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에서 방영하고 있는 <지금도 마로니에>라는 프로그램은 60년대초 서울대생 3명을 중심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그리고 있다. 정치학과의 김중태, 불문학과의 김승옥, 미학과의 김영일(김지하). 그리고 동시대의 문화인들 천상병, 전혜린, 임권택, 신중현 등이 나오는데, 특히 앞의 세 주인공들을 둘러싼 고뇌와 그들간의 관계가 가슴을 저리게 만들곤한다.
항상 <죽고싶다>라고 소원하던 김지하에게 김승옥은 제발 죽지말고 살아달라고 말한다. 어렸을적 자신의 누이동생의 죽음으로 인해 항상 죽음에 대한 강박과 두려움 속에서 살았던 김승옥은 진심으로 그가 살아있기를 원했다. 지하는 이 단어를 아마도 가슴 깊숙히 묻어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발걸음을 옮긴 고향 원주. 이곳에서 그는 막 감옥에서 출소한 장일순을 만난다. 밥 한그릇에 담긴 우주와 밥 한그릇에 담긴 어머니의 사랑을 말하는 장일순을 뒤로 하고 김지하는 아버지와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눈다. 공산주의에 발을 담갔던 아버지는 <나는 실패자였다>라고 토로하고, 김지하는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님을 외친다. 그리고 다시 원주를 떠나려 역에 도착할 때 그를 기다리고 있던 장일순이 전해주는 서예 한 점. 화선지를 펼치면 바닥을 기어 천리를 가다라고 쓰여 있다. 김지하는 살아야겠다라고 다짐한다.
천리를 가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다. 천리를 빨리 가려고 길이 아닌 곳을 가지 않는다. 그것이 길임에 바닥을 기어서라도 간다. 바닥을 김으로써 흙의 냄새를 맡으며 간다. 바닥을 김으로써 손과 발이 모두 흙과 함께다. 바닥을 김으로써 흘리는 땀방울이 땅을 적시는 것을 본다. 바닥을 김으로써 거친 숨의 의미를 안다. 바닥을 김으로써 삶의 모든 고통을 온몸으로 받는다. 그렇게 한손 한발 절대 포기하지 않고 기어간다. 그래서 끝끝내 천리를 간다. 그래서 끝끝내 천리를 가리라. 바닥을 기어서 천리를 가리라. 살아있음을 온 몸으로 느끼리라. 결코 잘났다고 까치발을 하지 않고, 결코 잘났다고 자동차로 씽씽 달리지 않고, 천천히 천천히 그렇게 바닥을 기어 천리를 가리라. 남에게, 세상에게 잘난체 말고, 기어 기어 그렇게 천리를 가리라. 온 생명의 힘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