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과 매혹’은 한 살인사건과 그 분석에 매달린 프랑스 지성인들의 이야기다. 1933년 프랑스의 한적한 시골도시 르 망에서 하녀로 일하던 파팽 자매가 주인 모녀의 눈알을 맨손으로 뽑아 죽인 엽기적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시신은 난자당했고, 동성애 관계이던 범인 자매는 “이제 제대로 됐어”라는 말을 남기고 순순히 잡혀간다.

광분한 프랑스 대중은 이들의 공개 참수를 요구했지만, 지식인들은 인간의 본성을 시사하는 ‘상징’을 읽어내려고 이 사건을 부단히 뒤졌다. 지난 70년 동안 수많은 소설과 연극, 영화가 탄생했고, 사건은 지금도 문학 작업의 모티브로 자리를 내어놓지 않고 있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편집증적 범죄의 전형에 대한 들춰내기를 시도한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에로스트라트’에서 주인공 알베르에 파팽 자매를 오버랩했고, 보바르는 사건의 본질적 희생자는 파팽 자매라고 역설한다. 좌파 지식인들은 “주인 마님의 피부를 갖고 싶었다”고 동기를 밝힌 점을 들어 살인을 ‘계급적’ 행위로 해석했다. ‘심연’ ‘의식’ ‘살인의 상처’, 다큐멘터리 ‘파팽 자매를 찾아서’ 등은 그 영상 텍스트들이다. 국내 무대에 올려진 장 주네 원작의 ‘하녀들’은 이 사건이 우리 주변에까지 와 있음을 깨우치게 하는 사례다. 파팽 자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20세기 프랑스 담론인 셈이다.

 

‘악마의 사도’는 도킨스가 25년간 써 온 글 가운데 일부를 추린 것이다. 일부는 기고문이고, 또 일부는 강연 원고다. 과학적 사고로 세상을 읽어낼 수 있도록 작은 창을 제시하고 있다. ‘이기적 유전자’처럼 그가 만들어낸 중요한 생물학적 개념에서부터 다윈주의의 위대함을 역설한 글까지 다종다변한 잡문들이다. 진화의 문제뿐 아니라 윤리, 종교, 대체의학에 관한 글도 실려 있다.

그러나 저자의 명성만 믿고 덤비기에는 난감한 면도 있다. 친절하지도 않을뿐더러 모호한 표현이 수시로 발을 건다. 이 분야 최고 번역자의 손을 거쳤으므로 번역상의 오류라고 보기는 어렵다.

결국 과학이라는 카테고리로 묶이는 책의 일반적 특성으로 볼 수 있다. 즉 과학서적을 읽을 때는 그에 맞는 최소한의 문법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진화생물학의 새로운 장을 연 도킨스의 전작을 읽지 않고 이 책에 도전하면 재미가 덜할지도 모른다. 역으로 생물학적 개념이 조금이라도 정리되어 있다면 그의 날카로운 위트를 ‘쿨’하게 즐길 수 있다.

과학과 진리에 대한 믿음은 이 글들을 관통하는 기본 주제다. 뉴에이지 신비주의와 영성까지도 이 틀에 맞춰 재단해낸다. 다윈주의는 ‘나’라는 존재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문이다.

 

1930년대 중반, 군국주의 국가 권력에 저항하던 일본 좌파 지식인들의 전향이 러시를 이룬다. 저자는 이들의 전향에서 일본 정신사의 가장 중요한 코드를 찾아낸다.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 쓰루미 슌스케의 대학 강의 노트를 출판한 책.

 

 

 

20세기 세계 어문학사 연구자인 블라디미르 프로프(1895~1970)는 이렇게 언명한다. "민담과 설화가 풍부한 민족이 바로 문화민족이다"라고. 그에 따르면 한 나라의 문화가 주변국을 압도할 수록 그 나라의 이야기와 이야기의 구조는 주변국을 지배한다. 그런 프로프는 이 책을 통해 이야기에 관한 자세한 연구방법과 의미를 일러준다. 기본적으로 러시아 민담에 대한 연구이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와 민담의 비교연구, 민담 연구의 세계적 학파와 연구가들, 유럽 문학 형성에 있어서 이야기의 역할 등에 대해서도 조명하고 있다. 특히 민속문학 연구의 귀중한 참고자료들이 각주 형태로 빼곡이 수록되어 있어 한국의 이야기 연구가 들, 민담 및 설화 연구가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영국 스코틀랜드 북서쪽, 북대서양 한가운데 위치한 세인트킬다 섬에서 자연이 주는 소박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 수천 년 전의 삶의 방식을 고스란히 간직했던 망망대해의 외딴섬의 일상과, 문명의 개입으로 인한 몰락의 과정을 담은 책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anda78 2005-08-27 0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 민담 연구.. 넘 재밌겠어요... ;;
하튼 라주미힌님의 탐나는 모월 모일 때문에 보관함이 터진다니까! >_<

라주미힌 2005-08-27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판다님을 위한거지용.. 호호..

2005-08-27 1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오명을 씻기 위해 1시간 동안 이 땅에 내려온다. 자신이 살던 소호에 내려와야 했지만 뉴욕에 있는 소호로 잘못 전송됐다. 마르크스는 잘못 이해되고 있는 자신의 사상과 저서의 내용들을 올바로 이해시키기 위해 대중들에게 다가간다. 또한 자신의 부인과 아이들 그리고 동지들의 이야기를 곁들임으로 이야기의 진중함을 쉽게 풀어간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5-08-19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탐나는 X월 XX일, 잘 보고 있답니다. 라주미힌님, 감사해요. 좋은 정보가 너무 많아요..;;

라주미힌 2005-08-20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신문 보고 관심가는 것들만 가져오는 거에욤.. ㅎㅎ
책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지는 않아 신뢰도는 무지 떨어집니다.
아무튼 비숍님 감사합니당..
 

1996년 '오래전 집을 떠날 때'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세 번째 창작집의 개정판이다.

 

 

 

 

아픈 과거를 꺼집어내는 것이 잔인한 일만은 아니다. 칠레를 대표하는 세계적 작가인 아옌데 역시 남미의 음습한 과거를 통해 공식 역사로부터 소외되어 왔던 여성들의 과거를 풀어낸다. 페미니즘 작가로 잘 알려진 아옌데의 대표작들인 '영혼의 집' '운명의 딸'에 이은 완결편이 이 작품. 무려 여섯 세대에 걸친 여성사가 펼쳐지만 앞의 두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작품의 앞 대목 3분의 1에 걸쳐 앞의 내용들이 압축돼 있으니까.

 

 

그를 빅맨(Big Man)이라 칭한 것은 얼마나 통쾌한 역설인가. 키 1m32에 양손의 손가락이 7개밖에 되지 않는 독일인 토마스 크바스토프. 선천성 지체장애를 딛고 세계 정상급 성악가가 된 작은 거인이다.

천형의 육신을 울림통삼아 천상의 소리를 뿜어내기까지 그가 싸우고 화해하고 극복한 이야기다.

 

 

1977년과 78년 당시 아동문학가 이오덕 선생이 잇달아 엮어낸 두 권의 책.
글쓰기 교육에 불어온 새로운 바람이었다.

1960년대 전후 시골아이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건져올린 언어들은 그만큼 신선했다. 도회지 아이들이 습관적으로 써온 '짝짜꿍 식 동요' '진부한 글쓰기'에 대한 대안이라는 평가도 그때 받았다.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는 이오덕 선생의 2주기에 때맞춘 재출간본. 당시 청년사에서 나온 산문집을 사계절별로 4권으로 분권(分卷)한 것 중 첫번째 책. 이어지는'방학이 몇 밤 남았나'(여름)'꿀밤 줍기'(가을)'내가 어서 커야지'(겨울)등은 여전히 신선하게 읽힌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hantomlady 2005-08-13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동안 신경숙을 읽지 않았군요.. 그녀의 '오래전 집을 떠날 때' 는 의외로 참 좋았어요.. 예전 표제작이 훨 나은데 흠흠..

라주미힌 2005-08-14 0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넹... 꼭 읽어봐야징...
 

인간과 포유동물의 유사성을 근거로 시작된 생쥐나 개,원숭이 등의 동물실험이 인간 질병의 치료에 진전을 가져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동물실험을 통해 만들어진 의약품이 미국에서만 매년 10만여명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있다고 고발한다. 일례로 인간은 수십년간 생쥐의 암을 연구했지만 인간에겐 효과가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이종이식 실험이 ‘바이러스의 재앙’을 불러올 것이라고 경고한 대목. 이종이식이란 장기이식의 수요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동물에서 배양한 장기를 인간에게 이식하겠다는 시도인데 저자들은 이종이식이 불가능한 꿈일 뿐만 아니라 치명적으로 위험한 실험이라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에게 장기를 제공할 영장류 동물들이 보유한 해독 불가능한 바이러스들. 동물 장기를 인간에게 이식하는 것은 박테리아,바이러스,기생충,균류 등 보이지도 않고 예측할 수도 없는 수많은 미세 유기체들의 공동체를 옮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이것은 에이즈나 광우병처럼 인류에 치명적인 전염병을 불러 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황 교수팀이 추진하고 있는 대형 프로젝트들은 하나같이 현실성과 윤리성 측면에서 중대한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 교수와 언론은 낙관적 측면만 너무 부각시켰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한국적 근대화의 핵심을 ‘힘의 숭배’, 즉 폭 력 이데올로기의 정당화 혹은 침투화 과정으로 본다. 이같은 전 제하에 저자는 개화기부터, 박정희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 지 이같은 힘의 숭배가 종교, 군대, 스포츠, 초등학교 운동회, 역사 교과서 등을 통해 어떻게 형성, 내면화됐으며 개개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쳐왔는가를 분석한다.

 

 

 

구조주의 인류학을 개척한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기념비적 저서 '신화학'(한길사)이 번역돼 나왔다.

전체 4권 중에서 제1권 '날것과 익힌 것'이 먼저 선보였다. 앞으로 '꿀에서 재로'(2권), '식사예절의 기원'(3권), '벌거벗은 인간'(4권) 등 독특한 제목을 단 책들이 잇따라 소개될 예정이다.

 

 

섬세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삶의 미시적 풍경'을 포착해내는 촉수, 핍진성 있는 언어운용 능력, 여기에 독자로 하여금 "그래, 이건 바로 내 얘기야"라며 무릎을 치게 만드는 시대해독 감각까지. <단백질 소녀>를 시작으로 <61X57>을 거쳐 <끝에서 두 번째 여자친구>에 이르는 그의 작품은 타이완은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까지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인정받았다.

'한국에서 가장 재미있는 소설을 쓰는 사람'을 꼽는데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박민규(<지구영웅전설> <카스테라>의 작가)는 이 책을 접하고 "아아, 재밌다. 이 추천글을 쓰기가"라는 너스레로 왕원화와 자신의 코드가 유사함을 기꺼워했고,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주목받은 신진 정이현은 "(배경이 낯설지만)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끝에서 두 번째...>의 매력으로 평가했다.

 

이 책은 그 긴박했던 3주간의 기록이다. 미국 뉴멕시코에서 원폭 실험이 성공한 시점부터 거대한 불꽃이 수만 명의 생명을 집어삼키기까지, 책은 원폭 개발팀과 남태평양 티니언 섬의 폭격팀, 히로시마의 일본인들, 미소(美蘇) 수뇌부 등 네 시점을 오가며 인류의 무력 갈등 양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한여름의 현장을 옮겨 놓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르가즘의 기능>(윤수종 옮김.그린비 간)은 1927년 당대 정신분석학계의 거목 지그문트 프로이트에게 헌정됐다가 퇴짜 맞았던 빌헴름 라이히의 '과학적 자서전'이다.
 
  "오르가슴 능력 억압이 모든 신경증의 원인" 주장한 정신분석학자
 
  혹시라도 '이 책을 읽으면 오르가슴(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책 제목 외에는 '오르가슴'으로 표기)의 원리를 깨우칠 수 있을까'라는 기대를 갖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기대는 접기 바란다. 저자는 성적 에너지의 억압이 개인과 사회의 신경증적 병리현상의 원인이라는 주장을 펼친 당대의 '혁명적 정신분석학자'다.
 
  그에 따르면 오르가슴 능력은 "자연스러운 성행위에서 성 흥분의 절정, 즉 오르가슴을 경험하고 그것에 빠져들 수 있는 능력"이다. 이 오르가슴 능력의 정도에 따라 심리적 또는 정신적 건강이 좌우된다는 것이 라이히의 지론이다.
 
  독재사회는 오르가슴 능력을 억압당한 사람들의 신경증적 결과물이며, 인민 대중으로 하여금 권위에 순종하도록 구조화하는 중심은 자연스러운 부모의 사랑이 아니라 권위주의적 가족이다. 그 주요수단은 어린아이들과 청소년들의 성을 억압하는 것이다.
 
  이같은 혁명적 주장을 바탕으로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을 결합하자고자 했던 그는 '전투적인 정신분석학자'를 넘어 '성격분석학자'로 분류되면서 공산당과 국제정신분석협회 양쪽 모두에게서 추방당했다. 결국 그는 자유의 나라라는 미국에 정착했지만 미국에서마저 매카시즘이 기승을 부리던 1950년대에 저서를 소각당하고 감옥에서 일생을 마감한 '비운의 사상가'(1897~1957)였다.
     
 
<오르가즘의 기능>(윤수종 옮김.그린비 간). ⓒ프레시안  
 

  이처럼 빌헬름 라이히는 한마디로 시대가 감당하지 못한 학자였다. 주류 정신분석이 프로이트의 무의식론을 중심으로 정신변증법 또는 관념론에 가깝던 시대에 라이히는 그에 대항해 프로이트 무의식론의 핵심인 리비도론을 오르가슴론으로, 에너지론으로, 생체발생학으로 유물론화 했다.
 
  신체의 건강한 활동을 촉진해야 정신건강이 유지된다는 것이 라이히의 주장이다. 신체의 건강한 활동의 핵심은 바로 성적 욕망이다. 마르크스가 계급해방을 해결과제로 삼았다면, 라이히는 대중의 욕망 해방을 추구했다.
 
  우리가 "저 사람 성격 이상하네"라고 할 때 라이히의 주장에 따르면 "성적 에너지가 억압돼 초래된 신경증적 성격"이라고 말하는 것이 된다.
 
  이러하니 당대의 보수적인 정신분석학계는 라이히의 이론에 냉소를 보내며 일축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라이히의 연구 결과가 당대의 온갖 무시와 험담을 뛰어넘어 지금까지도 주목 받게 만든 생명력은 바로 추론이나 가설에 머물지 알고 철저하게 실험을 통해 그것들을 증명해내려 했던 그의 자세에서 비롯된다.
 
  그의 주장 중에는 동성애를 '남녀의 오르가슴적 결합이 방해받아 왜곡된 형태'로 보는 등 현재의 관점에서 볼 때 보수적인 측면도 없지 않지만 라이히는 동성애가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는 등 당대의 상황에서는 혁명적인 성 자유의 대명사로 불릴 만도 하다.
 
  특히 이번에 번역된 <오르가즘의 기능>은 <빌헬름 라이히 유아신탁재단>이 제공한 라이히의 독일어 수고(手稿)를 직접 완역한 국내 최초의 책이다. 라이히는 "역사적인 사실을 위조하고 파괴하려는 사람들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도록 50년 동안 나의 기록들을 따로 보관하라"는 유언을 남겼을 정도로 자신의 저작들이 정확하게 소개되기를 바랐다.
 
  게다가 이 재단은 라이히가 남긴 유언의 취지에 충실하게 모든 해외 번역본을 꼼꼼히 감수한 뒤 출판을 허락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우리나라에 소개된 라이히의 저작은 대부분 일본어나 영어의 중역이거나 발췌번역이었고, 국내의 독자들이 라이히의 사상을 제대로 접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라이히의 삶과 사상 전반을 아우르는 <오르가즘의 기능>의 독일어 수고 완역은 그 자체로 큰 의미를 갖는다.
 
  사실 라이히는 미시권력의 작동방식을 분석한 <파시즘의 대중심리>의 저자로 더 유명하다. 그는 이 책에서 "독일의 파시즘은 성적 억압에서 발현됐다"는 독특한 주장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가부장 남자를 제외한 다른 모든 구성원들의 성적 욕망을 억압하는 문명에서 히스테리 등 온갖 신경증이 발생한다는 것이 라이히의 핵심 주장이다.
 
  <오르가즘의 기능>에서도 라이히는 '신경증적 성격'이라는 개념을 통해 비합리적인 행동을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라이히에 따르면 '신경증적 성격'은 '오르가즘 능력'을 상실할 때 생겨나는 것이다. 여기서 '오르가슴 능력'이란 "아무런 장애 없이 생체 에너지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길 줄 아는 능력"을 말한다.
 
  그런데 진정한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하고 생체 에너지의 자유로운 흐름이 막힐 경우, 사람들은 외부세계의 공격이나 자신의 충동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특정한 성격을 발전시킨다. 그것이 바로 '신경증적 성격'이다. 그런데 신경증 환자는 자신의 신경증적 성격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그녀는 마치 갑옷을 겹겹이 껴입은 듯 자신의 성격을 은폐한 채 외부·내부의 강압적인 도덕적 규제에 순응한다.
 
  라이히는 신경증 환자의 이런 자기방어기제를 '무장'이라고 불렀다(그리고 이런 무장은 정신적으로는 '성격무장'으로, 육체적으로는 '근육무장'으로 표현된다). 바로 이와 같은 '무장'이 '비합리성의 합리성'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열쇠다. 라이히가 분석한 수동적이고 여성적인 젊은 남자의 사례를 살펴보자.
 
  "그는 매우 공손했고 아주 교묘하게 불안을 감추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그는 모든 것에 양보했다. 그는 어머니에 대한 자신의 성적인 종속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많은 얘기를 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 문제가 아니라 실제적인 정서적 통찰을 피하는 방식인 그의 공손함을 계속 지적했다. 공손함이 줄어들자 그는 무례해졌다. 이렇게 공손함이 증오를 방어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금지들을 모두 해제시킴으로써 그 증오를 완전히 드러내게 했다. 그렇게 하기 전까지 증오는 무의식적 태도였다. 증오와 공손함은 대립물이었다. 동시에 과도한 공손함은 위장된 증오의 표현이었다. 지나치게 공손한 사람은 보통 가장 잔인하고 가장 위험하다. 당시 해방되어 드러난 증오는 아버지에 대한 극심한 불안을 방어하고 있었다."
 
  라이히가 분석한 다른 사례들―자신의 아이들을 죽이려는 충동에 죄책감을 느껴 무언증에 걸린 여성 환자, 항상 친절하고 예의 발라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알코올중독에 빠진 남성 노동자 등― 속의 환자들도 겉으로 보기에는 공손하고, 예의 바르고, 착했다. 그러나 이런 모습 속에서 그들은 지극히 비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 라이히의 '무장' 개념은 전혀 이상한 행동을 하지 않을 듯 보이는 사람이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이유를 잘 설명해 준다. 그리고 이런 무장을 해제시킴으로써 비합리적인 행동의 진정한 '원인'에 다가갈 수 있게 도와준다.
 
  그러나 라이히의 연구는 이처럼 환자들의 치료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오르가즘의 기능>의 핵심 주장 가운데 하나는 신경증적 성격이 '심리적 전염병'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문화, 문명, 도덕의 이름으로 갖가지 금지를 부과하는 사회는 늘 그 사회의 구성원들을 신경증적으로 만든다. 신경증적 성격을 불러오는 오르가즘 능력의 상실은 단순한 '개인적 문제'가 아닌 것이다. 즉, 오르가즘 능력의 상실은 사회적·정치적 문제라는 얘기다.
  

  "파시즘은 성적 억압에 따른 심리적 전염병의 결과"
 
  라이히는 이 점을 파시즘에 대한 분석을 통해 설명한다. 파시즘은 당시 라이히가 염두에 두고 있던 심리적 전염병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라이히에 따르면 인민 대중이 자신들에 대한 억압을 긍정하거나, 스스로 자신들을 억압한다는 데 파시즘의 특징이 있다.
 
  당시 독일의 인민대중은 '자유'를 원하고 있었지만, 권위주의적이고 독재적인 지도력을 약속한 히틀러 주위로 모여들었다. 사회주의를 파괴하겠다고 주장한 히틀러에게 사회주의적 인민 대중이 모여들었고, 여성들의 자유를 폐지하고 정치적·경제적 활동을 불가능하게 만들겠다는 주장에 여성들이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독일의 인민대중이 이렇게 비합리적인 행동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라이히는 이들이 보여준 비합리성의 원인 역시 개개인의 심성에 뿌리박혀 있는 신경증적 성격에서 찾는다. 그러나 라이히는 자신의 분석을 더 확장해 이들이 이런 신경증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당대의 사회적·정치적 상황에 주목한다.
 
  민주주의 제도들은 실업에 대처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하는 인민 대중에게 사실상 자신들의 노동성과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가르쳐야 하는 일이 닥쳤을 때 불안한 모습을 확연하게 드러냈다. 노동과정에 관해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고, 생산과정에 대한 전체적 조망으로부터도 차단된 채 단지 임금만을 받도록 교육받아온 이 수백만의 노동자와 피고용인들은 '파시즘'이라는 더 강화된 형태의 낡은 원칙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위치에서 볼 때 '위대하고 강력한 국가 및 민족'과 자신들을 동일시할 수 있었다.
 
  게다가 당시의 '자유로운' 조직들(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자들의 조직)이 인민 대중에게 심어놓은 정치적 무력감, 인민대중으로 하여금 쓰라린 현세적 고통과 대결하도록 만들었던 대공황이 이와 같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무능력에 기름을 부었다.
 
  바로 이와 같은 위기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신경증적 성격을 발전시켰던 당시의 독일 인민 대중들은 기꺼이 파시즘을 추종하게 됐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 인민 대중들은 '가족의 유대'를 강조하며 이것을 더 큰 가족, 곧 '민족에 대한 유대'로 전이시킨 파시즘, '어머니 독일'과 '아버지 히틀러'에게 무조건 의존하는 유아적 심성을 야기한 파시즘, 유태인이나 유색 인종은 '더럽고 음탕하다'는 비합리적인 감정을 가지게 만든 파시즘, 그에 따라 결국 학살과 전쟁이라는 가학적인 행위들을 자행한 파시즘에 기꺼이 동참한 것이다.
 
  이와 같은 파시즘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신경증적 성격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언제 어디서든 심리적 전염병이 만연한다. 즉, 라이히가 심리적 전염병의 대표적 사례로 꼽은 파시즘이 사라졌다고 해서, 심리적 전염병 자체가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물신주의·테러 속 신종 '신경증적 전염병'
 
  오늘날까지 가부장적인 가족과 종교가 도덕적 엄숙주의를 통해 여전히 사람들의 심성을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 개개인에게 금전만이 삶의 유일한 가치라고 가르치는 자본주의, 물질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외로움과 심리적 왜곡을 불러일으키는 자본주의, 싸구려 호색 소비산업과 상업광고를 통해 사랑에 대한 갈망을 착취하는 자본주의, 세계의 안녕을 위협하는 테러리스트들을 소탕한다며 오히려 이 세계를 위험에 빠뜨린 자본주의 자체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자발적으로든 억지로든) 신경증적 성격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렇게 된다면 또다시 철학과 예술을 사랑한 독일 국민들이 파시즘에 빠져들듯 '빅브라더' 체제를 환영하는 새로운 '신경증적 전염병'이 창궐할 것이다. 아니, 이미 이 전염병이 상당히 전세계적으로 퍼져 있는 것은 아닐까?

 

출처 - 프레시안

 

 “인종이나 종족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제노스(genos)’와 살인을 뜻하는 라틴어 ‘사이드(cide)’를 합해 유대인 학자 라파엘 렘킨(1900~59)이 1944년 처음 제안한 합성어 ‘제노사이드(집단학살)’는 20세기에 등장한 국가 중심의 신종 범죄입니다. 그런데 유대인 학살에만 그런 잔혹한 제노사이드가 있었던 게 아닙니다. 우리 현대사의 비극에서도 제노사이드의 범죄조건에 해당하는 흔적들은 발견됩니다.”

최근 종족을 절멸시키고자 했던 세계사의 제노사이드 범죄 사례들과 그 논쟁적 개념을 찬찬히 다룬 <제노사이드­ 학살과 은폐의 역사>(책세상 펴냄)의 저자 최호근 부산교육대 연구교수(39·서양사학)는 “한국전쟁을 전후한 우리의 동족상잔 역사도 제노사이드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이 책에서 제주 4·3과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을 한국의 제노사이드 사례로 다뤘다. “제주 4·3은 양민을 빨갱이로 몰아 ‘인간 같지 않은 존재’라는 이미지로 만들고 무차별 절멸시키고자 군경과 관료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나섰던 제노사이드였습니다.”

 

출처 - 한겨레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고싶다 2005-07-29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셸 푸코의 <성의 역사>를 떠오르게 하는 책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