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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백수로 살기 - ‘청년 연암’에게 배우는 잉여 시대를 사는 법
고미숙 지음 / 프런티어 / 201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백수'라는 답이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시절이 있었다. 물론 이 백수는 먹고 살 수 있는 경제적 바탕을 갖추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지만 말이다. 그런 면에서 요즘 떠오르는 '파이어족'과 무척 닮아있다. 파이어족은 경제적 자립을 토대로 자발적으로 조기 은퇴를 추진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20~30대 때 극도의 절약을 통해 자금을 마련해서 40세 전후에 은퇴를 하는 것이다.
최근 백수가 되었다. 풀타임 정규직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7년 전엔 자발적 백수의 길을 택해 시골로 내려왔지만, 이번엔 비자발적 백수가 되다보니 기분이 다르다. 파이어족이 될만큼의 경제적 자립기반이 충분하지 않기에 다소 당황스럽다.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해가야 할까. 그래서 찾아본 것이 연암 박지원의 사생팬(?)이라 할 정도로 연암을 좋아하는 고미숙의 책 <조선에서 백수로 살기>였다.
연암을 본보기 삼아 백수로 사는 법이 이 책의 중심 테마다. 백수로 사는 법 중 어찌보면 가장 중요한 경제적 측면은 일본의 '프리터족'에 가깝다. 자유롭게 아르바이트 등을 통해 기본 생계를 꾸린다는 것이다. 되도록이면 돈을 벌기 위한 노동이 아니라 자신의 활동을 통해 수입이 되는 길을 찾는 것이 더 좋겠지만 말이다. 즉 저자 자신처럼 연암을 좋아해 공부를 하고, 이 공부 덕에 강연이나 책 등을 쓰면서 돈을 버는 방식 말이다. 생계를 위한 억지 노동이 아니라, 자신의 활동이 돈이 되는 길을 찾는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더라도 프리터로 활동하며 최소한의 생계비로 사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단 시간만큼은 어느 부자보다 많은 타임슈퍼리치로서 자유시간을 누리는 행복은 포기해서는 안된다.
백수는 노동의 소외에서 벗어난 존재다. 백수의 경제는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활동의 산물이다. 당연히 소비와 부채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동시에 투기 자본에도 포획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필요한 건 철학이다. 돈과 삶의 관계에 대한 인식론적 태도. 그게 바로 백수의 생명 주권이다.(69쪽)
자, 이제 쇼핑, 일, 연애, 뮤지컬 등등에 중독되지 않고-이런 것들은 대부분 돈이 없으면 누릴 수 없기에. 그래서 도서관 등 공유경제를 적극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활의 거품을 걷어내고 살아보자. 무엇을 위해 살아가지 말자는 것이다. 살다보니 찾아오는 것들은 적극 반기면서 살아가는 거다. 반복은 중독을, 중독은 우울을... 또는 고립은 우울을, 우울은 중독을, 중독은 충동과 폭력을,... 그러니 새로움을 찾아, 즉 나를 변화시키기 위한 길을 떠나는 것이 좋겠다. 소유와 독점으로부터 벗어나 공유할 수 있는 것은 경험이다. 경험의 공유는 친구들과 언제 어디서나 가능한 일이다. 새로운 경험이란 새로운 감각, 시선, 생각으로 반복에서 벗어나 배움을 준다. 명랑하게 길을 떠나 친구를 만들고, 또는 친구와 함께 길을 나서 새로운 경험으로 배움을 갈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미숙이 말하는 백수의 길은 그야말로 외적성향의 청년백수에게 적용될만한 행동요령이다.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고, 내적성향의 사람에게는 다소 버거운 제안이다. 다만 화폐가 주는 쾌락, 즉 여러 중독으로부터 벗어나고, 자신만의 활동(노동이 아닌)을 하라는 것은 새겨들을만하다. 어차피 최소한의 생계비로 삶을 유지해야하기에 거품은 걷어낼 수밖에 없다. 다만 길을 나설 수 없는 조건(과 성향)에서 끊임없는 배움을 어떻게 성취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깊다. 고미숙의 <조선에서 백수로 살기>가 꼭 정답은 아닐테지만, 백수로 명랑하게 살아갈 요량과 응원을 건네주는듯하다. 자, 한 번 가보자. 명랑백수의 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