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도로위 나무 그림자는 심하게 흔들린다.

바람이 그리 심하게 불지 않는데 왜 그것은 그렇게도 거친 몸짓을 하는가

하늘을 쳐다본다.

가로등 옆 나뭇잎은 바싹 붙어있다.

조그만 움직임에도 그들 사이가 너무 가까운 탓에 그리도 크게 휘청거리고 있는 것이다.

가깝다는 것은 이런 의미다.

사소함마저도 큰 그림자를 드리우는...

고슴도치의 사랑마냥 우리는 그렇게 거리를 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휘청거리지 않고 서 있으려면 말이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때론 우린 그렇게 휘청거리고 싶어하지 않은가? 마치 술에 취한듯이, 술에 취하고파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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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보이 최민수

짐슴보다 못한 놈이지만 살 권리는 있는 것 아닙니까?



영화 초반부 오대수가 자살남을 만났을 때 자살남이 외치는 소리다. 또한 오대수가 영화 마지막 부분 최면술사에게 자신의 기억을 없애달라고 부탁했던 편지의 마지막 구절이기도 하다. 이 구절은 이우진(유지태)과 오대수(최민식)의 유사점 속에 감추어진 대립된 성격을 찾는 재미를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영화는 영문도 모른채 15년간의 감금생활을 마친 오대수가 5일간 자신의 원수를 찾아, 아니다 원수는 이미 이우진임을 알고 있으니 그 이유를 찾아 복수를 행하는 이야기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중의 하나는 바로 이 복수심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나는 아직 고양이나 개가 자신에게 해를 가한 사람에게 복수를 하기위해 찾아나선 일을 들어본 적이 없다.) 주인공들이 뜨거운 복수심에 휩싸이는 사건은 또한 근친상간의 금지라는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도덕적 불문율과 연관이 있다.

하지만 이 두가지 점에 있어 이우진과 오대수는 천지차이를 보인다. 먼저 이우진은 오대수에게 이렇게 외친다. 당신은 알고도 사랑할 수 있겠는냐고? 자신은 누이인줄 알면서도 순수하게 사랑했음을 역설한다. 하지만 오대수는 이름처럼 오늘도 대충 수습하지 못한다. 제발 미도와 자신의 관계를 미도에게 알리지 말아달라고 개가 되는 흉내를 내며 빈다. 자신은 짐승보다 못한 인간이지 않다고 외치듯이 멍멍 짖어댄다. 하지만 우진은 오히려 인간이라는 제약을 뛰어넘는다. 그것은 우진과 대수가 서로 무기를 겨눴을때 드러난다. 대수를 향한 총을 거두는 우진과 우진을 향해 겨눈 무선 리모콘을 과감히 눌러버리는 대수의 모습을 통해서 말이다.

우진은 용서를 한 것이다. 복수심을 극복한 용서는 누구나 행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죽 했으면 사랑이니 자비니 하면서 모든 종교들이 계속해서 주장해대겠는가? 반면 대수는 인간성에 충실하게 행동한다.

복수나 근친상간의 금지라는 것은 본능의 모습을 띤 인간만의 문화이지 않는가? 교육되고 훈련되어진 것에 길들여진 대수는 그래서 감금생활동안 TV를 통해 모든 지식을 흡수한다. 반면 우진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그 이상인지 그 이하인지를 가늠하기 힘들다. 근친상간은 대수롭지 않으며 복수 또한 넘어서 삶의 상실감에 빠져든다.

짐승만도 못한 놈이지만 정말 살 권리는 있는가? 아니 그 이전에 어느 누가 짐승만도 못한 놈이며 어느 누가 짐승보다 나은 사람이란 말인가? 그리고 정말 사람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진정 짐승보다 나은 삶이기나 한 것일까?

영화와 관계없는 상상을 한다. 아차 영화의 메시지처럼 입조심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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