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영화 [버드박스]는 [콰이어트 플레이스]와 많이 닮아 있다. 갑작스레 다가온 공포의 대상, 두 아이를 지키려는 부모의 사투가 꼭 닮았다. 게다가 아버지(또는 남친?)의 희생과 편애, 질투로 오해받는 사랑의 모습도 닮은 꼴이다. 다만 [콰이어트 플레이스]는 괴생명체와의 대결에 집중하며, 극도의 긴장감을 자아내는 오락영화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면, [버드박스]는 한 집안에 갇힌 인간군상과 이곳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착지를 찾고자 하는 가족을 통해 인간과 삶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2. 영화 [버드박스]는 어떤 빛의 존재를 보는 순간, 자살 충동을 느끼며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게되는 사건을 다룬다. 집안에만 있다면 괜찮다. 하지만 식량과 전기 등등 생존을 위해 밖으로 나서야 하는 순간이 있다. 문제는 이 빛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정신병자라고 분류한 이들은 이 빛이 아름답다며 정상인이라 말해왔던 이들에게 빛을 보라고 강요한다. 살기 위해선 빛을 보지 않아야 하며, 이들로부터 떨어져 있어야 한다.
3. 사람을 자살로 이끄는 이 빛은 자신을 돌아보라고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 유혹은 바로 <과거>다. 떠나가버린 사람들과의 <추억>이다. 영화에선 명확하게 빛의 정체를 표현하고 있지 않지만, 마치 한국영화 [장산범]처럼 목소리로 유혹한다. 자신과 인연을 맺고 있다 떠난 사람들의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것이다. 그 목소리에 취해 눈을 뜨는 순간 빛을 들여다보게 되면서 자살충동에 감염되는 것이다.
4.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아이들을 키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법이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야만 한다. 그런데 살아남기만 하는 삶은 진정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삶이라 할 수 있을까. 꿈을 그리는 삶, 미래를 희망하는 삶이 없다면, 그 삶은 행복할 수 있을까.
5. 죽음으로 이끄는 빛이 다가오면 새들은 두려움에 울어댄다. 버드박스는 새들을 넣어둔 상자로 죽음의 빛이 다가오는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새들이 지저귀는 곳이 바로 새로운 정착지이다. 새들의 지저귐이 없는 곳은 이미 죽음의 도시일지 모른다. 마치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라는 책 속에 표현된 것처럼 말이다.
영화는 새로운 정착지를 유토피아처럼 그린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맹인학교를 거점으로 한 곳이다. 아쉽게도 유토피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유토피아를 찾는 영화인 셈이다.
6. 결국 [버드박스]는 과거와 추억에 발목잡혀 살지말라고 말하는 듯하다. 미래를 그리고, 유토피아를 찾아 길을 떠나라고 말하는 듯하다. 삶은 과거에 있지 않고 미래에 있다고 주장하는 듯이 보인다. 꿈꾸지 않는 삶이란 의미가 없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꿈은 나홀로가 아니라 더불어 꾸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