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0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인생이 추리소설 같다면야 얼마나 좋겠는가. 사필귀정에서 한치도 어긋나지 않은 삶이라니. 1+1=2일 수밖에 없는 곳에서의 삶은 단순하지만 명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디 우리네 인생이 그러던가? 느닷없이 찾아오는 우연한 사건 때문에 또는 우연한 만남 때문에 모든 것이 뒤엉켜 버리기 일쑤다. 잠깐 한발자국만 떨어져 바라보면 그런 삶이 재미있을련지도 모른다. 우리가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무미건조한 일상보다는 파란만장한 삶의 모습이나 환상, 모험들을 쫓아 나서는 모습처럼 말이다. 그러나 당사자에겐 괴로울 뿐이다. 거의 미쳐버릴만큼. 거의 손아귀에 잡을 만큼 쫓아간 그 무엇이 순간 불어오는 바람에 날아가 버리듯이 우연은 그렇게 순간 불어와서 우리네 인생을 날려버린다.

소설은 천재적인 한 경감의 몰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천재성이 결국 인생에서 빛을 발하지 못하고 미치광이로 고꾸라지는 비참함만 드러낸다. 빨간 치마를 입은 어린 소녀의 연쇄적인 죽음. 경감은 그 패턴을 이해하고, 함정을 만든다. 기어코 걸려들 수밖에 없는 치명적 덫. 하지만 경감은 뜻을 이루지 못한다. 거기엔 누구도 예상못한 우연한 사건이 끼어들기 때문이다. 목숨을 걸고 범인을 잡겠다는 약속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 누가 되었든. 아~  알고보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이 책 속에선 약속 말고도 <사고>라는 단편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 <사고>또한 우리의 사고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사고를 일으키는 재미를 준다. 세일즈 맨의 자동차가 멈춰 서버리자 그는 하루를 인근 마을에서 보내기로 한다. 젊은 여자를 생각하며 모험심에 가득차 마을로 향하지만 여관은 이미 만원이다. 그래서 향한 곳이 민박(?). 주인은 은퇴한 판사. 집에 찾아온 친구들은 검사, 변호사 출신이다. 그는 저녁을 먹으며 이들과 재미삼아 재판을 받는다. 자신은 아무런 죄도 짓지 않고 살았다며 자신하는 주인공. 포도주 한 두 잔이 창자 속을 파고들면서 호기가 발동한다. 자기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일즈계의 규칙대로 살아왔다. 그래서 좋은 차도 얻고 승진도 했다. 물론 이런 초고속 승진은 상사의 죽음으로 생각보다 일찍 다가왔지만 말이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검사의 추긍으로 점차 상사의 죽음이 자연사가 아닌 세일즈맨의 고도의 책략으로 발생한 살인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세일즈맨은 끝끝내 자신의 순결을 주장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행동들이 과연 순수했는지 의심을 갖기 시작한다. 세일즈계의 도리를 다한 삶 그것 자체가 이미 문제를 발생할 여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신은 무결하다고 주장해도 그가 걷고 있는 길 자체가 이미 피로 이루어진 길이라면 그의 온 몸은 이미 피투성이일 뿐인 것이다.

세일즈맨의 심리적 변화를 쫓아가는 것은 흥미롭지만 섬뜩하다. 지금 내가 무해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해도 그 길이 이미 누군가의 희생 속에서 이루어진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도덕적인 삶은 결코 만만치 않다. 특히 현대의 이런 경쟁사회 속에선 말할 필요조차 없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음흉한 웃음이 내 가슴 속에서 몰래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자양분은 무죄다. 그러나 그 열매는 유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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