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 이준익 감독, 송강호, 유아인

 

자식이 웬수?

 

사도세자 이야기는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였다는 것, 그것도 뒤주에 가두어 고통 속에 죽였다는 점 때문에 잊혀질려야 잊혀지기가 힘들다. 그런데 왜 영조는 사도를 죽였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다양한 해답이 여러 작품으로 나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번 이준익 감독의 <사도>는 정치적 역학 관계보다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 속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려 하고 있다.

■ 권력의 그늘 - 영조의 입장에서

그런데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자 했던 것은 영조 만의 일이었을까. 신들과 인간의 아버지라는 제우스에게도 자식을 잡아먹는 아버지가 있었다. 바로 크로노스다. 제우스는 아버지에게 잡아먹히는 운명을 벗어나 오히려 아버지를 왕 위에서 쫓아내고 제왕의 자리에 오른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말을 남긴 오이디푸스는 어떤가. 그의 아버지 테바이의 왕 라이오스는 아들인 오이디푸스가 크면 자신의 생명과 왕위를 빼앗을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아들을 양치기에게 맡기고 죽이라 명한다. 하지만 오이디푸스 또한 제우스와 마찬가지로 죽음에서 벗어나 오히려 신탁처럼 아버지를 죽이고 왕 위에 오른다. 이들이 영조와 다른 것은 아들을 죽이는 것에 실패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자식을 죽이고자 했던 이면에는 권력에 대한 집착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영화 속에서 영조는 사도에게 묻는다. 왕가에서는 자식을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고. 그 답은 ‘원수’다. 원수처럼 대해야 한다고. 그 본마음은 사가의 아비와 똑같이 사랑이지 않겠느냐는 사도의 말에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왕권을 지키려는 마음이 부정보다 더 강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영조는 직접 말하지 않고 그저 왕이 되고나면 알 것이라 말한다. 왕의 자리 또한 생사를 건 자리였기 때문이리라 추측할 뿐이다.

■ 육아의 어려움 - 사도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바꾸어 영화 속에서 절절히 느껴진 육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현재 딸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사도가 너무 가여웠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현대의 육아서가 말하는 몇 가지 피해야 할 행동을 영조가 서슴없이 행하는 모습에서 육아의 어려움이 느껴진다.

먼저 영조의 첫 번째 잘못은 일관성이 없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사도의 스승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영조에게 상소를 올리는 장면이 있다. 웃고 화를 내는 것이 하루에도 수십 번 변해 그 기분을 맞출 수 없다며 사도에게 보다 살갑게 대해 줄 것을 간청한다. 그런데 아이를 키우다보면 이것처럼 어려운 일이 또 없다. 나의 몸 상태, 마음의 상태에 따라 아이들의 똑같은 행동도 귀엽게 느껴질 때도 성가시게 느껴질 때도 있기 마련인지라 항상 같은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닌 것이다.

두 번째로는 자식을 끝까지 믿어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 영조가 사도의 대리청정으로 나섰을 때 자신의 업적과 상관없이 사도를 끝까지 믿고 힘을 보태줬더라면 사태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성에 차지 않는 자식의 모습을 보고도 그 믿음을 유지한다는 것이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세 번째로는 칭찬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칭찬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행위의 결과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 대한 칭찬, 마음이나 의지에 대한 칭찬이 중요하다. 영조는 어렸을 적 사도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영특함 덕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결과만을 보고 사도를 헤아리다보니 칭찬은 줄어들고 호통만 늘어났다. 무엇을 칭찬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하지만 그래도 아이들 자라는 모습에서 행복을 느낀다. 영조의 슬픔은 그리고 사도의 슬픔은 행복한 순간을 함께 만들어가지 못함에 있었을 것이다. 사도를 키우지 않기 위해 부모는 애를 써야 한다. 사도의 눈물이 애통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