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l Marx, 프랑스 내전

1. 옮긴이의 말(안효상)

‘현존 사회주의’의 붕괴가 가져다 준 여러 가지 의미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차츰 드러나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국가라는 관제 고지의 점령을 통한 이행의 불가능성이다. 이는 도구로서의 국가라는 관념의 일면성을 보여 주며, 이에 따라 집권을 지향하는 조직으로서의 당 개념을 재고하도록 만든다.

󰡔프랑스 내전󰡕이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위와 같은 판단에 기초한 새로운 정치적 형태 혹은 사람들의 유대 관계를 기획하는 데 이론적, 역사적 준거점이 된다는 점에 있다. (8~9)

「공산당 선언」에서 pt독재혁명은 bg혁명과 동일한 형태로 나타난다. 사실 이러한 동일성은 맑스가 역사를 파악하는 데 있어 중요한 특성을 보여준다. 추상화와 단순화. 맑스가 앞으로 일어날 pt혁명이 bg혁명과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던 것은, 그가 다른 혁명과정들을 비교하는데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그는 항상 두 개의 혁명을 비교하며 그 공통적 ‘형식’과 그 ‘내용’의 상이함에 주목한다. (그의 “프랑스 혁명 3부작”모두에 해당되는 사항) 옮긴이는 결국 국가권력(기구)의 pt계급 독재가 공산주의 혁명과정에서 필수적이라고 파악한 것이 옳지 못하다는 것(또는 역사적으로 증명된 것은 바로 이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러한 pt계급 독재가 역사상 실현된 예가 바로 이 ‘프랑스 내전’ 또는 파리 꼬뮌이다. 따라서 이는 일종의 ‘타산지석’으로 삶을 수 있는 예이다. (그렇다면 옮긴이가 말하는 ‘현존 사회주의’붕괴는 어떠한 예인가? 공산당 독재라는 의미에서 ‘당’이라는 매개(또는 pt와 구분되는 ‘주체’)의 실패? 이는 이제 ‘레닌’의 실패로 그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인가.) 옮긴이는 이를 의식하면서 이 책을 시작한다. (옮긴이의 말이 책의 ‘앞’에 있다.)

(맑스는) 혁명적 대중 운동 속에서 실천적 진보를 보았고, 이러한 시도에 근거하여 이론을 검증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그 결과가 긴급한 정세 속에서 씌어졌음에도 풍부한 이론적 함의를 담고 있는 󰡔내전󰡕이다.

“각각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라는 맑스(주의)의 지향은 ‘정치 경제학 비판’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이론적, 현실적으로 요구하였다. 이는 정치 혁명과 구분되는 사회 혁명의 과정인데, 이는 국가 권력의 장악이라는 정치 혁명과 달리 자본과 국가 장치의 동시적 변혁을 요구한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은 집권을 위한 당이 아니라 노동자 통제라는 새로운 정치 형태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새로운 정치 형태는 관념의 고안물이 아니라 투쟁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빠리 꼬뮌이었다. “꼬민은 본질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정부였으며,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완성될 수 있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였다.” (9~10)

결국 옮긴이는 앞서 말한 것처럼 ‘당’이라는 매개/주체가 아니라 ‘노동자 통제’라는 ‘새로운 정치 형태’를 pt 독재가 요구한다고 보았고, 이것이 파리 꼬뮌에서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그럼 파리 꼬뮌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결국은 bg세력에 의해서 처참하게 학살당하지 않았는가? 파리 꼬뮌 또한 pt의 국가 기구의 전복과 장악이지 않는가? 비록 ‘당’이라는 것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파리’라는 상대적으로 작은 인구와 지역이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는가? 아니면 이렇게 그리스 아테네식 ‘도시 공산주의’만이 ‘노동자 통제’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인가? 파리 꼬뮌은 무엇인가?

2. 칼 맑스의 󰡔프랑스 내전󰡕 독일어 제3판 서설 -F. Engels

1870년 7월 발발한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은 처음부터 프로이센 육군이 프랑스를 제압하였고 파리 시민들의 농성에도 불구하고 1871년 1월 28일 휴전조약이 체결되었다. 2월 12일 강화조약을 토의할 국민의회가 보르도에 설치되고 임시행정장관에 L.A.티에르가 임명되었다.

국민의회는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비준했으나 파리 시민은 오히려 항전의 뜻을 굽히지 않고 이 조약에 불만을 가졌다. 3월 1일 파리에 입성한 프로이센군은 파리 시민의 무언의 적의와 소극적 저항을 받으면서 3일 후에 철수하였다. 3월 18일 티에르의 임시정부는 정규군에게 농성 중 국민군(의용병)이 사용한 대포를 압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를 계기로 시민과의 마찰이 생겼으나 곧 정규군과 국민군 사이에 화해가 성립되어 19일 양자의 대표는 시청을 점거하고 ‘중앙위원회’를 결성하였다. 동시에 티에르 정부는 베르사유로 도피하였다. 중앙위원회는 포고문을 발표하여 코뮌(인민의회)의 선거가 실시될 것이며, 중앙위원회는 그 때까지의 잠정기관임을 분명히 하였다. 26일 선거를 마치고 28일 시청 앞 광장에 20만의 시민을 동원하여 코뮌 성립의 행사를 거행하였다. 29일 집행위원회 아래 군사 ·재정 ·식량 ·노동 ·교환 ·교육 ·외교 ·사법 ·보안의 9위원회가 성립되고 시민생활의 자주관리체계가 정비되었다. 90명의 코뮌의원의 성분은 자유직업자 ·중산시민이 대부분이고 노동자는 20명이었다.

블랑키스트 ·프루동파(派) ·자코뱅 당원 등 일부 사회주의자들도 있었다. 코뮌은 짧은 기간에 징병제와 상비군의 폐지 및 인민에 의한 국민군의 설치, 집세의 미지불분의 일시연기, 관리봉급의 최고액 결정, 종교 ·재산의 국유화, 공장주가 방기(放棄)한 공장에 대한 노동조합의 관리, 부채의 지불유예와 이자폐기, 노동자의 최저생활보장 등 여러 가지 정책과 법령을 발표하였다.

코뮌이 지상 최초의 노동자정부를 수립하려고 분주한 틈에 프로이센과 결탁한 정부군은 5월 21일 맥마흔의 지휘하에 파리로 진격하였다. 그리하여 ‘피의 1주일’이란 7일간의 시가전 끝에 코뮌은 붕괴되고 3만의 시민이 죽었으며 많은 사람이 처형당하거나 유형당하였다. (네이버 백과사전 ‘파리코뮌’)

꼬뮌은 처음부터 곧바로 다음의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노동자 계급은 일단 지배권을 획득하면 낡은 국가 기구로는 더 이상 관리해 나갈 수 없다는 것. 이러한 노동자 계급은 방금 전취한 지배권을 다시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자신들을 반대하여 이용되어 온 모든 낡은 억압 기구를 제거해야 하며 (27)

그럼 그 제거하고 난 후 어떻게 ‘통치’ 즉 유한재화를 분배, 필수 생산물들을 생산할 것인가? 어떠한 조직이 만들어졌는가? 이에 대한 즉답은 없다. 대신 국가 관료에 의한 민중의 지배가 아니었다는 것만 다시 강조한다.

국가 및 국가 기관이 사회의 종에서 사회의 주인으로 전화한다는 것은 이때까지 존재한 모든 국가에서 불가피했는데, 이것을 반대하여 꼬뮌은 확실한 두 가지 방법을 적용하였다. 첫째로, 꼬뮌은 행정, 사법, 교육의 모든 직책들을 관계자들이 보통 선거에 의거해서 선출하여 임명하고 게다가 이 관계자들에게 언제든지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둘째로, 꼬뮌은 직위 고하를 불문하고 모든 공무원에게 다른 노동자들이 받는 정도의 임금을 지불하였다. (28)

선거. 선거. 또 선거들. 그만큼 토의할 수 있는가. 그만한 정보를 모든 유권자에게 납득시키고 설득시키고 이해시킬 수 있는가? 오히려 고대의 추첨에 의한 공무원직이 보다 pt적이지 않을까. 계급으로서의 pt가 진정 존재한다면.

실제로는 국가란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억압 기구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며 이는 민주 공화제에서도 군주제에서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국가는 기껏해야 하나의 악에 불과하며, 계급적 지배를 위한 투쟁에서 승리를 쟁취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악을 물려받는데, 프롤레타리아트는 꼬뮌과 마찬가지로 새롭고 자유로운 사회 상태에서 성장한 한 세대가 모든 국가 폐물을 떨쳐 버릴 수 있을 때까지 될 수 있는 한 국가의 최악의 측면을 감소시킬 수 있을 뿐이지 그것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 빠리 꼬뮌을 보라. 그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였다. (29~30)

결국 파리 꼬뮌 또한 그 ‘악’을 안고 갔다는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앞의 옮긴이의 주장은 엥겔스의 주장에 전면으로 배치된다. 그리고 ‘현실 사회주의’ ‘국가’는 끝끝내 ‘국가’를 벗어나지 못했다. 정말, 파리 꼬뮌은 어땠는가? 우리는 이를 알기 위해서, 파리 꼬뮌의 동시대인이자 당대 뛰어난 역사학자, 철학자, 공산주의 운동가인 맑스의 해석에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 내전.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의 담화문

1

맑스는 프랑스 내전 또한 계급투쟁의 일환이라고 본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당시 내부장관 (임시 수상)인 띠에르가 어떻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착취를 하였는가를 보인다. 실상 루이 보나빠르트가 프로이센 침공에서 패배하고 포로로 갇힌 직후, 공화국을 선포한 티에르 일당은 공화국 시작부터 프로이센의 프랑스 침공에서 자신은 방어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넉 달동안 투항하지 않았던 것은 이 혼란기를 빌어서 자신들의 이익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였다.

부의 전유자들은, 공화국의 폭력적 전복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들 때문에 일어난 전쟁 비용을 부의 생산자들의 어깨로 이전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프랑스의 엄청난 몰락은 토지와 자본의 이 애국적 대표자들에게 박차를 가하여, 외국 정복자가 지켜보고 비호하는 가운데 대외 전쟁에 내전을, 노예 소유주들의 반란을 접목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68)

맑스는 집요하게 띠에르의 과거 행적에서부터 파리 꼬뮌까지 얼마나 치사하고 더러운 방법으로 자신의 이득을 추구했는지를 밝힌다. 이는

띠에르, 이 난쟁이 기형아는 거의 반세기 동안이나 프랑스 부르주아지를 매혹해 왔으니, 이는 그가 부르주아지 자신의 계급적 부패의 가장 완성된 정신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60)

2

언제나 대칭적으로 (정-반-합의 연쇄인 변증법적으로?) 역사를 파악하기 좋아하는 맑스는 (예를 들어 bg 혁명과 pt 혁명) 1849년 6월 혁명 때 부르주아가 pt를 과격하게 진압하던 것과 달리 파리 꼬뮌 하에서는 부르주아의 시위를 평화롭게 용인하였다는 것을 보인다.

3

의회제 공화국이 최소한 그 지배 계급의 여러 부분들을 분리시킨 국가 형태라면, 이와는 반대로 루이 보나빠르뜨를 대통령으로 하는 의회제 공화국은 이 계급과 그들의 듬성듬성한 대오 외부에 살고 있는 사회 전체 사이에 심연을 만들었다. 이전의 정부 아래에서 저 계급의 내적 분열이 여전히 국가 권력에 부과했던 제한은 그들의 단결에 의해 이제 사그라졌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위협적인 봉기를 목도한 이 연합한 유산 계급은 이제 국가 권력을 노동에 대한 자본의 국민적인 전쟁 도구로서 무자비하고 뻔뻔스럽게 사용하였다. (83-84)

제정은 부르주아가 독재할만큼의 권력도, 노동자가 독재할만큼의 권력도 가지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정치제도이다. 공화국에서 제정으로 복귀하는 사태는 맑스가 계속 언급하는 로마사에서 볼 때, 카이사르 시기이다. 이 때 로마는 더 이상 과두정치가 기능하지 못하여 뛰어난 인물로 권력을 집중시킬 필요성이 있었다고도 서술된다. 그런데, 당대 프랑스는 왜 제정으로 복귀할 수 밖에 없었을까. 루이 보나빠르뜨가 전통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농민을 기만하여 그들을 주된 지지세력으로 업고 대통령이 당선한 이후, 그가 왕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과정은 「루이 보나빠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서술된다. 그러나 충분치 않다. '왕'의 의미 상징조작, 가부장제 등등. 나폴레옹 시기와 마찬가지로 충분한 '문화-상징'분석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왜 '제정'인지는 설명되기 힘들다.

어쨌든 pt의 위협적인 봉기를 목도한 bg는 연합하였고 이러한 제정에 대한 직접적 대립물로서 꼬뮌이 등장한다.

빠리 프롤레타리아트가 2월 혁명을 수행할 때의 “사회 공화국”이라는 구호는 계급 지배의 군주제적 형태뿐만 아니라 계급 지배 자체를 폐지해야하는 공화국에 대한 모호한 열망을 표현하였을 따름이다. 꼬뮌은 이러한 공화국의 현실적인(positive) 형태였다. (85)

꼬뮌은 본질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정부였으며, 전유 계급에 대한 생산 계급의 투쟁의 산물이었으며,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완성될 수 있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였다. (90-91)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라는 것이 중요하다. 맑스에게 있어 공산주의는 「독일 이데올로기」나 「공산주의 선언」에서도 나타나듯이 명확한 정치형태로 서술되지 않는다. 이는 현실의 투쟁과정 속에서 역사의 진보 속에서 마침내 발견되어야 할 정치 형태였고, 이것을 맑스는 마침내 ‘꼬뮌’을 통해서 본다. (구체적으로는 최갑수 선생의 ‘해제’를 참조할 것)

이러한 ‘꼬뮌’에 대해 bg정부는 ‘민족’이라는 경계를 벗어던지고 연합하여 계급 투쟁으로 나아간다.

낡은 사회가 아직도 할 수 있는 최고의 영웅적인 노력은 민족 전쟁이다. 그런데 이것조차 계급투쟁을 연기하기 위한 것이며 계급투쟁이 내전으로 타오르자마자 내팽개쳐지는 정부의 순전한 사기임이 증명되고 있다. 계급 지배는 더 이상 국민적 제복으로 가장할 수 없다. 국민 정부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 하나가 된다! (122)

해제 「빠리 꼬뮌, 프롤레타리아의 독재, 민주주의」 -최갑수

사실 맑스의 프랑스 혁명 3부작은 당대사로, 맑스가 입각한 조직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당시의 정세와 제한된 정보에 의해 상당부분 ‘구성’되어 소개될 수밖에 없다. 또 당대인의 입장에서 당대인 독자에게 당대적 목적으로 쓰여진 글이기 때문에 이해하기 힘든 구석도 많다. 이를 잘 보완해주고 있는 것이 최갑수 선생의 해제이다. 프랑스 혁명시기 사상사를 전공한 학자의 자세한 설명이 명쾌하다.

결국 맑스가 말한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완성될 수 있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가 무엇이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들이 무엇을 행했는지 또는 행하려 했는지를 보아야 한다.

;꼬뮌‘이 취한 조치들을 “노동자 계급을 위한 조처들”, “노동자 계급을 위한, 그러나 주로 중간 계급을 위한 조처들”, “일반적인 조처들”, “공안을 위한 조처들”, “재정 조처들” 등 다섯 가지로 분류하여 소개하였다. 이 가운데 눈에 띄는 것으론느 제빵공의 야간 작업 금지, 자본가들이 폐쇄한 작업장을 노동자 협동 조합에 맡긴다는 계획, 공창(公娼)제의 폐지, 교육의 세속화 조치, 실질적인 무료 의무 교육제, 임차인과 영세 상인을 보호하기 위한 임대차 계약과 약속 어음에 관한 조치, 징병제의 폐지, 도박의 금지, 정교 분리, 기요띤의 소각, 정치범의 석방, 군국주의의 상징인 방돔(Vendome)광장 원주의 파괴, 헝가리 출신의 ’제1 인터‘ 회원인 레오 프랑켈(Leo Frankel)의 ’꼬뮌‘ 의원 선출 유효화 등을 꼽을 수 있으며, 이외에도 꼬뮌 공무원의 연봉이 6,000프랑을 넘을 수 없게 한 연봉 상한제, 꼬뮌의 연합을 통한 국가의 재조직안 등이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155)

이들이 생산 수단과 경제 운용의 주체로 상정했던 것은 중앙 집권화된 국가 아니라 ‘조합’과 ‘노동조합’으로 결집한 노동자들 자신이었다. (.....) 그 전망에 따르면, 국가-꼬뮌의 도움을 받아 사회 작업장이 확산되면 고용-피고용 관계와 착취가 사라지고 궁극적으로는 동업 조합과 노동조합의 권력이 정치권력을, 곧 ‘사무르이 관리’가 ‘인간의 통치’를 대체할 것이었다. 그 법령은 단기간이나마 적용되었고, 일부의 작업장이 노동자들의 자주 관리 하에서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당시 프랑스의 전통적인 노동 협동 조합식의 사회주의가 빠리의 노동자들에게 얼마나 강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보여 주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 분명 그들에게 전통적인 요소들이 지배적이었음은 사실이지만, 거기에서 사회주의의 존재를 배제할 수 없으며 그 사회주의는 한편으로는 1848년의 유산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적 노동조합주의의 예시이기도 했던 것이다. (172-173)

또 이들의 이데올로기는 다음과 같이 파악된다.

3층의 이데올로기적인 중층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고 본다. 하층으로 내려갈수록 ‘꼬뮌군’에 의한 정서적 공감대는 더욱 커져 1층에 해당하는 애국주의는 사실상 ‘빠리 꼬뮌’의 이념상의 토대를 이루며 그 위에 자꼬뱅적이고 블랑끼주의적인 혁명주의라는 2층이 놓이고 꼭대기인 3층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그러나 지도부에서는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을 끌어안았던 사회주의가 자리하였던 것이다. 이 세 층은 그 경계선에서는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으며, 따라서 그 속에서 같이 호흡하였던 ‘꼬뮌’의 투사들은 다양하고 복합적인 이 이념의 세게에서 아무런 이질감을 느끼지 못한 채 ‘빠리 꼬뮌’이라는 거대한 움직임을 일구어냈던 것이다. (165)

이러한 파리 꼬뮌의 현재적 의의는 무엇일까. 특시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되고, ‘현실 사회주의’의 민중들은 자신들을 ‘지배’했던 당이나 사회주의에 대해서 대부분 비판적, 비난적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맑스가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완성될 수 있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라고 생각했던 ‘파리 꼬뮌’의 현재적 의의는 무엇일까.

‘빠리 꼬뮌’은 맑스를 통해 새로운 정체성, 곧 새로운 역사적 의미를 부여받는 동시에 맑스는 그 새로운 역사적 실험을 통해 새로운 정치적 인식과 원리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 노동자 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한 최초의 경험을 의미했는가 하면, ‘꼬뮌’은 그가 자본주의가 계급 없는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해가는 단계에서 존재한다고 믿었던 과도기의 특징들을 생전에 상세하게 논의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174)

󰡔내전󰡕의 다음의 구절은 실질적 민주주의의 윤곽을 제시해 준다. “고뮌은 의회체가 아니라 행정과 입법의 업무를 겸하는 행동 기구여야 했다. 이제까지 중앙 정부의 도구였던 경찰은 즉시 자신의 모든 정치적 속성을 벗어 버리고 책임이 있고 언제든지 해임될 수 있는 꼬뮌의 관리로 전환되었다. 다른 모든 행정부의 관리들도 마찬가지였다. 꼬뮌 의원들에서 아래에 이르기까지, 공직은 노동자의 임금으로 수행되어야 했다. 국가 고위 관직의 기득권과 판공비는 이 고위 관리들 자체와 함께 사라졌다. 공직은 중앙 정부의 앞잡이들의 사유 재산이기를 중지하였다. 시 행정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국가에 의해 행사된 발의권 전체가 꼬뮌의 수중에 놓였다.” “꼬뮌의 첫 번째 포고령은, 상비군을 폐지하고 그것을 무장 인민으로 대체한다는 것이었다. ...... 옛 정부의 물리적 강제력의 도구인 상비군과 경찰을 일단 제거한 꼬뮌은 ...... 억압의 정신적 강제력인 성직자 권력을 분쇄하고자 하였다. ...... 모든 교육 기관은 인민에게 무상으로 개방되었고, 동시에 교회와 국가의 모든 간섭이 제거되었다. ...... 사법 공무원들은 ...... 모든 정부에 대한 자신의 굴종을 은폐하는 데 불과하였던 저 외견상의 독립성을 상실하였다. ...... 그들도 앞으로는 선출되고 책임이 있고 해임될 수 있게 되었다. (190-191)

󰡔내전󰡕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일종의 ‘문화 혁명’을 예시하는 대목이다. 직접 맑스의 말을 들어보자. “꼬뮌이 빠리에서 이루었던 변화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 시체 공시장에는 더 이상 시체가 없었으며, 야간 도둑도 없었고, 절도도 거의 없었다. 실제로 1848년 2월의 날들 이래로 빠리의 거리는 처음으로 안전했는데, 그것도 어떤 종류의 경찰도 없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 그들[진정한 빠리의 여성들]은 고대의 여성들처럼 영웅적이고 고결하고 헌신적이었다. 일하고 생각하고 투쟁하고 피를 흘리는 빠리는-새로운 사회를 준비하느라고, 식인귀들이 자신의 문 앞에 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채-자신의 역사적 창의성에 대한 열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는 단지 ‘빠리 꼬뮌’에 바치는 헌사만은 아니리라. 실제 목격자들은 꼬뮌기의 빠리가 어려운 조건 하에서도 하나의 거대한 활력과 부산거림 그리고 즐거움의 도가니였음을 웅변해 주고 있다. (192)

사실상 인민이 조직되고 집단적으로 행동할 때만이 민주 정치는 가능하다는 교훈을 󰡔내전󰡕은 주고 있는 것이다. 거대한 국가 관료제에 의해 정치적으로 소외되고 그리하여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사회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권을 상실하고 기껏해야 국가 행위의 수동적 존재로 전락해 버린 현대의 대중에게 ‘빠리 꼬뮌’은 “생산자의 정치적 지배”가 얼마나 엄청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194)

또 최갑수 선생은 레닌에 의해서 재해석된 ‘당 지도하의 pt독재’는 pt독재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강조하면서 “맑스와 엥겔스에게 그들 생애의 처음에서 끝까지 그리고 예외 없이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는 ‘프롤레타리아의 지배(rule)', 즉 노동자 계급에 의한 ’정치권력의 획득‘, 즉각적인 혁명 이후의 시기의 노동자 국가의 확립, 그 이상도 그렇다고 그 이하도 아니었다”는 Harl Draper의 말을 인용한다. 사실 그렇다면 공산주의자나 당이라는 전위 주체의 역할이 공산주의 혁명과정에서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들은 혁명 과정 즉 정치권력을 획득하기 까지만 활약하고 그 이후에는 노동자 계급에 의해 맡겨야 한다는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공산주의자나 당이라는 전위 주체가 필요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그들은 역사과정을 지켜보다가 파리 꼬뮌가 같은 사태가 일어났을 때 능동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것일까? 결국 문제는 ’정도‘의 문제이지만, 누구도 그 시대에는 그 정도를 모른다는 것이 문제이다. 당이 언제까지, 공산주의자들이 언제까지 혁명에 관여해야 하는가. pt또한 권력을 잡으면 pt의 ’상층부‘가 당으로 변화하지 않는가?

하지만 ‘꼬뮌’이 노동자 계급의 정부였다고 해서 이들이 ‘꼬뮌’의 다수였다는 말은 아니다. 맑스 역시 이 점을 모르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의 인구 구성으로 볼 때 프롤레타리아는 소수였고, 그러기에 맑스는 󰡔내전󰡕에서 농민의 존재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표명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꼬뮌’에 노동자 계급적 속성을 부여했을까? 그것은 혁명 과정에서의 프롤레타리아의 전위적 역할이요, 헤게모니였다. 즉 그에게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란 노동자 계급에게 국한하는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그들이 이끄는 혁명을 뜻했다. (186)

결국 그러하다면 노동자 계급의 전위로서의 ‘공산주의자’ 또는 당을 설정한다면 이는 ‘당 혁명’ 또는 ‘공산주의’자‘ 혁명’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역사상 유일하게 성공한 혁명인 러시아 혁명과 다를 바가 어디 있는가? 결국 빠리 꼬뮌이 실패한 이유는 그들과 대결하는 bg계급을 이겨내지 못했고, 이것이 빠리에만 국한된 소규모 혁명이었다는 점에 있다. 이것이 외부와 연계되서 전국적, 전세계적 혁명이 일어날 때만이, 이 혁명은 영속적일 수 있다. 그리고 빠리 꼬뮌은 단기간이었다. 장기 혁명으로서 ‘당’이 형성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권력이 집중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혁명세대 이후의 세대들은 회귀하지 않을 것인가? 권력의 달콤함과 권태와 게으름의 유혹이라는 쌍방향으로의 이끌림이라는 욕망은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소규모 집단의 연대로 인한 조합이 해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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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01-24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자체가 사실 레닌적 전위당 혹은 당에 의한 지도의 개념을 어쩔수없이 포함할수밖에 없는 개념이라고 봅니다. 아무리 그것이 "즉 그에게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란 노동자 계급에게 국한하는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그들이 이끄는 혁명을 뜻했다"라고 한다고 말이죠. 이러한 불분명함, 애매함이 결국은 레닌의 전위당이론과 스탈린주의 등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죠. 전 과거 19세기의 아나키스트들도 이야기 한 것처럼 특정계급에 의한 지도라던지 당에 의한 국가권력장악이라든지 하는 정치투쟁은 더이상 불가능 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어쩔수없이 자율주의나 이진경씨등이 이야기하는 코뮨주의등과 같은 아나키즘이 앞으로의 사회변혁의 방법으로서 불가피한 대안이 될수밖에 없다고 보는데요. 기인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참 그리고 인용하시는 본문은 기울어져있는? 서체대신 색깔을 달리한다던가 하는 방법이 어떨까요? 서체가 기울어져있으니 인용하신 문장들을 읽기가 조금 힘드네요..

기인 2007-01-24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 :) yoonta님 안녕하세요? 기울어져 있는 것 읽기 힘드시죠;; 색깔 입히는 것 잘 안되서 -_-; 앞으로는 색깔을 입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요즘 다시 맑스를 사상체제로서 읽어보려고 하고 있는데, 아무리해도 완결된 체제는 아닌 것 같아요. 사실 맑스도 포이에르바하 테제나 유물변증법 자체가 실천을 통해서 진리를 발견해나간다는 것을 강조하지만서도요. 저도 결국에는 자율주의나 코뮨주의인가 라고 생각하는 중이라서, 사실 그 생각을 넘기 위해서 다시 원전을 맑스부터 차근히 읽어나가려고요. 지금 안그래도 공익 중이라 시간도 많고, 박사논문도 10년간 맑스주의 차근히 공부해서 맑스주의 문학이론 재구성이랄까 -_-; 라는 원대한 계획만 잡아놓았답니다. ㅋ 호랑이 그리려고 들면 아기 고양이라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ㅎ
제 고민과 논문을 일치시키고 삶과 고민을 일치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요 ^^
주위 사람들은 제가 쫌 구좌파적 마인드라고 하지만, 아직 무언가 자율주의나 공동체주의로 너머가기에는 아쉽거나 찜찜한 마음이 들어서. 그래서 공부하는 중입니다. 그 전에 네그리 공부는 했는데, 아무래도 그 '다중'이라는 개념이 말이 안되는 것 같아서요. 오히려 맑스, 레닌, 알튀세를 다시 읽어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혹은 당연하게도 지젝이나 현대 사상가들을 읽으면서 잘 안 와닿았던 이야기를 맑스를 읽으면서 어떠한 지점에서 현대 사상가들이 발언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어서 즐거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

yoonta 2007-01-25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그런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 군요...^^ 꼭 좋은 성과있으시길 바랍니다. ^^
맑스의 혁명론은 사실 맑스의 글만 읽어서는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힘들다고 봅니다. 당시 맑스와 같은 시대에 혁명운동을 도모하였던 다른 혁명적그룹의 시각에서 파리코뮨을 바라보는 것도 도움이 많이 되시리라고 봅니다. 이미 보셨을수도 있겠는데 하나 소개해 드리면 bakunin archive에 있는 바쿠닌의 파리코뮨과 관련된 글입니다. (http://dwardmac.pitzer.edu/Anarchist_Archives/bakunin/pariscommune.html)
파리코뮨에 대한 맑스의 시각과 대조해서 보시면 도움이 많이 되실겁니다. 바쿠닌의 위 글 자체가 맑스가 주도한 프롤레타리아 정치투쟁노선을 비판하기 위한 내용을 상당부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제 개인적으로는 맑스의 <내전>과 더불어 꼭 같이 한번쯤은 읽어보아야할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크로포트킨의 저서인 <크로포트킨 자서전>도 맑스와 동시대 혁명가가 맑스가 주도하는 세력을 어떻게 평가하는 가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359쪽-366쪽) 크로포트킨은 당시 파리코뮨과 인터네셔널 해체 사건등을 둘러싸고 벌어진 맑스의 권위주의적 운동방식과 아나키스트들간의 논쟁등을 바라보며 결정적으로 아나키스트로 전향하게 되었죠..
현대사상가들에 대해서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슬라보예 지젝이나 알튀세 혹은 네그리나 들뢰즈등의 사상도 오늘날의 사회변혁을 위해 그리고 맑스를 넘어서기 위해 참조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만약 앞으로의 사회의 변혁의 대안이 아나키즘적 방향이라고 한다면 지젝이나 들뢰즈등과같은 철학을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그런 이론적 노력들 보다는 실천적인 어떤 대안들을 내 놓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고요. (물론 그런 사상가들을 공부함으로써 실천적 대안의 가능성을 열수있다면 좋겠지만서도..^^;;) 그러기 위해서라도 19세기 아나키즘운동의 역사 그리고 20세기의 러시아나 스페인에서의 아나키즘운동 오늘날의 아나키즘운동의 역사등을 들춰보는것도 큰 도움이 되지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많은 현대의 사상가들이 맑스와의 직간접적인 이론적 투쟁을 통해 자신을 (이론적으로)무장하는 경향들이 있는데 그런 이론들이 제가보기에는 실천적 사회변혁운동과는 다분히 동떨어져있는 것이 사실이고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대안적 사회운동이 아니키즘적 운동이라면 맑스를 넘어서려는 이론적 운동은 애초부터 잘못된 타켓을 설정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전 어디까지나 이론은 이론일뿐고 책은 책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봅니다. 맑스의 <자본론>은 많은 점에서 변혁운동에 약이 되기도 했지만 아카데믹한 이론추구의 한 경향을 좌파내에 뿌리내기게 함으로써 독으로도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댓글쓰다보니 이야기가 좀 많이 앞서간 경향이 있는데요..^^;; 앞으로도 자주뵙고 조좋은 이야기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기인님^^

기인 2007-01-25 0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yoonta님 친절한 댓글 감사드립니다. 안 그래도 학부때 친한 그룹은 아나키스트 그룹이었습니다. 역시 <자본론>을 어떻게 볼 것인가, 맑스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토대(생산양식)에의 법칙성을 규명한 것이 <자본론>이라면 그 법칙성에 대한 '과학적' 규명과 혁명적 실천과의 관련성에 대해서 안 그래도 요즘 의문이 들고 있습니다. 단순 결정론적 반영론적 시각으로 상부구조를 보는 것을 지양한다해도, 투쟁의 장소인 상부구조에서 혁명적이고도 주체적인 실천을 논하는 것이 가능한가의 문제. 아마 yoonta님이 지적하신 것도 <자본론>이 야기한 몇몇 오해(?)와 파급효과를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물적 토대의 분석만으로 모든 실천이 인과적으로 끌려나오거나 혹은 (자기일, 인텔리겐차의) 완료되었다는 망상이 그건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yoonta님 말씀처럼 아나키즘 운동으로 관심이 옮겨가지 않은것은,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아직 무언가 재구성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들어서요. (음.. 이런 생각 때문에 신세 망친 사람 여럿 있지만 ^^;;; ) 어쨌든 맑스를 우회할 수는 없으니 정면 돌파(?)해야 겠다고 다짐은 하고 있는 중입니다. ㅎㅎ
정말 자주 뵙고, 여러 이야기 해주시면 좋겠네요.
 

새삼 맑스를 다시 공부하고 있다. 맑스를 공부하고 있다는 것은, 맑스의 저작을 읽고 있다는 것. '맑스주의'를 공부하고 있어도 사람들이 '새삼?'이라는 판국에, '맑스'를 다시 읽고 있다는 것.

새삼. 그래 새삼.

어쨌든 학부 때 읽었던 맑스는 사상체계라기보다는, '도구'나 '방법론'으로 '무비판적'으로 '해석'의 수준에서 읽었기에, 정합론적인 체계로서 읽어보려는 셈. 그러나, 역시 그러니 만만치 않다.

어쨌든 나름 '시리즈'로, 맑스를 공부하다가 의문이 나는 것들을 적어 두기로 한다. 알라딘의 고수님들이 지나가시다가 댓글을 달아주시거나, 내가 나름 정리해 두었다가 주위 맑시스트(?)들에게 묻든지 할 목적이다. 결국은 공부하려면 의문이 있어야 한다. 우선은 정리가 되야, 의문을 풀던지 말던지 하지! 그래서 쓴다.

첫번째 시리즈! ㅋㅋ -_-;

Pt 개념과 '변증법적 유물론'에 있어서의 '실천' -맑스를 공부하다 생기는 의문 1

맑스에게 있어서, '맑스주의'에 있어서 Pt 개념 (최근 네그리-하트에 의한 '다중'이든 간에 어쨌든 맑스주의에서 말하는 '혁명적 주체'라는 개념)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이 개념 때문에 절망한 사람도 많다. 왜? 실제 우리가 마주치는 pt계급과 맑스가 말한 pt 계급 사이의 격차.

부르주아 사회에 '진정한 pt'는 존재하는가? pt는 생성중에 있는가? 즉 혁명적 주체로서의 pt는 결국 혁명의 순간에 탄생하는 것인가?

pt 계급의 운동방식 또는 자본주의의 작동방식은 소위 '유물론적 변증법'의 논리적 전개를 따른다고 했을때, 그렇다면 이 '유물론적 변증법'은 외부 '현실'의 작동방식에 대응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는 역사의 전개로 증명되는 것인가. (즉 헤겔적인 의미인가?)

그렇다면 현실 자본주의 사회는 공산주의 사회의 가능태로서 존재하고, 이는 '실천'을 매개로 공산주의라는 현실태로 정립되는가? 그렇다면 이 '실천'은 변증법 외부에 있는 것인가, 아님 내부에 있는 것인가. 내부에 있다면 그때 '주체'는 어떻게 설정될 수 있는가?

변증법 자체가 '주체적'이라면, '비주체적'인 것, 즉 '대상'은 어디에 있는가? 세상이 변증법적으로 작동한다면 그러면 모든 것이 '주체'이지 않는가? 모든 것이 '주체'라면 '주체'라는 것의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닌가?

그 유명한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11번째 테제'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에 입각해서 위 질문들을 해석한다면.

결국 pt계급은 생성중의 가능태로서 존재하는 것이고, 이는 실천을 통해서 현실태로 변화하는 것이며, 맑스의 철학은 이 실천을 가능하게하는 '무기' 즉 '도구'(또는 하나의 실천)인 것인가? 그렇다면 이 철학 '자체'로 놓고 본다면 '외부' '실천' 또는 '정치'에 종속되는 것이 아닌가. 또는 정말로 맑스가 포이에르바하의 테제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의 '실천'으로서의 철학인가?

이 철학 '자체'로는 정합적이지 않고, '외부' '실천' 또는 '정치'라는 콘텍스트가 이 '내부' 철학에 의해 현실태로 변모할 때, 이 철학 또한 '자체'적으로 정합적이게 변모되는 것인가.

이렇게 철학 '자체'와 실천을 구분할 수 없는 것인가. 결국 이것인 것 같다. 생각을 정리하면, 이 '철학' 자체가 실천이다.

그러면 맑스의 철학 자체는 변증법적인 운동 과정에 놓이는 것.

음. 과정 중에 있는 변증법이라. 역시 흥미로운데...

그러면 결국 '맑시스트'가 되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 맑스를 받아들이는 것과 아닌 것은, 전부 혹은 전무의 선택이고, 그 '안'으로 들어가느냐 그 '안'에 들어가지 않느냐의 선택인 것일까.

변증법적 유물론을 인정하고, 또 맑스주의의 근본적인 전제인 혁명성을 받아들인 이후라면 이는 내부적으로 작동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들어갈 수도 없는 것일까.

닫힌 체계? (포퍼 아저씨가 생각나는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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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Harvey, Paris, Capital of Modernity(2003), 8~18

8. Abstract and Concrete Labor

9. The Buying and Selling of Labor Power

10. The condition of Women

11. The Reproduction of Labor Power

12. Consumerism, Spectacle, and Leisure

13. Community and Class

14. Natural Relations

15. Science and Sentiment, Modernity and Tradition

16. Rhetoric and Representation

17. The Geopolitics of Urban Transformation

Part Three Coda

18. The Building of the Basilica of Sacre-Coeur

8. Abstract and Concrete Labor & 9. The Buying and Selling of Labor Power

우선 ‘Abstract Labor' ’Concrete Labor'의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맑스가 상품과 가치라는 자본주의에 현상에 대해서 이론화하면서 도출된 개념이다.

상품은 교환을 목적으로 생산된 것이므로, 어느 한 상품의 사용가치가 다른 상품과 교환되는 양적인 비율로 규정되는 '교환가치'를 갖는다. 따라서 상품은 사용가치임과 동시에 교환가치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교환가치는 시간, 장소, 상황에 따라 항상 유동적이며, 하나의 상품은 그것이 교환되어 지는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다양한 교환가치를 갖는다. 그러므로 교환되어지는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다양한 교환가치를 갖는다. 그러므로 교환되는 각 상품은 어떤 의미에서 동등해야 하며, 따라서 서로 동등하게 교환되는 모든 상품을 표현하는 상품이 있게 마련이다. 즉 교환가치는 구별되어질 수 있는 다른 무엇의 현상형태이다. 동일한 양이라는 이 공통요소는 그 상품들의 이질성 때문에 해당 상품의 물리적 및 자연적 속성과 화합될 수 없다. 교환과정에서는 동질적인 것이 표현되며, 모든 상품이 갖는 유일한 공통적 속성은 상품이 노동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교환과정은 상품을 생산하는 여러형태의 모든 노동을 동질화 시킨다. 상품을 생산하는 동질적 노동을 추상적 노동이라 부른다. 이 때 가치는 추상적 노동의 구체화 또는 물질화로 규정되고, 가치의 현상형태는 상품의 교환가치이다. 그러므로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아니라 사용가치와 가치로 된다. (다중생활도서관 노동자의 책 <맑스주의사상사전>의 <가치> 항목 중에서

http://www.laborsbook.org/dic/view.php?dic_part=dic01&idx=5)

즉 ‘구체적 노동’은 말 그래도 개별 노동자들의 구체적 노동인 반면, 추상적 노동은 하나의 상품을 생산하는데 요구되는 사회적 노동 (모든 총 노동자들의 구체적 노동을 추상화 시킨 형태)이다.

당시 노동자는 4가지 계층으로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자기 직업에 관련된 모든 국면에 통달한(대개 도제기간을 통해) 수공업 노동자, 세밀하게 분화된 노동 범주 내에서 전문화된 과제에만 국한된 기술을 지닌 숙련 노동자, 대개 떠돌이 막벌이꾼이며 “위험한 계급”이라든가 “룸펜 프롤레타리아” 등의 다양한 이름 아래 빈곤한 범죄적 계급으로 분류되는 비숙련 노동자, 글을 읽을 줄 알 고 숫자를 아는 화이트칼라 노동자가 그것이다. (253 참고)

부르주아가 두려워하는 것은 화이트칼라 노동자를 제외하고 (그들은 소부르주아지로 점차 변모되어 갔고) 모든 노동자들이지만, 각기 두려워하는 이유는 다르다. 우선 노동자 계급에서는 ‘맏이’뻘 (중세적이라는 의미에서, 또 소득수준과 교육수준에서)인 수공업 노동자는 말그대로 ‘수공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로 ‘장인’과 비슷한 존재이다. 자신이 맡은 분야에 대해 일정기간의 숙련을 통해 대체하기 힘든 노동력으로, 근대화로 인해 지위가 격하되기 시작했지만 때문에 불만도 많고 목소리도 크다.

수공업 노동자들은 모범성과 정치적 지도력을 무기로 이론의 여지없이 1840년대의 파리 노동시장을 주도하는 존재였으며, 1848년 노동자 운동의 핵심이었다. 자본의 연합이 투쟁해야 하는 대상은 그들이었다. (253)

둘째인 숙련 노동자는 비숙련 노동자보다는 ‘숙련’되었지만 수공업처럼 완전히 자신이 한 분야를 장악하고 그 일을 모두 하는 것이 아니라, 분업에 의해서 조그만 부분에 숙련된 노동자이다. 이들은 근대화와 분업화가 진행되면서 비숙련 노동자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어쨌든 자본은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바라기 마련이고, 그러면 언제나 대체가능한 비숙련 노동으로도 생산이 가능한 시스템을 만드려고 노력하는 것이 이득이 된다. (요즘 ‘신자유주의’도 매한가지. 다만 이제 그 동안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만들어왔던 고용 안정을 위한 최소한의 ‘제도’를 붕괴하려고 투쟁하는 것) 그리고 분업은 생산성의 향상과 함께, 모든 노동을 간단하게 만들어 숙련의 정도가 낮아도 되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결과적으로, 생산성은 높아졌지만 임금은 낮아질 수 있었다. ‘수요-공급’에 의해. 또 소생산자와 장인들은 대량 시장의 형성과 신용 재정에 있어서 대규모 산업에 의해 점점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또 산업과 상업의 관계에서 상업이 산업을 진두지휘하는 형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실제로는 개인과 소기업과 외주 노동자와 삯일꾼들이 고도로 효율적인 생산 시스템에 통합되는, 점점 더 복잡하고 세부적으로 전문화된 노동 분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수많은 소기업들은 보다 큰 조직 형태의 하도급 단위에 불과한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본가-생산자나 원격조종 상인들에게 매여 있는, 도제적 노동 시스템에서 활동하는 존재였다. (233)

제2제정에서는 생산과 판매의 격리가 점점 커지며 권력 관계가 점진적으로 뒤집혀 파리 산업의 많은 부분이 점점 더 상업의 지시에 복종하는 꼭두각시의 처지가 된 것이 특징이었다. (...) 전형적으로 하도급 조직망, 즉 주문 생산이나 삯일에 의한, 혹은 외주에 의한 생산 조직망의 축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하여 자율성이 점점 강해진 상인 계급은 직공과 수공업 노동자를 상인 자본의 지배 아래 포섭하는 공식적인 중개자가 되었다. (238)

소생산자들은 한때 자부심 있고 독립적인 수공업 노동자와 장인이었지만 점점 더 빚과 의무, 특정한 지시와 통제된 공급의 그물 속에 갇힌 존재가 되었다. 그들은 어디로 발전해나갈지 자기들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전체 생산 시스템 속에서 세부 작업을 하는 노동자의 지위를 강요당했다. (241)

전통 한지를 만드는 ‘장인’ -문화재 전수자와 모닝글로리 노동자를 비교해보라!

제2제정기에는 노동시장에 대한 수공업 노동자의 장악력이 점점 줄었다. 또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탁월하게 묘사하는 과정인 기술의 재규정, 즉 생산과정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노동의 사회적 분화가 진행되면서 생산이 기계와 공장제 생산으로 넘어가는 현상도 일어났다. 일부 산업에서는 수공업 기술이 배제되고 세분화된 분업 체제에서 요구되는 전문화된 기술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 저품질 대량 생산 시스템에서의 탈기술화 경향과 쉽게 복제될 수 있는 기술을 사용하는 쪽으로의 이동이 대세였다. 기술과 조직에서의 변화를 감안할 때, 기술 없는 이주민이나 여성을 작업장에 들여놓기가 쉬워질수록 기술자와 비기술자 사이의 경계선은 점점 더 흐려졌다. (.....) 1870년의 노동시장의 성격이 1848년의 것에 비해 경쟁적 개인주의가 훨씬 더 강해졌다는 데 동의한다. (254)

결국 그 어떤 정치적 탄압보다도 그들의 힘을 잠식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은 노동 과정의 변화였다. 추상적 노동의 조건이 변화함에 따라 수공업 노동자들이 제공할 수 있는 구체적 노동의 중요성이 감소했다. 하지만 새로운 노동 배치도 속에서도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활용할 기회는 여전히 충분했다. 장인과 노동자 사이의 경계선이 대개 아주 엉성한 것인 한,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상향 이동은 여전히 가능했다. 그들 자신의 노동 시스템이 가진 위계적 조직 역시 세밀하고 사회적인 노동 분업 내에서 감독이나 심장, 하도급자로 투입될 기회를 주었다. 기술과 교육, 적응능력 덕분에 그들은 새로운 직종이 만들어질 때 그 분야를 장악하고 새로운 기술을 독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수공업 노동자로서의 지위를 잃고 1871년 이후 노조사회주의의 기반이 되는 “노동 귀족”의 핵심이 되었다. (.....) 그것이 대표하는 이념은 수공업 전통에서 나오는 상호부조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산업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노동조합 의식으로 바뀌었다. (255-257)

여기서 우리는 ‘노동조합’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관련 책 진짜 많은데, 특히 민주노총 쪽에서 나온 책이 많은데, 읽지도 않고 무지를 들어내며 세미나때 나불대기만 했다. -_-; 공부하자! )

당시 노동자들은 ‘중앙집중적인 국가 통제보다는 생산조합이나 자율 관리, 혹은 상호부조의 형태를 기대했’고 ‘대부분의 수공업 노동자들이 1848년에 노동을 재조직하고 생산의 사회적 관계를 개혁하여 앞으로 올 몇 십 년 동안 그들 자신의 사회적 진보를 위한 무대를 마련하려는 자신들의 노력을 지지해줄 사회주의 공화국의 창설’을 기대했다. (227)

산업의 동일 직종 또는 동일 분야에서 노동자들의 결합은 상당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널리 퍼져있는 운동으로서 노동조합주의는 자본주의적 임금노동의 성장의 산물이다. 초기 노동조합은 보통 파괴적 조직으로 간주되었으며, 국가의 탄압도 빈번하였다(프랑스에서는 1884년까지, 독일에서는 1890년까지 불법이었다). 법의 방치 상태는 폭동적 형태의 사회적 저항과 결합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초기 영국 노동쟁의의 급진주의에 의해서 강한 영향을 받아 노동조합을 아주 상세하게 분석했다. 엥겔스는 《노동계급의 상황》의 한 장을 "노동운동"에 할애했으며 (주로 랭카셔 목화공장 노동자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리고 또한 석탄광부들의 노동조합주의에 대해서 논했다.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을 영국의 조합 투쟁에 대한 열정적 평가로 끝맺었다. 그리고 점점 더 확대되는 노동자들의 연합을 가져오는 지역적 결합에 대한 견해는 《공산당 선언》에서 반복되었다. 이러한 초기 저작들은 중요한 세 가지 논의를 전개 시켰다. 첫째, 노동조합은 자본주의적 산업의 자연스런 결과물이다. 즉 노동자들은 임금 인하나 기계에 의한 노동의 대체에 대항하는 방어책으로서 결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 조합은(푸루동이나 뒤에 라살레가 주장한 것처럼)경제적으로 비효과적이지 않다. 즉 조합은 고용주들이 노동력의 가격을 그 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낮추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조합은 그 수준 위로 임금을 올릴 수 없고, 그들의 방어력 조차 자본의 집중과 순환되는 경제위기에 의해서 마멸된다(마르크스, 《임금노동과 자본》). 셋째, 그러므로 방어적 경제활동의 제한된 효력으로 인해서 노동자들은 더욱 더 폭넓은 계급적 기반 위에 점증적으로 조직되며, 정치적 요구를 제기하고 궁극적으로는 혁명적 계급투쟁에 종사하게 된다(인용된 영국의 예들은 목화 노동자들의 10시간 노동 운동, 인민헌장 운동, 그리고 1845년의 전국노동조합연합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 외의 노동조합 경험은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계급의식을 확대시켰다. 즉 "전쟁의 학교로서 조합을 능가할 만한 것은 없다"(엥겔스, 앞에서 인용한 책).

그러나 영국의 대규모 운동은 곧 붕괴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서신 왕래에서 자신들의 환멸을 토로하였다. 즉 조합은 노동자귀족의 보호처가 되었으며, 조합지도자들은 시민계급 정치가들에 의해서 타락했으며 전체 노동자계급은 식민지 착취의 열매로 매수되었다. 그러나 1860년대 마르크스는 제1인터내셔날에서 영국의 주요 조합지도자들과 협력하였는 데, 그들의 참여가 제1인터내셔날의 성공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마르크스는 《가치, 가격 그리고 이윤》에서, 그리고 다음해 제네바 회의를 위한 결의안 초고에서 조합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확대하도록 촉구하였다. 비록 그러한 측면에서의 기대는 곧 실망스런 결과로 나타났으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문제에 대한 어떠한 논의도 행하지 않고 있는 고타강령을 비판하면서 (엥겔스가 베벨에게 보낸 편지, 1875년 3월 18일-28일) 노동조합은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계급적 조직"이었다고 여전히 주장할 수 있었다.

1850년대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경험과 저작에는, 합법적이면서 안전한 제도로서의 조합관과 보다 더 급진적 잠재력과 그 실천이라는 전망 사이에 긴장이 존재하고 있다. 놀랍게도 이 긴장은 결코 체계적으로나 이론적으로 대립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본론》은 노동조합에 관해서는 매우 부분적 언급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비록 노동시간을 제한하려는 정치투쟁이 다소 자세하게 거론되고는 있지만).

나중에 노동조합주의에 대한 관점은 크게 4가지로 분류된다. 특히 전미노동조합연맹(AFL)과 관련되어 있지만, 또 영국 조합주의의 성격이기도 한, "순수하고 단순한" 노동조합주의는 알게 모르게, 그리고 명백하게 조합의 목적과 방법의 골격으로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수용한다. 그것은 1890년대에 유럽에서 형성된 가톨릭 노동조합에도 적용된다. 무정부주의적인 생디칼리즘적 노동조합주의는 매우 혁명적이었으며, 투쟁적 계급의식으로 무장된 조합을 자본주의 전복을 위해서 필요하고도 충분한 토대라고 보았다(→생디칼리즘). 실제로 점점 개량주의로 빠져들어간 제2인터내셔날의 지배적 입장은,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은 서로 보완적이지만 뚜렷이 구별되는 자신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유럽의 많은 곳에서는 전국적 조합이 사회-민주적 지도 아래 생겼으며, 20세기로 접어든 뒤 그들은 대부분 자율성을 확립하였다. 마지막으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이 있다. 예를 들면 룩셈부르크는 노동조합 활동을 "시지프스의 노동"으로 보았다. 즉 관료적 관리에 의해서 지배되는 조합은 고용이라는 좁은 문제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이다."노동조합의식"이라는 레닌의 개념은 이와 비슷한 경향이 있다. 양자는 조합 안에서 혁명적 전략을 위해서 싸우며, 경제와 정치 사이의 구분을 타파하고, 사회민주당이 이 조정을 지도해야 할 필요성을 주장하였다(→파업). (다중생활도서관 노동자의 책 <맑스주의사상사전>의 <노동조합> 항목 중에서

http://www.laborsbook.org/dic/view.php?dic_part=dic01&idx=17&keyword=노동조합)

이러한 상황에서 오스망은 파리에서 노동계급을 없애려고 일자리를 줄이려는 정책(산업을 교외로)을 쓰면서 노동자들의 정치권력을 제거하려고 노력했다. 또 토지 가격과 임대료 때문에 도심에서 견딜 수 있는 일부 산업을 제외하고는 산업들이 모두 교외로 이동했다. 도심에 남아있던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높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어 3시간 이상 걸리는 출퇴근을 감수해야 했고, 그들의 임금은 최저 생계비 아래였다. (맑스의 <자본론>에서 나타난 당시 영국 노동계급의 비참함이나, <전태일 평전>에서 나타난 70년대 남한 노동계급의 비참함! 당시 ‘숙련노동자’였던 제단공 전태일이 비숙련 ‘시다’들이 딱해서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물론 맑스 시대에 공장주들이 ‘공장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나 70년대 ‘근로기준법’이 유명무실이었던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맑스 시대 영국에서는 노동자 계급의 재생산을 우려한 정부에서 공장법 관리들을 파견하고, 노동자 계급 생활상태의 심각성이 어느 정도 부각된 반면, 우리는 ‘전태일’의 분신에 의해서야 이러한 악조건이 환기된다.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라

파리에서는 삯일로 유지되는 직업이 있는데, 그 일을 20년간 하다보면 노동자는 불구가 되고 탈진해 버린다. 다행히 그때까지 목숨이 부지된다면 말이다.(234))

70년대 남한의 ‘도시화’과 농촌의 억압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듯이, 파리도 마찬가지였다.

파리의 노동예비군은 대부분이 지방 출신이었다. 이주 움직임은 부분적으로는 1850년대 농촌의 불황에 원인이 있다. 또 그 불황은 부분적으로는 농촌 산업을 와해시키고 지역의 자족성을 무너뜨리며 프랑스 농업의 근대화 속도를 늦춘 공간관계의 변화 때문에 유발되었다. (261)

17. The Geopolitics of Urban Transformation & 18. The Building of the Basilica of Sacre-Coeur

결국 결론-결말에 가서 이 책의 집필(구성) 의도가 드러난다.(또는 독자는 결론-결말을 통해 이 책의 주된 집필-구성 의도를 추론한다) 이 책은 프랑스의 1848년 2월 혁명부터 1871년 파리 코뮌까지의 시기를 다룬다. 서론에서 이 책이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파리의 공간적 구조의 변모에 따른 산업 구조, 노동 방식, 거주민들의 (근본적/구조적)변모일 터이고, 이러한 변화는 ‘근대성’을 함축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진짜 의도(?)는 1848혁명으로 인한 제2제정(오스망)의 개혁 시도와 결국 이의 좌절로 인한 파리 코뮌의 발발까지의 역사적 행보이다. 그 와중에 하비의 특장이라면 ‘지정학적’인 관심과 문화-상징적 기술물들에 대한 관심으로 미시사적인 접근도 함께 하고 있다는 것.

마르크스가 프랑스 혁명사 3부작을 통해 동시대 프랑스의 혁명적 성과들에 대해 논평을 하며 운동을 끌어간 것과 같은 배치.

<1848년에서 1850년까지의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

<프랑스 내전>

각기 2월 혁명 직후, 제2제정이 시작되는 때, 그리고 마침내 파리 꼬뮌을 다루고 있는 이 세 역작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17과 18장은 17장이 앞선 2부의 결론과 같은 형태로 ‘요약’이라면 18장은 이제 이 책을 새롭게 읽게 만드는 새로운 시작으로서의 임무를 띠는 ‘파리 꼬뮌’에로의 초대이다. 지금까지 하비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설명을 한 것들이 모두, ‘파리 꼬뮌’이라는 역사의 결절점으로 모여든다.

1860년대에 파리에서 전개되어 코뮌을 예고한 투쟁은 영웅적이라 할 만한 수준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공동체와 계급 개념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또 계급 연대와 적대감의 진정한 기반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자신들의 요구를 강제하고 세력을 동원할 수 있는 정치적, 경제적, 조직적, 물리적 공간을 찾아내기 위한 투쟁이었다. 이런 모든 의미에서 그것은 파리의 정치와 문화뿐 아니라 파리 경제를 변형시키기 위한 지정학적 투쟁이었다. (422)

잘 나가던, 자본의 흐름에 최대한 따라가던 오스망과 제국은, 자본과 서서히 그 연결이 부식되어 갔다. ‘정부’주도식 파리는 부르주아와 노동자 둘 다를 만족시키지 못했고, 이들의 불만을 완화시키기 위한 대책들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발생한 파리 꼬뮌은 중앙집중론자와 탈집중론자들로 분열되고 공화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분열로 일관성이 결여되고 내적 갈등으로 점철되었다.

프로이센과의 전쟁으로 패퇴하던 프랑스의 국제 정치적 상황과 노동자들의 불만이 터져 나와 대규모 봉기로 이어지자, 부르주아들은 “내부의 적”에 대한 두려움에 프로이센에게 항복하는 것을 선택했고, 그 와중에 시민에게 발포하려던 프랑스의 군대 장군에게 거부하던 병사들과 함께 프랑스 시민은 그 장군을 총살하는 일이 발생한다. 1871년 3월 18일. 파리 꼬뮌의 탄생이다. 이에 대해 당시 프랑스 대통령 티에르는 파리에서 군대와 정부 요원들을 완전히 철수시키며 파리의 침공과 탈환을 준비했다.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는 파리를 진압하는데 필요한 프랑스 군대의 재조직을 허락하고, 대규모 프로이센 군대를 파리 주위에 주둔시킨다. 그들은 파리 코뮌과 프랑스 군대의 자국민 학살을 침묵 속에서 바라본다.

파리 시민들은 철수된 행정 기관을 모두 접수하고 빠르게 이를 다시 운영하며 3월 26일 선거를 치르고, 3월 28일 파리 코뮌을 선언한다. 부르주아들은 당혹해 했고, 상당수가 파리를 ‘탈출’했다. 파리는 프랑스 군대에 의해 ‘진압’당하며 2만에서 3만 명 사이의 코뮌 가담자들이 그 과정에서 죽고 또 처형당했다. (역사는 끊임없이 차이와 함께 반복된다. 이는 인식 주체의 한계 때문에 '반복‘으로 보는 것일 수도 있지만, 행위 주체들의 공통점들도 간과할 수는 없다. 프랑스 꼬뮌으로부터 100년후, 1980년 광주 ’꼬뮌‘. 마찬가지로 부르주아들은 침묵했고 광주를 ’탈출‘했다. 파리 꼬뮌에 대한 연구는 은연중에 프랑스 학계에서 배척당하고, 파리 꼬뮌을 연구주제로 선택하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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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Harvey, Paris, Capital of Modernity(2003), 3~7

3. Prologue

4. The Organization of Space Relations

5. Money, Credit, and Finance

6. Rent and the Propertied Interest

7. The State

3. Prologue

1부가 전체 책의 서론격이라면, 이제 2부(Materializations: Paris 1848-1870)는 본격적으로 오스망화(근대화)되었던 시기의 파리를 다루고 있다. 1부가 Representations: Paris 1830-1848이라면 이제는 Materializations 된다는 것. 옮긴이(김병화)는 이를 각각 ‘묘사’와 ‘물질화’로 옮기고 있지만, Representation은 ‘상상’혹은 ‘재현’으로 옮기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결국 representation-> materialization 으로 이행한다는 것을 살리려면 상상-> 물질화(실현)의 과정인 셈.

1848-1870은 루이 나폴레옹 3세가 공화국 대통령(1850~52), 황제(1852~71)로 재위했던 시기이며 오스망이 1853-1870년까지 파리의 도시계획을 책임지고 실행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1부에서 살펴본 1830-1848시기는 1830혁명으로 시작되어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하기까지의 시기로 이 때 또한 기존의 사회-경제적 불만들이 누적되어 혁명이 일어난 것으로 이 시기에 혁명으로 해결되지 못했던 많은 문제들이 이제 나폴레옹 3세 정권에게 이행되게 된 것이다. 1)

도시를 옥죄고 있는 또 다른 족쇄는 실질적으로는 18세기적 구조 그대로인 제조업, 금융, 상업, 행정, 노동관계들을 지배하는 사회 관행과 사회 하부구조였으며, 이런 활동들을 제약하고 있는 여전히 주로 중세적인 물리적인 하부구조(medieval frame of physical infrastructure: 결국 이 물리적인 infrastructure에 대한 관심이 하비 책을 특징짓는 요소일 것이다. 이 infrastructure을 ‘하부구조’로 번역하는 것도 조금은 미스다. 하부구조라는 용어는 당연히 맑스적 의미에서 읽히게 될 수밖에 없다. 인프라 구조나 사회간접자본(?) 등으로 번역해야 옳지 않았나 싶다. 그것이 더 하비적 맥락에 맞을뿐더러 쓸데없는 오해를 줄일 수 있다.) 역시 족쇄로 작용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7월 왕정 기간 동안 도시의 쇄신에 대한 이야기가 무성하게 나왔고 이따금씩 실제로 시도되기도 했지만 파리는 짓눌려 있는 상태였다. (143)

이러한 infrastructure는 ‘새로운 산업도시에서도 나타나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효율적으로 되어가는 자본주의적 생산과 소비의 조직과 양립할 수 없었다’

자본 축적이 요구하는 새롭고 엄격한 수준을 충족시킬 만큼 효율적으로 파리가 움직이지 못한 정도에 비례하여 1847년에서 1848년 사이의 위기 동안 느껴진 고통은 배가되고 연장되었으며, 회복을 꾀하려해도 온갖 장애물이 널려 있었고, 정계와 문화계가 하는 일이라고는 의심과 혼란과 공포감을 만들어내는 것뿐이어서 문제가 더욱 복잡해졌다. (145)

결국 자본의 근대적 운동 방식(이윤 추구)에 방해되는 도시 구조는 당대의 상황을 읽고 이에 기민하고 정열적으로 대응한 오스망에 의해 변혁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제2제정의 18년간을 하비는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그 기간은 지독하게 진지한 국가사회주의 형태, 즉 경찰 권력과 인민주의 기반을 가진 권위주의 국가의 실험이었다. 그런 실험이 대부분 그렇듯이 그것도 전쟁과 불화로 인해 몰락했지만 그 기간은 강력한 노동 규율의 부과와 자본 순환의 기존 규제에서의 해방을 특징으로 한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정확하게 어떤 새로운 사회적 실천, 어떤 제도적 틀과 구조, 혹은 사회적 투자가 제대로 작동할지가 분명하지 않았다. 그때 제2제정은 자본주의, 즉 그 안에서 다양한 경제적 정치적 이익들이 의식적으로 이런저런 장점이나 해결책을 추구해보지만 자기들의 행동이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에 얽매이는 일이 너무 잦은, 까탈스러우면서도 급속히 성장하는 자본주의에 적응하려고 분투하는 단계에 있었다.

황제와 자문관들이 파리를-그 삶과 문화와 경제를-그것을 까마득한 과거에 너무 답답하게 붙들어 매고 있는 규제들로부터 해방시킬 방법을 찾아나선 것은 그러한 맥락에서였다.(147~148)

그리고 이는 다음과 같이 본질적인 문제들을 발생시키고, 이 문제들에 대한 대응을 모색하게 했다. 이것이야 말로, 자발적 ‘근대화’의 고민과 면모들이며, 식민지 조선이 ‘주체적’으로 궁구하지 못했던, 맞닥뜨리지 못했던 문제들이다.

목적과 수단의 문제가 있었고, 개인의 이익과 자본 순환과 관련된 국가의 적절한 역할이 무엇인가, 노동시장과 산업 상업 활동이나 주거와 사회복지의 제공에 국가가 어느 정도로 개입할 것인가 하는 것도 문제였다. 무엇보다 아직도 강력한 상류 부르주아들의 완강한 저항과 부딪히지 않으면서, 또 겉보기에는 안정되게 뿌리박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언제나 한계상황으로 내몰릴 위협 아래 놓여 있는 중간 계급의 불안정성을 더 크게 만들지 않으면서, 노동자들을 노골적인 봉기로 내몰지 않고 파리 경제를 다시 확고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정치적인 문제가 있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황제가 처음에는 그처럼 방자하게 대하고 멸시하는 듯이 의표를 찔렀던 계급세력에게 궁극적으로는 포로가 된 사람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148)

결국 일반화를 최종 목적으로 하는 역사학자답게, 하비는 오스망과 황제 또한 ‘계급세력의 포로’, 즉 역사의 주체로서의 ‘계급’과 역사의 동력으로서의 ‘계급’을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오스망의 파리는 1870년에 끝난 것이 아니라 그 뒤 30년이 지난 뒤에도 그가 규정한 노선에 따라 개발되었음으로 ‘오스망화=파리의 근대화’라는 명제는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하비의 저술이 문학도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아무래도 경제적 심급과 ‘역사-지리적’변모가 의식과 문화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중요시한다는 것이며, 실제로 이에 대한 연구를 실행한다는데 있을 것이다.

제국 치하의 18년은 오스망의 작업이 도시의 물리적 바탕을 절개하고 개조하는 과정에서 파리인들의 의식 속 깊이 각인되었다. (149)

하비가 2부에서 서술하고자 하는 것은 이 시기 파리의 ‘역사-지리학적 변화’이며 이는 ‘도시 경제, 정치, 사회, 문화의 내적인 작동과 관계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설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하비는 각기 주제들은 모두 다른 주제들이 없으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전제 하에, 이 상호관계를 보여주려 한다. 특히 이 글이 구체적으로 다룰 5~7장인 ‘금융 자본, 부동산 이권, 국가’는

사회적 생산물이 이권과 임대료와 세금으로 분배된다고 하는 이론의 일부로서 함께 연결된다. 분배에 대한 고려가 생산보다 우선시되는 점이 좀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마르크스가 언급했듯이,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는 데 극히 중요한 “원초적 생산-결정 분배”라는 것이 있다.(번역이 약간 이상한데 “an initial production-determining distribution"으로 ”생산을 원초적으로 결정짓는 분배”정도로 이해된다.) 이 경우에는 대체로 새로운 공간관계(내면적, 외면적 모두)는 국가와 금융자본과 토지 이권의 연정聯政에서 창출되었으며, 그들 각각은 도시 변형의 과정에서 시행되어야 하는 과제를 위해 고통스러운 상호적응 과정을 거쳐야 했다는 사실에 따라 위치가 설정된다. 물론 국가는 단순한 분배 도구 이상의 존재이며(비록 세금이 없으면 별 도리가 없지만), 국가 활동의 다른 측면들, 적법성과 권위도 여기서뿐 아니라 뒤의 적절한 지점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154)

4. The Organization of Space Relations

*생시몽주의: 19세기초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드 생 시몽은 빈민의 처지를 염두에 둔 '새로운 그리스도교'를 역설했다. 생 시몽파는 화합의 정신이야말로 사회발전의 기초이며, 여기에 종교가 주된 역할을 한다면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개인주의와 적대감정을 점차 불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들은 자본이 유산계급의 사욕에서 벗어나 사회의 의지대로 처분되기 위해서는 상속권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생시몽파는 이러한 조처가 빈민들에 대한 착취를 효과적으로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empas 백과사전)

철도의 확충과 도로망의 신설 등의 공간관계 변화에 따라 자본의 순환 시간이 짧아지고, 생산과 분배, 두 분야 모두에서 대기업 경영의 가능성이 열렸다. 오스망은 도시 구역 내에서 상품과 인간의 유통 능력을 개선시켰다. 이러한 오스망의 개혁은 능동적이라기보다는 자본의 ‘요구’에 따르는 수동적인 개혁이었다.

오스망은 토지와 부동산 시장의 운영과 산업의 입지와 노동과정과 시장과 분배시스템과 인구 분산과 가정 형성 등의 온갖 변동 양상을 주도했다기보다는 그에 적응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파리의 내부 공간의 개조는 이미 가동되고 있던 과정에 대한 반응이라 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그 과정-산업과 상업 발전, 주거에 대한 투자와 주거 공간의 분리 등-이 뭉쳐지고 그들 자신의 궤적을 따라 활동할 수 있게 해주며 도시 진화의 새로운 역사지리학을 규정해주는 공간적 틀이 되기도 했다. (.....) 제국이 살아남으려면 자본과 노동력의 과잉은 기필코 흡수되어야 했다. 파리의 내부 공간을 그처럼 변형시킨 공공사업을 통해 그러한 과잉을 흡수하다보면 건조 환경의 특별한 공간 배치의 건설을 통해 자본이 자유롭게 순환하게 된다. 봉건적 족쇄에서 풀려난 자본은 파리의 내부 공간을 그 자신의 고유한 원칙에 따라 개조했다. 오스망은 파리를 서구 문명까지는 아닐지라도 프랑스에 걸맞은 근대적 수도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자본의 순환이 진정한 제국주의적 권력이 되어버린 도시를 만드는 것을 도왔을 뿐이다.(167-168)

오스망은 도시공간을 하나의 전체로서 파악하고 다루었으며, 그 안에서 도시의 상이한 구역과 상이한 기능들은 상관관계를 맺고 활동하는 전체를 형성하였다. 이는 자본이 도시를 그렇게 파악한 것과 관계 깊을 것이다.

공간관계의 재형성과 그로 인해 발생한 공간적 규모의 변형은 도시화 과정에서 수동적 계기가 아니라 능동적 계기로 작용했다. 교통과 운송을 통한 공간의 실제 조직은 모든 역사적 지리적 분석이 반드시 파악해야 하는 1차적인 물질적 사실이다. 파리 안팎에서 이루어진 제2제정의 공간관계의 혁명은 연원이야 그 이전 단계에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1852년 이후에 이루어진 변화의 속도, 공간적 규모, 지리적 확장은 그 이전의 전반적 수준과 차원이 다르다. (172)

5. Money, Credit, and Finance

1851년의 당면 과제는 자본과 노동력의 과잉을 흡수하는 것이었다. (.....) 정부는 생시몽주의 노선을 채택하고, 직접적인 정부 개입과 신용 창조와 금유에 관한 구조 재정을 혼합함으로써 과잉 자본과 과잉 노동을 경제 부흥을 위한 기반인 새로운 물리적 infrastructure로 전환하려고 했다. (175)

그리고 이를 보조할 수 있었던 것 페레르 형제들이 ‘소액 저축을 동원하여 장기적 프로젝트를 감당하도록 신용기관들을 치밀한 위계적 형태로 조직하여 저축을 민간 차원으로 확산하는 길’이었던 것이다. 금융-정부의 연합. 저축 즉 투자 붐의 근대적 시작.

계획의 실행을 위하 투기적 자본을 끌어 모으지 않는다면 근대성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열쇠는 소규모 실개천 같은 자본을 한데 모아 필요한 규모의 기획에 착수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흐름으로 만드는 방법을 찾는 데 있다. 페레르 형제가 하려고 했고, 금융 분야에서 제도적 변화를 통해 달성하려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182)

실제로, 금융이 조금이라도 재편되지 않았다면 애당초 그처럼 빠른 속도로 변형이 진행될 수 없었다. 단지 도시가 돈을 빌려야 했다는 것(뒤에서 다룰 주제)뿐 아니라 오스망의 기획 자체가 그가 열어젖힐 공간을 개발하고 건설하고 소유하고 관리할 재정적 힘을 가진 회사의 존재에 기대었던 것이다. (178)

정부가 세금만으로, 공무원만으로는 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었다. 자본은 정부와 동시에 소시민들의 저축-투자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저축-투자를 하지 않으면 뒤떨어진다는 -손해를 본다는- 생각. 남들이 진보할 때 내가 서 있다면 나는 뒤떨어지는 것.

돈, 재정, 투기는 파리의 부르주아들에게 너무나 큰 강박관념이 되었으므로(“사업이란 다른 사람의 돈이다”라고 아들 알렉상드르 뒤마가 농담했다) 증권거래소는 지주들의 재산을 수없이 집어삼킨 무모한 투기와 타락의 중심이 되었다.(181) (ps. 채만식, 󰡔탁류󰡕에서 미두)

이러한 신용 시스템의 재편은 파리의 산업과 상업, 노동 과정과 소비 양식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어쨌든 모든 사람이 신용 거래에 의존했으니까. 유일한 질문은 누가 누구에게, 그리고 어떤 조건으로 빌려주느냐 하는 점이었다. 계절 실업으로 인해 시달리는 노동자들은 거기에 생계를 의존했다. 소규모 장인과 점포주는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주문을 처리하려면 신용 거래를 해야 했다. 이 같은 연쇄는 끝없이 이어진다. 채무상태는 모든 계급과 모든 활동 영역이 당하는 만성적인 문제였다. (183)

신용 시스템은 자본의 연합을 통해 합리화되고 확장되고 민주화되었지만 대개 무절제한 투기와 중앙집중화되고 위계적으로 조직된 시스템 속으로 모든 저축을 흡수해들이는 대가를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시스템 속에서 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화폐권력을 조금이라도 지닌 사람들의 제멋대로이고 변덕스러운 일시적 기분에 더욱 피해를 입기 쉬운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공간관계에서 혁명이 일어나려면 신용 시스템에서 혁명이 필요했다. 그러나 파리 내에서 그 과정은 금융자본과 토지자신의 훨씬 더 긴밀한 통합에 의존하여 진행되었다. (184)

6. Rent and the Propertied Interest

임대료와 부동산 이권이 점차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작동하기 시작하여 파리의 공간들이 분절되어 각기 용도에 맞는(높은 임대료를 부과할 수 있는 순으로) 구역들로 나뉘기 시작했다. 이제 파리의 부동산은 재정적 자산으로, 투자의 대상으로 인식-변모 되었다.

파리의 부동산은 점점 더 순수한 재정적 자산으로, 자본의 일반적인 유통과정에 통합된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를 전적으로 지배하는 의제자본 형태로 평가되었다.(185)

중하류층가 소부르주아들은 부동산 소유권에서 계속 배제되었고, 그들의 자리는 지주와 대상인들로 이루어지는 상류층 부르주아가 차지했다. 그러한 변화는 수공업과 소생산자와 점포주가 대상인과 금융에 종속되는, 상업, 금융, 제조업 구조의 중대한 변화와 일치한다. 모든 사회 집단들이 점점 더 투기를 위해 부동산 매매에 기꺼이 참여하고자 했다는 증거도 있다.

소유권은 분산되기 시작하여 계속 그러한 상태가 유지되었다. 도마르의 집계에 따르면 1846년에 평균적 소유자는 부동산 두 건만을 관리했고, 이들 가운데 개별적으로 대규모의 부동산도 일부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188)

파리의 부동산은 주식 시장의 전형적 특징인 불안정성으로부터 보호되는, 안정적이고 수익이 높은 투자처였다. (193)

이러한 인식변모의 와중에는 오스망이 파리라는 도시를 전체로 보고 이를 구역별로 운용하려는 그의 인식과 정책이 있다.

파리를 변형시키려면 자본을 동원해야 하는데, 그것은 매매뿐 아니라 전통적인 부동산 소유자들의 사생활 우선주의와는 상극이며, 집단적 원칙에 따르는 도시공간의 장기적 경영과 철거와 재편에도 투자할 자본이었다. (194)

오스망이든, 상류 부르주아든, 일반적 소시민이든 부동산에 대한 투자는 ‘자본의 순환이라는 기반’에 한데 묶여 있었다.

토지와 건물 자산의 임대료와 가격은 갈수록 현저하게 자본주의적 논리에 기대는 용도에 맞춰 토지를 할당하는 작용을 한다(201)

새로 도로시스템은 공간관계를 체계화하여 토지가격과 용도가 보다 체계적으로 조직된 시스템으로 넘겨주었다.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는 용도는 점차 밀려났고, 감당할 수 있는 용도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202)

좀더 순수한 자본주의적 노선에 따르는 토지와 부동산 시장이 새로운 신용 시스템의 성장에 고무되어 재편성된 현상(좌안에서처럼 전통주의자의 저항 중심도 물론 있지만)은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즉 파리 내부 공간의 재편성이 공간을 장악하려는 여러 다른 사용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가격 경쟁에 점점 더 예속되어버리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 파리의 재건설을 통해 노동과 자본의 잉여를 흡수하는 일은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명백하게 병적이라고 여겼던 온갖 부정적인 결과들-퇴거당하거나 격리되는 일이 늘어나고, 일하러 더 먼 길을 가야 하며, 치솟는 집세와 인구과밀의 환경-을 가져왔다. (205)

이에 대해 이를 오스망-국가의 힘에 의한 일방적 결과인지는 다음 장에서 살펴볼 것이다.

(물론 ‘자본’의 운동과정에 따른 결과라고 제출될 것이다.)

7. The State

하비는 당시 프랑스 제국을 ‘국가 기관들이 근대의 요구와 자본주의의 모순점과 보다 밀접하게 조화하는 데 기여한, 프랑스 정부와 정치에서 중요한 변천 단계’로 보고 ‘이 정치적 변천 과정이 파리에서 어떻게 일어났으며, 그 도시의 역사적 지형에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오스망과 그의 파리는 자본의 ‘과잉 축적이라는 거대한 문제를 적자재정을 통해 자체 재정을 충당하는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했던 한 국가 기구가 결국은 이권을 장악하는 화폐 자본의 순환에 내포된 아슬아슬한 모순의 제물이 되고 만다’. 그 ‘정치 시스템이 이 분야에서 성장하는 자본주의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만 것이다. 결국 과잉축적을 해결하는 대외적 방법이 제국주의와 식민지 건설이라면, 내부적으로는 적자재정을 통한 건설경기 활성화일 것이다. 그리고 이 둘 모두가 원활하게 작동할 때, 제국주의시기 근대화는 가능할 것이다. 이는 안으로는 노동자들의 계급적 착취로 인한 자본의 증가와 밖으로는 식민지의 착취로 벌어지는 데, 둘 다 피지배계급의 저항에 맞닥뜨리게 된다. 식민지는 ‘준인간’이었기 때문에 무자비하게 죽이면 됬지만, 어느정도 ‘민주주의’의 역사가 있는 프랑스-파리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은 탄압하는 주체인 병사들 또한 설득되기 힘든 문제여서 결국 파리 꼬뮌으로 나아가고 만다.

이 시기 오스망의 강압적인 감시와 통제, 일방적 선전과 축제와 빵은 노동자들의 불만을 억누르거나 달래지 못했다. (전두환 정권 시절의 무자비한 노동운동 탄압과 함께 3S정책의 투박함을 떠올리게 한다.)

오스망과 자본의 연합으로 실행된 ‘사회적 재생산 공간의 형성’을 통해 소득계층에 따라 ‘주거가 점점 더 격리되는 현상은 위험하고 범죄적인 계급이 가하는, 실제이건 상상에 의한 것이건 위험으로부터 부르주아를 보호할 뿐 아니라 점점 더 도시를 상이한 사회계급들의 재생산을 위해 상대적으로 안전한 공간으로 변모시켰다.’

결국 오스망과 제국은 실각하고 만다. 파리 꼬뮌의 탄생이 그것이고, 이는 계급적 혁명을 의미한다.

도시 내에서 안정적인 계급 연대를 유지하기가 특히 어렵게 된 더 깊은 불만의 원천이 있었다. 변형 자체로 인해 “오래된 파리”가 사라지는 데 대한 광범위한 향수와 회환(귀족이나 노동자나 모두에게서)이 생겨났고, 이는 가이야르가 대단하게 평가하는 공동체의 상실감을 널리 퍼뜨리는 데 기여했다. 낡은 방식과 구조가 뒤집어진 것이다. (.....) 오스망은 파리를 통상적인 의미의 공동체로 보고자 하는 입장에 확고부동하게 반대하고 그것을 “유목민적”인 이익과 개인들이 왕래하여 일체의 고정적이거나 영속적인 의미의 공동체 형성이 애당초 배제되는 방식으로 움직이는 자본주의적 도시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리를 국가가, 국가를 위해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었으며, 이 목적을 위해 그는 선출된 관리보다 임명된 지사의 손에 모든 행정 권력을 쥐어주는 1855년의 정부조직법안을 발의하고 옹호했다. 파리 공동체를 이행기에 있는 것으로 본 점에서는 오스망이 옳았을지도 모르지만, 수도에서 대중 주권을 부정한 것은 수많은 노동자와 부르주아를 코뮌 지지로 끌어들인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오스망이 영구적인 계급 연대를 유지하는 데 실패한 것은 그가 한 일보다는 그 일을 한 방식과 더 많은 관련이 있다. 또 그렇다면 권위주의적인 그의 행정 스타일은 애당초 쿠데타를 발생시킨 상황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러므로 그가 자유주의 제국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없었다는 주장은 타당하다. (223-224)

결국 자본의 작동방식과 역사발전 과정에 부합하지 못했던 이전 프랑스가 쿠데타를 통해서 무너지고 다시 집권하게 된 나폴레옹 3세와 오스망이 근대적 기획에 따라 정부주도의 적자재정 경제정책을 폈지만 이 또한 내부적 한계로 무너지게 되었다. 여기서 더 살펴보아야 할 것은 당연히 오스망 직전과 직후의 프랑스 상황일 것이다.

1)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하기까지의 시기에 대한 연구는 하비가 추천하는 마르크스 <1848년에서 1850년까지의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 참조 할 것. 전자는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2󰡕, 박종철출판사, 1992, 1~114면. 후자는 277~393면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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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공간 수유+너머> 2007년 겨울 강좌 안내

개강일 : 2007년 1월 3일 (수요일)
장소 : 연구공간 ‘수유+너머’
접수구좌 : 우리은행 1002 - 332 - 853371 (박현민)
문의 : 박정수(016-473-9293), 박혜선(019-433-6342), 현민(016-624-1892)


◎수강을 원하시는 분은 인터넷 홈페이지를 이용해주십시오.
◎강좌회비를 온라인 송금하신 분은 홈페이지 강좌게시판을 통해 입금날짜와 강좌명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환불 안됨)
◎연구실에서는 강좌 외에 다양한 세미나가 열리고 있습니다. 세미나는 모든 분에게 공개되어 있습니다. 홈페이지 세미나 안내를 참조하십시오.

서울시 용산구 용산동 2가 1-206 (구) 정일학원 자리
∥TEL 02-3789-1125
http://www.transs.pe.kr ∥trans@korea.com

1. [특별강좌] 한국근대문학사의 두 공간에 대하여
1. 8-11  월-목  7시  강좌회비: 8만원  강사: 김윤식

‘근대’문학은 ‘국민’문학입니다. ‘민족국가’(nation-state)와 ‘국어’의 수립이 근대문학의 조건입니다. 그러나 한국은 민족-국가 수립에 실패한 상태에서 근대문학을 형성했습니다. 이런 모호한 상황은 일제말기 한국어 말살 정책에 의해 종결되고, 한국작가들은 일본어로 글쓰기를 지속했습니다. 그들의 일본어 글쓰기는 제국의 ‘국어’도 아니고 식민지의 ‘모어’도 아닌, 제3의 이중어 글쓰기였습니다. 해방이 되었다고 해서 이런 이중어의 지대가 해소된 것은 아닙니다. 한국근대문학의 형성은 여전히 ‘과정’ 중에 있으며 그 안에는 해소 불가능한 모호함과 혼종성이 웅얼거리고 있습니다. 한국근대문학사의 탐색은 고답적인 아카데미즘도 아니고 고풍스런 문학취미도 아닙니다. 그것은 여전히 진행중이며 항상 되돌아오는 근대성의 질문들에 대한 질문입니다. 


1강(1.  8) 한국근대문학이란 무엇인가
2강(1.  9) 이중어 글쓰기론
3강(1. 10) 민족문학 글쓰기론
4강(1. 11) 합병세대의 글쓰기론

 

(*아직도 저 책들을 보면 눈물이 나려고 한다. 쩝; 나의 김윤식 선생님에 대한 센티멘탈한 감정.. )

오. 김윤식 선생님께서 수유에서 강의하신다는 사실은 놀랄만한 일이다. (몇해전 조동일 선생님께서 철학아카데미에서 강의하셨던 것보다 몇 배는 더! 그래도(?) 철학 아카데미는 내 경험(?)상 뭔가 더 제도 내적이다.)

수유 연구실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자기 안에 갇히지 않고 뻗어나가려고 하는 것 같은데, 초청강좌라던지 소위 '대중지성'/청소년교양 등으로. 갇히지 않는 것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해되는데, 역시 힘든 길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상품화' 논란도 있고, 세미나가 원활하게 진행되기 어려운 점도 있고.

시간만 된다면, 오랜만에 수유도 가볼껄. 석사입학 이후 한번도 못 가봤네. 시간 낭비라는 생각도 들었고. ㅎ

수유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2002, 박노자 선생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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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6-12-21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 낭비란... 수업의 질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뜻인가요?

기인 2006-12-21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제가 좋아하는 시집~ <자명한 산책>님.
사실 수유에서의 수업은 교양수준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나서 별로 만족스럽지는 않았고요. 저는 세미나 이야기를 하는 것인데, 아무래도 '제도'내적인 공부와는 유리되는 부분이 있었죠. 또 혼자 공부하거나 대학원 사람들이랑 공부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판단도 됬고요.
그래도 수유의 장점은, 공통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장기적으로 세미나를 할 수 있는 장소와 이를 통해 출간도 하는 등의 '물적 기반'인 것 같아요.
요즘은 워낙 인문대 대학원 사람들의 수도 적고, 관심사도 제각각이라서 공부 모임을 꾸리기가 힘들죠. 뭐 다 제 능력 이상의 과욕을 제가 부리는 걸 수도 있고.
생각해보면, 공부하려고 마음 먹으면 왜 못 하겠어요? ㅎㅎㅁ

antitheme 2006-12-21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수유"라면 이진경씨에 대한 선입견으로 조금은 꺼려지던데 그곳에서 김윤식선생의 강좌라니 그건 쫌 끌리네요.

기인 2006-12-21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ㅎㅎ 저는 이진경 선생 강의나 세미나에서는 직접 못 뵈서 ^^;

kocka 2006-12-22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식 소비자는 뭐 든 배우고 싶어요^^
결국은 하나로 통하지 않겠어요?

기인 2006-12-22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만류귀종! ^^

릴케 현상 2006-12-22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을 좋아하신다니 반갑습니다^^

기인 2006-12-22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ㅎㅎ 전공도 현대시에요 :)
<자명한 산책>은 그 해 제가 읽은 최고의 시집이었어요! ^^*

2006-12-23 1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