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자 X의 헌신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이성과 감성의 대결은 시대를 구분짓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이성에서 감성으로, 감성에서 이성으로 삶의 영역은 줄타기를 해왔다. 최근엔 이성이 모든 영역으로 확장되던 근대의 시기에서 벗어나 점차 감성을 중시하는 시대로 옮겨오고 있는 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논리적 사고보다는 창의력을 중시하는 사회도 이런 흐름 중의 하나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구분은 인간을 정의짓는데도 사용된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철인이 이상형이 되기도 하고, 풍부한 감성을 지닌 예인이 이상형이 되기도 한다. <용의자 X의 헌신>은 추리적 형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그 안에선 이성과 감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용의자 X의 헌신은 크게 두가지 질문을 갖게 만든다. 도대체 알리바이를 어떻게 만들었는가? 제목이 뜻하는 것처럼 왜 용의자는 그토록 피의자에게 헌신하는가?이다.  

딸과 함께 사는 하나오카는 어느날 아파트로 찾아온 백수 전 남편과 실랑이를 벌이다 딸의 우발적인 행동으로 남편을 죽이고 만다. 이들의 살인을 알아챈 옆집에 살던 수학 천재 이시가미는 모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넨다. 아무도 깨뜨릴 수 없는 알리바이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반면 이시가미의 친구이자 천재 물리학자인 유카와는 그 알리바이를 깨뜨리고 진짜 범인을 잡기 위해 머리를 굴린다. 그리고 감추어졌던 진실들이 드러나는데... 

영화의 재미는 알리바이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또한 깨져가는지를 보는데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도대체 왜 이시가미는 살인죄를 뒤집어쓰면서까지 모녀를 도우려 했는가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데서 재미를 찾을 수 있다.  

알리바이가 깨지는 것은 함정문제라는데 힌트가 있다. A처럼 보이는 문제가 실은 B였다는 것을 알아야지만 B의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A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를 풀어낼 수가 없다. 영화 속에서 A는 시간과 공간이다. 이것울 푸는 것은 이성적 재미를 건넨다. 

한편 이시가미의 헌신과 이를 스토커처럼 오해했다 그 진심을 알게된 하나오카의 보은의 태도는 눈물을 글썽이게 만드는 감동을 건넨다. 사람이 살아가는 힘은 관심과 배려, 그리고 사랑임을 저절로 알아채게 만든다. 살아간다는 것은 훈훈함임을 뜨거운 절규를 통해 깨닫게 된다. 죽음 앞에서 돌아서게 만드는 힘, 살맛나는 것, 그것은 누가 뭐래도 사랑이다.

다만 그들을 위해 희생된 생명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 생명은 도대체 어디에 하소연을 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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