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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요, 찬드라 - 불법 대한민국 외국인 이주 노동자의 삶의 이야기
이란주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지원한 <여섯개의 시선>의 마지막 작품, 박찬욱 감독의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를 봤다. 이 책을 먼저 보고 영화를 나중에 보았다. 책을 통해 느꼈던 감정들이 되살아났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결과는 놀랍지만 내막을 알고 보면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일터에서 다른 이주노동자와 싸우다 거리로 나왔다. 배가 고파 밥을 먹었다. 돈을 잃어버렸다. 말이 안통했던 주인 아주머니는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은 찬드라를 데려갔다. 말이 안통하고 행색이 초라해 행려병자로 알고 정신병원에 넣었다. 역시 정신박약, 정신분열에 우울증으로 분류되었다.
6년 4개월. 네팔에서 온 이주 노동자 찬드라가 정신병원에서 머문 기간이다. 어떻게 나왔을까. 그나마 개념있는 의사와 간호사를 만나, 아무래도 정말 네팔인 같다고 한국말도 가르치고, 네팔인을 데려와 대화를 시도한 끝에 결국 지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생각없이 일하는 경찰과 생각없이 일하는 정신병원 의사와 간호사, 그들만 있으면 누구나 이런 일을 당할 수 있다. 장장 6년 4개월. 그 어느 곳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악몽 같은 나날을 뒤로 하고 찬드라는 결국 네팔로 갔고, 박찬욱 감독은 그곳에 가 영화를 찍었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이 할 줄 아는 한국어는 딱 하나. "유년사개워"
1993년부터 6년 4개월간 찬드라의 이름은 '선미아'였다. 제 이름과 제 말을 잃어버리고 지낸 악몽 같은 시간들. 감금 당하고 묶이고 하루 세 번씩 스무 개도 넘는 약을 먹어야 했다. 네팔인이라고 말했다. 네팔 사람이라고. Nepal. 어렵지 않다. 그냥 들리는대로 들으면 된다. 그러나 누구도 네팔 사람인지 확인해보려는 시도조차 안했다. 마지막 병원의 의사 말고는. 그녀의 어머니는 네팔에서 실종 소식을 듣고 쓰러져 돌아가셨고, 그녀는 네팔에 돌아간 뒤에도 어머니를 죽인 불효자식이라며 동네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어야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네팔 공동체가 네팔인 176명의 서명이 담긴 탄원서를 가져왔고, 2001년 재판부는 '국가배상법'상 네팔과 한국이 상호 보증이 있는 경우에만 국가가 배상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국인이 네팔에서 공무원의 불법행위로 피해를 입을 경우 배상을 받을 수 있어야 네팔인도 한국 공무원의 불법행위로 피해를 입었을 때 배상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한참을 기다려 네팔 정부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으나, 재판부는 6년 4개월 체류 기간 동안의 수익을 한국 기준이 아닌 네팔 도시 노동자의 평균 임금으로 계산하라고 요구했다. 찬드라가 네팔에서 일했니? 모두가 분노했다. 그러나 그나마라도 받으려면 재판부가 요구한 자료를 제출해야만 했다. 그거라도 받으려면. 대한민국은 찬드라를 두 번 죽였다.
이 책엔 찬드라 말고도 이와 비슷한 더러운 경험을 한 이주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가득히 실려있다. 그들은 왜 한국에 왔을까. 한국에서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 이주 노동자들 중 과연 몇이나 한국에 대해 좋은 경험을 안고 고국으로 돌아갈까. 손 잘리고, 팔 잘리고, 다리 절고, 때로는 정신병원에 가둬지고, 또 죽고. 대한민국 경제를 밑바닥에서 살리는 이들은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사장님에게 맞아가며, 욕 처먹어가며, 경찰에게 쫓기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신문에서 볼 수 없는 내용이라 하여 진실이 아닌 것은 아니다. 일부 신문이 약자의 이야기를 싣는다 하지만, 그 약자는 대한민국 국민에 한정된다. 이들은 우리가 흔히 약자라 부르는 이들 축에도 끼지 못한다.
코리안 드림을 이루겠다고 희망을 갖고 한국에 들어온 그들은, '불법체류자'의 이름으로 매일을 고달프게 버틴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지극히 일부의 이야기도 아니다. 사람들은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려고 한다. 아름답고 이쁜 것만 보려고 한다. 그게 몇명이나 되겠어, 그런 일 당하기 싫으면 안오면 되지, 억울하면 선진국 국민으로 태어나라 그래. 이게 이주노동자들을 보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시각이 아닐까. 사람들의 무관심도 슬프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는 더 슬프다.
이 책을 보기 전까진 나도 그런 사람들이 있구나, 하는 정도만 인식했지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겪는지는, 어떻게 이 땅에서 살아가는지는 관심 없었다. 알지만 잊고 있었다고 하는 게 정확하겠다. 보이지 않으니까.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보통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잘못된 법은 고칠 것을 요구해야 한다. 그들과 같은 땅에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사람이 사람을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 모습이 다르고, 못 사는 나라에서 왔다고 다르진 않다. 미국인에 벌벌 기면서 네팔, 파키스탄, 말레이시아 사람은 내치는 정부와 자신을 부끄러워 해야 옳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지에서 덩치큰 외국인 노동자를 봤다. 시설을 설치하는 사람이었다. 그보다 덩치가 작은 한국 아저씨들은 그를 발로 차고 욕을 퍼부었다. 빨리빨리 일하라고. 러시아인 같았다. 러시아가 아니라면 러시아 인근의 분리된 나라 사람이 틀림 없었다. 그때 아저씨들에게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저씨가 무서웠고, 나는 그들과 조금 떨어진 무리 속에 있었다. 캠프파이어를 하기 전이었던 거 같다. 장기자랑 무대를 만드는 것 같았다. 우리가 웃고 즐길 그 무대를 만들기 위해 욕먹고 맞아야 했다. 미안했다. 부끄러웠다. 하지만 아무 말도 못했고, 나는 무대에 동화되어 곧 축제를 즐겼다. 그로부터 10년이 넘었다. 이제 한 마디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저씨, 그도 우리 같은 사람입니다." 제 2의 찬드라가 나오지 않기 위해서 그거면 된다.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대우해주는 것, 그거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