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도연대 雨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이길진 옮김 / 솔출판사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교고쿠 나츠히코의 소설을 읽는 재미는 고서점 주인 주젠지의 괴설이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논리를 전개해나가면서 일반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의심케 만드는데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보고 싶은 것만 보인다는 메시지를 강렬하게 전했던 전작들에 비해 이번 백기도연대는 김빠진 활극이라고 할 수 있다. 탐정 에노키즈의 초능력, 한 사람의 과거를 그 사람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 그 능력이 십분 발휘되면서 사건 해결에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에노키즈의 방약무인한 행동이 계산된 것인지 무작정 나온 것인지 헷갈릴 정도의 해프닝이 웃음을 머금게 만든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전의 소설이 유럽식 블록버스터였다면 이번 소설은 할리우드식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소설은 여전히 독설의 재미를 주고 있다.

개인은 개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싶지 않을 때 대중이라는 복면을 쓰는 겁니다. 책임 소재를 모호하게 하여 불특정 다수에게 전가시키는 비겁한 행위란 말입니다. 예컨대 개인이 발언하면 몰매를 맞을 폭언이라도 익명성 운운하며 방패막이 뒤에 숨는 순간 일반론으로 둔갑하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고유명사를 은폐함으로써 개인이 대중으로 둔갑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여 아무런 논의도 거치지 않고 하찮은 헛소리가 마치 민의를 얻은 정론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거예요. (31쪽)

현재 우리 모습이 비쳐지지 않는가. 인터넷의 익명성을 그야말로 적나라하게 말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인간관계란 전적으로 운명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중략) 어차피 인간은 모두 불가항력적으로 이미 형성된 관계의 테두리 안에서만 좋다거나 싫다고 떠들어대고 있을 뿐이다.(255쪽)

인간이란 욕심만 내지 않으면 어떻게든 살아가기 마련이오. (344쪽)

죄라는 것은, 벌을 받는 편이 훨씬 더 편한 법이지요. 법률이라는 것도 인간이 정하는 것이니까요. 이것은 일종의 주술입니다. 항아리에 값을 매기는 것과 다를 바 없어요. 무가치한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만이 가격은 아닙니다. 가격이란 것은 그렇게 정해지기 전까지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것의 가치를 10엔이면 10엔으로 한정시키는 작용도 합니다. 범죄도 마찬가지입니다. 행위 자체에는 의미가 없지요. 그것을 범죄라고 결정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경우에 따라 징벌이 따르겠지만, 뒤집어서 말하면 잘못하면 영원히 지속될지도 모르는 자책감을 징역 몇 년이라거나 벌금이 얼마라는 눈에 보이는 형태로 한정시키는 작용도 하는 것이지요. 형태가 없는 것에 형태를 부여하고 이름을 붙여 결말을 낸다. 이것이 악귀를 제거하는 방법입니다. (420쪽)

자책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태생적인 것인가, 교육을 통해서인가. 그 대답에 따라 주젠지의 말은 완전히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군인들의 전쟁 이야기만 듣고 자란 아이들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아무 생각없이 전쟁놀이만 할 테지. 전쟁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는 당연한 감각이 사라지는 거야.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438쪽)

우리가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의 의미는 그래서 중요하다. 매일 보는 텔레비젼과 신문, 그리고 이제 인터넷까지 그냥 흘려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백기도연대 속에 나오는 아귀들이 실은 모두 인간들이었음을... 군군신신부부자자의 공자말씀이 문득 생각난다. 인인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호쾌한 활극 속에 감추어진 독설 속에서 잠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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