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일반 인민은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설립되었다.
는 말을 듣고 소수의 조직이든 인물이 좋든 나쁘든 상관하지 않고 다 기뻐하여 금전도 아끼지 않고 적의 악형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외지에서 임시정부를 반대하던 자도 국내에 들어와서 금전을 모집할 때에는 다 임시정부의 이름을 파는 것이 바로 국내 동포가 임시정부를 믿는 증거다.
만약 5년의 역사를 가진 정부를 없앤다면 소수는 만족할지모르나 대다수는 슬퍼할 것이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개조하자. -김마리아
- P28

고향에 아내가 있었다. 당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해서, 대개의 남자들은 기약 없는 본부인을 두고 새로 결혼하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주위에서도 이를 허물하지 않았다. 그러나김철수는 "조선이 낳은 혁명 여걸‘을 고작 첩으로 만들 수는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김마리아를 흠모하기에 더욱 그랬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마음을 조용히 접었다훗날 김철수는 먼저 간 김마리아를 그리며 평생 그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다녔다). -김마리아 - P29

"어떤 인생을 살았기에 투사가 되었느냐 물었지요. 나는오히려 되묻고 싶습니다. 조선에서 어떻게 하면 투사가 안되고 살 수 있습니까? 친일 부호라면 몰라도 우리 같은 노동자는 싸우기 싫어도 싸워야 하는 게 현실이지요. 따지고 보면 기자 선생도 지금 붓으로 싸우고 있는 거 아닙니까?" -강주룡 - P39

정화가 임시정부의 안주인으로 불리며 26년간 임시정부의 역사를 함께한 것은 제 의지로만 된 일은 아니었다. 두어른의 죽음으로 만주행과 미국행이 틀어지며 상하이를 떠나지 못한 외부 상황 때문이기도 했다. 어찌 보면 마지못해상하이에 남게 된 것이지만, 정화는 상황을 탓하거나 주저앉지 않았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찾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정정화였다.
- P67

그는 조선최고의 천재로 꼽히던 사람인데, 최초로 우리나라의 한문학과 소설 역사를 정리한 국문학계의 큰 별인데…. 잘못된시대를 만나 어쩔 수 없어 총을 들었으나 마지막까지 붓을그리워했던 그의 운명이 새삼 서러워 나는 오래 울었다. 어쩌면 그 울음은 북에서 허수아비만도 못한 존재가 되어 스러져가는 내 운명을 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박진홍 - P94

아무튼 우리는 야학이 생기니까 얼마나 좋은지. 나랑 같이 물질하던 또래 친구들이 다 야학에 들어갔어. 굴동 사는부춘화 언니랑 부덕량, 고순효(호적 이름은 고차동), 우리 동네 사는 김계석이랑 다들 다녔어. 나도 가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여자가 배우면 큰일 난다고 어찌나 반대를 하는지. -김옥련 - P123

결국 우리 셋은 6개월 형을 선고받고 감옥살이를 했어.
다행히 고순효랑 김계석은 다른 동네로 잘 피해서 감옥살이를 면했는데, 그 바람에 해방되고 독립유공자 선정할 때속상하게도 제외가 됐어. 감옥만 안 갔다 뿐이지 독립투쟁을 안 한 게 아니잖아. 친일파들한테는 웬만하면 이해해주자고 하면서 독립투쟁을 한 사람들한테는 왜 그리 깐깐하게 구는지…. - 김옥련 - P131

내가 본 중에 그 무렵에 선생이 젤 늙었던 것 같아요.. 일제 때도 씩씩하던 분이 툭하면 한숨을 쉬시고,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파요. 나중에 북에서 숙청당했느니 어쩌니 하는데, 난 알고 싶지가 않아요. 선생님이 어떤 사람이냐고 ? 글쎄, 내 생각엔 불쌍한 조선 여자를 위해 울었던 진짜 조선 여자인 것 같아요. 강하고 부드럽고 헌신적이고 부지런한, 믿음직한 성님. 나의 영원한 선생님이지요. -정칠성 - P153

알렉산드라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나는 볼셰비키다. 나는 억압받는 민족과 소비에트 정권을 위해 싸웠고 지금도 싸우고 있다. 나는 조선 인민이 러시아 인민과 함께 사회주의혁명을 달성해야만 나리의 자유와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알렉산드라의 뜻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안 백위군은 즉결재판을 열어 바로 사형을 언도했다. -김알렉산드라 - P216

기사를 보고 나는 실소했다. 일제의 검열 때문이라 해도내가 중국 군대까지 가서 비행사로 활동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고 "꽃 같은 여류비행사 따위의 말만 가득한 데다, 동지인 이영무를 연인이라 하니 어이가 없었다.
수많은 여성이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건만 여자를 보는 세상의 눈은 변함이 없구나 싶었다. 그래도 신문기사 덕분에 가족 친지들이 내가 조종사가 되어 전장을 누비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리라 생각하니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권기옥 - P232

난징에서 나는 조선민족혁명당 부녀국에서 박차정 등과 함께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그 무렵 윤세주 등 간부들의 권유로 독립군 장교인 리집중 동지와 재혼했으나 그 역시 가부장적으로 내 활동을 속박하기에 이내 헤어졌다. 당차원에서는 여성의 지위와 권리가 남자와 평등해야 한다고선전하고 있었으나 실제론 전혀 그렇지 못한 현실 앞에서나는 깊은 실망감을 느꼈다. 하지만 내게는 가야 할 길이 있기에 결코 후퇴하지도 후회하지도 않았다.
-이화림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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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4-27 0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19년에 여성독립운동가로 나온 우표가 생각나네요 안경신, 김마리아, 권기옥, 박차정 네 사람이었어요 그 우표는 거의 다 팔려서 여덟장 남은 것만 샀어요

http://image.epost.go.kr/stamp/data_img/sg/up20190211195036958.jpg


희선

바람돌이 2021-04-27 21:39   좋아요 1 | URL
와우 몰랏어요. 저도 알았으면 사둘걸.... 득템하신 희선님 부러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