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라·반공·실어증·오적·전태일…
‘말’을 고리로 들춰낸 말문 닫힌 역사 ‘7통’과
일본어 추방된 자리 꿰찬 콩글리시,
우리말순화운동·문맹퇴치…
독재권력과 결탁한 모국어 수난 ‘14통’

 

지은이는 “국어에 반세기 동안의 갈등과 억압이 숨어 있는데, 이제는 그것이 내면화되어 자기검열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언중의 말에는 질곡의 흔적과 함께 자유와 해방의 욕망이 살아있어 이를 통해 국어의 미래를 엿볼 수 있음을 내비친다.

 집필·출판·판매·수집·보관·독서 등 책에 관한 모든 것을 다룬다. 솔직하면서 익살맞은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서평의 역사와 장삿속까지, 서평가를 뜨끔하게 만드는 일침도 빼놓지 않는다. 서문에 “종이에 베일 수 있음. 장갑을 끼시오!”란 경고문구까지 독자가 재미있게 읽게 만들려는 온갖 장치를 다 동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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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불온한가

 

 

 

책 잘 안낸다는 분의 몇 년만의 새책.

2001년
친일파? / 학교 / 진리는 쉽다 / 독사의 새끼들 / 논평자들 / 꿈 이야기 / 저능한 제국 / 고양이 / 얼치기 도사들 / 밴드 / 회의와 희망 / 운동

2002년
한국 록에 관한 사적인 기억들 / 존경 / 강준만 / 평론가의 탄생 / 마리아의 기억 / 학술의 기억 / 우주 / 네 이념대로 찍어라 / 그 페미니즘 / 편지1. 진보주의자는 행복합니까 / 편지2. 보수는 공기처럼 / 편지3. 하나되면 죽는 사람들 / 새 청년 / 돼먹지 못한 소리

2003년
개혁이냐 개뼈냐 / 딸 키우기 2 / 선택 / NL의 추억 / 요구르트 / 활동가 / 수작 / 텔레비젼 / 예수의 얼굴 / 추모 / 국익 / 풍요 / 더러운 공화국 / 희망 / 선택 2 / 청년들의 근황 1 / 청년들의 근황 2

2004년
청년들의 근황 3 / 가치관 / 숙제 / 강연회 / 주례사 / 그 여자와 함께한 10년 / 예수 이야기 1 / 예수 이야기 2

2005년
예수 이야기 3 / 예수 이야기 4 / 예수 이야기 5 / 들쥐, 혹른 레밍에 관한 단상 / 예수 이야기 6 / 딸에게 보내는 편지 / 광주의 정신, 민주주의 정신 / 자본주의와 기독교

 

[펌] 두번째 책


정의를 가르친 어머니에게
절제를 가르친 아버지에게
그 가르침 탓에 늘 애끓는 그들에게

두번째 책은 내 늙은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헌정했다. 몇 달 전, 어머니가 어떤 이에게 “항이 걔는 자나 깨나 불쌍한 동포 생각만 하는 아이라..” 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가슴이 내내 아팠다. 나는 여전히 정의롭고 절제할 줄 아는 인간은 아니지만, 내가 그나마 정의와 절제를 되새기며 살 수 있었던 건 그들 덕이다. 안상수 선생이 ‘전임 디자이너’의 지위를 고수해준 덕에 검소하면서도 예술적인 책이 되었다. 혹시 이 책의 외관이 칙칙하다는 느낌이 든다면 다른 책들이 지나치게 화려한 게 아닌지 생각해보시길 바란다. 책은 홍등가의 정물과는 달라야 한다. 써놓은 글을 묶어 책을 내는 일에 여전히 냉소적이면서 책을 낸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이젠 되도록 유별나게 굴지 않고(특히 자의식을 과도하게 드러내지 않고) 살기로 했기 때문이고 다른 이유는.. 굳이 적지 않기로 한다.


 

목차를 보니 김규항 블로그에도 올라왔던 글도 있을 법하고...

날이 얼마나 섰는지 무지 궁금...

스윽.. 스윽 베어낼게 너무 많은 세상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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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5-09-21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내긴 내는군요
예수이야기로 책 한 권 내려는 줄 알았는데 그냥 다 나왔네요

만주개장수 2005-09-24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명한 산책/김규항님이 준비 중이시라던 '예수전'과 이 책의 '예수 이야기'는 다른 내용입니다. 착오 없으시길...
 

 중세는 신앙의 시대이자 위조의 시대였다. 중세인들에게 위조는 죄악이 아니라 믿음을 이해시키는 도구였다. 당시의 위조 방식과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메로빙거 왕조와 관련된 문헌 중 절반, 카를 대제에 관한 원전 서류 가운데 3분의1 정도가 가짜다. 교황의 교서, 수도원의 권리를 입증하는 문서의 상당수도 위조된 것이다. 신화와 유물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날조된 성인의 뼈와 옷조각 등이 만들어지고 거래됐다.

이런 심리는 현대인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다. 현대인들도 중세인들처럼 믿기 위한 도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움베르트 에코는 그 도구를 ‘극사실주의’라고 말한다. 현대인은 역사적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모든 것을 똑같이 복제한다. 사람 같은 밀랍인형, 진짜 뺨치는 모조품이 전시된 박물관, 디즈니랜드가 제공하는 꿈의 모사품…. 에코는 현대의 이미지·기호 중심의 삶과 중세적 사고의 간극이 아주 작음을 보여준다.

‘포스트 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에는 ‘새로운 중세’라고 할 수 있는 현대 문화에 관한 에세이가 수록돼 있다. 에코는 세계의 여러 증상을 해부하고 영화와 유행가, 베스트셀러, 전람회 카탈로그 같은 여러 텍스트의 이면에 가려 있는 현실을 살펴본다.

 《권력과 언론》(열대림)은 현재의 우리 언론들에 부족한 ‘그 무엇’을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하는 책이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대포’로 불리는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 이 책은 이 주간지의 창간인이자 발행인인 루돌프 아우크슈타인의 시사평론과 저명인사와의 대담, 강연, 그리고 슈피겔이 권력과 투쟁해온 역사를 통해 참 언론이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준다.

 

 사상의 자유라는 주제를 서양사 속에서 일관되게 추적하고,그 당위성과 사회적 효용에 대한 논증을 시도한 고전적 저작.

  리영희 선생은 “군인 독재의 포악한 시대에 나의 지적 활동을 지탱해준 것이 바로 이 책이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시기적으로 대략 5세기부터 17세기 후반까지, 지리적으로는 인도나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이남뿐 아니라 스페인과 모로코, 아프가니스탄에 이르기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꽃을 피운 이슬람 예술 전반을 아우르고 있는 책이다.

이슬람이라고 하면 언뜻 떠오르는 대(大)모스크들의 웅장한 모습, 아라베스크 무늬로 대변되는 기하학적인 장식 문양과 화려한 카펫, 나름대로의 독창적 경지를 창조했던 도자기와 공예술, 채색 사본의 발전과 서예의 발달까지 거의 전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이슬람 연구의 권위자로 꼽히며 '중세의 중동', '아라비안 나이트:자매편' 등의 저서를 펴내기도 한 저자 로버트 어윈에 따르면 현재 이슬람 종교건축 양식에서 한결같이 등장하는 미나레트(minaret.뾰족탑)는 최초의 모스크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초기의 많은 미나레트를 보면 예배시간을 알리려는 용도로 설계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저자는 실제로 모스크와 연관이 없는 미나레트도 있다면서 바다와 사막을 건너는 여행자를 위한 등대나 군사시설인 망루로 사용하거나 이슬람 교도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기념탑으로 건설된 사례도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또 예언자 무하마드의 가르침에 따라 이슬람 초기 수세기 동안 화려한 무덤을 세우는 것이 용인되지 않았지만 10세기 이후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특권을 과시하기 위해 장엄한 무덤들을 짓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달초 서거한 사우디 아라비아 파드 국왕의 유해를 화려한 국장절차를 생략하고 일반인들이 묻히는 리야드 시내의 공공묘지에 안장한 것도 이슬람의 초기 정신을 따랐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동서 교역을 잇는 교량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15세기말 비단 두루마리에 중국산 청화백자를 운송하는 장면과 결혼식 풍경을 그려넣은 그림에서는 중국 산수화의 영향이 확인된다.

함께 실린 200여 개의 화려한 도판과 사진, 자료들은 이슬람 미술의 색채를 보다 잘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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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5-09-16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슬람 미술 찜!
 

 FBI 요원 2명을 살해한 혐의로 1976년 체포된 이래 30년 가까이 수감 생활을 하고 있는 인디언 저항운동가 레너드 펠티어의 옥중수기. 자신이 경험한 20세기 후반의 인디언 수난사와 저항운동사를 통해 미국사의 추한 이면을 폭로했다.

 

 

 작가, 연극 연출가, 영화감독, 아마추어 권투선수, 권투·경마 편론가라는 이색적인 이력의 소유자이며 20세기 일본 문화예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데라야마 슈지의 산문집. 야쿠자가 되는 법, 도박 예찬론, 가출하는 법, 자살학 입문 등 도발과 역설로 가득 차 있다.

 

 

  근대의 특정한 한 시기인 파시즘 체제에서 영웅의 이미지가 어떻게 변화돼왔는지를 파헤친다. 영웅을 둘러싼 신화, 영웅 숭배가 만들어지고 전승되는 과정과 메커니즘을 밝히고, 특히 국민 정체성 형성에 그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분석한다. 유럽의 1930~40년대와 동아시아의 1960~70년대의 영웅들, 나치 독일의 호르스트 베셀, 마오쩌둥·김일성 체제가 만들어낸 레이펑·길확실, 한국의 이승복이나 스탈린 시대의 모로조프·스타하노프 등이 거론된다.

 

 16세기 중반 브라질 과나바라 만에서 일어난 프랑스의 브라질 침략을 소설로 재구성. 중세 유럽 강대국들의 식민지 침략과 종교 갈등을 극명하게 보여 주면서 인간의 탐욕과 공포, 삶과 자유를 향한 의지 등을 그려 냈다.

 

 

 이 책은 한-미 ‘동맹 속의 섹스’(김연자의 증언에 기반해 저술된 여성주의 국제정치학서의 제목), 군사주의와 여성의 성, 한국의 남성 중심 거대 담론 위주의 사회운동, 성매매와 성폭력, 여성에게 ‘아버지’의 의미, 부자 중심의 정신분석학을 전복시키는 모녀 관계, ‘한국적 가부장제’ 특유의 교활과 위선, 여성들 간의 사랑과 존경 등 수많은 논쟁을 담고 있지만, 나는 이 모든 이슈들을 ‘고통받은 사람의 말하기’로 읽었다. 이 책은, 건드리기만 해도 피 흘릴 준비가 되어 있는 오래되고 내밀한 상처를 어떻게 타인과 소통하며, 관계 맺을 것인가를 질문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 삶의 근원적인 주제를 다룬다.

 여러 매체의 비평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말벌 공장>은 평범한 성장 소설은 아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입을 통해 아무것도 아닌 듯이 서술하고 있는 잔혹하며 파괴적인 행태들은 책 읽기를 거북하게 만든다. 하지만 차근차근 프랭크의 행위 이면을 들여다보면, 단순히 악의에 차거나 비정상적이고 비틀린 마음이 표현된 외적 형체 뒤에 숨겨진 상징과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겉보기에는 잔혹한 행위지만 프랭크에게는 나름의 정당성과 필연성을 지닌 의식(儀式) 절차와 다르지 않다. 각각의 행위는 또한 사고로 인해 불완전하게 된 육체를 완전한 상태로 돌려놓기 위한 제의이며 시원(始原)으로 회귀하기 위한 과정이다.

몇몇 비평가들은 <말벌 공장>을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에 비견하기도 하는데, 단순하게 프랭크가 사회에서 일탈한 불안정한 존재이고 무언가 상실한 소년의 갈망을 담았기 때문이 아니라 좀 더 근본적인 부분에서 소년의 '성장'을 담았기 때문이다. 상징과 비의적인 면에서 보자면 <호밀밭의 파수꾼>보다는 오히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나 <황야의 이리>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이 걸작선에는 좋은 걸작선이 갖고 있는 장점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다양한 작가들의 다양한 스타일과 과학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흥미롭고 세련된 소재와 설정, 그리고 그들을 통해 보이는 가볍지 않은 메시지까지. 어떤 단편은 설정 자체를 읽어 나가는 재미를 안겨 주기도 하고 어떤 단편은 과학소설의 감수성을 품 안에 안은 채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주력하기도 한다. 650쪽을 넘는 두꺼운 책의 무게는 단편 하나하나의 즐거움이 상쇄한다.

<오늘의 SF 걸작선>을 읽으면서 문학이 점점 더 분화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하나의 통일점을 향해 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전의 과학소설들은 기왕의 문학과는 확실히 다른 문법을 갖고 있었다. 헌데 이 단편집을 읽으면서는 어쩌면 이제 장르문학을 다른 문학과 구분 짓는 것은 거의 의미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에일로라' 같은 작품은 이탈로 칼비노나 미셸 투르니에의 단편을 읽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이런 느낌은 과학소설이 더 이상 설정이나 상상력에만 의존하지 않고 문학적으로도 완성도 높은 지점을 향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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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5-09-11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의 SF 걸작선 <- 이거 한 권은 있네요. ㅎㅎ

라주미힌 2005-09-11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딱 서재 들어오자 마자 판다님인줄 알았음다.. 쇼핑 마니아. ㅎㅋㅎㅋㅎ

panda78 2005-09-12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괴이한 웃음이... ^^;;
그래도 저거 해피올에서 70프로 할 때 사서 아주 싸게 건졌다구요. ^^

라주미힌 2005-09-12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70프로...
 

 14년간 프랑스에 거주하며 '월간 말', '한겨레 21'에 기고해 온 자유기고가 이선주씨가 프랑스인들의 내면 세계를 촘촘히 관찰한 <유럽의 나르시시스트 프랑스>(민연)를 펴냈다.

서문에서 "우리의 외국관은 그간 우리의 단점을 지적하기 위해 무작정 선진국과 우열을 따지는 콤플렉스로 가득차 있었다"고 꼬집은 저자답게 그는 똘레랑스 같이 찬양받는 가치의 이면을 파헤치며 프랑스를 '있는 그대로 보자'고 요청한다.

 "나는 그들을 존중한다. 왜냐면 나랑 상관없으니까"
 
  '사데팡'이라는 상대적인 태도가 개인주의와 병행되면서 "내가 원하는 게 곧 진리"라는 식으로 복수의 진리들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각자 따로, 내가 원하는 대로' 혹은 '나와 다른 것이나 내가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예 무시해버리는' 개인주의의 극치로 이어진다.
 
  그 결과 무지개처럼 다채로운 다양성이 존재하지만 서로 비켜가며 끼리끼리 뭉쳐 꼭꼭 문을 닫아버리거나 나와 상관없는 일에는 아예 무관심해져 버리는 것이 오늘날 프랑스인의 모습이라는 저자의 지적이 날카롭다. '무늬만 똘레랑스'의 속살엔 무관심과 고립이 또아리잡고 있다.

 


  "'생명의 아우성'에 귀기울이지 않는 문학은 죽었다" 
 
'사실'이 아닌 '진실'에 눈을 돌리게 하는 글
 
  그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의 백미는 태백의 폐광촌, 북한산국립공원 관통도로 공사현장, 새만금 간척사업이 한창인 부안을 둘러보고 쓴 네 편의 르포다.
 
  이 글들은 지극히 편파적이다. 한때 잠시 기사를 써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던 그이지만 이 르포를 쓸 때는 애초에 '기계적 중립성'은 관심 밖이었던 듯싶다. 쏟아지는 '사실'들 속에서 허우적대다 정작 '진실'을 부각시키기보다는 그것을 가리는 데 더 능력을 발휘해 온 '현직 기자'들에 대한 조롱일까. 감정선이 생생히 살아 있는 그의 글은 '사실'이 아닌 '진실'에 주목하도록 독자를 이끈다. 예를 들어 그는 1980년 사북사태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80년 사북사태의 광부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믿는 건 몸뚱이 하나, 몇 년 고생하면 목돈을 쥘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탄광촌으로 왔을 것이다. 다른 어떤 편법이나 탈법에 기대지 않았다는 점에서 탄광을 선택한 그들은 사회적으로 매우 건강한 욕망의 소유자다. 또 광부들치고 번듯한 집안 자식은 없을 것이며 가난에 시달릴 대로 시달리며 성장기를 보냈을 것이다. 자기 몸 하나 혹사시켜 가난에서 벗어나 좀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다면 까짓 몇 년 죽도록 고생하지, 하는 그들의 결심은 또한 얼마나 정직한가. 이 건강함과 정직함은 재산이나 학벌이나 다른 뭐든 가진 게 없기 때문에 약은 수로 세상을 살고 싶어도 살 수가 없는, 역설적으로 너무도 깨끗한 그들 삶의 기반에서 나온다. 바로 그만큼의 '나은 삶'을 향한, 바로 그만큼의 악착같은 그들의 소망, 80년 사북의 광부들 또한 바로 그런 사람들임에 분명하다."

산업주의와 자본주의에 결박당한 세상을 구원하라
    
 
김곰치, <발바닥 내 발바닥>, 녹색평론사, 2005. ⓒ프레시안  
 

  하지만 그의 시선이 '과거'로만 열려 있다면 한 때의 진실을 증언하는 '후일담'에 머물지도 모른다. 그가 발로 쓴 르포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산업주의와 자본주의에 결박당한 기존 가치관의 전복이다. 그는 사북사태를 겪은 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 탄광촌의 몰락에서 다음과 같은 가치관의 전복을 시도한다. 노동운동에 대해서, 느낌으로는 누구나 다 알지만 감히 말하지 못했던 진실.
 
  "새삼 노동운동에 대해 생각해본다. 대체 무얼 하자는 운동일까. 현실 노동은 결국 자본과 공동운명체, 노동운동은 죽어라고 부모 말 안 듣는 자본의 자식일 뿐이지 않을까. 그러나 호로자식이라도 감히 지 아비를 생매장시킬소냐. (…) 더 중요한 사실은, 폐업이나 자본철수라는 극단적 상황을 떠나서도 현실의 어떠한 노동운동도 그 한계가 빤한 운동이란 점이다. 아무리 강력한 연대투쟁을 벌여도 그들은 자본의 경계 밖으로는 나갈 수가 없다. 설사 노동자들의 연대체가 정치권력을 장악한다 해도 그 또한 자본의 영역 속이다. 물론 자본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리겠지만 기존의 '자본'은, 아니 발전의 기획, 그 생산력은 고스란히 남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은 자본을 해체시키는 건 꿈도 못 꾸는 운동이다."
 
  그렇다면 그가 지향하는 대안은 무엇일까. 그것은 처음 이런 르포를 써볼 것을 그에게 권한 <녹색평론> 김종철 발행인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한국 문학의 어리석은 관습에 매달려 계간지나 독자들 꽁무니나 쫓아다니지 말고, 김곰치 씨만이라도 이 땅의 산과 바다, 강, 나무한테 사랑받는 작가가 되지 그래요." 그렇다. 그는 몇몇 소수의 '소설 매니아'들에게 사랑받는 작가가 아니라 생명 전체에게 사랑받는 작가를 지향하는 것이다. '문학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는 점에서 그의 르포야말로 오히려 근대적 '문학'의 정체성에 부합한다.

"새만금 사업에는 대한민국의 후진성이 집약돼 있다. '영남 정권이 추진한 사업, 호남 정권이 마무리 짓자'라는 피켓처럼 지역감정이 작동하고 있고, 개발이냐 환경이냐, 완강한 시대정신이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고, 농업기반공사와 전라북도 도청의 힘겨루기처럼 중앙과 지자체의 갈등이 있다. 가난한 민중의 생존권이 있고 공동체가 깨지든 말든 제 앞가림만 하면 그만이라는 낯익은 처세술도 있다. 그러나 새만금 사업의 운명을 내다보는 데는 미래에 대한 엄청난 발상 전환도 있다. 계화도 어민 염정우 씨의 말이 그렇다. '이 사업을 막을 수만 있다면, 여기서부터 진정한 분기점이 일어나는 거 아니냐. 통일이 되어도 북한을 개발의 대상으로 보는 게 아니라 보다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 있을 거다. 새만금 사업 중단은 앞으로 우리 민족의 중요한 정신적 터전이 될 수도 있다.' 자연과 인간의 평화로운 공존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면, 그래서 1조원이 들어간 사업이라도 중단시킬 수 있다면 그 자체가 이 나라 민중의 새로운 저력이 될 거란 기대다. 아름다운 발상이다."
 
  '편지의 힘'을 새로 발견하다
 
  이 책에서 또 눈에 띄는 것은 시인 백무산, 지율스님, 이른바 '도롱뇽 소송'의 2심 판사 등에게 보낸 네 편의 편지다.
 
  그의 말대로 소설은 편지의 힘에 못 미친다. 편지는 무엇보다도 힘이 센 문학 행위다. "불특정 다수라는 제3자의 벽을 부수려는 소설의 꿈은 거꾸러지지 일쑤다. 작가가 소설을 쓰면서 수십 번 읽듯 수십 번 읽는 작가 자신 외의 독자를 만나기도 무망하다. 편지는 첫 출발부터 소설보다 힘이 세다. 오직 그(녀)가 독자다. 그의 마음을 쟁취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일대 일의 위대한 문학 행위가 편지다. 나는 완벽한 소설에의 꿈보다 완벽한 편지에의 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의 편지들은 매번 본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지율스님의 마지막 단식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프레시안>에 긴급하게 기고한 편지('지율스님에게 드립니다')는 단식을 중단시키지 못했고, '도롱뇽 소송'의 2심 판사 역시 예상대로 '기존 질서의 구미에 맞는 판결'을 내놓았다. 그는 편지를 통해 그(녀)의 마음을 쟁취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작 그의 편지는 어떤 소설보다도 더 편지를 엿본 제3자의 벽을 부수는 힘을 발휘했다. 지율스님의 단식에 지지를 보낸 (혹은 천편일률적인 개발 정책에 대해서 잠시 성찰하는 기회를 가진) 많은 시민들의 각성에 그의 '실패한 편지'가 미친 효과는 상당했을 것이다. 그는 '완벽한 편지'를 쓰지는 못했지만 역설적으로 '소설'보다 힘이 센 문학 행위의 한 전범을 선취했다.
 
  "탐욕으로 일그러진 이 시대에 대한 가장 정직한 문학적 증언"
 
  다시 묻는다. 21세기 문학이 나아가야 할 길은 무엇일까?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은 이 책의 발문에서 다음과 같은 통렬한 고백을 털어놓는다.
 
  "오랫동안 우리의 역사적, 사회적 현실에 관계하여 사람들의 의식을 날카롭게 하는 데 무엇보다도 크게 기여해온 것은 문학이었다. 그 문학이 언제부터인지 하찮은 것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문학은 이제 기껏해야 동호인들끼리의 취미활동으로 떨어져버린 게 아닌가, 나는 그런 느낌을 가지고 있다. 문학이 자기 본연의 역할, 즉 가장 근원적인 정치적 발언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삶의 밑바닥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보고 들은 것을 정직하게, 비타협적으로 얘기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김곰치의 이 책 역시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을 여는 소중한 시도다. 하지만 이 시도가 계속되기 위해서라도 그를 외롭게 하면 안 될 것이다. 새로운 문학은 작가뿐만 아니라 독자들도 함께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탐욕으로 일그러진 이 어리석은 시대에 대한 가장 정직한 문학적 증언"에 귀를 기울여보자. 생명의 아우성이 들릴 것이다.

 

from 프레시안.  강양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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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5-08-27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마음에 들어서 무리하게 TWO를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