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본 애니메이션 <아인>은 2016년 작품이다. 벌써 10년이 다 돼간다. 이제서야 작품을 접했지만, 방금 갓 방영된 작품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만큼 작화가 뛰어나다. 특히 총격신을 비롯한 액션 장면은 정말 실감난다. 이 장면 그대로 실사로 옮긴다해도 될 만큼 사실적이면서도 흥분을 자아낸다. 다만 인물들이 걸어가는 모습은 다소 흐느적거리는 느낌이 있다. 9점/10점 


2. 고등학생인 나가이 케이는 의사가 되기 위해 열공이다.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목표를 정하고, 감정적인 것을 멀리하고 차갑고 논리적인 사고를 중시한다. 그러다 우연히 교통사고를 당하는데, 죽었다가 멀쩡하게 다시 살아난다. 항간에 알려진 죽지 않는 존재, 다시 부활하는 존재 아인이었다. 일본에서 발견된 세번째 사례다. 나가이는 자신이 실험실에 끌려가 실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하고자 공권력으로부터 도망을 친다. 그의 도주는 어떤 결말에 이를까.


3. 애니메이션 <아인>에서는 아인이라는 존재를 상업적 도구로 사용하는 장면이 나온다.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 다시 살아난다는 성질을 이용해 각종 위험한 실험에 피험체로 쓰는 것이다. 생화학 무기나 살인 무기를 비롯해 의약품의 임상 실험 등등, 차마 인간에게는 하지 못하는 적용 실험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해 댄다. 정부는 기업체와 함께 이 사실을 숨기고, 돈벌이에 혈안이다.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칸트의 말은 아인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아인을 인간으로 분류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4.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대부분 수단으로 사용되어지는 것은 아닐까. 또는 쓸모있는 사람이라는 말 속엔 이미 수단으로서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났을 때 목적으로 대하라는 것이지 일(노동) 대 일(노동)로 만났을 때는 수단으로 대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아인이 이용되어지는 모습은 수단으로 대해지는 극단적인 모습일 것이다. 목적으로 대해지는 순간은 찰나조차도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인권을 단순하게 수단과 목적으로 분류해 나눌 수는 없다. 다만 우리의 삶이 평생 수단으로서만 존재한다면 그 속에 인권은 없을 것이다. 한편으론 목적으로서 대해진다 하더라도 생명을 해하거나, 폭력이 동원되어진다면 그 속에도 인권은 없을 것이다. 목적을 잃지 않는 수단, 그 속에 인간이라는 가치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본다.     


5. 한편 사토라는 아인은 아인의 인권을 위해 테러라는 수단을 사용한다. 아인을 실험체로 사용해 왔던 것을 폭로하고 아인의 자치권을 인정해 달라는 요구를 정부에 보낸다. 아인을 수단으로 여기로 함부로 대했던 정재계 고위 인물의 명단 15명을 공표, 이들을 죽이겠다고 선언하고, 실제 이를 실행에 옮긴다. 하지만 사토의 목적은 아인의 인권 수호가 아니라, 재미다. 죽고 죽이는 전투, 전쟁에서 느끼는 쾌감이다. 반면 사토의 테러는 나가이가 그토록 원하는 평범한, 또는 조용한 삶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인간 대 아인의 대결은 사토 대 나가이의 대결로 바뀐다. 


6. 사토의 테러에 동참했던 아인들은 점차 사토의 테러가 도를 지나치고, 그 목적을 도외시한다는 것을 알아챈다. 이들은 사토의 명령을 거부하고, 그의 곁을 떠난다. 그 중 일부는 사토를 배반하는 것이 곧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음을 알고도 반대편인 나가이를 돕는다. 이런 모습은 우리의 지금 현실과 겹쳐 보인다. 항상 자신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고 캐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저 주어진 대로, 명령 받은 대로 맹목적으로 실행하다간 자칫 목적으로서의 삶이 아닌 수단으로서의 삶을 자처할 수 있다. 우리가 목적을 잃지 않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선 맹목적이기 보다 항상 선택의 경우를 만들고, 선택해야 한다. 그 선택이 목적으로서의 나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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