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신간] 세계화 속의 비정규직 이야기 〈부서진 미래〉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왜 '가진 것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늘 더 빼앗겨야 할까. 더 이상 가진 것도 없는 사람들에게서 이 사회는 삶의 마지막 '희망'마저 앗아가고 있다.
  
  주류 삶과는 너무 다른 맨 밑바닥 층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슴에 얼음 작살이 깊이 꽂힌 것처럼 서늘하게' 다가오도록 하는 책이 나왔다. 르뽀문학교실 수강생들이 우리 사회의 밑바닥 인생들의 얘기를 묶어 펴낸 〈부서진 미래〉(김순천 외, 삶이 보이는 창)이 그것이다.
  
  '세계화'가 만들어낸 '열심히 일하지만 가난한 사람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일상의 곳곳에서 마주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가정복지도우미 이점순 씨, 서울대병원 간병인
정금자 씨, 미등록 이주노동자 라주 씨, 기간제 교사 원경미 씨, 영화 스태프 최진욱 씨, 노숙인 이곤학 씨…. 우리는 이미 곳곳에서 '물처럼 고통으로 가득찬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만나고 있지만 그들의 고통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그 침묵의 이유에 대해 대표저자 김순천 씨는 이렇게 말한다.
  
  "차라리 그 고통들이 전쟁이나 강제이주, 해일로 왔다면 뭔가가 좀 더 뚜렷해지고 해결점이 명확히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온갖 합법적인 것, 도덕적인 것, 능력 있는 것'으로 가장하여 우리에게 왔다."

그랬다. 사람들은 다들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꾸 이 사회의 끝자락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자행된 온갖 선진적인 조치들은 '노동빈민층'을 만들어냈다. 열심히 일하지만 가난한 사람들.
  
  "제가 철야 서너 번을 포함해서 120시간을 했는데, 110만원 받았어요. 3주 동안 하루도 못 쉬었는데, 거의 쓰러질 정도였죠. 철야를 3번인가 4번 했어요. 여기는 철야수당도 안 주고 철야하면서 간식 먹은 시간까지 빼요. 100시간 잔업하면 114만 원인데, 4대 보험 공제하고 나면 100만 원 조금 넘겠죠." (기륭전자 노동자 은미)
  
  비정규직의 고용은 저임금 노동자를 유연하게 사용해 글로벌 시대의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는 논리로 합리화된다. 그러니 이들은 당연히 '적절한' 임금을 받을 리 없다. 2004년 1700억 매출액에 220억 원의 당기 순이익을 올렸고, 2005년 무역의 날에는 1억 달러 수출의 탑을 수상하기도 했던 기륭전자이지만 이 회사 계약직 노동자들의 초임은 64만1850원(2005년 9월 인상 이전). 나라에서 정한 최저임금보다 고작 10원 많은 금액이다.
  
  2005년 보건복지부에서 발표한 4인 가구 최저생계비는 113만6332원. 기륭전자의 여성 노동자 행난 씨는 혼자 번 돈으로 네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그녀는 거의 매일 밤 10시까지 일을 해야만 가능한 80시간 잔업을 해도 이 돈을 벌 수 없다.
  

지호만 해도 그랬다. 지호는 IMF 사태로 아버지의 건설사업이 실패한 열 세 살 때부터 이제 파릇파릇한 스무살이 될 때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 몸이 채 다 자라지도 않았던 그 어린 시절부터 신문배달, 자장면 배달, 가스 배달, 다방 아가씨들 오토바이 태워주기, 주유소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혼자' 살아 왔다.
  
  "취업이 진짜 잘 안 될 때가 있었거든요. 저 같은 사람을 어디서 쓰겠어요. 주유소고 어디고 취업이 안 돼서, 그때도 참 힘들었어요."
  
  고학력 노동자들은 더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취업을 미루기도 하지만, 중학교도 겨우 나온 지호를 받아주는 곳은 역시 밑바닥뿐이었다. "다시 태어나면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지호는 "이렇게 떠돌면서 살지 말고 정착할 걸…. 마음을 못 잡았으니까. 한 가지 일만 했더라면 지금쯤은 인정을 받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있지요"라고 스스로의 부족함을 탓했지만 사실 지호를 떠돌이 인생으로 만든 건 지호 자신인가?
  
  그들에게는 오늘밤도 내일도 없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사회에서 밀려난 것은 주민등록등이 말소돼버린 노숙자 이곤학 씨(60)도 마찬가지였다. IMF로 일과 집을 다 잃어버린 이곤학 씨의 8년 간의 노숙 생활은 대한민국의 국민의 자리도 빼앗아갔다.
  
  지나는 차 소리로 한 밤중까지 시끄러운 길에서도, 공익근무요원들의 구박과 내쫓김을 당하곤 했던 지하철 역사 한 구석에서도 잘 잤던 그였다. 거리 한 복판 그의 작은 공간이 비행기가 지나가는 것 같이 시끄러운 곳이었다는 말에도 "그래도 한 자리에서 그렇게 오래 지낼 수 있었다는 것은 운이 좋은 것이제. 한 겨울에도 꼼짝 않고 거기 있었어. 영하 13도 내려갈 때도 움직이지 않았어. 은박지에다 박스로 집 지어놓고, 깔판 같은 걸 깔아 놓고, 침낭 2개 속에 들어가서 자면 괜찮아"라고 웃던 그였다.
  
  그런 그가 주민등록증이 말소된 사실을 알고 나서는 "정말 내 자신이 벌레만도 못하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700원짜리 컵라면을 사 퉁퉁 불려 먹기 위해 노가다라도 하려면 주민등록증이 있어야 한다. 이제 자신을 증명해 줄 수 있는 것이 사라진 그에게는 그의 말대로 "오늘밤도 없고 내일도 없게 돼버렸다."
  
  하루 밤 잠 잘 곳을 찾아 헤매는 노숙인은 아니어도,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위험 속에 불안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다. 비정규직 노동자들. 이미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없어선 안 될 사람이 된 '비정규직'의 이야기는 바로 내 옆 친구의 삶이기도 하다.
  
  "20년이나 30년 후에도 계속 교사 일을 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 난 교사밖에 내 길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 이 학교, 저 학교 장돌뱅이처럼 옮겨 다닐 생각을 하면 괴롭지." (기간제 교사 원경미 씨)
  
  그나마 계약 기간을 채울 수 있는 경미 씨는 나은 편이다. 강압적으로 업무량은 2배로 늘린 것에 대해 문제제기한 것이 해고 사유 '잡담'이 되어 문자로 해고 통지를 받은 기륭전자 노동자 석순 씨도 있다.
  
  "2월 14일에 들어가서 5월 3일에 문자메시지로 해고를 당했어. 000 차장 만났는데 A4 한 장짜리 팩스가 들어온 거를 보여주더라고. 15명이 같이 잘렸는데, 이름이랑 사유가 써 있어. 종희하고 나하고 사유가 뭐냐면 잡담이더라고." (기륭전자 노동자 석순 씨)
  
  어느 날 갑자기 문자로 날아오는 해고 통지 앞에서 그들은 해고당하지 않기 위해 핸드폰을 없애버릴 생각까지 했다고 했다. 이들의 불안정한 고용은 불안정한 삶으로 이어진다.
  
  "장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없다는 게 지금 큰 문제지. 보통 회사 다니면 퇴직금 쌓이고 1, 2년 가면 호봉도 오르는데, 이것은 승률 올리기도 힘들어. 뭔가를 배우려고 해도 시간이 안 되잖아. 아침 10시까지 출근해서 일찍 들어와도 밤 11시인데…." (학습지 교사
유지혜 씨)
  
  "그분들의 목소리가 세상과 불화하기를 바란다"
  
  점점 더 비정규직의 비율이 늘어나는 우리 사회에서 빼앗긴 사람들의 목소리는 더 이상 '너'의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목소리는 이 사회에서 한낱 넋두리로 버려지거나 냉소, 경멸당하고 있다. 이 나라가 꿈같았던 세계화를 이루면서 그 대가로 절망의 나락에 빠진 사람들의 목소리는 오히려 담담하다.
  
  그 목소리들이 이 각박한 세상에서 지켜지고 보호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이 책을 만들었다. 책을 읽는 이들이 그 목소리를 듣고 많이 아파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 아픈 목소리들에 우리는 무슨 답을 해야 할까?
  
  이 책의 대표작가 김순천 씨는 말한다.
  
  "그 목소리들은 지켜지고 보호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들의 목소리가 이 세상과 많이 불화하길 바란다. 몸으로 인생을 통과해오면서 얻은 육화된 그분들의 언어와 삶이 실종된 세상의 가벼움과 최대한 많이 충돌하기를 원한다.
  
  퓨전 음식처럼 여러 음식 중에 하나로 선택해서 즐기는 그런 것들이 아니기를 바란다. 값비싸고 좋은 음식만 먹다가 어느 날 먹는 된장찌개가 아니기를 바란다. 생의 하중을 견뎌오면서 만들어진 그분들의 얼음작살 같은 목소리가 될 수 있으면 마음에 오래 오래 박혀서 많이 아파주기를 바란다."

 

 여정민/기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화와 종교에는 이처럼 거리와 시간을 초월하는 공통점이 많다. ‘신화의 이미지’는 신화 전설 종교 등에서 나타나는 그 같은 통일적인 개념이나 이미지, 그리고 그것들이 구체적으로 발현하는 상징을 비교해보는 조지프 캠벨의 역작이다.

캠벨은 비교신화의 대가로, 이 책은 전 생애에 걸친 그의 신화연구의 결정판이다. 출간되자마자 뉴욕타임스 서평의 커버스토리를 장식하기도 했다.

책은 우주 질서를 시공간으로 탐색하고 동서양의 신화에 대한 해석의 차이를 드러내는가 하면, 요가를 통해 신화의 상징을 심리학적으로 해석하고 신에 대한 민속과 문자 기록을 비교하기도 한다.

글도 글이지만, 그림 450여장을 통해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도 중국 유럽 등의 신화와 예술의 의미를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낸다.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가로 불리는 캠벨이 70세를 맞은 1974년, 자신의 신화 연구를 결산하는 의미로 쓴 책이다. “신화는 ‘개념 체계’가 아니라 ‘삶의 체계’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지론에 따라 캠벨은 메소포타미아·이집트·인도·중국·유럽의 신화와 예술을 넘나들며 신화 속 모티브의 공통점과 차이를 살펴나간다.

“신화는 당신이 걸려 넘어진 곳에 보물이 있음을 알려준다”는 캠벨의 말을 떠올린다면, 450여장의 그림과 6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 가운데 어느 장에서 걸려 넘어지더라도 신화와 삶을 이해하는 열쇠를 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를 지낸 그리스 역사가 존 워리는 그리스와 로마의 중요한 전쟁을 시대순으로 차분히 설명하면서, 다른 많은 책들이 모호하게(특히, 과도한 상상력에 의존하는 문학적인 방식으로) 처리하고 넘어간 부분을 전황도까지 그려가며 완벽에 가깝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당시 병사들이 입었던 군복, 군사장비, 무기, 전함, 그리고 공성용 장치 등의 원형을 생동감 있는 그림으로 복원했고, 그 기능까지 자세히 설명한다.

서양고대사를 전공한 역자는 ‘전쟁 발발의 정치사회적 메커니즘이 세세하게 언급돼 있지 않’다는 점을 한계로 지적하면서도, 다른 많은 책들이 전쟁의 상당 부분을 ‘독자의 해석에 맡기는 경향이 있었’는데 비하면 ‘이제까지 보아왔던 전쟁사 관련 책들 중에 최고’라고 찬사를 보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커트 보네거트의 <제5도살장>은 전쟁의 참혹함을 독특한 방식으로 기억하는 소설이다. 커트 보네거트는 1943년, 스무 살의 나이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며 영미 연합군 800대의 폭격기가 2개월간 폭격을 가해 13만 명의 희생자가 생겼던 ‘유럽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학살’ 독일 드레스덴 폭격에서 살아남았다. 드레스덴 폭격 이후 커트 보네거트는 20여 년이 지난 후에야 소설을 쓸 수 있었다. 전쟁의 경험을 전통적인 소설의 기법, 즉 한 명의 서술자가 사건을 서술하는 방식으로는 도저히 표현해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드레스덴은 도시 전체가 건축 박물관처럼 보일 정도로 유서 깊은 도시였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 당시 영미 연합군은 소련 측에 폭격의 힘을 보여주기 위한다는 명목 하에 재래식 폭격기로 도시를 초토화시킨다. 드레스덴의 13만 명이라는 희생자 수는 히로시마 핵폭탄으로 인한 희생자보다도 많다. 이 어이없는 참변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보네거트는 드레스덴 참변을 기억하는 자신의 자세에 대해 성서를 인용한다. 소돔과 고모라가 파괴될 때 롯의 부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만다. 보네거트는 소금기둥이 되는 운명이라 할지라도, 파괴의 순간을 뒤돌아보고 기억하는 자세를 긍정하고 있다.

“이 소설에는 등장인물이 거의 없다. 극적인 갈등도 거의 없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연약하고 거대한 힘 앞에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전쟁의 가장 중요한 효과 중 하나는 개성을 가지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커트 보네거트의 여타 소설처럼, <제5도살장> 또한 꼴라주처럼 다채롭고 짤막하며 경쾌한 에피소드들이 이어진다. 이 에피소드들은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보편적인 시간관을 따르지 않는다. 주인공이자 드레스덴 참변에서 살아남은 검안사 빌리 필그림은 시간에서 자유롭다. 그는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현재로 자유롭게 시간여행을 할 줄 안다.

독자들은 빌리 필그림을 따라서 그의 현재와 과거, 미래까지 자유롭게 들여다본다. 빌리는 한참 전쟁 와중에 부인과 결혼하는 장면으로 시간여행을 가기도 하고, 별 다른 이유 없이 트랄파마도어 혹성으로 납치됐던 순간으로 떠나기도 한다. 빌리는 미래를 볼 줄 알기에 자신이 언제 죽을지, 가족이 언제 죽을지를 모두 알고 있다. 그래서 죽음은 놀랍지 않다. 또한 사람들의 죽음이 서술 될 때마다, “그렇게 가는 거지”(so it goes)라는 문장이 후렴구처럼 붙는다. 이 문장에는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그 부조리한 비극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이 담겨있다. 세상의 부조리함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이 같은 담담함이 필요한 법이다. 그래서 전쟁터에서 독일군의 포로가 된 빌리의 부대원들이 밀어터지는 기차 안에서 죽어갈 때도 “그렇게 가는” 것이다.

빌리를 납치한 트랄파마도어 혹성 사람들은 지구와는 정 반대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트랄파마도어 혹성 사람들은 ‘로키 산맥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것’처럼 과거, 현재, 미래를 한꺼번에 볼 수 있다. ‘자유의지’ 같은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영원하다. 그래서 그들은 책을 읽을 때 ‘수많은 경이로운 순간들’을 일시에 들여다보기를 선호한다. 빌리가 왜 자신을 납치했느냐고 묻자, 트랄파마도어 인은 왜 라는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단지 이 순간이 존재하기 때문에 빌리가 납치된 것일 뿐이라고 답한다.

트랄파마도어인의 세계관은 세계의 부조리함을 견디는 하나의 방법처럼 제시된다. 어차피 모든 것은 영원하므로, 기억에 남을 아름다운 순간만을 보면서 살자는 것. 물론 미국으로 돌아온 빌리는 정신적으로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 취급 당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5도살장>에는 역설적으로 아름다움과 순수함을 추구하면서 희망을 찾는 문장들이 자주 등장한다.

꼴라주적 기법을 사용한 까닭에 이 소설에는 다양한 자료들이 자유롭게 삽입된다. ‘지구에는 평균 324,000명의 신생아가 태어나는데 평균 10,000이 굶주림이나 영양실조로 죽는다.’ 남북전쟁 이후 비겁죄로 유일하게 총살당한 군인에 대해 법무관은 ‘군 기강’을 위해서는 ‘사형’을 당연하게 부과해야 한다고 쓰고 있다. 드레스덴 참변은 1760년, 프러시아 군에 의해서도 일어난 바 있다. 또한 전쟁이 끝난 후 어느 장교는 ‘군사적으로 꼭 필요하지는 않았던’ 참변이라고 기록하기도 한다. 이처럼 갑작스레 삽입되는 자료들은, 과거와 현재를 다층적이고 총체적으로 바라보도록 유도한다.

커트 보네거트는 이 소설을 구상할 당시 친구의 부인에게 혼이 났다. 그녀는 커트 보네거트가 전쟁에 참전했을 때는 ‘젖비린내 나는 애들’에 불과했다고 쏘아붙인다. 또한 전쟁을 영웅시하는, ‘프랭크 시나트라나 존 웨인처럼 매력있는’ 배우들이 역할을 맡는 전쟁영화들을 비판한다. 백여 년 간 쓸모 없이 피를 흘린 십자군 전쟁에서 소년 십자군까지 동원되었던 것처럼, 젊은이들은 전쟁을 영웅시하는 책과 영화를 보면서 자라나서 전쟁터에서 피를 흘렸다. (그래서 이 소설의 부제는 ‘아이들의 십자군 전쟁, 죽음과 추는 의무적인 춤’이다.) 이 부조리한 전쟁을 기억하는 자세는 평정심과 지혜다.

“하느님, 저에게 허락하소서. 내가 바꾸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정심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와 늘 그 둘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 '일다'에 게재된 모든 저작물은 출처를 밝히지 않고 옮기거나 표절해선 안 됩니다.

Copyrights ⓒ www.ildaro.com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기자

 

 

 

 

 

이 책은 과학과 기술의 역사, 과학기술의 흐름을 통해 세계사를 훑어보면서 ‘즐거운 과학기술’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투스는 이집트의 나일강이 범람한 뒤 토지를 재조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기하학이 생겨났다고 전해준다. 황하, 메소포타미아 등 고대 인류문명도 기하학을 이용한 관개시설이 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었다. 고대 과학자들은 숫자놀이를 발전시켜 역수, 제곱, 2차·3차 방정식 풀이법 등을 개발하는 등 수학을 추상적으로 즐겼다. 저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 과학자의 일화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것보다 먼저 땅에 떨어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뒤집기 위해 갈릴레오가 피사의 사탑에서 무게가 다른 2개의 물질을 떨어뜨리는 실험을 했다는 것이 대표적. 저자는 그가 낙하법칙을 정립하기 10년 전에 이같은 실험을 했을 리가 없다고 말한다.

과학은 늘 신학에 짓눌려왔지만 뉴턴은 영국의 종교적 온건주의자와 결합하면서 빛을 발한 경우다. 그가 사망한 뒤 영국의 유명시인 알렉산더 포트는 “어둠 속에 있던 자연과 자연법칙들을, 신께서 말씀하시길 뉴턴이 ‘있으라’하매 모든 것이 밝아졌다”고 칭송했다. 저자는 서구뿐만 아니라 앙코르와트, 마야, 잉카, 이슬람 등이 쌓아올린 과학·기술 업적까지 일목요연하게 들려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책은 복잡하고 난해한 20세기 철학사를 한 권에 요약해 내는 만만치 않은 내공을 보여 준다. 서구 철학 사조를 한눈에 꿰고 싶어 하는 독자들에게 안성맞춤이다.

프랑스 파리1대학과 미국 존스홉킨스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저자는 현상학, 논리실증주의, 실존주의, 비판이론, 해석학, 구조주의, 탈구조주의 등 20세기에 등장한 다양한 사조를 각각의 시대 흐름 속에서 포착해 낸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 속에서 ‘논리철학논고’를 쓴 비트겐슈타인과 나치당의 일원이었던 하이데거, 아우슈비츠의 비극이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정치철학을 나란히 제창했지만 고대 공화주의에 대한 해석이 엇갈렸던 한나 아렌트와 레오 스트라우스 등 철학자들의 구체적 삶을 통해 그들의 사유를 육화해 낸다.

자유주의를 수호했던 카를 포퍼와 레몽 아몽, 자유를 자유주의보다 중시했던 사르트르, ‘제3의 길’을 모색했던 마르쿠제,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에 희망을 걸었던 알튀세르, 이 4인의 삶을 대비하면서 냉전시대의 철학과 현실의 관계를 명쾌하게 그려 낸 것도 돋보인다.

하이데거를 보수주의자라고 비판하고, 사르트르의 진보적 시각을 옹호하는 저자의 주관적 시각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릴 수 있겠지만 각각의 철학사조가 지닌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대조와 비교를 통해 명징하게 끌어내는 솜씨는 일품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정말?

 

 

 

 

 

우리 사회 각 분야의 인권 현실과 노동자, 여성, 장애인, 성적 소수자 등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를 10명의 전문가들이 설명한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안보 논리, 자본주의 논리, 유교 논리가 지배해 온 우리 사회의 반인권적인 성격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는 인권 옹호를 위해 시민사회가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를 역사적으로, 또 해외의 사례를 통해 살핀다. 여성학자 정희진씨는 차별을 낳는 것은 권력이나 제도임에 주목하면서 인권의 보편성은 사회적 약자에 적용될 때만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 성적 소수자 인권의 주요 현안, 장애인 문제에 대한 사회 구조적인 접근 등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담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 잡는 정체성'  이론과 실천
    ' 마셜 호지슨의 세계사론" 사계절

 



내가 누구인지 규정하지 말라

 

사람 정체성은 어디서 어떤 핏줄로 태어났나가 아니라
삶의 역정, 신념, 감수성이 뒤섞여 만들어지는 것
친북좌파니 영남출신이니 하나의 소속에만 환원시키는 것
부당한 폭력이자 학살자를 만들어낸다

반미냐 친미냐, 반북이냐 친북이냐, 좌파냐 우파냐, 영남이냐 호남이냐, 여당이냐 야당이냐, 친박이냐 반박이냐, 서울이냐 지방이냐, 명문대냐 비명문대냐, 남자냐 여자냐, 진보냐 수구냐, NL이냐 PD, 노빠냐 노까냐, 황빠냐 황까냐. 이런 류의 이분법적 대립항 설정 자체의 타당성 여부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곧잘 자신이나 주변의 누군가 그 어느 한편과 동일시되고 그 때문에 배척당하는 현실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일단 한번 그렇게 ‘찍히면’ 거의 속수무책이다. 부인은 오히려 혐의를 짙게 할 뿐. 이른바 ‘남남갈등’ 따위의 언표들로 상징되는 우리 사회 내부의 분열과 타자 배제의 완고성을 드러내주는 이런 양자택일식 타자 규정의 천박성과 그 절망적인 위력은 익명성이 보장되는 인터넷에서 극에 달한다. 조선족이나 동남아 이주노동자 등 외부에서 온 구성원들, 특히 ‘부족적’ 친연성이 없는 외부인 약자들에 대한 배타성은 가히 폭력적이라 할만하다.

<사람잡는 정체성>(이론과 실천 펴냄)의 저자 아민 말루프도 그런 일로 숱하게 시달린 모양이다. 서문 첫 문장을 “…나는 나 자신이 ‘프랑스 사람’과 ‘레바논 사람’ 중 어느 쪽에 더 가깝게 느끼느냐에 대해 여러번 자문해 보았다”로 시작하는데, “양쪽 다!”라고 자답해 놓고도 찝찝해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런 식의 대답에는 으레 “에이, 그러지 말고 진짜는 어느쪽? 마음속 깊은 곳에선 누구라고 느끼냔 거죠” 따위의 다그침이 뒤따랐던 듯, “이 집요한 질문”을 오랫동안 받았다고 실토했다.

▲ 마셜 호지슨의 세계사론
마셜 호지슨 지음. 에드먼드 버크 3세 엮음. 이은정 옮김. 사계절 펴냄. 2만8000원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등을 통해서도 알려진 말루프가 “오늘날 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종교적·인종적··민족적 혹은 기타의 정체성의 이름으로 범죄를 저지르는가”를 화두로 삼은 출발점은 바로 그 자신의 정체성 문제였다. 1949년 아랍 남부지역 출신 집안에서 태어나 레바논 산간지역에서 자란 말루프는 아랍출신이면서도 이슬람이 아닌 기독교(멜키트 종파)를 모태신앙으로 이어받았다. 베이루트 대학을 나와 12년간 일간지 기자로 일하다 27살 때 종교분쟁에 휩싸인 조국을 떠나 프랑스 파리로 갔다. 6백만-7백만명에 이른다는 프랑스내 이슬람계 가운데서 그는 모국어가 아랍어지만 기독교도에다 주로 프랑스어로 생각하고 쓰는 이질적인 존재다. 이 책 출간시기가 1998년이니 ‘아랍인과 이슬람 문제’가 폭발적으로 터져나온 2001년 9·11동시테러를 내다보기라도 하듯 그때 이미 문제의 절박성을 감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9·11 테러 미리 내다본듯한 저작

사람의 정체성은 어떤 땅에서 어떤 핏줄을 받아 태어났느냐로만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자유스러운 한 인간의 역정, 확고한 신념, 고유한 감수성, 그 사람과 관련된 것들과 그의 삶 등등”, 달리 말하면 “언어, 신앙, 생활방식, 가족관계, 예술적 취향, 음식 취향…”과 뒤섞여 만들어진다. 그 다양성의 총합이 정체성이다. “인간은 그 아버지의 자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시대의 자식이다”라고 한 역사가 마르크 블로흐의 말과도 상통한다. 요컨대 어떤 사람을 친북좌파니 영남출신이니 황빠니 하는 한두마디로 규정하는 건 부당한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광신자들이나 외국인혐오자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주변의 개개인들조차 뿌리깊이 박힌 편협하고 배타적인 사고와 표현의 습관들 때문에 “한 사람의 정체성 전체를 단 하나의 소속에만 환원시키라고 격렬히 부르짖고”, 그것이 “학살자들을 만들어낸다”고 저자는 절규한다.


모두 ‘완전한 시민’으로 취급받아야

▲ 지난해 11월12일 프랑스 이주민들의 소요사태가 2주를 넘긴 가운데 남서부 툴루즈의 주민들이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펼침막을 앞세우고 도심 평화행진을 벌이고 있다. 타자 배제 및 차별로 이어진 이주민 정체성 문제가 자동차 방화 등 소요사태를 불렀다. 툴루즈/ AP 연합
저자가 특히 관심을 쏟은 이슬람에 대한 편견, 즉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과 여성의 권리, 근대성과 얄립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은 어떻게 형성됐나? 적어도 18세기 말까지 이슬람은 기독교에 비해 타종교나 문화에 대해 훨씬 관용적이었다. 그 무렵부터 소외 및 서양과의 격차를 의식하기 시작한 이슬람세계는 서양의 학살과 약탈, 노예화 행각에 한을 품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한 아랍세계의 서구화 노력을 주도한 세력은 이슬람 종교가 아니라 나세르 등 민족주의 세력이었으나 그들의 시도가 실패로 끝나고 사회·공산주의에 대한 기대마저 물거품이 된 뒤 이슬람 신앙이 복권됐다. “아랍 인구의 상당수가 종교적 극단주의에 귀를 기울이고, 1970년대부터 얼굴을 가리는 두건과 항의를 상징하는 수염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나세르를 필두로 하는 민족주의 지도자들의 잇따른 군사적 실패와 경제적 후진성에 관련된 문제를 풀 수 없는 무능력 때문에 막다른 길에 도달한 이후였다.” 차별과 빈곤·실업, 범죄·마약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서구모델의 실패, 세계화와 통신혁명 등이 이에 박차를 가했다.

저자는 ‘표범(정체성)을 길들이는 방법’은 “각 시민이 어떠한 소속을 지녔던 간에 하나의 완전한 시민으로 취급받게끔 하는 일”이라며, 절망을 깔고 앉은 근본주의적 태도에는 반대한다. “그것은 고통과 거부와 수동성 속에 틀어박히는 태도로 거기에서 나오는 방법은 자멸적인 폭력밖에 없다.”

<마셜 호지슨의 세계사론>(사계절 펴냄)은 근대 유럽이 철저히 찌그러뜨리고 왜곡해 놓은 이슬람 역사 복원을 통해 서구 우월주의와 서구중심 역사관의 패러다임을 흔들어놓은 중량감있는 고전이다.

이슬람 역사 전문가 마셜 호지슨(1922-1968) 전 시카고대학 교수의 글을 캘리포니아대학 산타크루즈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중인 에드먼드 버크 3세가 엮고, 마지막에 자신의 글 ‘세계사로서의 이슬람사-마셜 호지슨과 <이슬람의 모험>’을 결론삼아 보탠 이 책은 <사람잡는 정체성>에 담겨 있는 이슬람 역사에 대한 시각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다. 또 기성관념과 사고의 전환을 꾀한다는 점에서도 두 책은 일맥상통한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처음 일어났다고 해서 유럽의 역사를 영국사로 환원시킬 수 없는 것처럼, 산업혁명이 처음으로 확산된 지역이라고 해서 세계사를 유럽사로 환원시킬 수 없다”고 한 호지슨의 발상은 서구 중심사관이 당연시되던 반세기 전에 이미 근대성 전개를 전지구적 과정으로 보고 유럽 독주론을 부정하는 21세기적 지평을 선취하고 있다. 그는 유럽은 1500년 무렵 르네상스기가 돼서야 겨우 지구상 다른 문명 수준에 도달할 만큼 뒤처진 변방에 지나지 않았다고 봤으며, 유럽과 북반구 면적이 실제보다 부풀려진 세계지도의 메르카토르 도법을 ‘인종차별적인 투영법’이라고 불렀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