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 4월 22일 15도~29도 조금 흐림 초여름날씨
씨앗을 땅에 심으면 모두 싹을 틔우는 것은 아니다. 싹이 날 수 있는 조건이 있다. 그 조건을 충족시켰을 때에야 비로소 싹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식물은 씨앗을 만들어놓지만 정작 씨앗을 통해서보다는 뿌리나 줄기를 통해 번식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싹이 날 수 있는 조건을 인연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조건이란 어떤 시간과 공간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물 속에서 또는 진흙 속에서, 반대로 모래틈 같은 곳에서, 추위를 겪고 나서야, 또는 충분한 빛을 쏘이고 나서야 비로서 싹은 트는 것이다.
우리가 잡초라고 부르는 것은 지구와 인연이 잘 맞는 것이다. 일부러 씨앗을 뿌리고 싹이 날 수 있도록 보살피지 않아도 인연따라 싹을 틔운다. 그 인연의 파도 속에서 농부는 새로운 인연을 만들기 위해 애를 쓴다. 다만 그 애가 좀더 자연스러운가, 억지스러운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지난 늦가을에 퇴비 개념으로 뿌려놓은 무가 싹을 내밀어 자라고 있다. 늦가을에 싹을 내 어느 정도 자란 무를 내버려두어 죽게함으로써 3대 영양소 중 하나인 인 공급을 도모했었다. 그런데 그때 싹을 내지 못한 것 중 일부가 봄이 되어 비로소 싹을 내민 것이다. 이 무 중 일부는 무로 영양을 내보내지 않고 꽃대를 올려 꽃을 피운다. 성장보다는 생식이 급선무라 여기기 때문일터다. 지난 겨울을 나며 씨앗은 생식부터 할 것을 결정한 모양이다.
지난해 봄에 뿌려놓았지만 싹을 내밀지 않았던 더적 중에서도 올해 비로소 싹을 내민 게 몇 개 보인다. 어떤 조건이 맞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1년을 땅에서 묵고나서 비로서 싹을 내민 더덕이 신비롭다.
반면 어렵게 싹을 내민 것을 두더지들이 파헤치고 다니는 통에 죽음의 위기에 내몰리는 것들도 있다. 올해 특히 두더지 피해가 크다. 직파를 하면서 씨앗을 뿌린 곳에 물을 자주 주다보니, 이곳에 지렁이들이 몰리고, 두더지가 꼬이는가 보다. 직파의 어려움 중의 하나로 두더지도 꼽아야 할 판이다.
인연따라 씨앗이 자라고 죽는다. 농부는 좋은 인연을 맺도록 애쓰지만, 인연이란 좋고 나쁨이 없이 그저 인연이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농부는 다만 작물이 잘 자랄 수 있는 인연이 생기도록 거들면 그뿐이어야 한다. 오늘도 땅 속 어딘가에서는 인연을 만나 싹을 틔우는 것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