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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생태보고서 - 2판
최규석 글 그림 / 거북이북스 / 2012년 6월
평점 :
제목만 보면 마치 자연 환경 관련 서적이거나 글자 그대로 생태보고서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책장을 펼치면 그림이 그려져 있는 만화라는 것에 놀라고, 책을 읽다가 이것이 자연과는 전혀 관련없는 사람의 감추어진 심리를 잘 드러내고 있는 점에서 또한번 놀라게 된다.
이 만화는 경향신문에서 연재된 것을 단행본으로 묶은 것인데, 예상을 뛰어넘는 재미를 선사한다. 무엇보다도 키득키득 웃게 만드는 캐릭터들의 표정과 대사에 감탄하게 된다.
책에서 말하는 습지는 가난한 대학생들의 지하 단칸 자취방을 말한다. 작은 방에 4명의 친구와 1마리의 사슴이 동거하는 모양새다. 비록 가난하지만 비참하지는 않는, 아니 비참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려는 이들의 모습이 왠지 감추어진 자신의 속마음을 비추어주는 듯하여 얼굴이 확 달아오르면서도, 이내 헛웃음과 함께 통쾌한 웃음까지 흘린다.
자신보다 못한 친구 재호가 여자 후배로부터 칭찬을 받고 멋있다는 소리를 듣자, 대뜸 그 친구의 못난 얼굴을 들춰내며 어쩔 수 없는 생존 전략일 뿐이라는, 친구의 아픔을 이해하는 듯한 말을 건넨다. 하지만 속내는 친구가 칭찬받는게 기분 나쁜 것이다는 <칭찬은 고래 친구를 도발한다>라거나, 너무나도 착한 정군이라는 친구, 어렵고 힘든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는 모습에 주인공 최군과 사슴은 부자이니까 가능하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정군이 부자가 아님을 깨닫는다. 그래서 이것은 그릇의 차이임을 자각하고 자신들을 부끄러워하다 문득 정군의 일기장을 훔쳐본다. 그 일기장엔 친구들을 난자하는 그림과 욕설이 쓰여져 있다. 최군은 정군을 안으며 친구야 사랑해를 외치는 <친구의 조건>등은 사람간의 관계 속에 감추어진 속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도덕적 위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방 어퍼컷을 날리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책의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마지막 한 컷 속에 담긴 글들이다. 일단 그것들을 조금 나열해보자.
타인의 슬픔을 피해 달아나는 빠른 발걸음이 있다. 혹 내 생활이 더 나아질 일이 없더라도 슬퍼할 일은 없을 것이다고 생각하다 c8 성공하자라고 내뱉고. 쯔쯔 자네 혹시 진실은 통한다고 믿는 거야?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해보라는 말에 손을 얹었는가 싶었는데 실은 안 닿았다 라는 한 마디. 꼭 동정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가령 사랑한다거나.. 절대 동정이야! 다른 가설은 없어 라거나. 자기보다 부자인 후배에게 월 4만원 용돈 아껴가며 밥 사주다 후배의 정체를 알고 여윳돈 땅에 투자하자 라고 생각하는 등등.
내가 자라면서 배워온 가치관이 산산조각나게 만드는 현실을 이처럼 정확하게 표현하는 만화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부자 친구의 옷을 빌려입는 순간, 자신도 왠지 얼짱처럼 느껴지며 마치 상류계급에 속한 듯 행동한다거나, 富란 그렇게 소중한 것이 아니라고 지껄이면서도 실은 먹지 못한 포도는 실 것이다는 것 때문에 나오는 변명거리로 치부하는 등, 위선이라고는 한 자락의 껍데기도 걸치지않고 그야말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 속말에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이내 가슴 한 켠이 시려오는 것은 내가 이미 위선으로 치장되어져 있는 사람임을 절실하게 느끼기 때문이리라.
현실과 이상 사이의 차이가 클수록 지켜내기 힘든 일관된 자아의 정체성. 돈의 맛이 얼마나 달콤한지 안 후에도 그것에 종속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용기의 부재. 단 몇 컷의 만화 속에서 크게 깨우친다. 속내와 밖으로 표현하는 것 사이의 괴리에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소시민들에게, 삶이 결코 스카이라인으로 내비쳐지는 불야성이 아니라 배기가스가 온통 진동하는 지하단칸방인 사람들에게 이 만화는 따뜻한 위로가 되어줄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