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세계에 대한 관념과 민족의 삶이 합쳐져 실제 사건들의 객관적 형태로 제시됨으로써 이른바 서사시의 내용을 이루고 그 형식을 결정짓는다.
― 헤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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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나면서부터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것은 우리가 언제나 꿈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어린시절부터 마법의 힘이 깃든 지어낸 이야기 속에서 갖가지 꿈이 섞인 환상을 만들어 내곤 했다.
그러한 <환상 만들기>는 성인이 되어서도 틈만 있으면 계속된다. 오늘날에는 그 많은 부분을 영상매체에 빼앗기긴 했지만, 자기 나름의 온전한 환상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여전히 문학을 중요한 매개로 삼게 된다. 그 중에서도 소설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인간의 속성에 가장 적절하게 결합할 수 있는 장르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소설은 필연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을 수밖에 없으며, 그런 까닭에 본질적으로 대중적일 수밖에 없다.
소설이 문학의 중요한 장르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것은 민주주의의 발달 및 산업혁명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과 더불어 국가공동체 안에서 대중의 지위가 점차로 향상되기 시작했고, 대중의 계몽을 목적으로 한 신문들이 간행되면서 문자가 널리 보급됨과 동시에 신문소설이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문화적 소외계층이 교육의 보급 및 인쇄술의 발달, 정치적 진보에 힘입어 주된 소설의 독자층으로 등장한 것이다.
당시에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었던 으젠느 쉬 Eugène Sue의 『파리의 신비 Les Mystères de Paris』를 비롯하여, 90여편의 소설로 이루어낸 당대의 거대한 벽화인 오노레 드 발자크 H. de Balzac의 『인간희극 La Comédie Humaine』, 빅또르 위고 V. Hugo의 『레미제라블 Les Misérables』과 『파리의 노트르담 Notre-Dame de Paris』, 알렉상드르 뒤마 A. Dumas의 『몬테 크리스토 백작 Le Comte de Monte-Cristo』, 월터 스코트 Walter Scott와 찰스 디킨스 Ch. Dickens, 에밀 졸라 Emile Zola의 소설 등 대중의 인기를 독차지한 작품은 수없이 많다.
추리소설의 탄생은 그러한 소설의 발달과 더불어 이루어졌다. 인간은 상상력과 감수성으로 꿈을 좇는 한편, 정신의 작용을 통하여 그 꿈을 지각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욕망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소설은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오락적 기능을 강조할 때, 우리는 추리소설을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다.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면서 느끼는 지적 유희의 쾌감이 다른 어떤 종류의 소설보다 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추리소설이 소설의 발달과 더불어 탄생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미국의 포우 E. A. Poe가 쓴 <모르그가의 살인 The Murders in the Rue Morgue>(1841), <마리 로제의 비밀 The Mystery of Marie Roget>(1842), <도둑맞은 편지 The Purloined Letter>(1844)의 세 단편이 추리소설의 역사를 열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정설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소설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신화, 혹은 민담이나 설화, 전설 따위의 구비문학까지, 또는 『천일야화』까지 이를 수 있는 것처럼, 추리소설의 기원 역시 멀리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나 셰익스피어의 『햄릿』까지, 가깝게는 볼떼르의 『자디그 Zadig』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극단적으로는 인간의 이성이 존재했던 한 추리적 요소는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는 말까지도 가능하다. 그러나 근대적 의미의 추리소설은 역시 근대 산업사회가 도래하면서 나타난 도시문명과 경찰을 배경으로하여, 포우에서 본격적인 출발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급격한 변동을 겪기 시작한 사회와 경제 상황으로 인하여 파리나 런던 같은 대도시에서는 범죄가 급증하게 되어 매일같이 신문의 주요 지면을 채웠고, 그것은 문학작품의 좋은 소재가 되어 대중의 많은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또한 경찰이 범죄를 수사하여 범인을 색출해내는 과정에도 당연히 세인들의 관심이 모아졌는데, 여기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도형수였다가 훗날 치안경찰감이 된 비독 Eugène François Vidocq이라는 인물이 수많은 사건을 해결하면서 신화적 인물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많은 작가들이 그를 모델로 하여 인물을 창조해 냈고, 우리는 그 대표적인 경우를 발자크의 보트랭 Vautrin과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추리소설이 프랑스에서 로 불리게 된 것도 바로 그러한 연유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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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추리소설 tale of ratiocination>이란 말은 영미의 나 , 또는 프랑스의 를 총칭한 것으로서, 우리나라 일각에서는 아직도 <탐정소설>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탐정소설>이라 하면 작품 속에 탐정이 반드시 등장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소설로 해석될 소지가 많다. 따라서 우리가 다음에서 보게 될 고전적 추리소설을 이르는 데는 별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오늘날에는 추리소설이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그 모두를 총칭하기에는 부적절할 것 같다.
<탐정소설>이란 말은 추리소설이 일본에 처음으로 도입되던 메이지(明治) 말기에 일본인이 만들어낸 용어이며, 그 후 소화(昭和) 초기의 일본에서는 <본격(本格)>과 <변격(變格)>이라는 말로 영미의 와 를 구분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본격>은 포우에서 시작된 수수께끼(혹은 퍼즐)소설, 곧 순수 추리소설을 지칭하였고, <변격>은 수수께끼 소설의 비예술성을 극복하기 위해 일반소설처럼 범죄의 장면이나 에로티즘을 가미한 소설을 일컬었다. 따라서 당시 일본에서는 <본격>을 <건전파>, <변격>을 <불건전파>라고도 부름으로써 열띤 논쟁이 벌어졌고, 1945년 이후 현재까지는 이들을 모두 통칭하여 <추리소설>이라 부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08년 12월 4일 <제국신문>에 연재된 이해조의 소설 『쌍옥적』 앞에 <뎡탐소셜>이라는 말이 붙여진 것이 그 시초인 것 같다. 그것이 1930년대의 김내성에 이르러 <탐정소설>이 되었고, 이후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추리소설>과 <탐정소설>이 혼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추리소설 작가인 이상우에 따르면, 추리소설은 그 나라의 법제도 및 국민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미국의 는 범행의 주체와 방법이 미스터리이며 그 불가사의를 추리하는 데 초점을 둔 것이고, 영국의 는 주인공인 탐정에 중점을 둔 이름인데, 이는 셜록 홈즈의 명성 때문이며, 프랑스의 는 경찰력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이는 우리가 앞서 살펴본 추리소설의 탄생 배경에도 부합하고 있어서 매우 설득력이 있는 해석으로 보인다. 특히 경찰의 수사력에 역사적 배경을 둔 프랑스의 는 중국식 추리소설이라 할 수 있는 <공안소설(公案小說)>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추리소설 the ratiocinative story>이라는 총체적 명칭을 사용하기로 하고, 그 유형을 대략 다음과 같이 분류해 볼 수 있다.
1) 수수께끼형
퍼즐소설 또는 수수께끼 소설 roman à énigme로 불리는 추리소설의 고전적 형태로서, 포우의 <모르그가의 살인>에서 출발하여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프랑스와 영국에서 전성기를 누린 추리소설의 전형이다. 우리가 앞서 보았듯이 본격 추리소설 혹은 정통파 추리소설이라고도 하는데, 추리소설이라 하면 대개 이 유형에 근거를 두고 있다. 범죄(범인), 희생자, 탐정의 세 요소가 반드시 존재하며, 마지막에는 탐정의 뛰어난 추리를 통해서 불가사의한 사건의 범인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토도로프 Tzvetan Todorov에 따르면, 이 유형은 두 개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하나는 범죄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수사 이야기이다. 첫째 이야기는 소설이 시작하면서 끝나버리기 때문에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제시되는 게 아니라 등장인물들이 들은 이야기나 목격한 행위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진다. 둘째 이야기에서는 거의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탐정을 중심으로 한 사건의 수사가 느린 속도로 차근차근 진행될 뿐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실험적인 추리소설도 있어서, 어느 출판사에서는 이 두번째 이야기를 아예 생략해 버리고 독자에게는 단지 경찰의 가상 보고서와 심문 내용, 사진, 지문, 머리카락 등의 단서들만을 제공하여 사건을 추리하게 하는 책을 낸 바 있는데, 그 해답은 책의 맨 마지막장에 붙여 놓은 봉함된 봉투 안에 있다. 어쨌거나 그러한 실험적 추리소설을 제외하고는 수수께끼형의 고전적 추리소설에서 탐정은 어떤 공격이나 위협도 받지 않으며, 부상이나 죽음으로부터 안전한 것이 특징이다.
1928년에 반 다인 S.S. Van Dine은 이러한 고전적 추리소설을 쓸 때 지켜야 할 20가지 규칙을 설정하였는데, 그 가운데 몇 가지는 오늘날 추리소설의 경향과는 맞지 않는 것이 있어서 수정과 보완이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추리소설 작가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지성과 감성이 상호 변환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소설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추리소설 작법에서는 황금률인 바, 이를 토대로 하여 프랑스와 포스까 François Fosca는 자신의 저서 『추리소설의 역사와 기법 Histoire et technique du roman policier』(1937)에서 다음과 같이 추리소설의 법칙 6가지를 밝히고 있다.
① 주제를 이루는 것은 외관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미스터리이다.
② 한 사람(혹은 몇 사람)의 등장인물이 ― 동시에 또는 연속적으로 ― 범인으로 잘못 간주된다. 표면상의 단서가 그를 지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③ 사실을 물리적․심리적으로 면밀하게 관찰한 뒤 증언들을 검토하고, 그 위에 모든 엄격한 추론의 방법을 동원하여 성급한 이론들을 물리친다. 분석하는 사람은 결코 예견하지 않는다. 그는 관찰하고 추리한다.
④ 사실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해결은 전적으로 예기치 못한 것이다.
⑤ 어떤 경우가 범상치 않게 보일수록 해결하기는 더욱 쉽다.
⑥ 불가능한 모든 것을 제거했을 때 남는 것, 처음에는 그것이 비록 믿을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올바른 해결이다.
포우에서 출발한 이 고전적 유형에 해당하는 추리소설의 계보는 1860년대에 탐정 르꼭 Lecoq을 창조한 프랑스의 에밀 가보리오 Emile Gaboriau의 소설과, 1880년대 영국의 명탐정 셜록 홈즈를 등장시켜 세계에 열렬한 <셜록키>들을 만들어낸 코난 도일 A. Conan Doyle, 그리고 금세기 초에는 명탐정 브라운 신부로 유명한 체스터튼 Gilbert Keith Chesterton, 손다이크 박사를 탄생시킨 오스틴 프리맨 Austin Freeman, 우리에게 <괴도 루팡>으로 잘 알려진 아르센 뤼팽 Arsène Lupin(포우의 소설에 등장하는 명탐정 뒤팽 Dupin에서 따온 이름)의 창조자 모리스 르블랑 Maurice Leblanc, 룰따비유 Rouletabille로 유명한 가스똥 르루 Gaston Leroux, 그리고 명탐정 쁘와로 Poirot와 미스 마플 Miss Marple을 등장시켜 획기적인 추리소설을 쓴 영국의 아가사 크리스티 Agatha Christie, 그리고 마지막으로 메그레 Maigret 경감으로 유명한 죠르쥬 심농 Georges Simenon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다른 유형의 추리소설이라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이 고전적 추리소설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다만 그것을 약간 변형시키거나 연장시키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위에 열거한 세계적 명탐정들은, 추리소설의 변화에 따른 최근의 메그레 경감을 제외하고는 모두 엉뚱한 성격의 독신이고 기이한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는 결혼한 홈즈나 가정을 보살피는 쁘와로를 상상할 수가 없다. 명석하게 발달된 두뇌를 가지고 있는 그들은 사랑을 품을 가슴이 없는 듯이 보인다.
그들은 모두 닮은꼴로서, 포우가 뒤팽을 통해 말한 <어떤 단순한 사건의 특성들을 모두 파악하기만 하면 그로부터 원인과 결과들을 연역해 낼 수 있는 이상적 추리>의 방법을 예외없이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추리소설은 방법적인 면에서 상상력에 의존한다기보다는 과학적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 일반소설과 크게 다른 점이다. <허구이면서 사실>인 것이다. 포우의 <마리 로제의 비밀>은 실제 범죄 사건의 해결책을 소설로 제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작가가 하나의 이야기를 지어낼 때, 그 상상의 허구적인 이야기는 추리를 통해 실제 사실이 되기도 한다. 사실에 대한 이성적 연구가 필연적인 결말에 도달함으로써 그 만들어진 이야기와 실제로 체험된 이야기 사이에는 절대적인 균형이 존재하게 된다. 바로 여기에 추리소설이 주변문학이 아닌, 문학의 전혀 새로운 형식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추리소설의 문체는 완전히 투명하고, 단순․명확하며, 직접적이다. 추리소설 작가는 아름답고 윤기있는 언어보다는 추상적이고 건조한 논리적 언어를 사용한다. 다시 말하면 사고(思考)의 문체라 할 수 있다. 활기 넘치는 구상과 새로운 주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요소, 장소, 동기, 인물의 설정 등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2) 하드보일드형
1920년대 말경 미국에 처음으로 등장한 유형으로서, 프랑스에서는 <로망 느와르 roman noir>의 장르에 포함시키고 있는데, 특별히 이 유형의 미국 소설을 지칭할 때는 <세리 느와르 série noire>라는 명칭을 부여하고 있다. 비정파(非情派) 소설이라고도 하며, 주로 속어와 폭력이 난무하는 범죄세계가 묘사되고 있어서 범죄소설로 불리기도 한다.
고전적 추리소설에서는 탐정이 움직이지 않고도 책상 앞에 앉아서 단서들을 검토하여 뛰어난 추리로 범인을 잡지만, 여기에서는 탐정의 적극적인 행위가 개입되어 범인의 상대자로 행동한다. 탐정은 현장에 직접 출동하며, 범인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기도 하고,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하며, 반대로 범인에게 해를 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수사가 필요하고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있다는 점에서 추리소설이다. 탐정은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검증하고, 심사숙고한다.
하지만 그는 예전처럼 상냥하게 미소를 띤 모습의 예의바른 신사가 아니라, 거칠고 무뚝뚝하며 공격적인 사람이다. 하드보일드 소설의 전성기에 이르면 정통 추리소설과는 달리 사랑이 개입되기도 하고(대개는 육체적 사랑이지만), 무분별한 정열, 무자비한 증오, 온갖 형태의 잔인한 폭력과 비열한 범죄, 도덕에는 무감각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하드보일드 소설은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하여 미국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고, 프랑스에서도 실존주의가 나타난 시기에 소개되었다. 이 유형이 법을 수호하는 보안관이나 현상금을 타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폭력과 책략을 행사하는 무법자들, 서부에서 제일 빠른 총솜씨를 자랑하는 명사수들이 등장하는 서부극의 전통을 가진 미국에서 발생한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인 것 같다. 당시 미국에서는 도시가 발달하고 각종 선거에 의존하는 정치체제가 시행됨에 따라서 유권자들을 위협하거나 매수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 결과 힘이 센 자에게 권력이 주어졌으며, 그들은 대부분 경찰까지 마음대로 조종하는 갱단의 두목이었다. 그러한 부패한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정의감에 불타는 힘세고 머리 좋은 영웅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하드보일드 소설은 그처럼 부패한 시대를 배경으로 대중의 욕구에 따라 필연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대쉴 하메트 Dashiell Hammett와 호레이스 맥코이 Horace MacCoy, 레이먼드 챈들러 Raymond Chandler가 대표적인 작가이다. 특히 챈들러는 추리소설의 이론에 밝았으며, 자신의 소설이 추리소설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매우 난감해하면서 독립된 하나의 장르로 놓기를 원했는데, 그의 『살인의 기법과 최소한의 것들』, 『추리소설에 관한 몇 가지 고찰』에 잘 나타나 있다. 프랑스의 라까쌩 Francis Lacassin은 그 두 권의 책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9가지의 규칙을 이끌어낸 바 있다.
① 최초의 상황과 결말은 박수를 받을 만한 동기를 지녀야 한다.
② 살인이나 수사의 방법에 관한 기술적 실수는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다.
③ 등장인물, 배경, 분위기는 사실적이어야 한다.
④ 줄거리가 견고하게 짜여져야 하며 이야기로서의 흥미를 지녀야 한다.
⑤ 구조는 되도록 단순해서 최종적인 해명을 가능한 한 간결하게 하고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⑥ 해결은 불가피하면서도 가능하며, 트릭을 쓰지 않은 것으로 보여야 한다.
⑦ 양립될 수 없는 두 관점, 곧 수수께끼형과 폭력적 모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⑧ 범인은 항상 처벌되어야 하지만, 반드시 법정을 거칠 필요는 없다.
⑨ 독자에게 정직해야 하며, 아무 것도 감추어서는 안된다.
하드보일드 소설의 문체는 구어체이고 이미지가 풍부하여 가장 많이 영화화된 소설이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아무 여과 없이 묘사하고 있으므로 마치 경찰의 사건 보고서를 읽는 듯한 느낌에 빠지기도 한다. 오늘날에도 흥행에 성공하는 헐리웃의 많은 영화들은 이 하드보일드 소설을 원형으로 하고 있다.
3) 서스펜스 소설
이것은 추리소설의 세 요소 ― 탐정, 범인, 희생자 ― 를 모두 지니고 있지만, 그 가운데 희생자를 중심에 놓는 소설 유형이다. 추리소설에서 희생자는 수사의 출발점이며, 수동적 역할 밖에는 하지 못한다. 독자는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는 희생자의 감정상태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위험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도사리고 있다.
희생자는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가슴을 졸이며 기다린다. 그 위험이 눈에 보일 때 희생자는 그것을 피하려고 노력한다. 희생자가 직접 탐정이 되기도 하고, 희생자를 보호해 주는 탐정이 나타나서 범인을 쫓는다. 따라서 위협, 기다림, 추적이 서스펜스 소설의 세 요소이며, 그 과정에서 생기는 <두려움>이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효과가 된다. <서스펜스>는 바로 그 기다리고 추적하는 시간과 희생자에게 다가오는 위협의 팽팽한 긴장관계를 이룬다.
희생자는 결백하다. 희생자에게 공격 능력이 없을 때 그 결백함은 독자의 가슴을 더욱 파고 드는 것이다.
서스펜스 소설은 독자에게 놀라움과 두려움을 주고자 한 포우의 추리소설과 깊이 관련되어 있으며, 그 효과를 크게 확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서스펜스 소설은 괴기성과 초자연적 성격으로 두려움을 유발하는 공포소설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미국의 스탠리 가드너 Erle Stanley Gardner와 윌리엄 아이리쉬 William Irish가 대표적인 작가들이다.
4) 첩보소설
수수께끼 소설과 하드보일드 소설의 요소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소설로서, 기밀소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영국과 독일간의 국제 첩보전을 모델로하여 생겨난 유형인데, 간첩이나 특수기관의 공작원, 국가 기밀기관의 활동이 중심이 되는 추리소설이다.
영국에서 특히 유행하였으며, 탐정과 범인의 개인적인 대결 대신에 국가조직 간의 국제적 대결이 이루어지는 점이 정통 추리소설과 다른 점이다. 미국의 CIA와 소련의 KGB 간의 대결이 가장 많이 등장하였으며, 이언 플레밍의 <007 시리즈>가 가장 많이 알려진 대표적인 작품이다. 최근의 <미션 임파서블>을 비롯한 많은 영화들이 이 유형에 속한다.
5) 도서형(倒敍型) 추리소설
작품의 서두에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의 범인과 범죄행위를 추리의 의해 밝혀내는 수수께끼 소설의 기본 형식을 뒤집어 놓은 것이다. 따라서 소설의 초두에 범인과 살인행위의 전모가 드러나고, 이것을 탐정이 추적해 들어가는 것이다. 독자는 탐정의 사건 해결 능력에 관심을 모은다. 리챠드 헐 Richard Hull의 『백모 살인사건 The Murder of My Aunt』이 대표적인 작품이며, TV 수사물인 <형사 콜롬보>도 이 유형에 속한다.
6) 공안소설(公案小說)
중국의 추리소설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공안이란 <재판기록>을 의미하는데, 고대 중국의 사법 및 경찰제도에서 생겨난 소설 유형이다. 행정과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 지방장관이 판관도 되며,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탐정의 역할을 맡기도 한다.
그러나 서양의 추리소설과 다른 점은 초자연적인 요소가 많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귀신도 등장하며, 꿈과 점괘의 해석이 사건 해결의 중요한 관건이 되기도 한다. 반 다인이나 녹스의 추리소설 규칙에는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동․서양의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므로 추리소설의 한 유형으로 간주해야 한다.
공안소설에서 탐정인 판관은 부하와 함께 직접 출동하여 현장에서 활약하는 행동파이기도 하며, 결국 범인을 잡는다. 그러나 소설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형의 집행까지 계속되어 범인에게 법의 준엄성을 보여준다. 백성들 앞에서 피해자의 원한을 풀어주고 원수를 갚아주기도 한다.
이 점이 또한 범인의 색출로 끝나는 서양의 추리소설과 크게 다른 점이다. 따라서 영국의 쥴리언 시몬즈 Julian Symons는 중국의 공안소설을 일러 <죄와 벌의 소설>이라 했다. 판관인 적인걸(狄仁傑)이 등장하는 『무측천사대기안(武側天四大奇案)』과 포청천(包靑天)이 등장하는 『삼협오의(三俠五義)』, 『칠협오의(七俠五義)』가 가장 유명한데, 네덜란드의 반 굴리크 Van Gulik는 『무측천사대기안』을 『적공안―적판관이 해결한 세 살인사건 Dee Goong An : Three Murder Cases Solved by Judge Dee』으로 영역하였고, 19세기 서구에 수입되었음을 주장하고 있어서 중국의 공안소설이 포우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가설도 가능하다.
이 밖에도 모험소설, 사회파 추리소설, 법정소설, 경찰소설 등을 추리소설의 다른 유형들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독립된 소수의 유형이거나 위의 유형들에 속한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어서 굳이 열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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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에게 강한 호기심과 긴장의 효과를 유발하며 일상사로부터 기분전환을 가능하게 해주는 추리소설은 매우 광범위한 독자층을 가진 대중문학의 대표적인 장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출판사나 잡지사에게 추리소설은 치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 되었고, 그 결과 커다란 문학시장을 형성하며 점점 산업화되어 갔다. 코난 도일이나 아가사 크리스티, 대쉴 하메트 같은 베스트 셀러 작가들이 출현하면서 추리소설은 세계의 문학시장에 넘쳐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중은 기분전환을 위해서 많은 시간을 투자하려 하지 않고 마치 낱말퍼즐게임을 하듯이 추리소설을 읽고자 했으므로 그 생명력은 그리 길지 못했다. 한 번 읽고 나면 이내 잊혀져 버리고 마는 소비의 문학이 되어버린 것이다. 추리소설 작가들은 판에 박힌 형식과 내용에다 약간만 변형시켜서 똑같은 책을 내놓곤 했다. 그것이 추리소설을 이른바 하위문학으로 전락시키거나 그것과 혼동하도록 만든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프리맨이나 아가사 크리스티, 또는 죠르쥬 심농 등과 같이 대중의 기호를 염두에 두지 않고 문학성 높은 작품들을 써낸 작가들이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추리소설은 세상의 빛을 본 이후 여러 가지 다양한 형식을 추구하면서 끊임없이 진보해 왔다. 따라서 추리소설의 미래에 대한 예측이 다양하지만, 우리는 다음의 말을 한 번쯤은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추리소설은 그 어느 곳으로도 진행되지 않는다. 추리소설은 한 그루의 사과나무와 같아서 서로 다른 매우 다양한 열매를 주지만, 그것은 언제나 사과일 뿐이다. 오류는 다른 나무에 접목함으로써 그 본질을 바꾸려고 하는 데 있다. 추리소설은 이미 결정된 하나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부단히 수정되는 근사법을 통해 언제나 똑같은 방식으로 미지의 것에서 앎으로 추론하기 위한 장비를 갖춘 우리 정신의 구조 자체이다. 소설의 영역인 상상의 영역은 무한하다. 그러나 추리소설은 논리의 방법을 통해 상상에서 이성으로 진행되어야 하는 까닭에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스스로 짊어지고 있다.
분명한 것은 전혀 새로운 추리소설이란 없을 테지만, 그렇다고 같은 작품은 단 하나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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