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 또는 도덕성에 대한 고민은 예로부터 계속되어 왔다. 지금도 딱히 선천적 또는 후천적인 것인지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진 못하고 있다. 그러나 맹자나 루소의 성선설이나 순자, 마키아벨리, 홉스의 성악설을 비롯해 고자의 성무선악설 등 인간의 본성을 이야기한 것들은 그것이 선하건 악하건 간에 대부분 후천적 변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하지만 현대의 연쇄살인이나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에 대한 평가 또는 판단은 사이코패스라는 용어를 만들어내며 유전성, 불변성을 그 특징으로 내세운다. 인격장애라는 것이 유전이라는 선천적 요소로 인한 것이며, 그것의 변화 가능성이 없다는 전제하에 우리의 인격도 어느 정도 유전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할지라도 억지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샴 쌍둥이나 일란성 쌍둥이도 그 성격에 현격한 차이를 지니는 경우가 있다. 주디스 리치 해리스가 지은 책 <개성의 탄생>에서는 왜 내가 유일한 나이며 그것이 어떻게 형성되어 가는지를 보여준다.

 

      

 

 

 

 

 

 

 

리암 니슨이 주연한 영화 <언노운>은 <토탈 리콜>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언노운을 보기 전까진 토탈 리콜을 재패니메이션 <공각기동대>와 같이 나라는 정체성과 기억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런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언노운을 보면서 다른 부분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라는 정체성 즉 기억이 바뀐다면 인격, 도덕성마저도 한꺼번에 바뀔 수 있느냐는 것이다. 즉 유전적 측면에서의 성격의 발현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오로지 후천적 경험만이 셩격을 좌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영화가 직접적으로 이런 문제를 거론하고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끝내 지울 수 없었던 질문이 바로 이것이었다.

(스포일러 주의) 리암 니슨은 학술 대회 발표를 위해 아내와 함께 프랑스 파리에 온다. 하지만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기억을 잃는다. 몇일 후 기억을 되찾은 그는 아내를 만나기 위해 호텔을 찾는다. 하지만 그녀의 곁에는 리암 니슨이 자기라고 믿었던 남편이 버젓이 함께 있다. 누군가 자신의 행세를 하고 있다고 믿은 그는 자기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결국 그가 테러를 저지르기 위해 자신의 행세를 하고 있었음을 알아챈다. 그리고 테러를 막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던 중 자신의 기억을 더욱 온전하게 되찾으며 자신 또한 테러범임을 자각한다. 가짜 행세를 하던 테러범은 자신이 실패했을 경우에 대비한 동료였던 것이다. 자, 그럼 지금부터가 문제다. 리암 니슨은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와 테러를 저질러야 하는가, 아니면 테러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진짜 자신이라 믿었던 선량한 학자로 돌아와 평화를 지켜내야 하는가. 영화는 후자를 택한다. 잔인함으로 가득했던 사람이 선량함이 넘치는 사람으로 변신한 것이다.

 

  

 

 

 

 

 

만약 모든 것이 이렇듯 후천적인 것이라면 사이코패스의 기질을 가진 사람들의 기억을 조작함으로써 선량한 사람들로의 개조도 가능할 것이다. 물론 이것이 공익을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비윤리적이며 폭력적이라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는 있다. 영화 <클락워크 오렌지>에서는 바로 이런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성범죄자들에게 화학적 거세를 하는 것은 허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마무리를 지어보자. 예전엔 유전이라 하면 불변의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유전의 발현성 여부는 환경과 연관되어져 있다. 유전이 모두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위치가 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성선설이든 성악설이든 그들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문화, 교육 등을 통해 선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그 사회의 의지가 필요한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디로 나아가고자 하는가. 인간성이라는 단어 마저도 상실한 채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익이라는 거대한 그물에 갇혀 허우적 대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나는 얼마만큼 지독하게 이기적인지를 자문해 볼 일이다. 자본주의라는 현대사회가 가르쳐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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