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단히 혼란스럽다. 무엇보다 대체로 인간은 선의와 상식에 의해 움직인다,고 생각했던 기반이 흔들린다. 맹자가 인간에게는 우물에 빠진 아이를 앞뒤 재보지 않고 무조건 달려가 구하는 측은지심이 있다,고 주장했던 성선설 자체가 성악설에 대항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국가와 사회를 만들어 개개인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받는다는 사회계약설도 어불성설처럼 들린다. 내가 딛고 있는 땅이 흔들리는 느낌이다.
거대한 시스템이 있고 그 시스템에 내가 들어가 있을 때 그리고 그 시스템이 나와 가족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을 때 과연 용기있게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그러니까 나라는 인간이라고 뭐 별건가? 고작 그런 게 인간이고 그런 인간이 아귀다툼처럼 서로 짓밟고 올라서다 자기 죽는 날도 모르는 채 마침표를 찍고 마는 게 삶인가? 진실, 선의, 대의, 사랑 이런 것들은 하나의 허상인가? 그냥 소망의 언어이고 환상이고 착시인가? 질문들과 회의들로 가슴이 막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없을까.
레이먼드 카버는 살면서 미친듯이 짧은 이야기들을 썼다. 그는 비교적 환상이 없었던 사람인 것같다. 자신이 쓴 소설에도 그 소설이 아주 그럴듯한 힘이나 영향력을 가질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번번이 전율한다. 아주 공고했던 일상에서 여덟 살 아이의 갑작스런 죽음에 당면한 부부와 빵집주인의 교감.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정말 별것 아닌 이야기가 아니다. 예전에 아이가 죽을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에 무너졌을 때 카버의 이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분명 정말이지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이 덩치 큰 알코올 중독자였던 소설가와 만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이는 계속 아픈 잠에 빠져 있었는데 병원 밖 하늘에서는 너무 예쁜 눈발이 내리기 시작했고 직원들은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있었다. 이것은 극한의 부조리이자 불합리한 일이라고 되뇌어도 세상은 그런 것임을 이미 카버는 알고 있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없어도 내가 아무리 이 세상에서 극한의 고통을 겪어도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은듯 저만치 신나게 돌아간다. 그리고 타인의 고통 앞에서 나또한 그러한 배경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이동진의 낭독을 들으며 다시 한번 그 아팠던 기억이 떠올랐다. 읽는 것과 듣는 것은 또 달랐다. 무심코 지나쳤던 대목들이 또 지금의 이 비극들과 맞물려 더 절절하게 다가왔다. 정말 힘들면 잠들 수 없고 무엇보다 먹을 수 없다. 그렇다면 먹게 해 주는 것은 최고로 어렵고 가치 있는 위로인 셈이다. 하늘나라로 가 버린 스코티의 생일케잌을 준비했던 빵집 주인은 이 부부에게 자신이 막 구운 계피롤빵을 먹게 한다. 엄마는 아빠는 그 빵을 먹을 수 있게 된다. 먹을 수 있으면 그 다음이 있다. 먹기까지가 힘들다. 이러한 정확한 지점을 포착한 사람이 바로 레이먼드 카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타인과의 교감, 공감, 위로를 이야기한다. 무의미하지 않다고. 정말 있다고.
많이 살아 본 사람, 나보다도 훨씬 멀리 간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사랑이 있습니까? 희망이 있습니까? 대체 사람으로 태어나 산다는 게 뭐죠? 이다지도 추악하고 더러운 일들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그럼에도 내가 노인이 되면 천상병 시인처럼 이 세상을 즐거운 소풍지였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이혼하고 군부 쿠데타로 망명하고 다 키운 딸을 희귀병으로 잃어야 했던 칠레의 소설가 이사벨 아옌데의 이야기를 찾아본다. 책귀퉁이는 벌써 노랗게 바래어 간다. 줄그은 부분들을 되짚는다. 그녀는 죽은 딸 파울라에게 이야기한다. 내게 인생의 경로를 결정짓는 본질적인 사건을 통제할 힘은 없었다고. 인생은 물건들이 잘 보이도록 제대로 세워 놓은 다음 후대에 남길 목적으로 찍는 사진이 아니라고. 지저분하고 무질서하다고. 그럼에도 운과 우리의 착한 마음을 믿고 일상이 삶이 흘러가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고.
십팔 년 넘게 한 남자를 사랑하고 있고 이미 그 점에 대한 의심은 극복했기 때문에 사랑에 대해서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다,고. 결국 무거운 짐들을 버리고 계산을 마치고 났을 때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 사랑뿐이었다고, 이사벨 아옌데는 이야기한다.

정말이지 나는 모르겠다. 더 살아봐야 할 것 같다. 더 배우고 더 찾아봐야겠다. 그러나 무기력감과 허무감에 침잠하지는 않으련다. 그것은 또 다른 비겁한 타협이다. 그래도 선의를, 사랑을, 위로의 힘을, 공감의 저력을 믿어보고 싶다. 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