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을 찾아서
박정석 지음 / 민음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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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을 떠나고 싶다. 라고 하루에도 수십번 되뇌인다. 떠나고 싶은 이런 강한 욕망에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밥벌이라는 핑계를 대고 숨는다. 안주한다. 소심하게도. 대신 여행책이나 읽으며 대리만족을 느낀다. 제길, 나도 이렇게 떠나야 하는데... 이 책 쓴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여행을 시작했을까. 밥 먹고 살 걱정은 없는걸까. 엉뚱하게도 저자에게 화풀이 한다.  

누군가는 여행은 돌아올 곳이 있기에 참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휴가야 말로 최고의 여행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일상을 포기하고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 길고 긴 여행을 다녀온 후 그의 일상은 새로이 만들어져야만 한다. 사람들은 후자를 꿈꾸어도 용기를 내지 못한다. 휴가라는 짧은 여행에 만족할 뿐이다. 그래서 휴가는 항상 계획이 동반된다. 그 계획마저 귀찮은 사람은 패키지를 떠난다.  

이 책의 저자는 인도네시아 남동쪽 현지인들이 오라라고 부르는 코모도 드래곤을 찾아 여행을 시작했다. 일종의 도마뱀 종류로 인도네시아인들조차 일부러 찾는 곳은 아니다. 패키지와는 완전히 상반된 자유 여행이다. 그 와중에 패키지 여행자들을 마주치지만 그는 이들을 결코 얕보지 않는다. 여행가로서의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머나먼 과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 이분법적인 사고가 횡행하는 가장 큰 이유는, 편견이라는 기제가 인간의 작고 가엾은 뇌에 가능한 무리를 적게 주는, 주어진 에너지를 가장 효율적으로 쓰는 동시에 심리적인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는 두뇌의 구동 방식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즐겨 편견을 갖는 것은 그것이 자동 엘리베이터만큼이나 편리하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단추를 누르는 대신 가파른 계단을 걷고 걸어 목적지인 결론에 닿으려고 하는 사람은 다리 근육 유지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소수뿐이다. 여행과 관광을, 배낭족과 트렁크족을 굳이 구분하려고 하는 시도 또한 워낙에 분류 - 주어진 정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는데 필수적인 전제이다 - 를 좋아하는 인간 본성에 이분법의 편리함이 중첩된 결과이리라. 한 인간이 지적인 훈련을 쌓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미덕이라면 선명한 검은새과 흰색의 양극단 사이에 다양한 층층의 회색빛을 띤 스펙트럼의 영역을 일구어 내는 것이다. 뇌의 구조를 본래와는 다르게, 자체 내의 효율이 아니라 타자의 눈을 닮은 합리성을 추구하도록 바꾸어가는 것. 우리 몸에 각인처럼 새겨진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하는 것. 마침내 중력을 이겨내는 것. 193쪽  

코모도 섬으로 가기 위해선 자바, 발리, 롬복, 숨바와를 거쳐야 한다. 그런데 저자는 발리, 롬복, 우붓, 메단에서 머물다 목적지인 코모도에 가지 못한다(않는다?). 하지만 후회하는 모습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코모도 섬으로 떠날 수 있는 바닷가 민박집 앞에서 만난 프랑스 할머니의 말이 그의 심정을 헤아리게 만든다.  


서두를 필요는 전혀 없어. 그건 과업도 아니고 뭣도 아니니까. 여행은 의무나 목적이 아니고 오로지 즐거움이야. 집에서는 미처 모르던 것을 길에서 찾는 일이지. 너무 조급해하지만 않는다면, 시간만 넉넉히 둔다면, 너는 어디든지 갈 수 있을거야. 원한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280쪽
 

호숫가 생활이 평화로운 이유는 할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바다에서와는 달리 서핑도, 다이빙도 할 수가 없었다. 하염없이 호수를 바라는 것 이외에는 산책과 낮잠, 독서와 수영이 전부였다. 흙냄새가 풍기는 민물고기 요리와 꿀처럼 달콤한 망고를 까먹기에 지친 나는 이만 호수 마을을 떠나 북쪽의 메단으로 가기로 했다.  220쪽  

맞다. 여행은 즐거움이다. 저자가 걱정하고 있지만 사고의 편의를 위해 나도 조금 분류를 해봐야 겠다. 여행의 종류는 크게 역사, 자연, 문화를 맛보는 세가지로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각자의 개성이나 취향에 따라 좋아하는 것이 다를 것이다. 사람을 만나고 시장풍경이나 생활상을 엿보는데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들은 문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산과 바다, 강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자연, 나와 다른 곳에 살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문명을 발전시켰는지를 알고 싶은 사람들은 역사를 중시할 것이다. (휴양은 자연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인도네시아 여행에서 이 세가지를 단 한방에 해결해버린다. 오랜 여행의 공력이다.  

낯선 시간과 공간을 오가며 현기증을 느끼는  몇 초의 순간이야말로 내가 알고 있는 극도의 쾌락과 사치의 정점이었다. 252쪽 
 

 역사, 자연, 문화 모두 그 낯섬의 대상일 뿐이다. 때론 여행을 하는 순간 여행자 자신이 바로 낯선 모습이 될 수도 있다.

환경은 인간을 바꾼다. 모범생인 G는 표정마저 이전과는 달라진 것 같았다. 따분한 내가 아닌 다른 어떤 인간, 실제보다 훨씬 더 멋지고 자유로운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이 발동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실재란 개인과 환경 간의 지속적인 관계가 만들어 낸 허상에 불과한 것일까. 내가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을 때 G는 들릴락말락 아주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행복에 겨운 사람처럼. 115쪽 

그래서 여행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며, 그 탈출을 통해 즐거움을 얻게 된다. 그런데 일상이 즐거움 그 자체라면 어떨까. 일상이 여행같다면 어쩔까. 헛된 꿈일까. 하나의 망상일 뿐일까. 

사람들은 용을 일컬어 이 세상에 없는 상상 속의 동물이라고 말한다. 용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은 모두들 단 한 번도 그 동물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없는 것이라고, 세상 어느 구석진 곳을 찾아가면 혹시 있을지도 모르지만 흔히들 없다고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중국인 루쉰의 말대로 희망과도 같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땅 위의 길과 같아서, 사실 땅 위에는 애초 길이 없으나 걸어가는 사람들이 생기면 곧 길이 되는 것이다.2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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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도 좋은 여행이 있단다.

개발도상국을 여행함으로써 인류의 행복과 세계 평화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여행을 통해서 현지에 도움을 주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로 현지에서 달러를 씀으로써 곤궁한 현지인들의 경제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가 운영하는 숙소나 교통수단의 이용을 가급적 피하고, 거대한 공룡과도 같은 다국적 기업이 운영하는 곳 또한 가능한 한 이용하지 않는 편이 바람직하겠다. 즉 현지인들이 소규모로 운영하는 곳에 돈을 쓰자는 말이다. 여행으로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두 번째 방법은 상대적으로 우리에게 덜 알려진, 혹은 왜곡되게 알려진 지역을 여행하고 이해함으로써 그간의 몰이해와 편견을 줄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세심한 관찰이 필요하며, 현지인과 대화를 해볼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아무리 수줍은 여행자라고 해도, 가장 보수적인 여행지라고 해도, 낯선 이와 대화할 기회는 종종 찾아오기 마련이다. 일부러 피하지만 않는다면. 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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