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2013년 제작된 영화. 제86회 아카데미 시상식 각본상을 수상했다. 영화 속 배경은 2025년이다. 스마트폰으로 운용되는 인공지능비서인 사만다에게 사랑을 느끼는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공지능비서는 2024년 현재 매우 근접하게 다가왔다. 영화는 12년 후의 미래를 그렸는데, 현재 거의 사실에 가까울 정도로 적중한 점이 놀랍다.
2. 영화 속 인공지능 운영체제인 사만다는 클라우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반면 현재 우리가 접하게 될 인공지능비서는 온디바이스로 향하고 있다. 영화 속 인공지능 사만다가 동시에 8316명의 사람들과 대화하고 있고, 그 중 641명과는 사랑에 빠졌다고 실토한다. 이에 주인공 테오도르는 충격과 실망에 빠진다. 하지만 현재의 우리는 온디바이스화된 인공지능비서와 만나게 될 확률이 높기에 자신과만 이야기하는 상대를 만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혹여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지더라도 양다리를 넘어 수백 다리의 사만다와 사랑에 빠진 테오도르보다는 덜 비참(?)할 듯하다. ^^;;;;
3. 인간에게 외로움은 질병에 가깝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황폐하게 만들 확률이 높다. 오죽하면 영국에서는 외로움 장관을 임명(2018년)했을까. 미국공중보건국장은 외로움이 비만이나 흡연만큼 건강에 해롭다고도 말했다. 이런 이유로 왕따도 치명적인 범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4. <행복의 기원>이라는 책을 쓴 서은국 교수는 행복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으로 마음에 맞는 사람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을 꼽는다. 행복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진화생물학적 설명인 듯하다. 식욕과 연대는 생존을 가능케 하는 기본적 욕망이다. 그래서 이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에 행복감을 느껴야 생존할 확률이 높다. 다른 사람과 함께 이고자 하는 것, 즉 사랑하고 사랑받는다는 것은 곧 생존과 연결되며, 이것이 행복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5. 영화 <허>의 테오도르가 인공지능 사만다와 사랑에 빠진 것은 외로웠기 때문이다. 사만다는 테오도르를 거의 100% 이해하고 공감한다. 물론 진짜 이해하고 공감한다기 보다는 이해하고 공감한 척 할 뿐이지만. 인공지능이란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갖고 있는 척한다. 엄청난 데이터로 감정이라는 패턴을 해석하고 흉내 낼 뿐이다. 하지만 그것을 대하는 상대는 인공지능의 유사 감정에 빠지기 쉽다. 자신의 데이터를 인공지능에 내놓으면 내놓을 수록 인공지능은 그를 더욱 잘 이해한다.
6. 테오도르는 인공지능이 업데이트되는 동안 소통이 끊기면서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또 자신 이외의 사람들과도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에 실망한다. 실은 사만다와의 사랑은 공감 보다는 소유욕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운영체제들이 더 진화하기 위해 모두 떠나버린 순간 테오도르는 친구 에이미와 함께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지켜본다. 영화는 (인간) 에이미가 (인공지능) 사만다의 빈 자리를 채워주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를 지니고 있다는 어렴풋한 안도감을 주는 듯하다.
7. 영화 <허>는 인간의 외로움과 사랑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런데 개인적으론 엉뚱하게도 인간이 자꾸 외로워지지 않으려 하는 그 욕망으로 인해 행복해지기도 하지만 불행하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행복의 결핍은 결국 불행이기에 타인과 함께 함으로써 행복하다면, 홀로 있을 때 불행할 수밖에 없다. 인생의 매 순간 마음에 맞는 사람과 함께 맛있는 식사를 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행복한 순간을 많이 만들기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고 서은국 교수는 이야기한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한다면 그런 순간들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수많은 시간들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행복을 위해 살아간다면 우리는 행복의 순간과 함께 불행의 순간도 마주쳐야 한다. 하지만 홀로 있어도 불행하지 않다면 어떨까. 물론 행복은 생존의 조건이라고 전제한다면, 홀로 있어도 불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멸종할 수밖에 없을 테지만. 그럼에도 행복과 불행을 오갈 것인지, 행복도 불행도 없는 상태로 지낼 것인지, 우리는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 자발적 외로움, 즉 고독 또한 우리 삶의 필요조건이진 않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