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온 편지 - 작가정신 소설향 10 작가정신 소설향 10
장정일 지음 / 작가정신 / 199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소설(장정일은 그저 읽을거리라고 말하지만)은 사마천의 <사기>에서 나온 단 2단락을 바탕으로 탄생했다. 진시황의 맏아들 부소가 아버지의 미움을 받아 변방으로 쫓겨났다는 사실과, 자결을 강요받는 아버지의 유서로 인해 목숨을 끊는 장면. 이 두줄의 서술이 한권의 책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은 책의 말미 비평을 쓴 이의 말마따나 '검은 구멍'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잘 메꿔준 듯하다.

누구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무도 모르는 구멍. 숱한 이야기들이 쌓여 있는 가운데서도 홀로 뻥 뚫린 채 나를 기다린 구멍. 오직 나만이 채울 수 있는 구멍. 주위가 밝으면 밝을수록 더욱 어두워지는 구멍. 그 구멍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는 역사소설을 쓸 수 없다.(100쪽)

이러한 구멍메우기는 김훈의 소설<현의 노래>에서도 보인다. 삼국사기였는지 삼국유사였는지 모르겠으나 우륵이 가야금을 들고 신라로 도망쳤다는 단 몇줄의 기록만으로 소설은 탄생한 것이다. 이런 구멍메우기는 역사소설 속에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 이런 구멍 메우기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이 제격이 아닌가 싶다. <뇌>나 <아버지들의 아버지>에서 보여주는 과학적 사실과 이론들 사이의 구멍을 현란하게 메우는 그의 소설들은 재미있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구멍 메우기는 먼저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재미가 없는 구멍메우기란 쓸데없는 짓거리다.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재미가 없다면 구멍메우기는 땀만 흘리고 마는 허사로 끝난다. 차라리 메우지 않은 구멍속으로 사람들이 빠져, 끝간데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남겨져 있는 것이, 고갈되지 않는 상상의 샘 역할을 할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재미란 무엇인가? 도대체 어떻게 구멍을 메워야지 재미가 있을 것인가? 이것 또한 사람마다 다를터이니 개인적인 재미를 말하련다. 구멍은 분명 현대의 삽으로 메워져야 한다. 그 구멍이 과거든 미래든 현재의 흙을 파서 현재의 삽으로 메워지지 않는다면 구멍은 그저 구멍으로 남는다. 구멍이 지금의 나에게 자극을 가져다 주어 뒤통수를 후려 갈기거나, 멱살을 잡아채지 않는다면 시간낭비다. 현재의 삽이 아니라면, 생전 듣도보도 못한 삽으로 메워야 한다. 그런 면에서 <중국에서 온 편지>는 재미있다.

어떤 평론가의 말마따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해결하는 방안으로서 아버지를 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이기를 거부하고 여자로 변신해버린다는 발상은 얼마나 매혹적인가? 살부가 아닌 성적 변모라니...

권력, 힘을 빼앗길까봐 자식을 변방으로 내쫓은, 하늘 아래 유일한 태양을 자처하는 진시황. 그리고 힘없이 쫓겨난 아들 부소. 아들은 복수를 꿈꾸지 않는다. 대들어봤자 꺾일게 뻔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수모를 어떻게 견딜것인가? 부소는 여자이기를 선택한다. 힘의 싸움이라는 전제를 없애버린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힘을 누리소서. 나는 당신의 권력을 조금만큼이라도 찬탈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발 나의 목숨을 그대로 놔 주시구려. 당신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구려. 그러나 그런 여자되기는 아버지를 향해 있어야 했다. 진짜 아버지가 아닌 가짜 아버지 몽염 장군을 향함으로써 기어코 그는 힘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전제를 뒤집었으나 결과를 뒤집진 못했다. 그것은 만리장성 안이라는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진시황의 세상에 여전히 발을 딛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전제가 뒤집혀진 새로운 세상 속에서 살았다면 아마도 그는 자신의 사랑을 이루지 않았을까? 양성자로 변했어도 그 또는 그녀는 여전히 진시황의 그늘에서 벗어나진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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