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 한 오라기의 혁명
후쿠오카 마사노부 지음, 최성현 옮김 / 한살림 / 199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한마디로 자연을 이야기하고 있다. 자연이란 아무 것도 하지말라는 의미다. 아무 것도 하지말라고 해서 숨쉬기조차 거부한다면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꼴이다. 아무 것도 하지말라는 의미는 인위적인 것을 하지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또 방임과 구별해야만 한다.

자유와 방임의 차이는 과수 작물의 비유를 통해 알 수 있다. 나무가 어렸을 때 한번이라도 가지치기를 했을 경우, 그 이후 나무에 손을 대지 않게 되는 경우엔 모두 고사해버린다. 반면, 어렸을 적부터 자연그대로 커온 나무는 스스로 잘 자란다. 병충해도 없고, 농약도 비료도 그외 잡다한 작물 기술도 전혀 필요없게 된다. 이것은 그대로 교육에도 도입된다.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음악을 안다. 새소리와 물소리 등을 음악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여기에 잡음이 끼어든 순간 어린이의 귀는 혼돈을 일으킨다. 그래서 음계를 배워야 하는등 처음부터 다시 음악에 대해 공부를 해야만 한다. 진짜 음악이 사라진 자리에 인위적인 음악이 들어선다.

저자는 이런 자연과 방임, 또는 인위적인 것과의 차이를 스스로 농사를 지어보이며 증명해보인다. 25살 이후 40년간 자연농법을 통해 과학적이라고 여겨지는 농법보다 우수한 결과물을 내놓는다. 쌀과 보리를 연이어 지으면서 땅을 갈아엎거나, 제초제, 비료 등도 쓰지 않고, 오직 추수할때의 짚만 땅에 흩뿌려 둠으로써 이 모든 작물들을 풍족하게 거두어들인 것이다. 이 농사법에선 잡초도 없다. 잡초 자체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잡초라고 여긴 그 모든 것들이 수확하고자 하는 작물과 공존하면서 서로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즉 천적을 키워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며 거름이 되어주기도 한다. 풀과 벌레가 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공생하는 평화적 삶의 양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농기계를 도입하고 비료를 뿌리고 제초를 하며, 농약을 치는 것일까? 증산이라는 목적이었다면 이건 거짓말임이 저자의 40년 농사를 통해 드러난다. 그렇다면 또 다른 무엇? 아마도 맛의 질을 높이자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제철이 아닌 때도 마음껏 즐길 수 있고, 보다 맛좋은 것을 생산하기 위해 종자를 개량한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맛을 즐기기 위해 쌀의 껍질을 벗기고, 하우스를 짓고해서 생겨난 것들이 진짜 맛이 있을까? 영양도 맛도 상실한 그 거짓된 것에 사람들이 중독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어렸을 적 가지치기를 당한 어린 나무와 같다. 그래서 자연스런 맛을 잃고 인위적인 보살핌이 죽을 때까지 필요하게 된다. 물론 농기구나 제초제, 비료와 같은 석유관련 사업들의 팽창으로 인한 압력 또한 무시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으면서 희망을 가져보는 것은 3인 가족이 1500평이면 자급자족하고도 남는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으며 노동에 얽매이지 않고 많은 시간을 여유롭게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목표를 세우고 그것에 얽매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또는 목표를 상실하고, 우왕좌왕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런 삶은 아무 목표도 없이 그저 삶이 자연스레 흘러가는 즐거움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게 돌아갈 수 있을까 염려가 된다. 개개인 각각은 물론 이런 삶을 영유하고 싶어하고, 또 영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자의 소국과민은 유토피아일뿐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갖는 것은 사람이 하나 둘 모여 조직이든 공동체든 어떤 모습을 띠는 순간, 개개인의 이기적 욕망 때문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본성, 즉 안주하는 삶보다는 모험을 택하는 자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기생자, 즉 무임승차라는 욕망을 드러내기도 한다. 모두가 평화롭게 자신의 땅을 일구면 좋을테지만 착취하는 자가 나타날 수 있을 것이며, 그 착취여부를 떠나서 안주하는 삶을 택하지 않고 돌아다녀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즉 모두가 안주하고 싶다는 전제가 성립되지 않는다면 실은 불가능한 혁명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성스러움에 절절매지 않고, 목표를 향한 절대 의지에 얽매이지 않는, 자연스럽고도 평화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증표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용기를 얻게 된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거나 자연과의 합일 등의 묘사 자체도 거추장스럽고, 그 원뜻을 상실케 할 정도라고 생각될만큼 청정한 삶이 가능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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