-미신주의는 과학을 종교 및 미신의 대체물로 보는 SF 작가 (및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 과학자)들이 가진 자랑거리의 초점이다.
"도덕외적인 측면에서의 진실과 허위에 대하여 On Truth and Falsity in their Extramoral Sense"라는 은유에 대한 에세이에서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Friederich Nietzsche는 인류의 문자 그대로의, 사실적인, 은유적이지 않은 상황에 대해 느끼는 바를 묘사했다. 이는 쉽게 하드 SF 우주론의 묘사로 바뀔 수 있다:
우주의 어느 먼 구석에서 셀 수 없이 많은 태양계로 퍼져나간, 영리한 동물들이 인식을 발명한 별이 있었다. 그 것은 그 세계의 가장 오만하고 가장 거짓인 순간이었으나 단지 순간이었을 뿐이다. 자연이 한숨돌리고 나자 별은 얼어붙었으며 영리한 동물들은 죽어야만 했다.
우리 태양의 일생은 우주 역사의 가장 짧은 순간일 뿐이다; 우리가 가치를 두는 모든 것들은 우리가 우주로 뻗어나가지 않거나 다른 지적 생명형태가 저 밖에 있었거나 있게되지 않는 한 곧 사라지게 된다. 하드 SF 작가들은 이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하드 SF는 우리의 숙명이 아직 봉인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위해 결정론적 우주의 법칙을 사용한다. 할 클레멘트 Hal Clement가 대화중에 언급했듯이 하드 SF에서 우주 자체는 경쟁자 antagonist이다.
우리의 불가피한 멸망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하드 SF의 방법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1) 충분한 과학적 지식이 있다고 할 때, 생존하고 있는 지적생명의 전제조건을 바꾸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다, (2)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자연의 대체는 필수적이고, 바람직하며 우리 종의 장기적인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 (3) 과학적인 것은 비과학적인 것을 대체해야 한다. "영리한 동물은 죽어야만 했다"는 니체의 선언은 현실주의자에게는 울적한 생각이나 하드 SF 합리주의자에게 있어 이것은 흥미로운 도전이다! 하드 SF는 물리 - 고전적 이상주의가 지적 정합성을 가질 수 있는 마지막 시스템 중 하나 - 와 강한 연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계속 인간조건의 가장 포괄적인 측면인 우리 종의 생존을 다뤄왔다. 과학소설 공동체의 기술애호적 날개는 기술혁신에 대한 관심과 열의 덕분에 우리는 바로 지금 인간진화의 다음 단계에 있다는 생각을 소중히 간직해왔다.
이 개념은 하드 SF의 역설중의 하나로 우리를 인도한다: 과학에 대한 우리의 신념이 종교적 신념을 대체한다면, 과학은 하나의 종교로 흡수되며, 이는 물론 비과학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아서 클라크 Arthur C. Clarke의 작품은 하드 SF에서의 과학과 종교간의 긴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의 소설 _유년기의 끝 Childhood's End_의 어떤 판은 책에 실린 주장들이 "저자의 것과는 다르다"는 안내문을 싣고 있다. 그의 이야기인 "동방의 별 The Star" 또한 이런 긴장을 보여주고 있다: 이 이야기는 과학적 및 기술적 개념이 종교적인 개념을 대체하는 하드 SF의 관점에서 베들레헴의 별을 "설명한다"; 그러나, 기독교가 아니었다면, 이런 대체의 의의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과학소설에서의 경이감의 우위는 종교에 직접적으로 도전하게 된다: 과학소설을 통해 경험한 과학과 자연세계의 경이가 종교적 경외를 대체한 것인가? 명상기계를 사용하여 진정한 깨우침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해 뉴에이지 운동에서 비슷한 논쟁이 일어났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 전자적 계시는 진짜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차이는 뭐라고 말할 수 있는가? 미래에는 보다 좋고 과학적인 것들이 우리가 현재 필요로 하고 사용하는 모든 것들을 대체할 것이라는 생각 - 계속 개선되는 생활표준에 대한 우주적인 믿음 - 은 내가 SF의 대체원리 replacement principle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한다.
이 책(역주 - _The Ascent of Wonder_를 말합니다)에서도, 대체원리의 증거는 확연하다: 로버트 하인라인의 "돌아오니 좋구나 It's Great to Be Back"는 대체원리를 강하게 표출한다: 달에서 수년간 살다가 지구로 돌아온 한 가족은 지구의 청정함과 지구사회의 풍부함에 대한 향수가 감상적인 측면으로 흘렀음을 발견하게 된다. 프레데릭 폴 Frederik Pohl은 "백만번째 날 Day Million"에서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것들이 보다 미래적인 것으로 바뀐 사회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판매술에 대해서는 별로 그런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 원자전구는 더 이상 그리 좋은 아이디어가 아닌 것 같지만, L5 콜로니에 살면서 다른 행성으로 여행하여 외계지성과 통신한다는 발상은 여전히 우리를 사로잡는다. Bob Shaw의 "다른 날의 빛 Light of Other Days"에서 묘사한 "지체감광유리 slow glass" (역주 - 제목만 보고 대략 짐작한 번역이니까 너무 믿지는 마십시오. 후후...)가 상업화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사고 싶어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클로닝 (어슐러 르 귄 Ursula K. Le Guin의 "아홉생명 Nine Lives"을 보라)과 시간여행(Ian Watson의 "매우 느린 타임머신 The Very Slow Time Machine"을 보라)같은 기술에도 매혹되어 있다.
하드 SF의 위대한 아이디어들은 어떤 기계를 만드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하드 SF는 우리에게 수많은 삶의 대안처를 보여준다: 우주정거장, 다른 행성, 해저 공동체 등등: 하드 SF는 우주의 집짓기 나무토막에서 우리가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만들 지식과 기술을 끄집어 내 지구와 자연이 우리에게 준 것에 대한 유년기적인 의존을 끝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몇몇 하드 SF 작가들은 그들이 구상하는 미래세계와 상황이 결코 물리법칙을 위반하지는 않을 것이며 따라서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대부분의 SF 시나리오는 어쨌든 믿기 어려우며 - 종종 상당히 믿기 어려우며 - 다수는 완전히 불가능하다. SF 작가들이 소설에서 초광속 faster-than-light 여행을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오래된 논쟁은 작가에 대한 다양한 모순적인 요청을 보여준다: 절멸에서 인류를 구해야 한다는 SF의 유토피아적 목표때문에, 이는 반드시 규칙에 따라야만 하는 게임이다; 냉정한 우주에게 사정하는 건 소용없는 일일 뿐이다.
FLT(faster-than-light)의 가능성을 없애버리는 건, 우리의 선택권을 제한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 차려입었으되 갈 곳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수성가한 종이 되어, 적자가 되어 우리의 태양이 불가피하게 사멸하는 상황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우리가 아는 만큼 우주의 법칙을 지키면서 소설을 쓰지만 삶의 새로운 방식에 대한 환상적인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 하드 SF 작가의 핵심적인 노력이다. 물리적 법칙을 고려하자면 우리에게 수많은 것들이 지금까지의 기존 기술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과학적 지식의 신천지가 계속 확장되어감에 따라 우리는 결코 꿈꿔본 적도 없었던 수많은 일들을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알게된다.
SF는 미래가 어떠할 것인가를 표현한다, 비록 우리는 실제 미래는 이와 같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SF에서 보여준 미래와 만났을 때 이를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THE ASCENT OF WONDER
copyright 1994 by David G. Hartwell and Kathryn Cramer
Interactive Introduction to THE ASCENT OF WONDER
copyright 1995-1997 by Kathryn Cra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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