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 젖은 땅 -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유럽 걸작 논픽션 22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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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을 다룬 영화 <고지전>에서 가장 인상깊은 대목 중의 하나

정전협정이 맺어진 사실을 알고 모두가 환호할 때, 그 정전협정의 발효시간이 12시간이 남아있다면서 

"우리에겐 아직 12시간이 남아있다. 우리 군은 오늘 모든 전선에 걸쳐서 대대적인 총공격을 전개할 것이다. 12시간 뒤의 전선이 우리의 땅 우리의 영토가 될 것이다........... 마지막 총력전이고 다른 부대도 마찬가지다. 최고의 활약을 기대한다"

이후 영화는 어이없음과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찬 인민군과 국군의 모습을 교차시키면서 작전이고 후퇴고 없는 몰살의 마지막 장면으로 관객을 이끈다.

2년이 넘는 고지전의 기간동안 그래도 살아남았던 모든 군인들이 이 마지막 총력전에서 죽어나간다.

그 골짜기 하나, 봉우리 하나가 뭐라고......


권력을 가진 자가 그릇된 신념을 가지고 있고, 그 신념을 실현하는 것이 절대적이라 믿으며 현실을 자신의 신념에 맞추고자 할때 비극은 그 부피를 한없이 부풀리게 된다.

한뼘의 땅이라도 더 가지는 것이 국가의 미래를 위한 최선의 길이라고 믿는 국가 수뇌부의 신념의 현실화는 결국 수 만명 수십만의 비참한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역사가 수백만을 넘어서 추정치만 1,400만의 죽음으로 이어진 곳이 있다.

독일과 소련의 사이 폴란드 중부에서 러시아 서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연안의 에스토리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Blood land - 피에 젖은 땅!

도대체 그 땅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무엇이? 누가? 왜?

역사적 비극은 어느 하나의 원인만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비극의 규모가 커지는 것은 그것을 키우는 모든 것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면서 누구도 그 흐름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굴종하고 체념하고 외면하고 또는 부추기면서이다.

이 모든 것들이 그 땅에서 일어났다.


1,400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가 가리고 있는 것은 누군가의 이름이고 삶이다.

때로 역사가들은 쉽게 숫자에 함몰된다.

사실과 정확한 통계자료는 역사에서 기본 재료일 뿐이다.

그 숫자와 통계속에 인간의 삶과 숨결과 고통이 있음을 보지 못한다면 그 역사는 도대체 왜 존재해야 하는걸까?



1941년 12월 28일 새벽 12시 30분, 제나가 죽었다.

1942년 1월 25일 오후 3시, 할머니가 죽었다.

1942년 3월 5일 새벽 5시, 레카가 죽었다.

1942년 4월 13일 새벽 2시, 바샤 삼촌이 죽었다.

1942년 5월 10일 오후 4시, 레샤 삼촌이 죽었다.

1942년 5월 13일 아침 7시 30분, 엄마가 죽었다.

사비체프 집안 사람들이 죽었다.

모두 다 죽었다.

타냐 혼자만 남았다.


타냐 사비체바는 1944년 세상을 떠났다.   - P312


독일의 레닌그라드 봉쇄기간 동안 이 일기를 썼던 11살 소녀 타냐는 그렇게 모든 가족을 잃었고, 그녀 역시 결국 죽었다.

이제는 그 이름들을 부르는 것조차 불가능해진, 죽음의 통계 숫자로만 남아있는 이들을 복원하지 않는다면 비극은 언제든 다시 되풀이 될 수 있다.

이 책에서 그토록 희생자의 이름 하나하나를 부르려고 노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희생자의 죽음이 아니라 삶을 보고자 할 때 비극의 진정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1929년의 자본주의 경제의 대공황은 독일 경제에 치명타를 날렸다.

사람들은 인플레로 인해 돈으로 벽지를 바르고, 지폐더미를 땔감으로 사용한다.

독일의 누구에게도 희망이 없어 보였을 때, 우리의 희망을 얘기하며 '히틀러'가 등장한다.

그는 독일인들에게 지금 독일인의 고통은 우리 자신 때문이 아니며, 독일인은 강하다고 강변한다.

유대인 같은 가상의 적을 설정하고, 유대인들을 독일과 온 유럽에서 제거하고 강하고 넓은 영토를 소유한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독일제국을 건설할 때 독일인의 고통이 끝날 수 있다고 미래의 희망을 얘기한다.

뉘른베르크 나치 전당대회에서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를 향해 '그분이 오셨다'고 소리지르며 눈물과 감격으로 히틀러를 맞는다. 독일의 구원자, 구세주!!!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이 세계에 새로운 국가 모델을 창조했다.

그러나 혁명을 일으키는 것과 그 혁명 정신을 지키고 인류 최초로 시도하는 국가 모델을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일은 그 어떤 모범사례도 없이 새롭게 개척하는 길이다. 

그것이 심지어 규모가 작은 나라가 아니라 엄청난 규모의 경제크기와 영토를 자랑하는 러시아에서 일어났다는것이 어쩌면 비극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주변 자본주의 국가들의 이 신생체제에 대한 두려움은 공포의 극한이었고, 어쨌든 무너뜨려야 할 자본주의의 적이었다.

이런 상황속에서 등장한 스탈린은 세계 자본주의 제국들로부터 러시아 혁명을 보호하기 위해 '일국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이념을 창조한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야 단결하라'고 했던 마르크스가 이걸 봤다면 진정 사회주의 이념이 제대로 구현된 것이라고 했을까?

'일국 사회주의'의 진정한 문제는 최초이자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 소련을 보호하는 것이 역사의 진보라고 믿으며, 그 무엇보다 체제의 보호를 우선 순위에 두게 되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서는 사회주의 사상도, 러시아 혁명의 이념도 모두 유보될 수 있는 것이고, 어떠한 정책도, 잔학행위도 일국 사회주의 체제 - 소련의 보호라는 말로 용인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는 모든 것이 혁명의 적으로 단죄될 수 있는 것이 되어버린다.

히틀러와 달리 스탈린의 이 정책은 소련을 지켜보고 있던 유럽의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들에 의해서도 묵인되었다.

이념이 현실을 앞지르고, 현실을 이념에 짜 맞추기 위해서 수많은 개인들, 민중들의 삶과 죽음에 애써 눈길을 돌리는 것이다. 이런 일은 이후 중국의 문화혁명에 대한 유럽 좌파들의 태도에서도 다시 한번 더 반복된다.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의 강력한 철권 통치자, 히틀러와 스탈린이 준비되었다. 

심지어 그들은 자국민들의 지지라는 든든한 배경을 소유했고, 심지어 스탈린은 유럽 지식인들의 침묵까지 가졌다.

독일제국의 건설이라는 신념, 일국 사회주의의 완성이라는 신념, 이 두 개의 신념이 맞부딪히는 곳에서 모든 현실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복무해야 한다.

신념과 사상이 현실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신념과 사상에 맞추어져야 한다. 

따라서 사상에 걸맞지 않는, 방해가 되는 현실사회는 당연히 변화와 파괴, 나아가 절멸의 대상이 될 뿐이다. 

Blood Land를 위한 모든 준비가 갖추어진 것이다.



1933년 우크라이나는 소련경제 5개년 계획의 실현을 위한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스탈린에게는 소련체제의 우월성을 증명할 성과가 절실했고, 그것은 산업화와 집단화를 통한 생산성 향상이었다.

농업의 집단화에 반대하는 부농으로 지칭되는 사람들이 강제추방되어 강제수용소로 강제이주당했다.

누가 부농이냐? 누가 사회주의 소련에 암적인 존재냐는 공산당 관료체제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결정되었고, 누가 더 많은 부농을 강제수용소로 보내는가 경쟁이 있었을 뿐이다.

다음으로는 소련의 산업화를 위한 식량공장, 산업화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식량수출기지로서의 우크라이나의 역할이 부여되었다.

과잉 설정된 목표는 우크라이나 농촌을 초토화시키고 수백만의 농민들을 굶어죽게 만든다.

오죽하면 농민들이 다음해 농사를 지을 종자까지 먹어치웠을까?

이 사태는 식량 수출량의 조절, 공출양의 조정이라는 아주 간단한 정책만으로 막을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스탈린에게 우크라이나 농촌의 상황은 관심밖이었다. 자신이 설정한 목표 달성, 자신이 생각하는 사회주의 국가의 경제 발전을 가로막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 이 단순한 생각이 수백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다.

이러한 스탈린의 정책과 생각은 반대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과 추방으로 이어진다.

이번에 희생되는 것은 농업의 집단화 실패를 농민들의 토지소유욕이라고 몰아가기 위해 부농이라는 계층으로 뭉뜽거려진 농민이었고, 소련의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민족주의적 분열을 가져온다고 추정되는 폴란드인들이다. 

심지어 이들 희생자의 대부부은 아마도 그러할 것이라고 짐작되는 잠재적 불확정적 반대자가 대부분이다.

사람들은 그가 한 일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 때문-농민이라는 존재, 폴란드인이라는 존재 때문에 처벌받는다.

희생의 규모는 얼마나 많은 반대자를 찾아내고 처벌하는 가에서 충성도를 확인하는 것으로 변질되어 무차별적인 탄압으로 연결된다. 이는 독일이든 소련이든 마찬가지이다.


본격적인 2차 세계대전의 시작은 비극을 더 강화시킨다.

히틀러는 그들이 생각하는 독일제국의 완성을 위해 동쪽으로 진군하고 폴란드를 점령한다.

히틀러에게 폴란드는 독일인이 이주해서 살아갈 새로운 땅이었고, 그것은 폴란드인의 절멸을 뜻하는 것이었다. 

미래의 어느 때고 있을지도 모를 폴란드의 재기를 방지하기 위해 폴란드의 지식인들을 몰살시키고, 독일제국을 건설한다는 그들의 목표는 현지 주민의 몰살이었다. 

전쟁수행을 위한 식량확보와 전쟁물자 확보를 위해 노동력을 남겨야 한다는 고려가 있을 때만 그들의 학살은 멈칫했을 뿐, 식량부족이라는 사태를 막기 위해 소련의 전쟁포로들을 학살하고, 동유럽과 소련 지역의 유대인들을 절멸시키고, 점령지의 주민들을 절멸시키는 이 비극이 어떻게 인간 세계에서 가능한 것이었을까?

히틀러와 스탈린의 학살 경쟁은 서로에게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기반을 제공해주며 오로지 학살의 상승곡선을 그릴 뿐이다. 


이 책의 최대의 강점은 바로 이 학살이 이루어지는 땅과 사람들. 죽은 이들의 이름과 삶을 꼼꼼하게 따라가는 성실함이다.

이토록 끔찍한 일들을 연구하고 찾아간 작가가 오히려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작가는 집요하게 학살의 현장의 모습, 그곳에서 죽어가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학살에 참여한 사람들, 동조한 사람들, 또는 외면이라는 것으로 학살에 자기도 모르게 일조하게 되는 사람들, 그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빼놓지 않고 보여주고자 한다.

사실상 기존의 역사서술은 이곳에서 벌어진 학살들을 숫자로 얘기하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 정치적 역관계와 강대국들의 관계는 무엇인지를 찾는데 더 천착했다. 

그러면 왜 작가는 이렇게 집요하게 학살의 현장을 복구하는데 집착했을까?

그 대답을 작가의 말에서 찾아본다.



서구와 미국 역사가와 기념운동가들은 스탈린주의적 역사왜곡을 시정하려 하면서도 아우슈비츠 동쪽에서 희생된 거의 500만명에 가까운 유대인과 나치에게 죽은 거의 500만 명의 비유대인 희생자는 간단간단히 넘기는 모습을 보였다. 동방에서 특히 유대인들이 많이 죽어간 사실과 서방에서의 지리적 조건을 계산에 넣지 않는다면,홀로코스트는 유럽사에서 제자리를 찾았다고 볼 수 없다. 유럽인과 그 밖의 사람들이 아무리 ‘홀로코스트를 잊지 말자고 말한다고해도 말이다.
스탈린의 제국은 히틀러의 그것을 포괄했다. 철의 장막은 서방과 동방 사이를 갈랐다.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도 장벽을 마련했다. 이제 그 장막이 걷힌 상태에서,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볼 수 있다. 히틀러와 스탈린 사이에 있었던 유럽의 참된 역사를,  -p669



블러드 랜드에서 벌어진 일들을 정확하게 복구하는 데서 역사의 진실은 시작된다.

어떤 이유에서던, 설사 인류의 진보를 위한 외면, 눈속임이라는 것을 핑계로 댄다해도  역사적 진실에 눈감는 것은 인류의 진정한 평화에서 걸림돌이다.

스탈린의 사회주의가 마르크스가 말했던 그 사회주의였다고, 인간의 평등을 위한 희생이었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스탈린이 되고 히틀러가 될 뿐이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라는 평범한 말은 역시 진리다.


희생자들은 사람이었다. 그들과 진정으로 동일시되고 싶다면, 그들의 죽음만 볼 게 아니라 그들의 삶을 봐야 한다. 정의상으로 희생자란 죽은 사람이며, 다른 이들이 그들의 죽음을 어떻게 이용하든 저항할 수가 없다. 희생자들의 죽음을 내세우며 어떤 정책을 미화하거나 스스로와 희생자를 동일시하는 일은 쉽다. 범죄자들이 저지른 행동을 이해하는 일은 별로 매력이 없다. 그러나 도덕적으로는 더 중요하다. 어쨌든 도덕적 위험은 누군가가 희생자가 될 때보다 범죄자나 방관자가 될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나치 학살자들은 이해 불가능한 인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유혹적이다. 예를 들어 베네시나 예렌부르크 같은 비범한 정치인이나 지식인들이 전쟁 중에 그런 유혹에 빠졌다. 그 체코 대통령과 유대계 소련 작가는 그런 식으로 독일인들에 대한 복수를 정당화했다. 다른 인간을 인간 이하의 존재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신이 인간 이하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부인해버리면 윤리란 불가능해진다.
그런 유혹에 굴복해 다른 사람들을 인간이 아니라고 규정하는 일은 나치의 입장으로 한 발짝 다가가는 것이다. 물러서는 일이 아니고말이다. 다른 사람들을 이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이해를 포기하는 일, 다시 말해 역사를 버리는 일이다.  - P703



너무나 진부해 보이는 말이지만 역사에서 교훈을 찾는다는 것은 여전히 진리이다.

어떤 이념이든지 현실을 그 이념에 맞추고자 할 때, 그것을 위기극복의 방법이라고 강변할 때, 타자를 나의 고통과 위기의 원인이라고 떠넘길 때 우리 속의 파시즘은 언제나 부활한다.

블러드랜드를 만든 이들이 인간이 아니었다고 저게 어떻게 사람이냐고 말하면 안된다.

그들은 인간이었다. 

인간이 인간을 학살한 것이고 절멸 프로그램을 만든 것이다. 

그 말은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역시 언제나 똑같이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언제든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식민지시대를 겪었고, 한국전쟁을 겪었고, 남과 북에서 독재시절을 겪고 보고 들었던 우리 역사의 과거를 생각해보자.

지금 우리 안에 있는 북에 대한 그 적대감들을 생각해보자.

또한 지금 중국, 일본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 역시 생각해보자. 

우리는 우리와 다르다고 하는 가상의 적을 지금도 만들고 있지는 않는가?

일본의 우경화와 역사인식 부재를 비판하는 것과 그들을 증오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증오속에서는 일본의 시민사회와 연대하고, 함께 평화와 변화를 이끌어갈 최소한의 고리마저 놓치게 될지도 모른다.

점점 커져가는 중국을 폄하하고 비웃는 것이, 그들의 중화제국 건설 의도를 비판하는 것과도 또한 다르다.

어쩌면 우리는 저 블러드 랜드가 만들어질 조건을 또 우리 안에 차곡 차곡 쌓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역사의 교훈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며 진부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역사는 반복된다. 마르크스의 말과는 달리 늘 비극으로, 아니 더 큰 비극으로.

우리안의 히틀러는 스탈린은 없는지 끊임없이 경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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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4-26 06:53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와우 완독을 축하드립니다^^ 이 책의 리뷰를 읽어보면 비참하다는 생각이 항상 드네요. 학살경쟁이란 말이 딱 맞는거 같다는~ 블러드랜드의 역사적 사실을 우리 주위에 적용해서 쓴 내용 정말 적절한것 같아요ㅎㅎ

바람돌이 2021-04-26 11:54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읽는 것도 힘들었지만 리뷰 쓰는게 더 힘들었어요. 저는 항상 읽는건 너무 좋은데 쓰는건 너무 힘들어.... 그래서 쓰지 말까 하다가도 이게 또 쓰지 않으면 왠지 읽지 않은 듯한 찜찜함.... 새파랑님도 아시죠? ㅎㅎ

미미 2021-04-26 08:50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와👍👍 정리까지 완벽하게!! 수고하셨어요! 마지막 단락 공감합니다. 언제든 반복될 수 있고 사소한 증오도 거기 한 몫하는거라 생각해요.

바람돌이 2021-04-26 13:46   좋아요 4 | URL
정리는 정말 기본 내용만 한거라서 완벽은 절대 아니고요. 그래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었는데 제 생각에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페넬로페 2021-04-26 09:59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완독에 리뷰까지 작성하시고.
수고 많으셨어요^^
블러드 랜드,
1400만,
듣기만 해도 끔찍하고 그 비참함을 우리가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ㅠㅠ

바람돌이 2021-04-26 11:56   좋아요 4 | URL
벽돌책은 한달에 1권으로 제한하자고 살짝 생각하고 있습니다. ㅎㅎ
예전에 영화 지슬 보면서 아 저 시대 안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어 좀 부끄러웠는데요. 이 책도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을 하게 합니다.

coolcat329 2021-04-26 10:1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우와~~~~읽으셨군요! 우선 축하드립니다. 저도 이 책 사놨는데 4단 서랍장위에 육중하게 놓여있기만 합니다.ㅠ
다각도로 매우 꼼꼼하게 쓰여진 책이라 이리 두꺼운가봅니다.

바람돌이 2021-04-26 13:52   좋아요 3 | URL
그렇게 쌓여있는 벽돌책은 저도 엄청납니다. ㅎㅎ 이제 한달에 한 두권 정도로 벽돌책 치우기 5개년 계획을 해볼까하다가 맞아 5개년 계획 따위 하다가 저따위 일이 일어났지 하고 또 반성을... ㅎㅎ
이 책은 정말 꼼꼼함과 성실함으로 쓰여진 책 맞아요. 그래서 저는 감사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syo 2021-04-26 10:2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군인들이 제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예비군입니다. 다 읽어내셨군요. 제대 축하드립니다.... 나는 언제....

바람돌이 2021-04-26 13:54   좋아요 2 | URL
아 제가 드디어 예비군이 된거였군요. 아이 좋아라.... ^^
syo님 며칠 안남았어요. 어차피 읽을거 이벤트 기간에 읽어야죠. 으샤 으샤!!! 평소 syo님 독서 속도라면 얼마든지 가능하시면서 엄살은.... ^^ 어쨌든 화이팅입니다.

scott 2021-04-26 16:4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우와 바람돌이님 이 리뷰 새벽에 올리셨군요
이제야 읽어봄 ㅎㅎ
이런 감동의 깊이와 슬픔, 남겨진 후손들에게 크나큰 숙제를 던져주는
벽돌책, 많은 이들이 읽기 바랄뿐입니다
책값이 넘 높아서,,(원서 페이퍼백은 15불정도인데,,,)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씀에 동감 1000000배!!

바람돌이 2021-04-27 21:19   좋아요 2 | URL
저는 scott님의 리뷰와 계속 이어지는 페이퍼들에 감동 감동입니다.
아 책을 참 깊게 읽으시는구나, 한 번 읽고 글 하나 쓰고 던져 놓는 저의 자세를 반성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이 읽기에는 정말 분량도, 내용도 부담스러울듯... 하지만 이런 책을 읽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이야기 해주는 사람이 생기는건 좋을 거 같아요. 바로 scott님처럼요. ^^

mini74 2021-04-26 18:2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비판과 증오는 다른 문제 라는 말 동감합니다. 글 너무 좋아요 *^^*

바람돌이 2021-04-27 21:20   좋아요 3 | URL
좋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갑자기 힘이 불끈 불끈! 어깨가 으쓱 으쓱! 역시 저는 칭찬에 약합니다. ㅎㅎ
비판과 증오는 정말 천지차이로 다른 것인데 그걸 뒤섞고 오해하는 일은 현실에서 너무 많이 일어나요. 슬픈 일인데 왜 인간은 늘 같은 잘못을 계속 하는지....

붕붕툐툐 2021-04-26 23:1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의 인식에 깊이 공감합니다. 내 안에 히틀러가 스탈린이 있어서 늘 경계합니다. 누구 욕을 못하겠어, 나도 그래서..ㅠㅠ 이 책 요즘들 많이 읽으셔서 읽고 싶었는데, 벽돌책이었군요.. 그럼 전 조용히 패쓰해야할 듯.. 하지만 전 바람돌이님 페이퍼를 읽었으니 읽은 것과 마찬가지?ㅎㅎㅎㅎㅎ

바람돌이 2021-04-27 21:22   좋아요 2 | URL
툐툐님 공감에 뿌듯뿌듯요. ^^ 책들에서 읽는 교훈은 사실 삶 자체나 몸에 새겨지는게 아니기 때문에 자주 잊어버린다는 한계가 있는듯해요. 그래서 주기적으로 책을 읽고, 제 생각을 다시 재정립하고 제대로 몸에 새겨지도록 계속 생각하는게 중요한거 같아요. 툐툐님 이 책은 벽돌책이지만 어렵지는 않습니다. 음... 그렇다고요. ㅎㅎ

희선 2021-04-27 01: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사에서 배워야 할 텐데, 그런 거 다 잊어버리고 사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자기 나라만이 아니고 세계를 생각하고 모두가 같은 사람이다는 걸 잊지 않아야겠지요 전쟁 때 죽은 사람이 몇 사람이다가 아니고 누구인지 아는 게 더 중요하겠습니다


희선

바람돌이 2021-04-27 21:31   좋아요 2 | URL
맞아요. 하나 하나의 죽음은 해당자와 가족,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하나의 세상이 완전히 무너지는거잖아요. 그걸 잊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이 책이 주는 것 같아요.
 

"국내 일반 인민은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설립되었다.
는 말을 듣고 소수의 조직이든 인물이 좋든 나쁘든 상관하지 않고 다 기뻐하여 금전도 아끼지 않고 적의 악형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외지에서 임시정부를 반대하던 자도 국내에 들어와서 금전을 모집할 때에는 다 임시정부의 이름을 파는 것이 바로 국내 동포가 임시정부를 믿는 증거다.
만약 5년의 역사를 가진 정부를 없앤다면 소수는 만족할지모르나 대다수는 슬퍼할 것이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개조하자. -김마리아
- P28

고향에 아내가 있었다. 당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해서, 대개의 남자들은 기약 없는 본부인을 두고 새로 결혼하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주위에서도 이를 허물하지 않았다. 그러나김철수는 "조선이 낳은 혁명 여걸‘을 고작 첩으로 만들 수는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김마리아를 흠모하기에 더욱 그랬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마음을 조용히 접었다훗날 김철수는 먼저 간 김마리아를 그리며 평생 그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다녔다). -김마리아 - P29

"어떤 인생을 살았기에 투사가 되었느냐 물었지요. 나는오히려 되묻고 싶습니다. 조선에서 어떻게 하면 투사가 안되고 살 수 있습니까? 친일 부호라면 몰라도 우리 같은 노동자는 싸우기 싫어도 싸워야 하는 게 현실이지요. 따지고 보면 기자 선생도 지금 붓으로 싸우고 있는 거 아닙니까?" -강주룡 - P39

정화가 임시정부의 안주인으로 불리며 26년간 임시정부의 역사를 함께한 것은 제 의지로만 된 일은 아니었다. 두어른의 죽음으로 만주행과 미국행이 틀어지며 상하이를 떠나지 못한 외부 상황 때문이기도 했다. 어찌 보면 마지못해상하이에 남게 된 것이지만, 정화는 상황을 탓하거나 주저앉지 않았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찾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정정화였다.
- P67

그는 조선최고의 천재로 꼽히던 사람인데, 최초로 우리나라의 한문학과 소설 역사를 정리한 국문학계의 큰 별인데…. 잘못된시대를 만나 어쩔 수 없어 총을 들었으나 마지막까지 붓을그리워했던 그의 운명이 새삼 서러워 나는 오래 울었다. 어쩌면 그 울음은 북에서 허수아비만도 못한 존재가 되어 스러져가는 내 운명을 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박진홍 - P94

아무튼 우리는 야학이 생기니까 얼마나 좋은지. 나랑 같이 물질하던 또래 친구들이 다 야학에 들어갔어. 굴동 사는부춘화 언니랑 부덕량, 고순효(호적 이름은 고차동), 우리 동네 사는 김계석이랑 다들 다녔어. 나도 가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여자가 배우면 큰일 난다고 어찌나 반대를 하는지. -김옥련 - P123

결국 우리 셋은 6개월 형을 선고받고 감옥살이를 했어.
다행히 고순효랑 김계석은 다른 동네로 잘 피해서 감옥살이를 면했는데, 그 바람에 해방되고 독립유공자 선정할 때속상하게도 제외가 됐어. 감옥만 안 갔다 뿐이지 독립투쟁을 안 한 게 아니잖아. 친일파들한테는 웬만하면 이해해주자고 하면서 독립투쟁을 한 사람들한테는 왜 그리 깐깐하게 구는지…. - 김옥련 - P131

내가 본 중에 그 무렵에 선생이 젤 늙었던 것 같아요.. 일제 때도 씩씩하던 분이 툭하면 한숨을 쉬시고,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파요. 나중에 북에서 숙청당했느니 어쩌니 하는데, 난 알고 싶지가 않아요. 선생님이 어떤 사람이냐고 ? 글쎄, 내 생각엔 불쌍한 조선 여자를 위해 울었던 진짜 조선 여자인 것 같아요. 강하고 부드럽고 헌신적이고 부지런한, 믿음직한 성님. 나의 영원한 선생님이지요. -정칠성 - P153

알렉산드라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나는 볼셰비키다. 나는 억압받는 민족과 소비에트 정권을 위해 싸웠고 지금도 싸우고 있다. 나는 조선 인민이 러시아 인민과 함께 사회주의혁명을 달성해야만 나리의 자유와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알렉산드라의 뜻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안 백위군은 즉결재판을 열어 바로 사형을 언도했다. -김알렉산드라 - P216

기사를 보고 나는 실소했다. 일제의 검열 때문이라 해도내가 중국 군대까지 가서 비행사로 활동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고 "꽃 같은 여류비행사 따위의 말만 가득한 데다, 동지인 이영무를 연인이라 하니 어이가 없었다.
수많은 여성이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건만 여자를 보는 세상의 눈은 변함이 없구나 싶었다. 그래도 신문기사 덕분에 가족 친지들이 내가 조종사가 되어 전장을 누비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리라 생각하니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권기옥 - P232

난징에서 나는 조선민족혁명당 부녀국에서 박차정 등과 함께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그 무렵 윤세주 등 간부들의 권유로 독립군 장교인 리집중 동지와 재혼했으나 그 역시 가부장적으로 내 활동을 속박하기에 이내 헤어졌다. 당차원에서는 여성의 지위와 권리가 남자와 평등해야 한다고선전하고 있었으나 실제론 전혀 그렇지 못한 현실 앞에서나는 깊은 실망감을 느꼈다. 하지만 내게는 가야 할 길이 있기에 결코 후퇴하지도 후회하지도 않았다.
-이화림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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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4-27 0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19년에 여성독립운동가로 나온 우표가 생각나네요 안경신, 김마리아, 권기옥, 박차정 네 사람이었어요 그 우표는 거의 다 팔려서 여덟장 남은 것만 샀어요

http://image.epost.go.kr/stamp/data_img/sg/up20190211195036958.jpg


희선

바람돌이 2021-04-27 21:39   좋아요 1 | URL
와우 몰랏어요. 저도 알았으면 사둘걸.... 득템하신 희선님 부러우요. ^^
 

이처럼 모차르트의 오페라에는 보수성과 급진성이 혼재한다. 무수한 여인들을 농락하다가 지옥으로 떨어지고 마는 전설적 호색한을 그린 <돈 조반니>가 대표적이다. 기독교적 윤리관에서는 참회를거부한 죄인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최후의 심판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19세기 낭만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돈 조반니는 당대의 도덕과 가치관에 거스르는 반反영웅으로 재평가되기에 이르렀다. 예전에는 악인에 대한 심판이라는 권선징악의 교훈을 중시했다면, 주어진 운명에 대한 주인공의 반항과 거부로 강조점이 옮겨간 것이다.
최근에는 성적 충동과 폭력성 등 인간의 어두운 내면에 초점을 맞춘 심리적 해석도 늘고 있다. 이처럼 어제의 고전에 붙어 있는 묵은 때를 벗겨내는 순간, 작품속의 날카로운 급진성이 되살아난다는 점이야말로 모차르트 오페라의 매력이다. - P240

음악학자 랜던은 "모차르트의 삶에서 상류시민 사회와 쉬카네더의 극장이 서서히 궁정 오페라와 귀족의 살롱과 자리를 바꾸기 시작했다"고 표현했다. 실제 개막 이후 <마술피리)는 1년간 100여 차례 공연할 만큼 인기몰이를 했다.
- P262

궁정 귀족 사회에서 음악가는 요리사나 시종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처지였다. 음아가를 독립적 예술가로 존중하는 시민 사회는 아직 멩아 상태에 머물고 있었다. 입장료를 내는 관객들을 위한 연주회나 인세를 지급하는 악보 출판사도 막 생겨나기 시작한 단계였다. 작곡가들이 홀로 서기 위한 물질적 기반은 취약했다.
- P271

흥미롭고도 비극적인 점은 모차르트가 자신의 운명을 인지하지못했다는 사실이다. 음악학자이자 작가 힐데스하이머는 모차르트가 "늦게까지 (너무나 늦게까지) 평생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고 말했다. "그의 고독은 가장 깊고 은밀한 고독이었고, 삶의 마지막 몇 달 전까지는 의식하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선후배 작곡가와 비교해도 모차르트의 삶은 차이가 있다. 선배하이든의 삶은 평생 에스테르하지 궁정에서 봉직하다가 말년에 영국에서 성공을 거뒀다는 점에서 유쾌한 희극이었다. 후배 베토벤은 치명적인 청력 상실의 고통 속에서도 불멸의 걸작을 쏟아냈다는 점에서 장엄하고 영웅적인 비극이었다. 모차르트는 빈에서 음악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성공하리라는 낙관적인 믿음을 버리지않았다. 그 가운데 음악적 성공이라는 절반만 실현됐다는 점에서그의 삶은 희비극에 가까웠다. 그 희비극은 어떤 결말을 맺었을까.
이제 스스로 포기하고 추락한 자‘의 마지막 순간으로 향할 때다.
- P272

그런데도 모차르트 이펙트가 열풍을 일으킨 데는 이유가 있다. 모차르트 자신이 도무지 믿기 어려운 기록을 두루 보유한 불세출의 신동이었기 때문이다. 세 살 반 무렵부터 연주를 시작하고, 다섯 살이되기도 전에 작곡했으며, 여덟 살에 교향곡을 쓴 천재의 신기神技를배웠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이 숨어 있다. 모차르트 이펙트는 과학과 합리성을 가장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기복신앙과도 흡사한 염원이 담겨 있다. 어쩌면 모자르트 이펙트는 냉철한 분석보다는 맹목적 믿음의 대상에 가까울지 모른다.
- P311

숨가쁘게 쫓아온 모차르트의 생애를 한마디로 압축하면 그는
‘타고난 천재 보다는 ‘만들어진 천재‘에 가깝다. 그를 천재로 만든건 우선 아버지 레오폴트였고 그다음엔 ‘18세기 유럽‘이라는 드넓은 세상이었다. 아무리 타고난 재주가 뛰어나더라도 평생 타고난재주로만 먹고사는 사람은 없다. 천하의 모차르트도 마찬가지였다.
모차르트의 원천 기술은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재능이 아니라 오히려 거침없이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흡수력과 학습 능력에 있었다.
- P314

19세기에 낭만주의적인 모차르트가 있었고 20세기에는 영화 <아마데우스>의 모차르트가 있었던 것처럼, 미래의 후손들에게는 그들만의 모차르트가존재할 것이다. 우리 후손들과 미래의 모자르트‘가 서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 상상만 해도 즐겁고 유쾌하지 않은가. 빈의 공원 벤치에앉을 때마다 슬그머니 미소 짓는 이유다.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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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4-26 2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모차르트 ^^
정말 한 번 꼭 읽어 보고 싶어요.

바람돌이 2021-04-27 21:40   좋아요 0 | URL
쉬운 글이고 사진이 굉장히 많아서 책장이 잘 넘어가요. 시간 나실 때 한번 읽어보세요. 저는 유튜브 틀어서 음악도 같이 들으면서 읽었어요. 모차르트 음악이 더 좋아지더라구요. ^^
 

흔히 ‘신동 탄생‘은 아이의 재능에만 달린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모차르트 가족의 그랜드 투어는 두 가지 요소를 함께 감안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일러준다. 아이의 재능을 조기에 발견할 수있는 부모의 전문가적 식견과 아이가 충분히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마련해주는 추진력이다. 모차르트 가족의 그랜드 투어는 레오폴트의 예술적 감식안과 추진력, 모차르트의 음악적 재능이라는 삼박자가 행복하게 맞아떨어진 경우였다.
- P72

그랜드 투어를 떠날 당시에 이들 남매는12세와 7세에 불과했다. 하지만 잘츠부르크로 돌아왔을 때 난네를은 15세, 모차르트는 10세였다. 더구나 이들 남매의 놀라운 재능을접한 유럽 궁정 귀족이나 상류층은 똑같은 재주에 두 번 놀라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모차르트 남매의 음악적 재능도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성공리에 유럽 투어를마쳤지만, 정작 레오폴트의 시름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과연 레오폴트는 어떤 비장의 카드를 마련하고 있었을까.
- P87

따지고 보면 이유는 여러 가지다.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면 베토벤의 음악적 유산을 충실히 계승할 것인지, 고전주의 양식은 완성된 것으로 보고 오페라 같은 다른 분야로 개혁을 확산시킬 것인지를 놓고 독일 음악의 진영이 양분됐다. 이 복잡다단한 논쟁을 딱 한마디로 압축하면 ‘교향곡이냐 오페라냐‘가 된다. 전자에 해당하는슈만과 브람스가 교향곡에 매진했던 반면, 후자의 대표 주자인 바그너가 음악극의 혁신을 주도했던 건 우연이 아니다. 미리 의도했던 건 아니었지만 이러한 현상은 교향곡과 오페라의 교집합이 줄어드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 P90

이처럼 까다로운 조건에 들어맞는 예외적 존재가 모차르트다. 교향곡 41 곡과 피아노 협주곡 27곡, 바이올린 협주곡 5곡과 현악 4중주 23곡, 오페라 22편까지 정식 번호가 붙은 작품 수만 봐도 어디하나 빠지는 장르가 없는 전천후 작곡가가 모차르트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는 사람은 그 속에서 18세기 전체 음악을 듣게 된다"는스위스의 신학자 카를 바르트의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 P90

한 가족에서 두 스타가 탄생하기 힘들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해도, 클래식 음악사에서유독 여성들이 배제와 차별의 대상이 됐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하기 힘들다. 단네를 역시예외가 아니었다. 1769년부터 남동생 모차르트가 이탈리아에서 눈부신 음악적 성과를거두는 동안 난네를은 어머니와 함께 잘츠부르크에 남아 있었다. 반대로 1777년부터 모차르트가 어머니와 파리 여행을 할 당시에는 레오폴트와 함께 잘츠부르크에 머물러다했다. 난네를 역시 작곡을 했고, 동생 모차르트도 편지에서 난네를의 작품을 듣이 평가했다. 하지만 레오폴트는 편지에서 난네를의 작품에 대해서는 언급한 적이 없다. 레오폴트가 특별히 비정하거나 부당했다기보다는 남녀 차별적인 당시의 고정 관념이 투영된 결과로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아쉽게도 난네를의 작품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 P114

마지막으로는 신분적 질서의 대립도 깔려 있었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음악가가 교회와 궁정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않으면 비렁뱅이신세로 전락하는 봉건적 세상에서 실있다. 반면 모차르트는 봉건적질서에 넌더리를 내고 ‘프리랜서 음악인‘이라는 전인미답의 세계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었다. 이들 부자는 세대와 지역, 신분이라는삼중의 갈등을 겪고 있었다. 모차르트의 눈에는 아버지 레오폴트와고항 잘츠부르크, 내주교가 구질서의 삼위일체 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 점이야말로 이들 부자의 진정한 비극이었다.
결과적으로 모차르트는 대주교와의 갈등을 통해서 아버지 레오폴트로부터도 독립을 쟁취한 셈이었다. 거꾸로 레오폴트의 입장에서는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를 떠나려는 모습이 자신에 대한 거부로 보였을 것이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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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4-25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차르트한테 누나가 있었군요 그것도 재능이 있는... 버지니아 울프가 셰익스피어한테 여동생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걸 쓰기도 했던데, 모차르트한테 누나가 있었네요 누나가 쓴 곡은 전해지지 않았다니 아쉽습니다


희선

바람돌이 2021-04-25 02:04   좋아요 1 | URL
굉장히 재능이 뛰어났다죠. 그럼에도 동생에게 밀렸고, 아버지 레이폴드에 의해 결혼한 이후 평범한 삶을 살았다는데 어쩌면 그녀의 재능도 모차르트 못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유대인들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았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 동쪽에서의 총살은 어떤 식으로든 수십만 명의 소련인과 연루된 일이었다(그런 점에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 서쪽인 피점령 폴란드 소재죽음의 공장들에서 중요한 작업은 소련인들이 했다. 트레블린카, 소비부르,
베우제츠에 소련인 직원들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독일군이 부역자를 필요로 하고, 찾아냈음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부역활동은 증오스러운 파시스트 침략자들에게 가열차게 저항함으로써, 조국의 영예를 지켰노라‘는 ‘단합된 소련 국민이라는 신화에 걸림돌일 수밖에 없었다. 그 점에서 유대인 대량학살은 잊혀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 P613

소련 유대인의 크나큰 인명 피해, 그 대부분은 소련이 침략한 땅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이들 유대인은 폴란드, 루마니아, 발트 삼국의 국민이었으며, 독일의 침공이 있기 전까지 고작 21개월(폴란드의 경우),
또는 12개월(동북부 루마니아와 발트 삼국의 경우) 소련의 치하에 있었을 뿐이다. 전쟁 중 고난을 겪은 소련 국민은 대부분 독일군의 점령이전에 소련 체제에서 고통받았다. 소련과 나치 독일의 동맹 때문이었다. 이는 불편한 진실이었다. 소련의 입장에서 전쟁은 1941년에 시작되었으며, 고통받은 국민은 "평화롭던 소련 인민 "이어야 했다. - P617

 소련 유대인은
"근본 없는 코즈모폴리턴" 이면서 "시오니스트일 수 있었다. 미국에이끌리는 유대인은 미국의 새로운 위성국가를 지지할 수도 있으리라.
이스라엘에 이끌리는 유대인은 이스라엘의 새 종주국을 지지할 수도있으리라. 어느 쪽이든, 아니 둘 모두일 수도 있을 텐데, 소련 유대인들은 더 이상 믿을 만한 소련 국민일 수 없었다. 적어도 스탈린의 눈에는 그랬다.
- P624

홀로코스트는 많은 유대인을 공산주의로 이끌었으며, 소련을 해방자로 여기는 이념을 따르도록 했다. 그러나 이제는 폴란드의 통치권을 유지하고 스탈린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지도적 유대 공산주의자들이 홀로코스트의 중요성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1946년 12월, 베르만은 이미 그 방향으로 중요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비유대계 폴란드인의 사망자 공식 통계 발표치는 크게 늘리는 반면,
유대계는 줄여서 양쪽 다 같은 숫자(300만 명씩)가 되도록 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홀로코스트는 이미 정치적 문제가 되어 있었는데, 그것도 위험하고 어려운 사안이었다. 그것은, 다른 모든 역사적 사건과 마찬가지로 변증법적으로 이해되어야 했다. 그것이 스탈린의 이념 노선에, 그리고 현재의 요청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 P635

서구와 미국 역사가와 기념운동가들은 스탈린주의적 역사왜곡을 시정하려 하면서도 아우슈비츠 동쪽에서 희생된 거의 500만명에 가까운 유대인과 나치에게 죽은 거의 500만 명의 비유대인 희생자는 간단간단히 넘기는 모습을 보였다. 동방에서 특히 유대인들이 많이 죽어간 사실과 서방에서의 지리적 조건을 계산에 넣지 않는다면, 홀로코스트는 유럽사에서 제자리를 찾았다고 볼 수 없다. 유럽인과 그 밖의 사람들이 아무리 ‘홀로코스트를 잊지 말자고 말한다고해도 말이다.
스탈린의 제국은 히틀러의 그것을 포괄했다. 철의 장막은 서방과동방 사이를 갈랐다.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도 장벽을 마련했다. 이제 그 장막이 걷힌 상태에서,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볼 수 있다. 히틀러와 스탈린 사이에 있었던 유럽의 참된 역사를,
- P669

모든 죽음은 숫자가 되었다. 이오시프에서 유니타의 죽음 사이에나치와 스탈린주의 체제는 블러드랜드에 1400만 명 이상의 피를 뿌렸다.  - P671

집단수용소는 기본적으로 유대인용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집단수용소로 보내진 유대인들은살아남은 유대인들에 속해 있었다. 그것이 집단수용소가 유명해진또 다른 이유다. 그들은 수용소에 대해 설명했다. 오래 일하다가 끝내죽은 사람들이 아니라, 전쟁 끝 무렵에 들어와 바로 해방된 사람들이.
유럽 유대인을 말살하려던 독일의 정책은 집단수용소가 아니라 헤움노, 베우제츠, 소비부르, 트레블린카, 마이다네크, 아우슈비츠 등지의구덩이, 가스 차량, 살인 공장 등으로 실행되었다.
- P675

독일 점령 상태에서 대부분의 폴란드계, 소련계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가 주요 살인 공장이 되기 전에 이미 학살당한 상태였다. 비르케나우의 가스실과 화장 복합시설이 1943년 봄에 자리잡았을 때, 홀로코스트에서 희생된 유대인의 4분의 3 이상은 이미 죽은 상태였다. 다시 보자면, 소련과 나치 체제의 손으로 의도적으로 살해된 수없이 많은 사람의 90퍼센트 이상은 비르케나우의 가스실이 가동하기 시작할 무렵 이미 끝장나 있었다. 아우슈비츠는 죽음의 푸가의 ‘코다 밖에 안 되었다.
- P676

그로스만 소설의 등장인물 하나가 부르짖듯이, 국가사회주의와 스탈린주의의 핵심적인 공통점은 일정 집단의 사람들에게서 사람으로여겨질 권리를 빼앗는 그들의 능력에 있었다. 따라서 유일한 답은 그것이 말도 안 된다고 외치는 일, 외치고 또 외치는 일뿐이었다. 유대인과 부농은 사람이다. 그들도 사람인 것이다. 나는 이제 우리 모두가사람임을 알았다. 이것은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허구적 세계‘라고 불렀던 것에 저항하는 문학이었다.  - P681

스탈린은 유토피아를 재정립하는 능력이 있었다. 스탈린주의 자체가 목표 수정이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을 추동했던 유럽 혁명에서, 그 혁명이 불발하자 소련의 방어로 후퇴한 것이었다. 1920년, 북은 군대가 공산주의를 유럽에 확산시키는 데 실패하자, 스탈린은 후퇴 계획을 마련했다. 일국사회주의, 다시 말해서 사회주의를 하나의나라 소련에서 완성하는 게 먼저라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5개년 계획이 재앙을 가져오자, 그는 수백만 명을 의도적으로 굶어 죽도록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이 정책 추진 과정의 일환이라 설명하고, 그 덕으로 무서운 국부이자 정치국의 지배자라는 위상을 굳혔다. 1937년에서 1938년, 내무인민위원회를 부농과 소수 민족 박멸에 내세운 뒤, 그는 그것이 사회주의 조국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했다고 설명했다.  - P684

희생자들은 사람이었다. 그들과 진정으로 동일시되고 싶다면, 그들의 죽음만 볼 게 아니라 그들의 삶을 봐야 한다. 정의상으로 희생자란 죽은 사람이며, 다른 이들이 그들의 죽음을 어떻게 이용하는 저항할 수가 없다. 희생자들의 죽음을 내세우며 어떤 정책을 미화하거나스스로와 희생자를 동일시하는 일은 쉽다. 범죄자들이 저지른 행동을 이해하는 일은 별로 매력이 없다. 그러나 도덕적으로는 더 중요하다. 어쨌든 도덕적 위험은 누군가가 희생자가 될 때보다 범죄자나 방관자가 될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나치 학살자들은 이해 불가능한 인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유혹적이다. 예를 들어 베네시나 예렌부르크 같은 비범한 정치인이나 지식인들이 전쟁 중에 그런 유혹에 빠졌다. 그 체코 대통령과 유대계 소련 작가는 그런 식으로 독일인들에 대한 복수를 정당화했다. 다른 인간을 인간 이하의 존재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신이 인간 이하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부인해버리면 윤리란 불가능해진다.
그런 유혹에 굴복해 다른 사람들을 인간이 아니라고 규정하는 일은 나치의 입장으로 한 발짝 다가가는 것이다. 물러서는 일이 아니고말이다. 다른 사람들을 이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이해를 포기하는 일, 다시 말해 역사를 버리는 일이다.
- P703

"나는 믿고 싶었기 때문에 믿었다." 그에게는 도덕 감각이 있었다. 비록 잘못되었지만, 마르가레테 부버노이만이 카라간다의 굴라크에 있을 때, 동료 재소자가 그녀에게 "달걀을 깨지않고 오믈렛을 만들 수는 없어"라고 말했다. 많은 스탈린주의자와 그동조자들은 대기근과 대공포가 빚은 희생이 정의롭고 안전한 소련국가를 세우기 위해 불가피하다고 설명했다. 그토록 희생자의 규모가컸던 것은 그만큼 희망도 강력했다는 뜻이다.
- P705

희생자는 애도자의 뒤에 가려져 있다. 살육자는 숫자들 뒤에 숨어있다. 막대한 죽음의 숫자를 읊조리는 것은 익명성의 흐름에 숨어버리는 일이다. 죽은 뒤에 서로 경쟁하는 국가별 추념에 따라 명단에 실리고, 개별적인 삶을 부수적으로 다루는 숫자의 일부가 되어버리는것, 그것은 개인을 말살하는 일이다. 그것은 역사에서 빠지는 일이다.
- P715

블러드랜드의 대량학살의 역사에서, 기억은 다음과 같은 이름을포함해야만 한다. 포위 속에서 굶어 죽은 100만 명의(100만 배의 하나의) 레닌그라드 시민들 각각, 1941년에서 1944년 사이에 독일군에게 살해된 310만 명의 (310만 배의 하나의) 소련 전쟁포로 각각, 1932년에서 1933년 사이에 소련 체제 아래 굶어 죽어야 했던 330만 명의(330만 배의 하나의) 우크라이나 농민 각각도 이들의 숫자를 완전히정확히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들을 나타내고 있다. 무시무시한 선택을 해야 했던 농민 가족, 구덩이에서 서로의 몸을 덥혀주려 애쓰던 포로들, 레닌그라드에서 가족들이 한 명씩 죽어가는 모습을 봤던 타냐 사비체바 같은 아이들,
- P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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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04-23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백 쪽이 넘는 책이네요. 저로선 엄두를 못 내겠네요. 그런 분량은 두 권짜리로만 읽어 봤어요.
책이 무거울 것 같습니다. 이런 책은 읽고 나면 뿌듯하지요.

바람돌이 2021-04-23 15:22   좋아요 0 | URL
하하 그래서 제가 독서대가 필요했습니다. 너무 무거워요. ㅠ.ㅠ
이 책 읽을 때는 바른 자세로 책상에 앉아서, 아니면 서서 일게 되더라구요. 네 벽돌책은 우리의 올바른 자세를 위한 아주 좋은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좀 바쁜 주간이기도 해서 진짜 허덕이며 읽었어요. 딱 일주일 걸렸네요. 어쨌든 다 읽고 나니 뿌듯하기는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