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돌도 안된 아이에게 고함을 쳤다. 아니 고함이라기 보다는 분풀이를 위한 절규였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아이는 처음 듣는 고함소리에 놀라는 눈치다. 갑자기 울음을 뚝 그치고 눈치를 살핀다. 물론 잠깐이지만. 이내 다시 떼를 쓰기 시작한다. 하지만 한번 더 아이에게 고함을 칠 순 없었다. 아이가 깜짝 놀라는 모습에서 왠지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대단히 잘못했다는 느낌이 떠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고함은 그저 나의 분을 삭이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지독한 감기 몸살이었다. 몇년 만에 이렇게 앓는 건지 모르겠다. 아이로부터 시작된 감기가 온 가족에게 다 옮겨간 것이다. 그러니 아기도 얼마나 컨디션이 나쁘겠는가. 안겨있으면서도 계속 칭얼댄다. 한두시간은 어떻게 참아보았지만 세시간을 넘어서니 그 울음소리가 내 신경을 자꾸만 갉아먹는것 같다. 더구나 몸살에 걸린 몸뚱아리가 제발 쉬고 싶다고 아우성치는 것 같았다. 한계를 넘어섰다고 느끼는 순간 고함은 거리낌없이 튀어나왔다.
법륜 스님은 짜증과 성냄은 모두 다 자기만을 생각했을 때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타인의 입장에서 취하면 성낼 일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나는 가깝지만 타인은 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짜증과 성냄 속에서 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돌아봤다. 아이에게 고함을 친 일은 분명 내 몸과 마음이 지쳐있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쉬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즉 오직 나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어떤가. 몸에 열이나고 콧물이 흐르고 눈꼽이 끼는 불편함을 스스로 조절할 수 없으니 얼마나 답답한 일이었겠는가. 이런 불편함을 단시간에 없앤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그저 칭얼대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모든 문제의 해결을 개인이나 마음가짐으로 푸는 건 제도나 환경의 개선을 가져올 기회를 날려버릴 수 있다는 점에서 조심해야 할 부분이긴 하지만, 때론 꿈쩍도 않는 벽 앞에서 통곡하지 않고 웃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일 수도 있다. 일단 짜증나고 화가 난다면 먼저 자신을 돌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