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지형 이야기
양희경.장영진.심승희 지음 / 푸른길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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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어느 책에서부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영화와 다른 장르를 결합하는 식의 책은 그 소재 자체가 식상해져버렸다. 그러나 참 꾸준히도 비슷한 컨셉을 가진 책들이 나오는데 새 책이 담아내는 내용에 따라서 어떤 책은 기존에 나온 수많은 비슷한 책들을 놔두고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얻기도 하고, 또 어떤 책은 조용히 나왔다 사라지기도 한다. 이 책은 후자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나쁘지는 않았다. 특별히 새로운 것은 없었지만. 단지 이 책이 기존에 나온 '영화와 무엇의 이종교배'식의 다른 책과 다른 점이 있다면, 교배한 씨가 '지리'라는 것이다.

  영화와 물리학, 영화와 과학, 영화와 사회, 영화와 철학 등은 이미 써먹을대로 써먹어 더 이상 새로운 무엇이 있을까 싶지만, 영화와 지리가 만난 책은 아직까지 본 적이 없어 조금 색다르긴 했다. 물론 물리학이나 철학 대신 같은 자리에 지리가 들어갔을뿐이라는 점에서는 식상하지만. 지리를 공부하고 지리를 가르치는 고등학교 교사, 대학교 교수 세 사람이 대학원 시절부터 만나 박사학위를 받는 시점까지 함께 공부하고 답사를 다니면서 유익하고 재밌는 지리책을 하나 써보자 했고, 이 책은 그 결과물이다. 

  이 책을 쓰게 되기까지 근 5년간 그들은 영화를 오로지 지리학적 관점에서 살펴봤다고 한다. 이거 무지 고통스럽다. 사실 영화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혹은 또다른 문화적 재미를 찾기 위해 보기 마련인데, 5년 간 모든 영화를 지리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리고 각 영화들에서 지리학적 요소를 끄집어내고자 했다면, 이건 저자들에겐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이었을 것이다. 자발적인 작업이었으니 어쩌면 그들에겐 '즐거운 고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재료로 삼아 지리학적 지식을 얹어놓으며 평소 사람들이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간접적으로 보게 해주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리라. 같은 영화라도 어떤 시각을 가지고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달리 보인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해안선>의 경우 군대가 국민을 대하는 태도란 측면에서 바라볼 수도 있고, 사랑하는 남자친구를 사고로 잃어버려 미친 여자의 입장이 되어 감상할 수도 있다. 이 책의 저자들과 같이 영화 내용은 잠시 접어둔 채 먼저 영화에 등장하는 갯벌의 형성과정을 중심으로 바라보는 것도 가능하다. 

  이 책을 읽다보면 단지 지리학적 지식을 안내하기 위해서 영화를 재료로만 삼은 것은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장면, 지역이 물론 저자들이 가장 먼저 관심갖는 부분이긴 하겠지만, 어떤 장면을 찍을 때 왜 감독이 그 지역을 배경으로 했을까, 를 생각해보면서, 감독의 입장이 되어 영화를 찍던 시절로 돌아갈 수도 있다. 영화 감독의 입장이 되어본다는 것은, 감독이 드러내고자 하는 메세지를 표현하기 위한 가장 적합한 장소가 왜 여기일 수밖에 없었는가를 추측해본다는 것이고, 그것은 영화가 담아내고자 하는 메세지와 닿아있다. 지리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만나는 지점이다.

  가령 <폭풍의 언덕>의 배경이 카르스트 지형인 것은 주인공들의 "비극적 운명을 가장 극적으로 상징화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불규칙적으로 갈라진 깊은 틈과 울퉁불퉁한 표면의 회색빛 돌무더기 위로 단 한 그루의 나무가 서 있는 황야. 이 비현실적인 분위기의 장소는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비극적 운명을 예언한다."

  중고등학교 때 배웠지만 지금은 가물가물한 여러 지형의 이름들이 낯설게 느껴지고, 기본 지식에 대한 간단하고 친절한 해설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보지만, 내 상식이 부족하려니 하고 책보다는 나를 탓해본다. 이 책에 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저자 대표가 미안했던지 머리말에 밝히기도 했지만 이 책에 삽입된 영화 사진들이 선명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선명하지도 못할 뿐더러 잘 포착한 장면도 아니고, 게다가 사진 테두리의 검은 띠는 어설픈 사진마저 더 어설퍼보이게 만든다. 완성한 글에 어떻게든 시각적 요소를 집어넣고자 툭툭 던져놓은 듯 했다. 이 책의 기본 컨셉이 '영화와 지리'인데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부분에서 에러가 났다.

   대체로 내가 그동안 영화를 보면서 영화 속 지역이나 지형에 관심가질 일은 별로 없었는데, 이렇게 봤던 영화를 - 이 책의 재료가 된 영화 중 내가 본 영화는 사실 몇 되지 않는다 - 다시 한번 다른 관점에서 보게 해줬다는데에서 독서의 의미를 찾는다. 영화를 재료로 삼아 지리학적 지식을 풀어놨는데, 나아가 이 책으로부터 얻은 영화 속 지리 지식을 토대로 실제 그 지역을 찾아가 본다면 어떨까도 생각해본다. 그땐 이 책이 여행의 재료가 되겠지. 책은 영화를 재료로 삼고, 여행은 책을 재료로 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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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Journey 2008-07-17 0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런 책이었군요. 얼마 전부터 이 책이 눈에 들어 볼까말까 하고 있었거든요. 친절한 리뷰에 감사 드려요~~
다시 보니 저자 중 한 명은 아는 사람이네요. ^^

마늘빵 2008-07-17 08:59   좋아요 0 | URL
엇 저자를 안다구요? 전공영역이 비슷하신가봅니다. 아니면 동종업계? ^^ 별로 기대 안하고 보면 괜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