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청소년을 위한 인터넷 사이트 글틴에 SF 평론가 박상준님이 쓰신글을 갈무리하여 올리는 글입니다.(이하 SF 문학의 세계는 모두 박상준님이 쓰신 글임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과학적 합리성으로 무장한 상상력, SF
정지용이 자신의 책 「문학독본」(1948) 맨 앞에 붙였던 짤막한 서시가 있습니다.
별똥 떨어진 곳
마음에 두었다
다음날 가보려
벼르다 벼르다
인젠 다 자랐소
저는 SF를 즐기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분기점은 바로 이 시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 시에 대한 일반적인 감상이라면 ‘삶에서 꿈꾸던 이상과 현실의 괴리’ 정도로 은유적인 의미를 이끌어낼 수 있겠지요.
그러나 SF독자들은 그에 더해서 ‘별똥별’이라는 구체적 물체에도 묘한 이끌림을 느낄 것입니다. 별똥별이 떨어진 곳을 정말로 찾아가 보고픈 생각도 들고, 혹시 그 별똥별에 무엇인가 담겨있지는 않을지 상상의 나래를 마구 펼치지요. 그러면서 어느새 별똥별이 떨어진 곳보다는 별똥별이 온 곳, 즉 우주로 시선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SF든 판타지든 공히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게 됩니다. 하지만 SF독자들은 ‘마법’ 대신 ‘과학’을 택합니다. 설령 마법처럼 보이는 것이라 하더라도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어떤 일이든지 상상은 자유지만 실제 구현 과정에서는 과학적 합리성을 중시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도 깊이 따지고 들어가면 경계가 모호해지지만(<스타워즈>는 SF가 아니라 판타지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론적으론 불가능한 초광속비행이라든가 운동역학 법칙, 에너지 보존 법칙 등을 무시한 묘사들이 숱하게 등장하기 때문이지요), 아무튼 SF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들은 최소한의 과학적 형식논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경이감‘을 주는 우주의 광경들. 영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장면)
그렇다면 SF팬들이 별똥별을 보고, 또는 우주를 보며 느끼는 그 특별한 정서는 과연 무엇일까요?
서양에서는 흔히 그것을 ‘경이감(sense of wonder)’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세상에서 현실적으로 접해보지 못한 뭔가 낯설고 놀라운 대상, 그리고 그 존재로 인해 연상되는 온갖 미지의 가능성들. 우리는 이런 느낌을 시각적인 이미지에서 얻을 수도 있고(예를 들어 토성의 달 표면에서 토성이 지평선으로 떠오르는 모습을 본다고 상상해 봅시다. 토성과 그 거대한 테두리가 하늘을 가득 채우며 서서히 올라오는 모습은 아마 태양계 최고의 장관 중 하나일 것입니다), 또 책에서는 활자매체 특유의 상상력 자극 작용에 의해 더더욱 증폭된 경이감을 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뭔가 허전하지요? 경이감은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이 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SF팬들만의 독특한 정서를 명확하고도 핵심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을까요?
시공간에 대한 인류적인 시야
<로마클럽>이라는 전 세계 여러 분야 학자들의 모임이 있습니다. 이들은 일찍이 1970년대 초반에 인류 문명의 미래를 암울하게 진단한 보고서 「성장의 한계」를 내놓았지요. 인류 미래에 대한 그 불길한 시나리오들, 즉 자원고갈, 인구폭발, 환경오염 등의 내용은 대단한 충격을 주었지만, 오늘날에는 그런 변화가 당시의 예상보다는 ‘천천히’ 진행되고 있다는 쪽으로 결론이 난 상태입니다.
어쨌거나 그 보고서의 도입부에는 흥미로운 도표가 하나 자리 잡고 있는데, 사람들이 시공간적으로 얼마나 멀리, 또 미래를 생각하며 살고 있는가를 인류통계학적으로 나타낸 ‘인간의 시야’라는 그림입니다. 그 그래프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공간적으로는 자기 마을, 자기 도시, 자기 나라 이상은 벗어나지 못합니다. 시간적으로도 1년 뒤, 10년 뒤가 제일 많고 백년 이후 후손들까지 고려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지요. 인류 대다수는 원점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있으며, 이들은 그야말로 자기 입에 풀칠하느라 바쁜, 일터와 집만을 오가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고단한 삶의 시야에 갇혀 지냅니다. (물론 그런 삶을 살면서도 넓은 시야를 가진 사람은 있지요.) 또는 기껏해야 자기 가족만 생각하며 1년 이상을 내다보지 못하는 삶의 시야를 가지고 있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보고서는 그래프 상에서 원점과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사람들, 즉 시간적으로는 몇 세대 이후의 후손들까지 생각하고 공간적으로는 지구를 벗어나 태양계와 그 밖의 우주까지 아울러 사유하는 사람이야말로 바람직한 미래의 인류상이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야말로 ‘우주 속의 지구라는 천체’ 위에서 문명을 영위하고 있는, ‘인류의 시야’를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바로 이런 시야야말로 정통적인 의미에서의 SF팬들에게 가장 보편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아서 클라크(사진 왼쪽)는 「2001년 우주의 오디세이」등을 쓴 세계적인 SF작가이자 미래학자인데, 1969년에 아폴로 우주선이 처음 달에 착륙하던 날 실황중계의 해설자 역할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중에 말한 바에 따르면, 인류 최초로 달에 사람의 발자국이 찍히는 그 역사적인 순간에, 방송국 한 구석에서 어떤 직원이 스포츠 채널을 열심히 시청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인간의 달착륙 장면이 특별히 관심을 끄는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지요.
물론 여기서 그 직원의 개인적 취향을 비난하거나 조롱하려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다만 인간은 이렇듯 다양한 개성과 정서의 소유자들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사례라서 인용하는 것뿐이지요. 마찬가지로 SF를 즐기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SF 팬의 입장에서는 우리 인류가 어서 우주로 진출하기를 간절히 바라겠지만, 사실 현대사를 돌이켜 보면 인간은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까지의 특정한 한 시기에만 달로 몇 번 왕복여행을 했을 뿐, 그 이후에는 오히려 퇴보해 버렸습니다. SF팬들의 입장에서는 꽤나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렇지만 우리 인류 전체가 전부 다 SF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점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