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로 쓰기 - 김훈 산문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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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글은 단어 하나 하나를 꼭꼭 씹어서 읽게 된다. 그렇게 읽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읽을 수밖에 없다. 가령 다음 글을 한 번 보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야 보던 것이 겨우 보인다. (76쪽)

 

징검다리를 건너듯 한 단어 한 단어를 디디고 건너가야지, 자동차를 타고 씽~ 지나가듯 읽어낼 수가 없다. 혹여 그렇게 술술 읽다보면 갑자기 무슨 글을 읽었는지 영문도 모른채 지나치게 된다. 그러다 아차차! 하며 다시 술술 읽었던 부분의 처음을 찾아 꼭꼭 다시 씹어 읽게 되는 것이다. 이런 불편함? 또는 이런 섬세함이 바로 김훈의 글맛이라 할 것이다.

 

또한 김훈의 글은 단순한 감상으로 끝나는 것이 거의 없다. 기자 출신의 글쟁이들의 직업병마냥 꼼꼼한 취재를 바탕으로 쓰여진다. 이번 책의 <밥과 똥>을 한번 보자. 그 글 속에서는 다양한 출처가 쏟아져나온다.

 

국립생태원 소식지, 삼국유사, 일본 메이지 유신 분뇨 취급규칙, 고양 화장실 전시관의 전시자료. 동의보감, 정약용 <민보의>, 정약용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구약성서 신명기, 정의도 논문 <청동숟가락의 등장과 확산>, 유기영 논문 <저탄소 지비용형 서울시 분뇨처리권역 재설정기법 개발연구> 2012, 대가람의 뒷간 도록.

 

여기에 더해 자신이 직접 겪은 경험담이 살을 붙인다. 출처라는 뼈와 경험이라는 살이 더해져 글은 생명력을 뿜어낸다. 글의 출처들이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고 뻐기기 위한 것이 아니다. 글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들어주는 물과 같아 글 곳곳에 잘 스며들어간다. 

 

아무튼 이번 책 또한 삶의 현장을 많이 노래하고 있다. 그의 글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라는 속담에서 <이승이 좋다>가 아니라 <개똥밭에 굴러도>에 방점을 찍는듯이 보인다. 삶의 주름과 눈물을 이야기하면서 또한 미소와 흥을 노래하기도 한다.

 

이번 책에서는 유독 <전환>이라는 말이 눈에 띈다. 단어를 선택하는 데 있어 신중한 그가 변화나 진화라는 단어를 선택하지 않고 전환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일단 전환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부분을 살펴본다.      

 

오이지 항아리 속 전환의 진행방향은 그 놀라운 단순성인데, 오이지는 단순성을 완성해가면서 깊어지고 깊어져서 선명해진다. (222쪽) 오이지를 먹으며 중

 

생명은 그 자비없는 시간에 쓸리면서 시간이 가져오는 변화를 받아들임으로써 저 자신을 전환시키는데, 저 자신을 전환시키지 못하는 것들은 모조리 멸종해서 그 생명을 미래에 전할 수 없다. 이  전환이 건너뛰기 식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고, 수백만 년의 시간 속에서 수많은 멸종들의 무덤을 딛고 서서히 이루어진다. (449쪽) 고래를 기다리며 중

 

전환 속에는 분명 진보나 발전이라는 개념은 없다. 변화는 수동과 능동의 형태가 모두 가능하다. 하지만 전환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힘으로 바꾸어야 벌어지는 것들이다. 책 속에서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통해 그의 심정을 이해해가는 부분에서도 이순신의 전환을 말하고 있다. 삶의 위대함은 또는 위대한 삶이란 바로 이 전환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일까.변화를 요구하는 시대, 진화가 필요한 시대에서 우리는 전환을 도모해야 할련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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