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엑스맨 시리즈가 처음 선을 보였을 때는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소외된 자들에 대한 시선이 꽤나 매력적이었다. 돌연변이들의 상상을 자극하는 초능력은 감독의 시선을 화려하게 꾸며주는 포장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감독의 시선보다는 변이들의 특이성이나 액션의 화려함에 더 무게가 실리는 듯했다.

 

2. 진화라는 것은 변이를 통해서 진행되고, 이 변이는 뛰어난 능력이라기 보다는 환경에의 적응력을 통해 유전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물론 다른 동물들도 그렇겠지만)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한 두려움을 폭력을 통해 다른 것을 제거하거나 억제함으로써 해결해왔다. 그런데 만약 변이 중에 인간보다 탁월한 능력을 소유한 존재들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이 쉽게 제거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가진 존재가 등장한다면 말이다. 아무래도 이 존재들이 더 커지기 전에 어떻게든 제거하려 할 것이다. 항상 이들에게 지배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공존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테니 말이다. 변이의 입장에서는 이런 인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맞서 싸울 것인지, 타협을 통해 공존의 방법을 찾을 것인지.

 

3. 다크 피닉스 편은 다른 돌연변이들의 능력을 다 합친 것보다도 더 큰 능력을 지닌 존재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는 힘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영화의 전면에 내세웠다. 칼을 잡은 사람이 그것을 통해 사익을 취하고자 한다면 도둑이 될 것이요, 타인을 위해 움직인다면 의사가 될 것이다. 힘은 어떤 의도로 사용되느냐에 따라 약이 되기도 독이 되기도 한다. 엑스맨에서는 초능력을 지닌 주인공이 자신의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갈등하도록 만든다. 이 갈등의 원천은 자신을 대하는 상대의 태도에 있다. 나를 이용하려는 자인지, 사랑하는 자인지. 즉 아침이슬을 먹고 독을 품는 뱀이나, 우유를 생산하는 소처럼 서로 다른 길이 운명적, 선천적으로 결정되는 것으로 보지않고, 상대와의 관계 속에서 갈등을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어떤 구조(사회)가 자신을 뱀이 되게 만들지 소가 되게 만들지 결정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것보다는 규모를 줄여서 자신과 관계를 맺는 집단 속에서 힘의 향방이 갈린다.

 

4.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힘은 두렵다. 하지만 그 힘에 내편이라면 두렵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 힘이 내편 네편 가리지 않고 선의를 가지고 있다면 더 안심이 될 것이다. 자신의 딸이지만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던 힘을 지녔기에 책임지지 않았던 부모는 이 힘에 악한 성정을 씌운다. 한국영화 <마녀>에서의 힘이 비뚤어지지 않았던 것과는 정반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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