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장막‘은 장막도 아니고 철로 돼있지도 않다.
그것은 빨간색과 흰색으로 칠한 나무 방책인데, 꼭 이발소간판 같다. 그 장막안에 석달 동안 머무르고서, 나는철의 장막이 정말로 철의장막이기를 바라는 건 일반 상식이 모자란 결과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십이 년 동안집요하게 선전을 해대면, 그로 인해 생겨난 신념이 모든철학 체계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한다. 24시간 매일 저널리즘 문학에 매달리면 상식적인 생각이 극단적으로 무너지고, 그래서 우리는 은유나 암시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 P9

동베를린으로 들어갈수록, 정치 체제의 차이를 뛰어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즉, 브란덴부르크문을 사이에 둔 양쪽의 정신 구조가 반대임을 알게 된다. - P31

우리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치 시간을 죽이러 영화관에 갔다가 미친 사람들의 영화, 그러니까 밑도 끝도 없이 오로지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려고 줄거리를 구성한 영화를 만난 것 같았다. 새로운 세상, 즉 혁명의 완전한 중심에서 모든 것이 낡고추레하며 노쇠한 듯 보이는 건 적어도 꽤 당황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 P39

"아무것도 안 줘도 괜찮아요. 하지만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은 하게 해 줬으면 좋겠어요." 이런 만장일치의 반란에 놀라서 나는 최근 선거에서 정부에 우호적으로 투표한사람이 92퍼센트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 P53

노동자들은 잘살지만, 정치의식이 없다. 절대적으로정부에게 경의를 표하지만, 정부가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잡고 있다고 말하는데도 왜 고작 옷 한 벌 살 정도의 월급을 받으려고 죽도록 일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 P56

두 독일 모두 항의하지 않는다. 자신들이전쟁에서 졌고 지금은 현실을 모르는 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가 사회주의나 자본주의에 대해 말하기 전에,
자기들이 원하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그건바로 독일의 통일이고 외국 군대의 철수다. - P58

 상점은 동독과 마찬가지로 형편없다. 그러나 서점은예외다. 그곳은 가장 현대적이고 가장 화려하며 깨끗하고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이다. 바르샤바는 책으로 가득하고, 가격은 놀라울 정도로 싸다. 가장 인기 있는 작가는 잭 런던이다.  - P106

나는 거리에서 그 많은 사람이 뭘 하는지 이해할 수가없었다. 폴란드에서 실업은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검증되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가게 진열장을 보면서인생을 보낸다. 국영 백화점은 새로운 물건을 권하지만,
오래돼 보이고 값도 매우 비싸다. 사람들은 백화점이 문을 열기 전부터문앞에 장사진을 이룬다. 가장 사진을 잘받는 바르샤바 백화점의 빽빽한 인파와 뒤섞여 몇 시간을보내면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내렸던 나는 사람들이 백화점을 돌아보고 빈손으로 나온다고 자신 있게 말할수 있다. 밖에서 물건을 사기엔 돈이 충분치 않다고 깨닫는 것 역시 쇼핑의 한 방법인 것 같다. - P107

그들은 덕지덕지기워졌지만, 찢어지거나 망가지지는 않았다. 설명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가난하지만, 반항 정신으로 가난과 맞서고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건 적어도 동독에서는 선명하게보이지 않는다. 낡은 옷과 닳은 신발 속에서 폴란드 사람들은 존경할 수밖에 없는 기품과 품위를 간직하고 있다. - P109

이렇게 바르샤바 건축은 일관성 있게 진행되었지만,
우발적 사고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문화궁전으로, 소비에트 연방의 선물이자 모스크바 교육부를 충실하게 복제한 건물이다. 폴란드 사람들에게는 러시아 사람들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그랬다간 욕을 퍼붓기 때문이다. 그래서그들은 아마도 그 건물을 폭파하고말것이다.  - P110

"두 수업중 그 어떤 것도 아니에요. 우리는 폴란드의 경험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 P127

외국인들은 환상을 품고 오고,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현실을, 여기서의 삶이 매 순간 드라마와 같다는 사실을 이해시키기 힘듭니다."  - P128

계급의 소멸은 가장 인상적인 흔적이다.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다. 모두 같은 수준으로 낡고 형편없이 재단된 옷을 입고, 조악한 신발을 신고 다닌다. 서두르지 않고, 서로 밀치지도 않으며,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느긋하게 살아가는 것 같다. 얼빠지고 착하며 건전한 마을 사람들과 똑같다. 차이가 있다면 조그만 마을이 엄청난 크기로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어느 영국 대표단원은이렇게 말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이후 나는 돋보기 너머에 있다는 인상을 받아요."모스크바 사람들과 대화할때, 그러니까 그들을 개인으로 접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 한가롭고 느릿느릿한 군중이 전혀 공통점이 없는남자와 여자와 아이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P168

거대함에 의미를 부여하고 수많은 군중을 조직하는행위는 소비에트연방의 매우 중요한 심리적 측면으로 보인다. 우리는 결국 엄청난 규모와 양에 적응하게 된다. - P172

매릴린 먼로에 대해 농담하고, 그런 재치 있는 농담이 다른 의미로 이해될때의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나는 매릴린 먼로가 누구인지 아는 소비에트 사람들을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 P182

스탈린은 아무 죄책감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 P208

인류가 벌인 이 거대한 모험에는 국가전체의 노력이필요했고, 그 비용은 한 세대 전체가 지급해야만 했다. 우선 혁명 기간의 일과 속에서, 그 후 전쟁 속에서, 마지막으로 재건 과정에서 대가를 치러야 했다.  - P215

소비에트 연방의 열원자핵 무기와 우주 로켓,
기계화된 농업, 그리고 환상적인 변환 시설을 이용해 사막을 농경지로 바꿀 거대한 가능성이 존재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형편없는 신발을 신고 제대로 맞지 않는 옷을 입고서 사십 년을 보낸 결과이다. 그러니까 가장 지독한 금욕 생활로 거의 반세기를 희생한 결과이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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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2-07-17 1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이런 책도 썼군요. 별5주셨는데 재미있나요?ㅋ

바람돌이 2022-07-17 21:24   좋아요 0 | URL
잘 써서 좋은 책이라기 보다는 여러가지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책이었어요. 호불호가 갈릴거라는 생각은 드는데 저에게는 좋았습니다. ^^ 책장은 쉽게 넘어갑니다.

yamoo 2022-07-17 2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마르케스가 이런 책도!! 근데, 별5!! 음~~~ 리스트에 넣어야 되것습니다~~ㅎ

바람돌이 2022-07-18 22:05   좋아요 0 | URL
저는 재밌게 읽었습니다. ^^

레삭매냐 2022-07-19 0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주 어려서 이원복 아자씨의
<시관이와 병호>를 보고서 철의 장막
에 언젠가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
을 했더랬답니다.

나중에 통일 된 다음에 베를린에 가보
았는데, 당시의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는.

바람돌이 2022-07-19 17:03   좋아요 1 | URL
지금은 없는 곳에 대한 여행기인 셈이지요. 그래서 더 많은 생각이 들었더랬습니다. ^^

페크pek0501 2022-07-20 1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사려고 장바구니에 담아 놨었어요. 동유럽이라니 급관심이 생기더군요.
 

그런 순간을 목격할 때마다 초록은 자신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능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별 관심도 없으면서 좋은건 귀신같이 알아보고, 이거다 싶으면 망설이지 않고 달려드는 과감함까지. 언젠가 김구름이 한마디로 정리해준 적도 있었다. "금수저라서 그래"라고. - P12

"이건 위험한 사상이고 과정이야. 꼭 친화성주의나 콜로니독립주의 같은 걸 선언해야 그때부터 위험해지는 게 아니란다. 어떤 시기에는 무언가를 선언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지. 어느 동네사람들이 서로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지내기 시작했다는 소문은 항상 거기에 속하지 않은 다른 동네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우주 건너에서 들려오는 소문이라고 덜 불온한것도 아니고." - P68

엄밀히 말하면 그건 순환이 아니라 여과다. 진정으로 순환이라는 말을 쓸 수 있으려면 집을 나간 물이 반드시 ‘세상‘을떠돌다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사비처럼 작더라도 일단 세계는 세계여야 한다. 화장실을 떠난 물이 바로 주방으로 들어가거나, 옆집까지만 잠깐 나갔다가 그대로 집으로 돌아오는 것도 용납이 안 된다. 다른 이유는 없고, 함께 순환에 참여한 구성원이 누구인지가 너무 확실하게 정해지기 때문이다.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딱 저 사람과 저 사람이라니! 얼마 전에 우주를 건너온 사람에게 그것은 윤리적인 거부감마저 불러일으키는 짓이었다. - P99

‘내일은 떡볶이랑 칵테일 먹으러 가자. 둘이 어울리는 건지는 나도 몰라 망한 조합일지도 모르니까 이번에는 내가 살게,
작업비는 한 푼도 못 받았지만,
그리고 여기까지 찾아와줘서 고마워. 그 먼 데서 이 깊숙한곳까지 찾아와줘서, 정말로.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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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0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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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난민이자 망명 신청자다. 익히 들어서 별 것 아니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결코 단순한 말이 아니다. -17쪽


소설의 첫 문장은 아니지만 실제 첫 문장에 해당된다고 생각하는 문장이다. 

소설의 주인공 살레 오마르는 60이나 된 나이에 살던 곳을 떠나 영국으로 망명한다. 

소설은 그가 영국 게트윅공항에 도착하고 망명신청을 하는 순간부터 그의 여정과 심리를 집요하리만큼 따라간다. 

그동안 독자는 내내 궁금하다. 

이 사람은 왜 난민이 되었고, 왜 망명을 신청했을까? 

3부분으로 나뉘는 이 책의 1부에서는 여기에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난민이 된다는 것이 어떤 처지에 놓이는지를 끈질기게 주인공을 통해서 따라가고 있을 뿐.....


임시 수용소에서 주인공은 난민을 돕는 친절한 영국인의 집으로 옮겨진다. 

그 곳에는 그 외에도 먼저 영국에 도착해 난민 심사를 받고 있는 젊은이들이 있다.

친절한 영국인들은 그들 자신의 자비심에 과잉되어 있고, 불쌍한 난민들을 돕는다는 사실에 고양된 감정을 가지고 이들을 대하지만, 사실 그들이 제공하는 것은 먼지쌓인 방 한칸일 뿐이다. 

이곳에 먼저 와있는 게오르기라고 하는 체코 청년의 난민신청심사가 잘 안될 것 같다는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한다. 

그 때 게오르기를 관찰하는 주인공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게오르기는 그 대화를 뜨거워진 눈으로 따라가며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것은 존엄성이 꺾여버린 비참한 광경이었고, 자신들의 열정의 결과를 논하는 사람들의 바로 그 열정이 유지되는 것에 목숨이 달린 그는 비극적인 몸뚱이였다. -89쪽


이 소설에서 가장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 문장이었다.

한 번도 내 자신이 난민이 된다는 생각을 못해보았고, 내 삶의 방향이 나 아닌 사람의 결정에 의해 좌지우지 되리란 생각을 못해보았던 내 삶은 얼마나 축복받은 것인가?

난민이란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이고, 그럼에도 누군가가 자비를 베풀어주지 않는다면 바로 그 돌아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돌아가 죽어야 하는 사람, 즉 자신의 삶과 생명이 온전히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타인들의 결정에 달려있는 존재.

그럼으로써 뜻하지 않게 비극적인 몸뚱이가 될 수 밖에 없는 그런 존재라는 것.

관념으로 생각하던 난민이 육체와 생명을 가진 실체로 확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때때로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그 답이 이런 문장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처하리라고 생각해보지 못한 타자의 입장에 설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리고 다시 돌려 내게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럼으로써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하는 태도의 예의를 갖추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존중과 환대의 태도를 갖추는 것.

문학이 아니면 무엇이 이토록 절실하게 타자의 감정에 이입할 수 있게 할까?


2부에서는 또 한 명의 난민이 등장한다. 

라티프 마흐무드라는 이 인물이 난민이 되는 것은 조금 독특하다.

아프리카 동부해안의 잔지바르 섬 출신인(작가의 고향이기도 한) 이 인물은 복잡한 가족사를 뒤로 하고 독립 이후 사회주의국가와의 수교를 강화했던 탄자니아의 정책에 따라 동독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곳에서 만난 펜팔친구였던 엘레케라는 동독청년과 그는 서방 세계로의 망명을 꾀하고 성공하는 것이다.

딱히 정치적인 이유도 생명의 위협도 아닌 내가 더 열망하는 곳, 열망하는 생활방식으로의 이주다.

이런 형태의 난민이 가능할까를 생각해봤는데 냉전 시대 동독에서의 이주라면 가능했겠구나 싶기도 하다.

물론 라티프가 그의 고향 잔지바르에서 바로 이런 식으로 망명을 했다면 아마도 바로 송환되지 않았을까 싶지만......

상대적으로 젊었고, 적응의 에너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인지 라티프의 이야기는 그의 고향에서의 삶을 서술하는데 치중하고 있다. 

그리고 1부의 주인공 살레 오마르의 삶과 교차되는 지점들이 등장하며 3부에서 두 사람의 만남과 엉킴을 예고한다.


살레 오마르는 자신의 이름으로 난민이 되지 못했다.

그가 쓴 이름은 라티프 마흐무드의 아버지의 이름이다. 

더군다나 둘은 원수라면 원수관계였다.

라티프 역시 그 사실을 안다. 

왜? 내 아버지와 우리 가족의 집을 빼앗았던 이 사람이 나의 아버지의 이름을 쓰고 있는거지라는 궁금증 때문에 라티프는 살레 오마르를 만나러 오고 그의 얘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이제 소설은 살레 오마르가 난민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와 라티프가 고향을 떠난 이후 고향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가 펼쳐진다. 

잔지바르가 독립을 하고 왕조국가에서 공화국이 되고, 그 과정에서 섬의 권력자들이 바뀌고, 당연히 그런 변화에 편승한 누군가는 권력의 부스러기를 잡고 무기를 휘두르고,누군가는 납작 업드려 굴종하거나,아니면 그 칼날에 희생당하거나, 모두가 익히 아는 상황들이 벌어진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벌어지는 희생이 정치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한 번의 광풍이 몰아쳐서 정치적인 희생이 지나가고 나도 광풍은 꺼지지 않는다.

정치의 자리를 대신해서 정치의 껍질을 쓴 사적인 복수의 장의 펼쳐진다. 

살레 오마르는 바로 그 사적인 복수의 대상이 되었고, 아무 말 못하고 11년간의 감옥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오로지 사랑하는 아내와 딸에게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버텼던 감옥에서 겨우 돌아온 고향, 이미 오래 전에 그의 아내와 딸은 전염병으로 죽은 뒤였다. 

살레 오마르는 그럼 여기서 복수를 꿈꾸었을까?

이 소설이 가지는 장점이 여기서 드러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오랫동안 고통을 겪고나면 복수를 꿈꿀 희망도 사실상 가지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살레 오마르 역시 무언가를 도모할 힘도 의지도 없다. 그저 이곳에서 무탈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다시 수용소로 감옥으로 가고 싶지 않을 뿐.....하지만 세상 일이 늘 그렇듯이 운명은 살레 오마르를 또 감옥으로 내몬다.

그리고 살레 오마르는 난민이되어 망명의 길에 오르는 것이다.

집안의 원수였던 살레 오마르와 라티프 마흐무드는 이제 어떻게 될까?

망명지에서도 둘은 오래된 집안의 원한을 간직하고 싸워야 할까?

아니 이곳에서는 둘은 둘다 외로운 이방인으로 고단한 삶과 외로움과 싸우는 존재들일 뿐이다. 

서로의 현재를 그저 안아주며 테이크 아웃 음식을 나누고 기댈 뿐이다.


살레 오마르의 삶에서 가장 통탄스러운 것은 자신이 불합리한 일을 당할 때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누구도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고 방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살레 오마르 역시 자신의 일이 아니라 누군가가 불합리한 일을 당했다면 아마도 똑같지 않았을까?

그것은 나아가 아프리카 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역사 어디에서나, 그토록 자신만만한 너희 유럽도 똑같지 않느냐고 작가는 말한다. 


그 사진 속에는 세 명의 유대인이 넙죽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닥 솔을 지고 빈의 인도를 쓸고 있었습니다. 그들 주변에 그들 아주 가까이에, 그들의 뒤와 앞의 인도에 빈 사람들이 무리지어 빼곡히 서서 히죽거리며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어요. 모든 나잇대의 사람들, 어머니들과 아버지들과 할아버지들과 아이들이 누구는 자전거에 기대 있고 다른 누구는 쇼핑백을 든 채 점잖고 일상적인 모습으로 서서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러는 동안 그 세 사람은 그들 앞에서 굴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하켄크로이츠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그저 세 유대인의 굴욕에 웃음을 터뜨리는 평범한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어요. 그 세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신만이 아시겠죠. - 373쪽


이 작가의 능력이 참 빛나는 순간이 이런 순간이다. 

단 하나의 우화로 아프리카의 역사에 코웃음치는 유럽에게 한 방을 날려버리는 거다.

너희라고 다르냐? 결국 야만의 역사는 아프리카든 유럽이든 다를게 없다고 말이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도 이런 이야기들을 이렇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신이 이방인으로 살아왔던 오랜 경험의 축적이리라 짐작한다. 


다만 별 하나를 뺀 것은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 때문이다.

1부에서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게 했던 서술들이 2부 라티프의 이야기에서는 지나치게 작위적인 면도 보이고, 라티프라는 인물 자체가 지나치게 현실감이 없달까, 그가 가족이고 고향이고 모든 것을 버려버리는 과정이 그렇게 개연성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아프리카 그것도 이슬람교도속에서 자란 라티프가 이토록 쉽게 가족을 한 순간에 버려버린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므로 갑자기 이야기가 긴장감을 놓쳐버린다.

덕분에 살레 오마르와 라티프의 긴장으로 팽팽해야할 3부 역시 미리 김이 빠져버리는 모양새다. 3부쯤 오면 더 이상 살레 오마르의 이야기가 궁금해지지 않는 이상한 경지까지...... 

소설이 가져야 할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이 몇몇 빛나는 장면을 충분히 견인하지 못하는,

그래서 작가가 중점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난민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진지한 탐구인지, 동아프리카의 부당한 역사에 대한 비판인지, 서구 문명의 오만함에 대한 경고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리는 안타까움을 낳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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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2-07-10 08:5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요즘 이 작가의 책 읽으시는 분들이 많으시던데, 또 다른 소설을 읽으셨군요?^^
난민에 관한 책을 읽어 본 적이 그닥 많지 않아( 아, <문맹>이 있었군요^^) 여느 문학과는 좀 다르게 읽힐 것 같네요.
마지막 문단을 읽으니, 작가는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많았었나? 그런 생각도 들게 되네요.
저도 한 번 읽어봐야 겠어요.^^

더운 여름, 모쪼록 즐겁고, 건강한 독서 시간 되시길요♡

바람돌이 2022-07-17 21:26   좋아요 2 | URL
이 작가 책은 총 3권이 번역되어 나왔는데 이제 마지막 <그후의 삶>만 남았어요. 겨우 3권이니 마저 다 읽어보려구요. 아직은 노벨상의 이름값에 필적한다는 생각은 안드는데 마지막 책이 어떤지 보고 판단하려고요.

페넬로페 2022-07-10 09:2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문장이나 서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좋은 소설을 만나는 건 쉽지 않은것 같아요.
이 소설은 난민을 다루고 있어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듯요.
저 지금 낙원 읽고 있는데 작가의 문장이 담백한 느낌이 들어요.
바닷가에서도 읽어 보겠습니다^^

바람돌이 2022-07-17 21:27   좋아요 2 | URL
담백하다 못해 거리를 너무 많이 둔다는 느낌도 들지 않나요? 저는 이 작가가 도대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뭔지가 아직 잘 모르겟어요. 지나친 거리두기때문에 오히려 말하고자 하는 바도 잘 전달이 안된다는 느낌도 들구요.

프레이야 2022-07-10 09:3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낙원 읽다가 중간에 다른 책들이 여럿 개입해버렸네요. 얼른 돌아가야지 하며 노려보는 중입니다 ㅎㅎ 오늘도 무지하게 더워요. 갈수록 더워지는 건 맞는 것 같은데 유난히 더위를 타는 체질로 바뀌는 것 같아요 제가.

바람돌이 2022-07-17 21:29   좋아요 1 | URL
저도 낙원이 그렇게 페이지가 잘 넘어가는 책은 아니었어요. 낙원보다는 바닷가에서가 조금 더 잘 읽혔긴 하지만 큰 차이는 아니고요. ^^
저도 갱년기를 겪으면서 신체 변화중 더위를 진짜 많이 더 타는 증상이 있는거 같아요. 원래도 전 더위 많이 탔는데 지금은 조금만 더워도 땀을 미친듯이 흘리니 좀 불편하네요. ^^ 우리 모두 건강 관리 열심히 해서 이번 여름도 무사히 잘 넘겨요.

새파랑 2022-07-10 10: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89쪽 문장 완전 좋네요. 그런데 1부 대비 2, 3부는 좀 작위적인가 보네요 ㅋ 내용 자체는 흥미롭네요 ^^

난민의 삶을 경험해보지는 않았지만 정말 고독할거 같아요. 타인에 의해 인생이 결정되어야 한다니..

바람돌이 2022-07-17 21:31   좋아요 1 | URL
그쵸! 저 문장은 진짜 압권이었어요. 아 그런데 1부의 그런 긴장을 2,3부가 못 받쳐줘서 좀 아쉬움이 많이 남았어요. 난민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온전히 타인에게 자기 운명을 넘겨야 하는데, 그 사람들은 또 너무 무신경하게 이 사람의 운명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를 하는 .....
난민문제에 대해서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scott 2022-07-11 00: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기작이여서 서사의 마무리가 부족 했던 것 일까요?

하루에 단 한권도 안 팔렸던 책이
이제는 세계 각국으로 번역 되고 있으니
분명 이런 작품, 난민에 관한 것, 차별에 관한것
문학이 아니라면 함께 공감하고 생각해 볼 기회도 없었을 것 같습니다. ^ㅅ^

바람돌이 2022-07-17 21:32   좋아요 1 | URL
생각해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고 공감하게 하고 행동하게 하는 힘.
문학이 가진 힘이겠죠.
아직은 이 작가의 힘을 100% 느낄 수 없지만 마지막 남은 책까지 읽어보고 판단하려고요. ^^

희선 2022-07-12 03:0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영국 사람은 좋은 일을 한다 생각하고 난민을 받아들여주지만, 한국 사람은 난민이 온다고 하니 오면 안 된다고 하기도 하는군요 한국으로 난민이 오기는 멀어서 쉽지 않다고 하는데, 아주 안 오는 건 아니기도 한가 봅니다 예전엔 원수였지만, 서로 처지가 같은 영국에서는 달라지기도 하네요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말하는 거 쉽지 않겠습니다 혼자 말하기 힘들면 여러 사람이 하면 좀 나을지...


희선

바람돌이 2022-07-17 21:34   좋아요 1 | URL
영국 역시도 난미에 대한 태도에서 찬성하는 사람도 반대하고 혐오하는 사람도 있는건 우리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다만 반대의 정도가 우리보다는 훨씬 약하다는 정도?
우리나라는 외부인에 대해 지나치게 폐쇄적이잖아요. 인종차별도 사실상 진짜 심하게 하는 나라고요.
지금같은 글로벌 시대를 살아나가는데 필요한건 영어나 이런게 아니라 타인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원칙을 공유하는거라는 생각을 더 하게 되네요. ^^

감은빛 2022-07-15 21: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자신이 난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사실 우리 대부분은 한국전쟁 당시에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졌다면 태어나지도 못했을 사람들이지요. 또 한 편으로 지금처럼 계속 기후위기가 심해진다면(현재 상황으론 100% 이상 이렇게 되겠지만) 우리 후손들 대다수도 난민이 되겠지요.

바람돌이 2022-07-17 21:36   좋아요 1 | URL
전쟁의 위험이 상존하는 이 한반도에서 자신이 난민이 될수 있다는 생각을 못하는 것도 웃기지 않나요? ㅎㅎ
기후위기가 심해질때는 오히려 난민이 안될거 같아요. 우리보다 더 상황이 안좋은 나라들이 너무 많아서 갈데가 없을거 같아서요. ㅠ.ㅠ

그레이스 2022-07-19 17: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 읽어 갑니다.
그후의 삶도 읽으려구요
다 읽고 리뷰나 페이퍼를 쓸 예정입니다.
사이사이 다른 책들 읽었더니, 흐름이 끊겨서 잘 기억할지 모르겠네요 ㅎ

바람돌이 2022-07-19 22:54   좋아요 1 | URL
저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지금은 일단 앨리슨 백델 그래픽 노블 마지막 한권 마저 읽고 여성주의 책 읽고 읽으려구요. 이렇게 밀리는 책들...... 하루는 왜 24시간인가요? 인간은 왜 밥을 먹어야 하나요? 잠은 왜 자야 하고요????
 

음, 나는운동에 관해서만쓰는 건 아니야.
운동이 어떻게 다른 곳에 도달하는다리 역할을 해 왔는지에 대해 쓰지. - P25

큰 그림에서 보면그렇게 나쁜 일은아니지만 적어도 노력은 해보자고. 어때?

이 지구라는 행성은 하나의 커다랗고 행복한무정부 비전 공동체가 될 수도 있어 우리 모두제발 좀 진정하고 화장지 사재기를 멈춘다면..

머릿속을 벗어나자아를 초월하는 탐색에 함께해.

주체와 객체가 없다는걸 깨닫고!

내가 남과 별개라는 착각을 버리고!

온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이 나와 상관없다는 착각도 버리고!
- P27

앨러게니 고원의 지평선 너머 저 멀리로내 앞에 펼쳐질 인생 전부가 보이는 듯했어.

지금 여기 선 나의 상태로 돌아오기 위해그렇게나 열심히 고된 탐구를 하며인생을 소비할 줄 몰랐지.

펜실베이니아에 대해서말하는 게 아니야.

머지않아 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바라볼 수 없게 될 거야..

성취에 관한 생각, 자아에 관한 생각에휩싸여 거의 마비될 테지.

나의 가장 큰 장애물은바로 내가 될 거야. - P60

나는 에머슨식 자립의 본보기였어.
아무도 필요 없었어.

정말이지 지금에서야 알겠어. 벽을 함께 오르며 배운 협력과상호 의존의 교훈을 어떻게든 잊으려고 했다는 걸. - P94

너무 놀라 입을 못 다물었지.
남자는 한 명도 안보였거든.

뚫어지게 쳐다보고, 휘파람 불고, 희롱하고, 만지고,
그 대상으로서 치르는 대가를...

... 상상할 수 없겠지. 어디서나 일어나는 그런 끔찍한위험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경험을 하기 전까지는.

그 놀라운 공허함 속에서 나는아찔한 관점의 변화를 겪었어!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된다는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거든.


가부장제에 의해 거부된 몸이 이곳에서는 분리된 무엇이거나
‘타자‘ -자연도 포함해서가 아니었어, 중심으로 돌아왔지.

여기 모인 사람들은 살충제, 핵무기, 근본주의 헤게모니,
서양 의학, 다이어트, 전쟁, 그 모든 것이 지겨웠어. - P102

바로 이 순간, 고통을 누르고 기쁨만 느낄 수는 없다는 사실이명확하게 이해됐어. 그리고 고통을 느끼는 것은...

고통을 피하려고 불안에 떠는 것에 비하면,
거의 기쁨 비슷한 감정에 가까웠어.

사실, 기쁨이란 존재가 이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에 가능하거든.

죽음 없이는 얼마나지루하고 힘든 삶이겠어!

내가 충만하게 살아 있다는 감정을 느끼려면 아빠를 향한슬픔의 밑바닥까지 싹싹 긁어내야 하는 거야. - P158

쉬고 싶지 않았어. 그저 차단하고 싶었어. 아무것도 느끼지 않게. 이제는 알아.
이런 것들이 내 다루기 힘든 ‘애착‘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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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난민이자 망명 신청자다. 익히 들어서 별것 아니게 들릴 수도있겠지만, 이것은 결코 단순한 말이 아니다.  - P17

수세기 동안 용감무쌍한 상인들과 선원들, 분명 대부분 야만적이고가난했을 그들이, 무심의 바람을 막아내려고 아주 오래전에 뾰족해진아프리카 대륙 동쪽의 그 쭉 뻗은 해안으로 해마다 여행을 떠나왔다. 그들은 자신들의 물건과 신과 자신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자신들의이야기와 노래와 기도를 함께 들고 왔고, 그 지식을 흘낏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들인 노력의 정수를 얻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그들은 자신들의 굶주림과 탐욕, 자신들의 환상과 거짓말과 증오를 가져와서 그것들 중 일부는 평생 그곳에 내버려두었고, 자신들이 사들이고 거래하거나 앗아갈 수 있는 것들은 가져갔는데,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사거나 납치해서 고국에 노예로 팔아먹었다. 그 많은 시간이 흐른 뒤그 해안에 살았던 사람들은 자기들이 누구인지 거의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자신들과 아프리카 내륙에 사는 인류의 외딴 자손들 중에서 경멸스러운 부류와 자신들을 차별화시키는 것을 고수할 정도로는 알았다. - P33

또한 나는, 고향에서 그렇게 멀리떨어진 곳에 와서도 그토록 확신을 갖고 진두지휘하는 그들의 대담함도 그렇고 질병을 치료하고 비행기를 띄우고 영화를 만드는 등 중요한일들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어서 우리가 영국인을 남몰래 동경했다고 생각한다.  - P37

나는 지도에게 말을 건다. 그러면 가끔 그것들이 내게 뭐라고 대답해준다. 이것은 생각만큼 이상한 일이 아니며, 전례가 없는 일도 아니다. 지도가 있기 전에 세상은 무한했다. 세상에 형상을 부여하고, 그것을 어떤 영역처럼, 단지 파괴되고 약탈당하는 것이 아닌 소유할 수 있는 무언가처럼 보이게 만든 것은 바로 지도였다. - P64

시집을 갔다고, 누군가의 아내가 되었다고, 결혼을 당했다고 나는 그게 어떤 기분일지 상상해보려애쓴다. 나는 나 자신이 무언의 정당화, 이루 말할 수 없는 최악의 정당화에 희생된 연약한 여자라고 상상해본다. 무릎 꿇려진 나 자신을상상해본다. - P67

게오르기는 그 대화를 뜨거워진 눈으로 따라가며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것은 존엄성이 꺾여버린 비참한 광경이었고, 자신들의 열정의 결과를 논하는 사람들의 바로 그 열정이 유지되는 것에 목숨이 달린 그는 비극적인 몸뚱이였다. - P89

그럴 때 나는, 마치 그것들을 위한 자리가 이미 정해져 있으며 내가 그것들을 소리 내어 말하기도 전에 이미 의미가 주어져 있기라도 하듯, 내가 말할 모든 것의자리를 결정하고 설명하는 뉘앙스들의 고압적인 무게에 져버린 기분이 든다. 나는 내가 또다른 존재의 계획 아래 내 뜻과는 무관하게 사용되는 도구, 다른 누군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등장인물이라고 느낀다. - P117

그래도 한 페이지에서 그렇게 많은 블랙 블랙 블랙을 보게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무방비 상태로 그 사실을 마주하게 된 것은 구시대 영화 속 심술난 인물처럼 보이는 남자에게서 ‘히죽거리는 블랙어무어‘라는 말을 들은 것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었다. 그로 인해 나는 미움받고 있다는 기분, 그러한 연상에서 오는 일종의 공포에 갑자기 나약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곳이 내가 살고 있는 집이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모퉁이를 세 번 돌면 꼭 한 번은 내 뒤에서 나를 향해 짖고 나를멸시하는 언어 - P124

나는 앞을 바라보고 싶지만 늘 뒤를 바라보고 있고, 이후로 일어났던 다른 사건들, 내게 커다랗게 다가와서 모든 일상적 행동들을 지시하는 폭군 같은 사건들에 의해 아주 미미해진 아주 오래된 시간을 뒤적이고 있다. 그래도 뒤를 돌아보면, 어떤 대상들은 여전히 눈부신악의로 빛나고 모든 기억이 피를 흘리게 한다.  - P145

나에게는 들려줘야 할 이야기가 있었고, 나의 고해를 들어줄사람으로 그보다 더 적절한 사람은 있을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 또한 내가 알던 것을 알 필요가, 이 외딴 삶의 빈칸을 완전히 채우고 그삶의 침묵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 P239

그곳에는 목격자들이 있었는데, 나는 그런 순간에 더 나쁜 게 범죄자인지, 아니면 가만히 서서쳐다보며 마치 아무런 사악한 일도 일어나지 않은 양 행동하는 죄 없는 사람들인지 잘 모르겠어요. - P350

사실 그들의 조상이 그 땅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그들은 나만큼이나 오만인이 아니었어요. 그들은 우리 나머지와 조금도 다르게 생기지 않았는데, 어쩌면 피부색이 살짝 더 옅거나 살짝 더 거무스름했는지도, 어쩌면 머리카락이 살짝 더 곧거나 살짝더 곱슬곱슬했는지도 모르겠군요. 그들의 죄목은 이 일대에서 오만이비열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러한 연관성은 그들이 원한다고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어요.  - P363

그 사진 속에는 세 명의 유대인이 넙죽 엎드려 있었습니다- 한 명은 짙은 정장과 타이 차림이었고, 다른 두 명은 셔츠 바람이었는데, 한 명은 셔츠 소매를 걷고 있었죠. 그들은 바닥 솔을 쥐고 빈의 인도를 쓸고 있었습니다. 그들 주변에 그들 아주 가까이에, 그들의뒤와 앞의 인도에 빈 사람들이 무리지어 빼곡히 서서 히죽거리며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어요. 모든 나잇대의 사람들, 어머니들과 아버지들과 할아버지들과 아이들이 누구는 자전거에 기대 있고 다른 누구는 쇼핑백을 든 채 점잖고 일상적인 모습으로 서서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러는 동안 그 세 사람은 그들 앞에서 굴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하켄크로이츠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그저 세 유대인의 굴욕에 웃음을 터뜨리는 평범한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어요. 그 세 사람이 어떻게되었는지는 신만이 아시겠죠. - P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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